정기국회 종료를 이틀 앞 둔 12월 7일, 4대강 예산 삭감을 주장해 온 야당의원들은 예산안 표결을 막기 위해, 본회의장을 점거하는 행위를 보여 주었다. 이 과정에서 국회의장실 근처의 유리문이 깨지고, 한나라당 현기환 의원이 의사봉에 맞아 부상을 당하는 등, 회의시작부터 격렬한 대치국면이 전개되었다. 그리고 이날 밤 9시 한나라당 소속 국토위원들이 국토위원장실과 소회의장으로 들어가 친수법 등 92개 법안상정을 강행 처리했다.

12월 8일, 정의화 부의장의 진행으로 2011년도 예산안과 기금운용계획안, 임대형 민자사업 한도액안을 비롯한 많은 법안들이 가결되었다. 의장석 주변으로 모인 야당의원들이 정의화 부의장을 향해 '내려와!’라고 고함을 치기도 했다. 회의는 소란스러운 가운데 계속 진행이 되었으며, 제안설명과 심사보고는 각 의원들 자리에 비치된 단말기 게재로 대체되었고, 결국 수적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여당의원들에 의해 각종 안들이 가결되었다.

아수라장이었던 이 날 본회의에서는 여ㆍ야의원들의 고성과 막말, 성토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회의장에 진입하는 과정에서 의원들 간에 시비가 붙은 한편, 한나라당 김성회 의원은 자신이 먼저 폭행을 당했다며 강기정 의원에게 다가가 얼굴을 때려 부상을 입히는 동영상이 일반인들에게 유포되기도 하였다.

예산안 가결 이후 정의화 부의장이 국군부대의 아랍에미리트(UAE)군 교육 훈련 지원 등에 관한 파견 동의안과 국군부대의 소말리아 해역 파견연장 동의안을 상정하고, 의결하려 했을 때, 갈등은 한층 더 깊어지는 모습을 보였다.

"거짓말쟁이들, 사기꾼들"이라는 비난과 함께 "패키지로 절대 하지 않겠다고 해놓고 국민을 팔아먹었다, 본인들은 군대에 가지 않고 남의 자식들만 군대 보내려 한다"고 소리 지르는 등 몸싸움과 함께 격앙된 분위기가 이어졌다. 결국 재석 157인 중 찬성 149인, 반대 2인, 기권 6인으로 UAE 파병동의안이 가결되었고, 이에 반대하는 야당 의원들의 고성으로 장내는 더욱 소란스러워졌다.

과학기술기본법 일부개정법률안에 토론신청을 한 창조한국당의 이용경 의원은 "과학기술계의 잦은 개편은 오히려 그들의 자율적 연구를 방해하고 연구의지를 꺾는 일"이라며, "인재를 뽑고 환경을 만들어주어 그들에게 연구할 시간을 주면서 자율성을 보호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반대를 주장했으나, 재석 168인 중 찬성 136인, 반대 12인, 기권 20인으로 가결되었다.

여당은 기한 내 처리를 불가능하게 한 야당을 비판하고, 야당은 여당의 강행처리를 문제 삼지만, 여야의원들 모두 국민에 대해 기한 내 불처리와 폭행과 막말 국회에 대한 책임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는 못할 것이다.  

이천년 전, 아테네라는 자그마한 도시국가에서 민주정치를 시도했던 이들은 자신의 정치체제를 매우 자랑스럽게 여겼다 한다. 유명한 페리클레스 연설에서 그들은 자신들의 정치체제를 다른 나라의 제도를 흉내 낸 것도 남의 이상을 추종하는 것도 아닌 오히려 우리의 모범을 배우게 하려는 제도라 말했고, 소수의 독점을 배격하고 다수의 참여를 수호하는 정치체제라 했다.

잠시 유지되었던 당시의 민주정치가 이천년이 지나 우리에게 금과옥조와도 같은 제도로 변모,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내용이 오늘 날의 국회파행처럼 허울 좋은 다수결 제를 내세워서도, 국민의 대표라는 지위를 역이용하였기 때문도 아니다. 그들은 법은 존중할 만큼 가치 있는 것이고, 지배받는 자들을 위한 법과 불문율은 존중되어야 할 것으로 믿었다. 그리고 그러한 법을 어기는 것은 수치스러운 것이라 여겼다. 그랬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들의 정치체제를 가리켜 자랑스럽게 민주정치라 부를 수 있었다.

회의장으로의 진입을 방해당하고, 의장석을 점거하고, 수적인 우세로 밀어붙이며 욕설과 폭력으로 점철된 제 18대 국회는 지난한 후진적 정치문화의 반복을 보여주었다. 뒤늦게 악화되는 여론에 조금씩 자성의 목소리를 내고는 있지만, 반복되는 정치쇼인지의 문제는 두고 볼 일이다. 피치 못 할 잘못을 하고 반성을 하는 것과 후에 변명할 것을 생각해놓고 잘못하는 것은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때늦은 반성을 한다고 요란을 떨지만, 바뀌는 것이 무엇이 있었는지, 국민의 입장에서는 과거를 되짚어 봐도 떠오르는 것이 없다. 여전히 양의 탈을 쓴 늑대처럼 후진적, 독단적 정치의 얼굴은 민주주의라는 탈을 쓰고 버젓이 행동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민주주의는 그저 다수결의 다른 이름이 아니다. 그것은 다수의 참여를 독려하고, 소수의 의견을 보호하고자 하는 장치이다. 이런데도 과연 우리는 우리의 현실을 가리켜 자랑스럽게 민주정치라 부를 수 있을 것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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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당의 주도권 싸움

자유당은 족청계 거세의 마지막 마무리 작업으로 1954년 1월 이범석을 위시한 이재형ㆍ진헌식ㆍ신태악ㆍ권상남 등 족청계 거물급 인사들을 당에서 제명 처분했다. 그리고 3대 국회의원 선거 2달 전인 3월에는 자유당 혁신강화 전당대회를 서울 시공관에서 열고 선거체제를 완비했다. 그러는 중에도 자유당 안에서는 당의 주도권 장악을 위한 싸움이 계속되었다.

당초 이승만은 족청 축출을 결정한 후 그 작업을 이기붕ㆍ이갑성ㆍ배은희 세 사람에게 동일하게 지시했다. 영을 받은 세 사람은 막강했던 족청세력을 거세하기 위해서 함께 힘을 모았다. 그러나 일단 그 작업이 성공적으로 완수되자 세 사람 사이에 당 주도권 쟁탈을 위한 치열한 싸움이 전개되었다. 나중에는 이 세 사람 외에 국민회의 이활까지 가세했다. 네 사람 모두 특정한 조직체 출신이 아니었다는 점에서 모두 이승만의 선택을 받을 자격을 갖추고 있었다.

1953년 7월 27일에 휴전협정이 체결되자 정부는 그 해 8월 15일에 환도할 것을 선언했다. 국회도 9월 21일 서울로 올라와서 지금은 허물어진 구 중앙청 청사 내 의사당에 자리를 잡았다. 2대 국회는 그 임기가 끝나는 1954년 5월 30일까지 이곳에 있다가 3대국회가 개원되는 6월 9일 태평로에 있는 새 의사당(구 부민관, 현재의 서울시 의회 자리)로 옮겼다.

자유당의 주도권 싸움은 환도 후에 더 가열되었다. 경찰은 이들 사이의 경쟁 상황을 이승만에게 보고했는데 경찰 정보는 의도적으로 이기붕에게 유리하도록 꾸며졌다는 것이며 그러한 경찰 정보는 주도권 싸움에서 이기붕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이기붕은 자유당 중앙위원회 의장직과 서울 시당 위원장직을 맡고 있어 주도권 장악에 여러 가지로 유리한 고지를 점하고 있었다.

이기붕이 서울 시당 위원장직을 맡게 되는 데에는 정치 폭력배 이정재의 역할이 한 몫 단단히 했었다. 당시의 서울 시당의 세력 분포로 보아 이기붕의 위원장 당선은 어려운 상황이었는데 이정재가 부하 폭력배를 동원해서 반 강압적으로 이기붕을 그 자리에 올려놓았다고 알려져 있다. 이기붕의 기반을 결정적으로 공고히 만들어 놓은 것은 1954년에 있은 5.20 민의원 선거에서의 자유당의 압승이었다. 

충성이 후보 공천의 잣대

자유당은 제3대 국회에 입후보할 후보 공천자 선정에서부터 이승만에 대한 충성심과 앞으로 3대 국회에서 있을 자유당의 개헌안에 대해 찬성하겠다는 서약을 조건으로 삼았다.

자유당이 성안해 두고 있던 개헌안은 이승만의 영구집권을 확고히 하고 야당이 제기할지도 모를 내각책임제 개헌을 봉쇄할 수 있는 조문을 헌법에 명문화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국가 안위에 관한 중대 사안의 국민투표제와 국회의원 소환권 조항을 신설하고 국무총리제의 폐지와 초대 대통령에 한해 3선 금지 조항을 철폐한다는 것이 개헌안의 주요 골자였다.

이 중에서도 가장 중요하고 시급한 당면 과제가 이승만에게 무제한 재선의 길을 열어 주는 3선 금지 조항의 삭제였다. 자유당이 이승만에 대한 충성 맹서를 3대 민의원 후보 공천의 기준으로 삼은 것은 "개헌 찬성을 조건부로 입후보하라"는 이승만의 지시에 근거한 것이었다. 부산에서의 재선 과정에서 애를 먹은 이승만은 일찌감치 3선 이상의 길을 확보하기 위해 급하게 개헌을 서둘 필요를 느꼈으며, 또 만약의 경우에 대비, 개헌의 당위성을 찾는 방법으로 나라의 중대사는 국민이 직접 투표로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이른바 국민 투표제를 개정 헌법에 명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개헌안에 대한 찬성 서명을 받고서야 공천을 해 주는 `조건부 공천’이 반드시 개헌안의 통과를 1백 퍼센트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니었지만 공천제의 채택으로 과거와 같은 무소속의 난립을 막는 데에는 효과가 있을 것이 분명했고 무소속이 줄어들면 그만큼 자유당 공천자의 당선 확률이 높아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자유당은 공천의 공정성과 민주성을 높인다는 명목으로 점수제라는 방식을 고안해 냈다. 지역구의 신망과 지지도를 반영하기 위해 지역구 대의원들의 비밀투표로 뽑은 후보자에게 40점, 지역구 후보에 대한 도 당부의 의견에 20점, 이를 다시 중앙당 심의에서 주는 40점을 가산해 총 1백점 만점 중 가장 높은 점수를 받은 후보를 공천자로 선정키로 했던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지역구에서 높은 점수를 받은 당선 가능성 높은 후보도 이승만의 종신집권에 찬성하지 않으면 공천을 받을 가능성이 전혀 없었다. 또 실제로 점수 상으로는 충분히 공천을 받을 수 있는 경우에도 이승만이 재가를 하지 않으면 공천에서 제외되고 말았다. 그러니까 자유당 후보의 공천은 거의가 이승만의 절대적인 재량 하에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민주당의 마지노선

선거일 공고 전까지 자유당은 전국 203개 시ㆍ군 당부의 개편을 완료했지만 민주당은 40여 시ㆍ군 지구당만을 겨우 재정비 하는데 그쳤다. 결국 전국 203개 선거구 중 민국당은 77개 지역구에서 공천자를 내게 되었고 나머지 구에서는 야당 성향의 무소속 후보를 지원함으로써 여당 세력의 확대를 막기로 전략을 세웠다. 이러한 민국당의 전략은 원내 야당 의석의 수를 개헌안 반대에 필요한 재적 3분의 1석 이상을 확보하자는데 목적이 있었다. 말하자면 민주당 선거 전략의 마지노선은 헌법 개정 저지에 필요한 67석 이상의 야당 세력 확보였다. 역으로 얘기하자면 여당 의석수를 재적 3분의 2인 136석 이하로 억제하자는 것이었다.

공천제의 채택으로 인한 무소속 후보들의 출마가 줄어들기는 했지만 3대 국회 입후보 자는 총 1207명에 이르렀다. 개헌에 필요한 재적 3분의 2이상의 의석 확보를 위해 자유당은 181명의 공천 입후보자와 61명의 무공인 입후보자를 내세웠으며 민국당은 77명, 국민회 48명, 대한국민당 15명, 조선 민주당 6명, 대한노총 5명, 기타 17명, 그리고 무소속 797명 등 총 1207명이었다.

판을 친 관권, 금권

5ㆍ20 민의원 선거는 민국당 등 야당의 주장처럼 관권과 금권이 판을 친 부정ㆍ타락 선거였다. 유권자들 눈에도 어김없이 그렇게 비쳤다. 자유당은 선거운동의 일환으로 전국적인 `개헌 촉진 국민대회’라는 것을 개최하여 이승만의 재집권만이 국가를 재건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역설했는데 말이 개헌 촉진 국민대회였지 사실상은 야당의 선거운동을 봉쇄하기 위한 일종의 협박성 국민대회였으며, 그 기세에 눌린 유권자들에게는 신상에 위협을 느낄 만큼 공포 분위기의 조성으로 비쳤다. 이러한 자유당의 공포분위기 조성에 민국당은 "선거의 자유 분위기가 보장 되지 않는 경우 입후보를 전적으로 취소할 수도 있다"면서 선거 거부 가능성을 강하게 시사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야당의 항의를 우습게 보았다. "자기들이 국회에 들어와서 요동시킬 희망이 없는 것을 완전히 각오한 모양이다. 이와 같이 공포하고도 또 선거에 들어간다면 이것은 정당한 대한민국의 한 정당으로서 있을 수 없는 일이며 또 이런 몰상식한 일을 해서는 민중의 신망을 얻을 수 없을 것"이라는 반박 담화를 발표했다. 야당이 어떤 태도로 나오든 하고 싶은 대로 해보라는 배짱이었다. 이 같은 당 총재의 뜻을 받들 듯이 전국 각지에서는 자유당의 횡포가 심했고 경찰뿐만 아니라 지방 행정관청까지 선거에 개입하는 사태가 만연했다.

이기붕이 출마한 서울 서대문 을구에서는 출마 예정자 조봉암이 등록 방해를 받아 입후보조차 하지 못했으며 민국당의 거물급 신익희ㆍ조병옥을 포함한 야당 거물 선거구에서는 야당 선거 운동원이 집단 구타를 당하거나 구속되는 등 심한 탄압을 받았다. 경남 사천에서는 집단 폭행으로 야당 선거 운동원이 사망하는 사고도 있었다. 야당 후보자들은 정도의 차는 있었으나 탄압을 받지 않은 곳이 없었다. 많은 지역에서 야당후보자의 선거용 차량은 교통 위반 딱지를 받고 경찰서 뒷마당에 견인되어 움직이지 못했으며 야당 후보의 운동원들이 갖가지 이유로 구금당하거나 여당 운동원들에게 폭행을 당하기 일쑤였다.

야당 입후보자들뿐만 아니라 자유당의 공천후보자 중에도 노골적인 경찰 간섭과 선거운동 방해를 받은 사례가 있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경북 대구 병구의 이갑성, 경북 달성구의 배은희 등 당권 경쟁에서 이기붕과 맞서고 있던 입후보자의 선거구였다. 두 사람은 말할 것도 없이 낙선되었고 그를 따르던 당내 인사들도 혹은 낙선되거나 당선이 되고서도 세리(勢利)를 쫓아 뿔뿔이 해어지고 말았다. 5ㆍ20 선거를 계기로 이기붕 파는 당권 경쟁자를 큰 힘 들이지 않고 몰아낼 수 있었다.

상처로 얼룩진 대승

총 유권자의 91.9%가 참가한 5ㆍ20 총선은 자유당의 대승으로 끝을 맺었다. 민주당의 참패였다. 선거 결과는 자유당 114명(공천자 99명, 비공인 입후보자 15명), 민국당 15명, 대한국민당 3명, 국민회 3명, 제헌동지회 1명, 무소속 67명의 당선이었다.

개헌 정족수를 채우지 못한 자유당은 부족한 의석을 무소속의 포섭으로 채웠다. 제3대 국회 개원일인 6월 9일에 13명의 포섭에 성공했으며 4일 후에는 다시 8명을 추가 포섭, 개헌 정족수에 한 석 부족인 135석을 확보했다. 그리고 개헌안 표결 직전에는 다시 나머지 1명을 포섭해서 개헌에 필요한 소기의 목적 수인 136명을 채우는 데 성공했다.

선거에서 당선자 15명을 얻은 민국당은 원내 교섭단체 구성도 할 수 없는 처지로 떨어졌다. 교섭단체 구성을 위해서는 무소속과 합류할 수밖에 없었다. 곽상훈을 중심으로 한 야당 성향 무소속 의원들과 민국당이 함쳐서 총 31명이 무소속 동지회라는 교섭단체를 만들게 된다.

자유당이 그렇게 단시일 내에 무소속 의원들을 흡수할 수 있었던 이면에는 그해 8월 20일까지로 된 선거사범 시효(時效)의 작용이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당시의 자유당의 힘으로써 선거법에 대한 처리를 좌지우지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당선된 무소속 의원 중 윤재욱(서울 영등포 갑구)ㆍ김두한(서울 종로 을구)ㆍ정성태(전남 관주구)ㆍ김우동(경북 선산구) 등에게는 이미 구속영장이 발부된 상태여서 기타의 마음 약한 무소속 의원들에게 커다란 불안 요소로 작용했다. 경찰이 한번 칼을 뽑으면 선거사범으로 옭아매어 당선 무효로 만드는 것 쯤 어려운 일이 아니었던 시절이었다. 관과 자유당한테 선거법은 사람에 따라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기 되는 편리한 마술의 작대기였다.

윤재욱과 김정호를 제외한 나머지 세명의 의원에 대한 경찰의 수사는 자유당이 필요한 개헌 정족수를 채운 후 무협의, 무죄로 처리되었다. 결국 이들의 입건은 무소속 의원들의 자유당 입당을 촉진시키기 위한 일종의 위협용이었음이 밝혀진 셈이다.

2대 국회는 1954년 5월 1일 제18회 정기회 폐회식을 마지막으로 막을 내렸다. 6ㆍ25라는 예기치 못한 변을 당해 3년여에 걸친 피난생활을 강요당하고 모진 정치파동 등 수없는 험난한 사건을 겪었던 2대 국회가 역사의 장 속으로 사라진 것이다. <다음호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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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2년 동안 북한의 대한민국에 대한 도발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대한민국 국회가 취해온 대응자세는 항상 부적절했다. 그러한 부적절성은 천안함이 북한의 어뢰공격을 받아 침몰한 사건에 대한 국회의 대응자세에서 절정에 달했다. 북한의 연평도에 대한 포격은 백주에 자행된 것이고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했기 때문에 국회는 다른 때보다는 좀 더 단호하게 대응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평도 사건이 발생한 후에 취해진 국회의 대응자세를 보면, 여전히 과거와 같은 부적절한 자세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다.

국회는 북한의 연평도에 대한 포격이 발생한 직후 국방장관을 국회로 소환하여 연평도 사건에 대한 전후사정을 캐물었다. 국방장관은 북한의 도발에 대한 대응을 지휘해야 하고 피격한 당한 연평도의 군병력과 민간인에 대한 각종 대책을 지휘해야 하며, 동시에 북한의 추가도발이 있을 경우 그에 대한 대응책을 강구해야 하는 주무장관이다. 이러한 국방장관을 국회에 소환해놓고 각종 사소한 문제들을 제기하며 콩이냐 팥이냐 따지는 논쟁을 벌이는 것은 북한의 도발에 대해 대응해야 하고 추가도발에 대한 대응책을 강구해야 하는 행정부와 군의 노력을 방해하는 것과 같은 효과를 나타내는 것이다.  

국회는 국방장관을 불러놓고 따지는 일에는 열을 올리면서도 영토가 적의 포격에 침략 당한 사태에 대한 국회의 대응책을 강구하는 것에는 매우 미온적인 자세를 취했다. 정상적인 국회라면 연평도가 피격당한 그날 밤에 도발을 자행한 북한을 최고수준으로 비난하고 대한민국 행정부와 국제사회에 대해 평화파괴자 북한에 대한 강력한 응징을 가하도록 촉구하는 결의를 채택했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회는 결의채택을 미적거리다가 사건발생 이틀 후에야 결의를 채택했다.

채택한 결의는 '북한의 무력도발 행위 규탄 결의’ 라는 제목부터 미온적이었다. 연평도에 대한 북한의 포격은 '무력도발’이 아닌 '무력침략’이었다. 따라서 피해당사자인 대한민국 국회의 입장에서는 이것을 침략으로 규정하고, 결의 제목을 '북한의 무력침략 규탄 결의’로 했어야 옳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회는 마치 제3국의 국회가 말하듯이 '침략’을 '무력도발’로 낮추어 표현했다. 결의는 그나마도 만장일치로 채택되지 못했다.

부적절한 도발규탄 결의

결의의 내용도 부적절했다. 결의는 북한에 대해 침략행위를 즉각 중단할 것과 연평도 사건에 대한 사죄와 재발방지를 요구하고, 행정부에 대해서는 북한의 추가도발이 있을 경우 그에 대한 단호하고 신속한 대응을 취할 것과 연평도의 피해복구 및 국제사회의 인식공유를 위한 외교적 노력을 병행해달라고 촉구했다. 동족상잔 전쟁의 재발을 불사하면서 침략을 자행한 북한에 대한 제대로 된 비판이 없고, 연평도 피침에 대한 응징 촉구나 국제사회에 대한 고발도 없는 이런 내용의 결의는 영토가 침략당한 국가의 국회가 채택한 결의라고 보기 어려운 저강도의 것이었다. 

결의내용은 영토가 침략당한 국가의 국회로서 천명할 내용에 미흡할 뿐만 아니라, 압도적 다수국민의 생각에도 부응하지 못한 것이었다. 지난 11월 29일 조선일보에 보도된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국민의 72%가 연평도 피침에 대한 정부의 어정쩡 반격조치가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했으며, 80%가 군이 강력한 대응조치를 취했어야했다고 생각했다. 또 11월 27일에 발표된 동아시아연구원의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연평도 피침 사건 후 81.5%의 국민이 국가안보가 불안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국회의 결의는 북한의 연평도 공격에 대해 보다 강력하게 응징해주기를 바라고, 그렇게 함으로써 북한의 도발로 인한 국가안보불안이 해소되기를 바라는 국민의 여망을 반영하지 못한 것이었다. 국회가 국민의 의사를 대변해야 한다는 당위를 망각한 것이다.

국회는 이런 미적지근한 결의를 채택하는 것으로서 북한의 연평도 침략에 대해 국회가 취할 조치는 다 취했다고 생각한 것처럼 결의 채택 후 연평도 사건에 대한 국회차원의 논의를 전혀 하지 않았다. 국가안보에 대한 책임감을 조금이라도 가진 국회라면 북한의 도발을 억제하기 조치들을 국회차원에서 강구하기 위한 특별위원회라도 구성하여 그 문제에 관한 논의를 계속했어야 하며, 서해에서 진행되는 한ㆍ미연합군사훈련 기간 중 연합군사훈련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고, 그 기간 중 북한이 자행할지도 모를 도발에 대해 어떻게 응징할 것인지를 행정부와 미국에 주문하는 결의도 채택했어야 했다.

그러나 국회에서는 의당 취해야 할 그런 조치들이 전혀 취해지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오히려 북한의 도발을 억제하는 일을 약화시키는 활동들이 있었다. 일부 민주당 소속의원들은 연평도 사건 후 남북한 간의 중재자를 자처하며 한국을 방문한 중국특사가 연평도를 포격한 북한의 침략행위에 대한 언급은 전혀 하지 않고 6자회담의 조속개최를 제안하자 그것을 지지함으로써 연평도 사건을 조속히 망각하게 만들려는 중국의 움직임에 힘을 실어주었다. 국회의원회관에서는 11월 29일부터 30일까지 민주당 소속의 한 의원의 지원 아래 북한의 핵무기 제조를 변호하고 주한미군과 한국군의 무기가 한반도 평화를 해치고 있다고 비난하는 사진전시회를 개최했다. 심지어 민노당과 진보신당에 소속된 국회의원들은 북한의 도발에 대한 대한민국의 응징결의를 과시하기 위해 계획된 서해에서의 한ㆍ미연합군사훈련을 중단하라고 촉구하는 성명을 국회에서 발표했다.

국회는 북한의 연평도 포격사건이 발생한 지 불과 10일 정도 지나면서부터는 연평도 사건을 완전히 잊어버린 것처럼 활동했다. 국회에서는 연평도 사건에 대한 언급도 사라졌고, 북한의 도발 억제를 위한 조치에 관한 논의는 더 더욱 종적을 감추었다. 국회는 4대강 사업문제와 청와대의 민간인 사찰 문제만을 놓고 격론을 벌였다. 그러한 대립은 12월 2일부터 여ㆍ야의원들 간의 몸싸움으로 진행되었고, 마침내 12월 8일에는 예산안 통과를 둘러싸고 여야 의원들이 폭력으로 대결하는 난장판을 벌였다. 북한의 연평도 포격으로 전쟁위기가 고조되고 북한의 핵공갈로 국가안보가 심각한 위기에 처해있는데, 국회는 그에 아랑곳 하지 않고 오로지 정쟁만 일삼는 분열된 모습을 보인 것이다. 임진왜란 직전에 왜적의 침략이 임박했는데도 불구하고 당파싸움만 해대던 조선의 조정 관리들과 닮은꼴이다.

국난 앞에서 당파싸움

북한의 연평도 포격에 뒤이어 대한민국 국회가 보여준 이상과 같은 일련의 움직임은 북한의 대남도발의지를 약화시키는 데 전혀 기여하지 못하는 것이다. 다소 심하게 말하면, 국회의 그러한 움직임들은 북한으로 하여금 '남조선 국회의 행동으로 볼 때, 우리가 앞으로 공격을 더 해도 남조선은 제대로 응징하지 못할 것이다’라는 생각을 가지도록 유도했을 가능성이 크다. 국회가 북한의 도발을 제대로 비난하지도 않고, 북한에 대해 강력한 응징조치를 취할 것을 행정부와 국제사회에 촉구하지도 않으며, 나아가서는 국회에서 북한의 핵무장을 변호하고 주한미군과 국군의 무기를 비난하는 전시회가 개최되고, 북한에 대한 응징결의를 행동으로 보여주기 위한 한ㆍ미연합군사훈련의 중단을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하는 일이 발생했으니, 그리고 국회가 북한의 연평도 침략이나 국가안보위기는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당파싸움이나 해대고 있으니 북한이 그러한 생각을 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북한이 앞으로 대남 도발의 유혹을 느끼지 않도록 하려면, 행정부와 군부가 그에 맞게 잘 대비해야 하지만 국회도 그에 부합하게 행동해야 한다. 북한이 도발을 해올 경우 행정부와 군, 국회와 국민이 모두 한 덩어리가 되어 도발보다 몇 배 강한 응징을 가할 태세를 취한다면 북한은 도발을 하지 못할 것이다. 국회가 북한의 도발에 대해 행정부, 군, 국민과 한 덩어리가 되어 강력한 응징에 나서려는 결의를 보이려면 국회가 다음과 같은 조치들을 취하는 것이 필요하다.

첫째, 북한이 화해의 대상이긴 하지만 대한민국의 명백한 적이라는 사실을 확인해야 한다. 둘째, 북한의 대남도발이 지속될 것으로 예상되는 2012년까지 모든 정당들은 대북정책을 선거의 쟁점으로 삼지 말도록 강제해야 한다. 셋째, 서해 북방한계선(NLL)이 영토경계선이며 그선 이남의 수역이 대한민국 영해라는 사실을 확인해야 한다. 넷째, 북한이 한차례만 더 도발을 자행하면 주한미군을 증강하고 미국의 전술핵무기를 한국에 배치해주도록 한ㆍ미 행정부에 촉구해야 한다. 다섯째, 북한의 군사도발이 또 자행될 경우 개성공단을 폐쇄하고 북한과의 경제교류를 전면중단하며, 북한에 대한 인도주의적 물자제공도 전면 봉쇄할 것을 촉구해야 한다.

만일 대한민국 국회가 위의 5가지 조치를 취한다면, 북한은 대남 군사도발을 다시는 자행하지 않을 것이다. 북한이 도발을 해봤자 대한민국의 군사적 방어태세만 강화되고, 북한의 도발이 겁나서 대한민국이 북한에 돈과 물자를 제공하게 되는 결과를 전혀 기대할 수 없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의 이 나라 정치상황에 비추어 볼 때 필자의 이러한 말은 헛소리에 불과하다. 현재 정당들이 취하고 있는 입장에 비추어볼 때, 그리고 종북세력과 친북세력이 이 나라 정계에 미치고 있는 영향력에 비추어볼 때 북한이 전면전을 각오하고 서해 5도 중의 한 섬을 점령하드라도 대한민국의 국회는 이러한 조치를 취할 가능성이 전무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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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지주회사제도의 문제와 방송자본의 자치

- 의안번호 1809818 방송법 일부개정법률안 -

또 방송법 일부 개정안이 발의되었다. 요지는 방송의 공적 책임을 확보하기 위해 방송사업자의 소유를 더욱 엄격하게 규율하고자 방송지주회사에 대한 특별규제의 근거를 마련하겠다는 것이다. 방송법은 신문진흥법과 함께 미디어의 산업 활동을 규제하는 내용까지 담고 있는 방송제도와 관련된 특별법이다. 전통적인 사기업인 신문사의 산업 활동을 규제하는 조항들로 인해 여론 시장을 소용돌이치게 만들었던 신문법에 비해서 방송법은 전파의 희소성이 강했던 전통적인 지상파가 포함된 방송통신을 대상으로 한 미디어법이라는 특성 때문에 방송사업자와 방송이용자의 이익을 형량하는 법으로 그 존재`가치를 인정받아 왔다.

이 법이 방송통신의 기술발전의 속도에 무딘 법이기는 해도 대다수 국민들은 불만을 참아 왔다. 하지만 방송지주회사의 규제라는 명분으로 방송 규제를 강화하려는 반시대적․반과학적 입법론에 대해서는 올바른 관련정보를 빨리 알려 시민들의 판단을 돕는 게 옳은 일일 것이다. 이번 개정안에는 방송지주회사 제도 도입뿐만 아니라 ① 이 회사가 지상파, 종합편성채널, 보도전문채널 사업자의 주식이나 지분 소유 상한을 30%로 제한하고, ② 이 회사 설립에 대한 방송통신위원회의 승인, ③ 승인에 필요한 심사 기준의 마련, ④ 이 회사에 대한 외국자본의 출자한도 20% 등의 규정을 담고 있다.

지주회사란?

지주회사란 무엇인가? 사업체의 주식이나 지분 소유를 통해 그 사업체의 활동을 지배하는 사업을 주업으로 하는 회사를 말한다. 넓은 뜻으로는 경영상의 지배관계를 차치하고 다른 회사에 대한 자본 참가를 주로 하는 회사로서 자본을 통한 피라미드형의 경영 지배를 가능하게 하며, 소자본을 가지고도 거대한 자본과 매출을 창출할 수 있는 독점적 지배 구조를 형성할 수 있다.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 제8조의 2에서는 주식(지분을 포함)의 소유를 통하여 국내 회사의 사업내용을 지배하는 것을 주된 사업으로 하는 회사로서 직전 사업연도 종료일 현재의 대차대조표상의 자산총액이 1천억 원 이상인 회사를 말한다. 현행 법인세법에서는 배당소득에 대한 이중과세를 조정하고, 지주회사의 주요 사업내용인 주식의 취득·보유 등을 지원하기 위해 지주회사가 자회사로부터 받은 수입배당금 중 일정한 금액은 이익금에 산입하지 않도록 하고 있다. 상법에서는 회사가 주식의 포괄적 교환 또는 이전으로 다른 회사의 발행주식 전부를 소유할 수 있게 하는 제도를 도입하여 기업의 구조조정을 지원함으로써 지주회사 설립을 용이하게 하고 있다.

이 제도는 금융지주회사 때문에 많이 알려졌지만 이 개정법안의 마련 이전에도 우리 방송에는 방송의 공공적 책임을 담보하기 위해 공공 독점사업체로 주식회사 문화방송을 소유하는 지배적 대주주인 방송문화진흥회라는 사실상의 지주회사가 특별법상의 재단법인 형태로 존재하고 있다.

방송지주회사의 자산총액은 대통령령이 정하는 금액이상인 회사라고 하니까 어떤 자본 규모의 회사인지 아직은 알 수 없으나 법 개정의 제안 이유를 살펴보면 현존하는 SBS홀딩스를 비롯하여 종합편성채널이나 보도전문채널의 자본규제를 목적으로 하는 입법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무엇보다도 방송사의 자본에 대해 MBC의 부모기업에 해당하는 방송문화진흥회에 대해서는 전혀 문제를 제기하지 않아오다가 방송시장의 개편과 새로운 채널의 등장을 앞두고 방송 자본에 대해 공정거래법상의 일반규율에 더해 방송을 더욱 특수하게 규율할 필요가 있는지 의아하다. 많은 채널이 등장하면서 성숙된 시장을 기초로 한 건전한 경쟁이 없으면 과학과 사회발전에 발맞춘 방송개혁이 느려지고 방송생산 비용이 증가하는 것이 명약관화한데도 방송지주회사의 주식 소유제한과 같은 규제장치가 왜 필요한지 이해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규제완화 반대론자들의 논점과 논거

미디어에 대한 규제완화를 반대하는 진영의 이론가들도 몇 가지 논점의 주장을 펼칠 것이다. 첫째, 그들은 미디어의 소유 집중이 증가되면 주요 미디어 채널을 통해 소통되는 정보의 전반적인 질이 떨어지고 다양성이 감소된다는 논점을 부각시킨다. 미디어 집중의 증가가 비판적인 사고에 대해 광범한 범위에서 사실상의 검열을 유발할 수 있고, 또한 지역공동체가 위기의 순간에 순발력 있게 유연한 대처를 못할 것으로 우려하는 논거를 제시해 왔다.

둘째, 미디어의 소유권 집중은 기업 통폐합으로 나타나 일반 공중에게 상이한 의견과 표현의 다양성을 위축시키게 된다고 주장한다. 방송을 비롯한 매스미디어는 공익에 이바지할 당연한 책무가 있는데 독과점적 미디어 시장 지배 상태가 되면 이 책무 대신에 독자와 광고주에게 해악을 발생시키는 정보를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소유권이 집중된 회사는 비리나 부정부패를 밝힘으로써 자사나 광고주에게 불리하거나 손해를 끼칠 기사 거리를 찾아내려는 경우에 방송사는 이를 거절하거나 편집 과정을 통해 걸러내기도 하며 때로는 당사자의 해고를 협박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미디어 시장을 지배하는 회사는 자신들의 이익에 부합하지 않는 기사를 억압하거나 소수자들이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거나 자신들의 관심을 표현하여 이를 공중에게 도달케 하는 기회를 축소시킨다는 것이다.

소유규제완화론자들의 반박

규제완화 진영에 선 사람들은 최근 들어 방송 미디어가 인터넷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는 현실을 올바로 이해할수록 더 많은 반박의 근거가 찾아진다고 본다. 인터넷의 발달로 시민미디어와 시민저널리즘이 증가하면서 시민 스스로 자신들의 뉴스를 전달하기 위한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오히려 전통적인 방송미디어 사업에 위협을 가하고 있음을 직시하라는 것이다. 최근에도 서해상 북방한계선 부근에서의 남북한 충돌 사태에서 보듯이 인터넷 기반의 시민 미디어는 대규모의 자금을 투입한 조사와 전문가적 분석 능력을 도입한 심층보도 면에서 전통적인 방송 미디어의 역할을 대신할 수 없었다. 사족이지만 전통적인 방송미디어도 진실을 늘 심층적으로 취재 보도해 온 것은 아니지만 방송미디어의 콘텐츠도 인터넷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인터넷의 인프라를 소유하는 통신회사나 케이블회사는 이용자가 여러 웹사이트에 접근함에 필요한 속도 조절능력을 가지고 있어서 방송통신기술을 생각할 때는 이처럼 인터넷의 독립성과 공적 통제를 둘러싼 네트의 중립성 문제까지 검토해야 정답이 나올 수 있다.

미디어의 다원성 확보, 즉 미디어의 다양한 제품 공급과 소유권의 분화를 결정하는 요인들에는 ① 시장의 규모와 시장의 경제적 부유 정도 ② 미디어 프로그램의 다양성을 지원하는 재정적 배경, ③ 미디어 시장에서 미디어 기업을 지켜갈 수 있는 이윤 창출 능력, ④ 미디어 소비자의 취향 등이 있다.

첫째로 공적 자본에 의한 방송시장의 과점이 이루어진 상태에서 잔여 시장을 대상으로 한 규모의 시장은 소비자가 지불하는 광고료에 의한 지원의 가능성이 풍부해야 다원성을 유지할 수 있다. 우리 방송시장은 이 조건에 미달한다.

둘째로 방송프로그램 공급의 다원성을 확보하려면 방송공급자와 소유자의 다양성이 확보되어야 한다. 방송 시장이 부유해지지 않으면 방송자본의 공급 시스템 분화가 불가능하다. 소수의 소비자를 위해 미디어 프로그램을 생산하는 이질적인 독립적 기구로서 우리나라에는 KBS라는 공유 상태의 공영방송이 있으므로 방송프로그램의 다원성을 확보하려면 더 많고 더 힘 있는 사영 방송이 있어야 다원성을 잠재적으로 위협하는 시장 압력을 견딜 수 있다.

셋째로 미디어 시장에서 기업을 지켜낼 수 있는 능력은 자원을 집중시켜 비용 절감 효과를 취하는 것이 한 방편이 될 수 있다. 사영 미디어가 분담하는 방송프로그램 생산 비용은 공급하는 프로그램의 차별성으로 인해 넷째 조건인 방송소비자의 지원을 받을 수 있고 이를 근거로 이윤을 창출할 수 있다.

미국 사례와의 비교

미국의 연방통신위원회(FCC)는 소유규제 완화를 계속하여 1950년대의 복점 체제로부터 다원 체제로 이행해 가면서 소유규제의 완화를 계속해 오고 있다. FCC는 의회의 규제 우선 정책에 맞서 주파수의 희소성 원칙에 근거한 규제근거의 전통성과 정당성이 변화되고 방송영상매체가 갖는 여론 영향력은 축소되면서 오락 매체로서의 기능이 더욱 강화되는 현실에 부응하여 다수국민의 문화향유 쪽으로 방송서비스의 목표를 수정하고 있다. 그러니까, FCC는 공익적 차원 보다 이제 와서는 방송의 발전과 관련된 기업의 역량에 기대하면서 미디어를 통해 더 나은 정보와 오락 서비스를 보장하고 의견의 다양성을 증진시키기 위한 정책이 현재의 미디어 환경에 맞는 정책이요 법제라는 입장이다.

우리나라의 방송시장을 매출액 기준으로 볼 때, 2007년 지상파 방송의 매출액과 비중은 KBS 1조 3,007억 원으로 33.4%, MBC 1조 2,199억 원으로 31.4%, SBS 6,353억 원으로 16.3% 모두 81.1%이고 기타가 18.9%에 불과하다. 종합편성채널과 보도전문채널이 등장하는 내년에 사영 방송미디어의 재원 조달은 협소한 광고시장을 감안할 때 매우 비관적이다. 이와 같은 환경은 오히려 방송사 간의 치열한 생존 경쟁을 완화하면서 경쟁의 규칙을 만들어 갈 수 있고, 그 동안 저질 인터넷 매체에 의한 `아니면 말고 식` 폭로와 책임 없는 선정화에 맞서서 방송통신의 질적 개선을 선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될 수 있다.

방송문화시장의 소유와 경영

오늘날의 다매체 환경은 보도 부문에서 조차 경제적 경쟁을 통한 의견의 다양성 확보가 중요해 지고 있다. 방송통신계 미디어의 양적 팽창을 눈앞에 둔 사회적․기술적 환경을 심사숙고해 보면 타 부문 산업자본의 소규모 방송사 소유권 확보를 통한 미디어 시장 교란을 차단하기 위한 대비책으로 방송지주회사를 규제할 것이 아니라 SBS 네트워크에 대항할 수 있을 만큼 경제적으로 탄탄한 자본의 방송문화시장 유입을 촉진하기 위해서도 소유 규제 발상이 부당함은 자명한 이치이다.

현재의 방송법 구조 하에서 방송지주회사가 방송통신위원회 소관 밖이므로 이를 경제법을 차용하여 규제하려는 발상은 종합채널 방송사업자의 출현을 앞두고 방송 자본을 상대로 시장경제활동에 일정한 압박을 가하려는 정치적 의도가 깔린 것으로 밖에 볼 수 없다.

방송통신사업의 재정과 운영은 방송통신 스스로에게 맡겨야 한다. 방송통신은 공익성과 경제성이라는 두 개의 가치 간에 언제나 이익균형을 유지하지 않으면 존립할 수 없는 공공재 산업이다. 방송통신은 수도나 전기 사업과 같다.

지금 방송계는 광고수입의 감소와 인터넷 매체의 국경선을 넘나드는 전송사업 사이에 끼여 고전을 면치 못하며 경영 위험성에 노출되어 있다. 이 판국에 방송지주회사를 통한 자구 노력을 지원하기는커녕, 공정거래법의 적용을 받되, 방송통신위원회의 승인을 받아 설립하고, 위원회가 정한 심사 기준에 따라야 하며, 외국 자본의 출자를 제한하고 법인의 합병․분할․ 방송사업의 조건변경 시에 역시 위원회 승인을 받게 하는 등의 행정규제를 가능케 하는 방송법 개정은 정부가 방송시장에 개입하여 미디어 기술발전과 한류(韓流)를 비롯한 방송문화발전을 저해하고 내수 시장의 기반을 꽁꽁 묶음으로써 세계 미디어자본과의 경쟁에서 불리한 위치로 자리매김하는 결과를 가져올 게 뻔하다.

맺음말

방송통신의 독과점을 막으려면 방송지주회사 제도를 도입하고, 그 주식․지분을 규제하기 보다는 오히려 그 시장진입장벽을 낮추도록 설립조건을 완화하고, 대신에 특정산업자본이 둘 이상의 방송지주회사에 지배력을 발휘할 수 없도록 하는 상법상 장치를 갖추도록 하는 것이 더욱 바람직하다. 또한, 공개된 주식시장을 통해 산업 자본에 편승한 외국 자본이 위장 전입하는 것을 차단하는 것도 우선일 것이다. 이 복잡한 방정식을 제대로 풀 능력이 부족한 정치권이라면 진정한 공익을 위해 사적 자본에는 사적 자치를 인정해야 옳지 않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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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94회 국회(정기회) 제13차 본회의 -
2010. 11. 10
10:05(개의)~11:40(정회)
14:16(속개)~17:09(산회)

11월 10일 제294회 제13차 본회의에서 진행된 청목회 입법로비의혹 관련 긴급현안질문을 하는 13명의 국회의원들은 자신들의 불편한 심기를 그대로 드러냈다. 대부분 주어진 12분의 시간을 초과하였고 다소 격앙된 어조로 압수수색의 필요성과 의문점, 국회의원 이미지 실추 우려, 청와대 혹은 검찰과 국회 간의 정치 싸움 등으로 이번 사건을 해석하였다. 질문을 하고 나서는 답변을 하는 김황식 총리와 이귀남 법무부 장관의 말은 제대로 듣지 않으면서, 검찰 흠집 내기와 제 식구 감싸기에 바빠 4시간 내내 거의 같은 말만 되풀이하는 진풍경이 계속되었다.

먼저 한나라당 김정권 의원의 질의가 시작되었다. 김의원은 많은 질문을 다소 차분한 모습으로 시간 안에 끝내는 모습을 보였다. “국회의원들이 증거 인멸할 위험이 없다고 본다. 로비 의혹이 사실이 아닐 때 국회의원에 대한 불신을 가중시킨 것은 누가 책임지느냐. 잘못이 입증되지 않으면 어떻게 할 것이냐.”며 질문하였고 이에 이귀남 법무부 장관은 “잘잘못은 수사 후에 가릴 수 있을 것이며 억지로 입증하는 것은 필요하지 않다.”고 답변하였다.

민주당 최규식 의원은 청원경찰법 개정을 발의하고 적극적으로 의정활동을 했던 의원으로 “청원경찰이라는 취약한 계층을 위해 정당한 일을 하고도 나중에 후원금을 받았다고 대가를 바라고 몰아가면 힘 없는 사람을 위한 일을 어찌 하겠느냐…이것은 사전 거래가 아니다. 청원 경찰과 의원들을 모독하는 것이다.” 라며 다소 흥분한 모습을 보였다. 이에 김황식 국무총리는 “이 사건은 청원경찰이 취약계층이라 해당사항이 없고 다른 이익단체는 해당 사항이 있고 하는 문제가 아니며 궁극적으로 알선·청탁 등이 있었는지 사실관계를 파악하는 것이 중심이다.”고 답변하였다.

한나라당 여상규 의원은 후원금 제도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임명직이나 선출직이나 공직이 맡겨진 상태에서 근본적인 차이는 없다…국회의원에게는 정책지원금이 지원되지 않고 후원금을 받도록 하고 있는데 왜 장관과 일반 국회의원들을 구분하는가? 정당한 기준이 있는가?”라는 발언을 하였다. 이에 김황식 국무총리는 “그것은 정치권과 학계, 선관위에서 합의해서 결정할 사항이다. 그러나 국고가 한정되어 있어 의정활동 진행에 지원되는 예산을 국고로 지원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지 않겠느냐.”며 우려를 나타내었다.

민주당 김부겸 의원은 매우 흥분한 상태로 질문을 이어나갔다. 특히, “정치를 하려면 자금을 후원받지 않으면 돈이 필요하다. 결과적으로 검찰은 부자만 정치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G20를 위해 국회의원들이 결의안까지 제출했는데 국회에서 상생법을 통과시키면 거부권을 행사할 것인가…언론도 언론의 자유를 위해 같이 싸워준 사람은 국회의원인데 검찰이 흘려주는 거짓 정보에 속지 말아라.”는 발언을 하였다.

자유선진당 김창수 의원은 “대검과 법무부, 청와대가 연이어 터지는 비리를 물타기 하는 것이다.”, 민주노동당 홍희덕 의원은 “397건의 선관위 정치자금법 위반 신고 중에서 상대적으로 위법 건수가 적은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만 수사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진보신당 조승수 의원은 “이것은 정당 차별 아니냐. 진보 양당만 조사하겠다는 검찰의 의도가 있을 것이다.” 라는 발언을 하면서 이번 청목회 사건을 진보세력 탄압 등의 정치공작으로 확장 해석하는데 주력하였으며, 질문을 한 뒤에 이어지는 김 총리와 이 장관의 답변은 전혀 듣지 않은 채 자신들의 이야기만 계속하였다.

민주당 장세환 의원은 압수수색 과정에서 등본을 사용하는 것을 문제시 하면서 법무부 차관이 지금껏 문제없이 진행된 관례라고 하는 답변은 듣지도 않은 채 “이것은 잘못된 불법 관행이며 왜 법대로 하지 않느냐, 국회의원 수색에 대한 것은 보고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것은 반드시 그래야 하는 강제 규정이다.” 라며 소리를 질렀다. 수사중인 사건이라 자세한 이야기를 할 수 없다는 법무부 차관에게 “수사 진행 중이면 여기 왜 나왔느냐 국회의원을 기만하는 행위다.” 라며 억지를 부리기도 하였다.

이번에 실시된 청목회 입법로비 의혹 긴급 현안 질문이 진행되는 동안 대부분의 국회의원들은 압수수색 과정에서 등본을 사용한 것과 압수수색 전 법무부 장관에게 보고하는 시점 등 법해석과 관련해서 법무부와의 차이를 보였다. 김황식 총리와 이귀남 법무부 장관 등은 수십 년을 대법원에 몸담아 온 법의 베테랑 들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국회의원들은 법을 모른다며 비아냥거리고 당신들의 해석은 틀렸다고 소리 지르며 질문을 한 후에 답변을 듣지 않고 인사도 받지 않는 등 최소한의 예의조차 지키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숨기는 것이 없다면서 왜 소리를 지르며 화를 내는지, 수사 중이라 아무런 답변을 들을 수 없을 때 수많은 질문만을 쏟아내는지, 한 의원들은 증거를 인멸할 우려가 없다면서 다른 의원은 이미 증거를 인멸했을 텐데 굳이 압수수색을 하느냐는 아이러니한 모습을 보여주는지 의아하다. 이번 사건으로 인해 후원금 위축을 우려하면서 은근슬쩍 정부 국고의 지원을 늘려달라고 이야기를 하고, 정치 싸움으로 비화하여 국회 감싸기에 열을 올린다면 국민들은 오히려 국회의원들에게 실망할 수밖에 없다. 먼저 당당하게 수사에 응하고, 그 과정에서 검찰과 정부에게 최소한의 예의를 보여주는 것이 국민들이 원하는 성숙한 대표의 모습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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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랑캐로 오랑캐를 제어(以夷制夷)
족청파의 오판
이승만의 특별 담화
족청파 거세
민주당의 재정비

오랑캐로 오랑캐를 제어(以夷制夷)

선거가 끝난 후 이승만은 선거의 뒤처리를 자유당이 하도록 만들었다. 자신의 뜻을 받아 이범석을 밀어내고 함태영을 당선시키는데 공을 세운 국무총리 장택상과 내무장관 김태선을 논공행상하는 대신 자신이 밀어낸 이범석의 족청파 사람들을 오히려 요직에 등용했다.

경찰의 선거 간섭을 고발한 이범석의 뜻을 시인이나 하듯 내무장관에 진헌식, 상공장관에 이재형, 농림장관에 신중목 등 족청계 인물들이 정부의 요직에 등용되자 자유당 내 족청파는 선거 중 경찰에 협조적이던 비 족청계 간부들을 축출하기로 결정했다. 비록 부통령후보 이범석은 마다했으나 족청에 대한 이승만의 믿음은 살아 있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중앙당부 지방당부 할 것 없이 모든 간부직을 족청파 일색으로 갈아치우는데 성공하고 여세를 몰아 지난 선거에서 이범석을 낙선시킨 경찰의 책임자 김태선을 물러나게 만들었다. 국무총리 장택상도 소위 후루이찌(古市 進=일제시대 경성부윤=서울시장)사건에 연관시켜 사표를 제출하게 만든다. 부산에 입국한 후루이찌를 장택상이 상륙을 허가하고 총리실에서 만나기까지 했다는 사실을 족청파 양우정이 경영하던 연합신문에서 폭로, 장택상을 친일파, 민족반역자로 몰아세운 끝에 총리 자리에서 물러나게 만든 것이다. 이범석이 선거에서의 패배를 깨끗이 갚아주는 결과가 되었다.

김태선, 장택상을 차례로 실각시킬 수 있을 만큼 힘을 회복했다고 생각한 족청파는 그들이 자유당을 완벽하게 장악하기 위한 비족청계 세력의 축출작업에 착수한다. 이에 대항해서 비족청계는 족청파의 세력 확장을 견제할 목적으로 장택상과 그가 영도하던 신라회 소속 의원들을 자유당에 입당시키기로 하고 수속을 마쳤다. 원내에서 열세인 자유당 의석 수를 보강하는 데는 신라회 소속 의원들의 입당이 두손 들어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그런데 입당 환영회까지 치른 마당에 당 내부에서 장택상만은 입당 가부 심사를 거쳐야한다는 주장이 나와 갑자기 심사위가 구성되고 심사위는 장택상의 입당을 저지해 버렸다. 이를테면 장택상에 대한 족청파 앙갚음의 연장이었다고 할 수 있다.

족청파의 오판

원래 자유당은 이승만이 여러 계파를 통합해서 직선제 개헌에 필요한 조직으로 발족을 시켰으나 내각책임제 개헌에 찬동하는 원내 자유당 세력이 우세해 짐으로써 원외가 주가 된 당을 이승만이 선택하게 되고 이범석이 그 조직 편성을 맡게 되었다. 따라서 이범석을 둘러싼 인물들이 당의 핵심 멤버를 이루게 되었으며, 이들 족청파는 지방의 군수나 경찰서장의 힘을 빌어 당세를 확장해 나갔다.

그러나 자유당의 중앙 조직은 이승만의 부름에 호응해서 창당에 참여한 대한청년단, 노총, 농총, 대한부인회 등의 인사들이 일정 비율로 임원직을 맡았기 때문에 수적으로 우세했다. 족청파는 중앙당의 이러한 판세를 뒤집기 위해 1952년 말부터 1953년 상반기에 걸쳐 약 반년 동안 기간단체들을 장악하기 위한 비족청계와의 싸움을 집요하게 전개했다. 단체 내부에서 반족청계 인사를 몰아내는데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여러 단체에서 족청은 분란을 일으켰으며 조금씩 단체의 주도권을 장악해 나갔다. 이범석이 내무장관으로 재임하는 동안 족청계는 기간단체들의 간부직을 하나씩 둘씩 차지해 갔다. 족청은 기간단체 대회에서 경찰관이나 폭력배를 이용, 대회장을 소란스럽게 만들기 일쑤였고 경찰은 이를 눈감아 주었다. 그 소란 끝에 족청은 몇몇 간부자리를 점령할 수는 있었으나 비족청계의 연합체인 전국사회단체 중앙협의회의 끈질긴 저항 때문에 그 세력을 기간단체 전체를 움직일 만큼 크게 늘리지는 못했다.

자유당 내에서 족청계의 전횡이 심해지자 이승만은 이제 족청파 제거 작업에 착수하게 된다. 당내 비족청계의 임영신 윤치영 배은희 이갑성 등도 족청계에 대한 공세를 늦추지 않았다. 이승만은 먼저 각료로 있는 족청계부터 정리하기 시작했다. 내무장관 진헌식, 농림장관 신중목을 차례로 파면시키고 진 장관은 보안법 위반, 횡령 등의 죄명으로 구속 기소를 했다. 이어 이재형 상공장관을 물러나게 한 후 이번에는 당의 정리에 들어갔다. 이미 장택상 김태선을 제거하는데 성공한 터에 더 이상 족청을 비호할 필요가 없어졌던 셈이다.

1953년 5월 10일에 있은 자유당 전당대회는 시작부터 족청계의 의도대로 모든 것이 진행되어 갔다. 비족청계의 입김을 완전히 막아두고 족청계 단독으로 모든 사안을 진행시켰다. 먼저 `반당분자 징계위`를 구성해서 족청에 비우호적인 간부들을 축출하기로 하는 한편 중앙위원회 대표와 중앙당 부·차장의 인선을 21명으로 구성하는 당 보강위에 전권 위임하는 결의를 한다. 전당대회는 족청파의 계획대로 차질 없이 진행되어 당권은 완전히 족청파가 장악하는 것으로 결말이 날 판세였다.

이승만의 특별담화

그러나 이변이 생겼다. 족청계의 뜻대로 진행된 대회가 폐회를 선언하기 직전에 당 총재인 이승만의 긴급지시라는 것이 하달된 것이다. 긴급지시는 3개 항으로 되어 있었는데 1. 전당대회는 매년 1회에 한할 것이며 2. 부·차장의 선출은 중앙위에 일임하고 사후에 총재의 재가를 받을 것 3. 지금까지의 파벌 대립은 묵인하겠으나 앞으로는 불용하겠다는 것이 그 내용이었다. 족청계에게는 하늘에서 떨어진 날벼락이었으며 비족청계에게는 기사회생의 기회를 열어주는 것이었다.

족청계는 대통령의 긴급지시에도 불구하고 부·차장 선출을 강행할 생각으로 11일 회의를 속개했으나 대통령의 지시를 일방적으로 거역할 수 없다는 당원들의 중론에 따라 부.차장 선출의 선행조건이 될 수 있는 비족청계 반당행위자의 숙청부터 먼저 하기로 하고 그 대상자를 선별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그래도 설마 하고 이승만 총재를 믿고 있던 족청파에게 5월 12일 자유당 총재 자격으로 발표된 이승만의 특별담화는 실질적으로 족청의 숨통을 끊어놓는 단호한 것이었다.

"자유당 안에 민족청년단의 세력 부식에 모모 인사를 중심하여 세력을 부식하려는 중에 서 내가 주장하는 의도와 대립되어서 필경은 자유당 지체가 분규 상태에 이르렀고…이것을 더 이상 허용할 수 없는 것이므로 사람의 4지 전체에 손가락 하나라도 다치면 아픈 것과 같이 몸 전체에 병이 들어 점차 전체에 고통을 줄 때에는 안으로 쓰린 것을 인내하는 것을 중지하고 잘라 내야 되는 것이다…이번 선거에는 각급 당부 간부와 각급 당부 당직자들이나 일반 당원 중에 민족청년단은 하나도 선거하지 말 것이며…이 사람들은 다 피선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한 뒤에도 족청이니 하는 소리가 있다면 그 때는 그런 말 하는 사람이 전체를 파당, 분열시키는 사람이라고 인정될 것이다…족청 지도하는 사람에게 이것을(어떤 개인이나 단체가 당을 이용하여 사사 경영을 하면 안된다는 뜻=필자 주) 말해도 점점 크게 가니 내가 이것을 만류하자는 것인즉 이 사람들은 임시 물러앉고…모든 애국하는 당원들이…다른 생각을 말고 지시대로 나가면 필경은 사심을 버리고 공의를 붙잡고 나가는 훌륭한 자유당과 자유당원으로 크게 발전할 것을 도모 노력할 것이다."

족청파의 거세

이승만의 이 담화를 계기로 족청파 거세 공작은 가속이 붙고 6월에는 이범석이 외국에 나가고 6월 말에는 족청의 자격 징계위원장이 실언사건으로 구속되고 8월 말에는 양우정의 정치참모 격이던 연합신문 편집국장 정국은의 간첩 혐의 체포, 9월 10일에는 족청계 3부장관의 파면과 해임, 10월 7일에는 백두진 총리의 이름으로 제출된 양우정의 구속동의요청이 가결되었다. 구속동의요청안은 양의원이 `정국은 사건에 관련되어 있어 군 수사기관에서 구속하고저 하니 국회에서 동의해 주기를 청한다` 고 되어 있었다. 양우정의 혐의는 간첩 방조와 은닉이었다. 표결의 결과는 재석 149석에 가 120, 부 18, 기권 11이었다. 그리고 12월 9일에는 자유당 족청계 간부 8명이 제명되어 족청파 제거는 정연하게 마무리가 되었다.

이승민이 족청파를 제거한 이유는 족청이 그 조직을 이용해서 장차 자신의 정치적 위치에 도전할 기능성이 크다고 판단했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거니와 위험 요소가 될 수 있는 세력은 일찌감치 그 싹을 잘라버리는 것이 이승만의 정치하는 수법이었다고 본다면 크게 틀림이 없을 것 같다. 그는 정략에 능하거나 큰 조직의 뒷받침을 가지려는 인물보다 오직 자기를 받들고 따르는 비서 같은 인물이 필요했을 뿐이다. 내각책임제 개헌안 반대 민중대회, 직선제 반대 국회의원 소환운동 등 관제 민의의 조직과 민중 동원에 앞장섰던 족청파는 이승만의 의도대로 일이 진행되어 만족할만한 결과를 얻게 됨으로써 그 임무 수행을 깨끗이 완수했으며 그 단계에서 축출될 수밖에 없는 운명에 있었던 꼴이다.

이승만의 유시 하나로 족청은 하루아침에 무너지고 자유당은 이승만 개인의 의도에 따라 자유자재로 움직여지는 이승만의 정당으로 변했다. 족청의 몰락은 관의 비호 없는 여당의 정파나 그 세력이 얼마나 무력한가를 보여주는 좋은 본보기였다고 할 수 있다. 족청계를 제거한 자유당은 국민회·노총·농총(후의 농민회)·대한청년단·대한부인회 등 5개 기간단체로부터 12명의 중앙위원을 선출, 이들을 중심으로 해서 당무를 집행해 나갔다.

1953년 11월에는 다시 전당대회를 열어 중앙위원제를 중앙당 부·차장제로 바꾸고 9명의 부장을 뽑아 당 재건을 서둘렀다. 부장에는 총무에 이기붕, 정무에 이갑성, 훈련 이진수, 조사 진승국, 재정 배민수, 조직 박용만, 감찰 이범녕, 선전 황성수, 청년 문봉재가 차지했다.

민국당의 재정비

대통령 선거 후 국회에서 세력이 약화된 야당은 대열을 재정비할 힘조차 잃고 있었다. 비록 원내 의석 수는 20석 남짓으로 줄어들었지만 그나마 야당 세력의 중심이었던 민국당은 반년 남짓 앞으로 다가선 3대 민의원 총선에 대비하기 위해서도 당의 개혁이 필수라는 생각이 지배적인 당내의 중론이었다. 구 한민당계의 주도적 역할에 불만이 없지 않았던 신익희 등 비한민계가 중심이 되어 12인 혁신위원회가 구성되고 본격적인 당 정비 작업에 들어갔다. 1953년 10월 5일에 열린 민국당 전당대회는 김성수, 백남훈, 조병옥, 서상일, 등 구 한민당계 간부직을 고문으로 후퇴시키고 신익희를 중심으로 한 새 지도체제를 구성했다.

민국당은 새로운 경제정책을 마련, 자본주의적 자유경제체제의 확립을 표방했으며 혁신운동의 일환으로 당의 문호 개방을 통한 당 조직의 대중화를 재창했다. 유명무실해진 야당세력의 연합을 다시 구축하는 방안도 모색했으며, 그러한 야당 연합체의 구성만이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야당세력이 자유당의 독주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밝혔다.

국회는 참의원 의원선거법의 제정과 민의원 의원선거법을 개정해서 입후보자의 연고지(緣故地)제를 채택하는 한편 정당 아닌 사회단체 이름으로 선거운동을 하지 못하도록 막는 안을 통과 시켰으나, 정부는 그러한 개정안이 현역의원(2대국회의원)의 재선에 유리한 내용이라고 해서 공포를 거부했다. 국회로 환송된 개정안은 재의에 부쳐진 결과 폐기되었다. 두 번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눈 앞에 다가선 선거일을 앞두고 국회는 몇 번 더 선거법의 개정을 시도했으나 번번이 실패하여 결국 폐기되고 말았다. 정부는 기존의 국회의원 선거법에 따라 제3대 국회의원 선거를 실시한다고 공고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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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적이지 못한 현행 정치자금법
법인과 단체에도 후원금 허용해야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SBS 드라마 `대물`에서 하도야 검사가 민우당 조배호 대표의 정치자금 문제를 밝히기 위해 고군분투 하는 내용이 나온다. 드라마 외에도 정치권의 불법자금 문제는 소설과 영화의 단골 소재가 되곤 한다.

최근 정치자금과 관련된 전국청원경찰친목협의회(청목회) 사건이 논란이 되고 있다. 국회의원 33명이 청원경찰법 개정 로비의 대가로 총 2억 7천여만 원의 후원금을 받았다는 것이다. 청목회는 이들 의원들에게 로비하기 위해 회원 1만여 명 중 5000명에게서 8억 원을 모았고 이를 청원경찰이나 그들 가족 1000여명의 명의로 쪼개서 후원금을 냈다고 한다.

이런 정치자금의 문제는 늘 있어왔다. 2002년 대선 때 한나라당의 차떼기 사건, 노무현 전 대통령의 박연차 리스트, 이명박 대통령의 천신일 세중나모 회장 문제 등 정치권력의 중심에는 늘 자금문제가 발생했다. 이런 사건들 때문에 일반인들은 정치자금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시각을 갖게 되고 정치자금 앞에 `불법`이라는 단어가 붙는 것을 자연스럽게 여긴다.

불법정치자금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겠다고 만들어진 현행 정치자금법도 불법 정치자금 문제를 해소하지 못하고 있다. 일명 `오세훈법`으로 통하는 이 법은 2004년 개정된 것으로 법인·단체의 후원금 기부를 금지해 기업과 이익단체로부터 정치자금 유입을 막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또한 개인이 10만원의 소액 후원금을 내도록 허용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현실적이지 못한 현행 정치자금법

민주주의 정치제도 하에서는 선거와 정당의 운영을 위해 정치자금이 필요한데, 정치활동은 경제활동과는 달리 생산활동이 아니기 때문에 정치인 스스로 정치에 필요한 자금을 벌 수 없다. 따라서 정치인들은 일반인들의 기부 즉, `무상증여`를 통해 정치활동에 필요한 자금을 구하고 있다. 정치인은 후원금을 필요로 하고, 이익단체는 자신의 정치적 이념이나 이익을 실현하기 위해 자신들의 입장을 지지하는 정치인을 후원하고 싶어 한다. 그래서 정치자금을 `필요악`이라고 한다.

그러나 불법 정치자금 문제를 막기 위해 만든 현행 정치자금법은 일반인이 지키기 어려운 수준으로 매우 비현실적이다. 현행 정치자금법은 개인이 소액 후원금만 제공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으며, 기업과 법인은 정치인에게 후원금을 내지 못하게 금지하고 있다. 이런 비현실적인 법 때문에 정치인들이 연말만 되면 출판기념회를 개최해 부족한 후원금을 모으는가 하면, 이익단체들이 직원 및 직원 가족의 명의로 후원금을 10만원 씩 쪼개서 특정 의원의 후원계좌로 입금하는 불법행위를 하게 만든다. 이번 청목회 사건도 정치자금법의 단체기부 금지 때문이다.

사실 정치자금의 `무상증여`라는 속성은 불법적인 대가를 바라고 증여되는 `뇌물`과는 구별이 어렵다. 특정 의원의 정당한 입법 활동을 고맙게 여긴 단체가 대가를 바라지 않고 10만원 씩 입금한 것을 로비로 해석해야 하는지, 해당 정치인의 활동을 지지하는 일반인들의 후원금으로 해석해야 할지의 문제가 따른다.

한 예로 민주노동당은 노동자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당으로 소속 의원들은 노조원들로부터 많은 후원금을 받고 있다. 이를 두고 민노당을 지지하는 노조가 자신들에게 유리한 정치활동을 요구하기 위해 집단적으로 민노당 의원에게 로비를 한 것이라고 판단할 수 있을까? 청목회 사건이 문제라면, 민주노총과 민노당 의원들도 마찬가지로 문제가 될 수도 있다.

10만원에 한해서는 소득공제까지 해주면서 건전한 기부문화를 조성한다는 법의 취지가 무색할 만큼 과도하게 도덕적 엄격함을 요구하는 현행법은 불법정치자금 조성을 유도하고, 많은 국회의원과 시민들을 범법자로 만들 우려가 있다.

법인과 단체에도 후원금 허용해야

불법정치자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첫째, 현행법이 금지하고 있는 법인·단체의 후원금 기부를 허용할 필요가 있다. 기업과 이익단체가 불법정치자금을 내지 못하도록 막기보다는 합법적이고 투명하게 정치자금을 제공하도록 허용하는 것이 오히려 합리적이고 현실적이다.

정치인들의 정치자금은 현실적으로 필요하며,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의원들에게 자신들의 의사를 전달하고 싶어 하는 단체의 후원금 공급 의지가 있는 한 아무리 강력한 법으로 규제한들 불법 정치자금 문제는 근절될 수 없다. 오히려 부정과 부패에 대한 문제만 계속해서 제기돼 정치활동에 대한 일반인들의 인식만 나빠지고, 건전한 정치문화 발전을 저해할 수 있다.

법인과 단체의 정치자금을 양성화 한다면 지금과 같은 정치자금 문제를 상당 부분 해소할 수 있으며, 정치자금을 투명하게 주고받는 정치풍토가 형성될 수 있다. 단체가 제공하는 후원금액을 제한하는 상한선만 적절히 설정한다면, 대부분의 정보가 투명하게 공개되어 있는 현재 시점에서 오히려 정치자금은 합리적으로 제공되고 사용될 것이다.

물론 정치자금의 모금을 자유롭게 하는 대신 정치자금의 수입과 지출을 투명하게 공개하는 것은 당연하다. 불법 정치자금을 주고받은 정치인과 개인이나 단체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법적 불이익을 주고 처벌을 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분명한 것은 법이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수준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정치자금을 무조건 줄여야 한다는 식으로는 불법행위만 조성할 뿐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정치자금 양성화를 위한 노력이다.

둘째, 정치자금법 개정뿐만 아니라 시민들과 단체가 자신과 정치적 이념이 같은 정당을 지원하기 위해 후원금을 제공하는 로비 행위 또한 법적으로 허용할 필요가 있다. 개인이나 단체가 자기 의사와 이익을 관철시키고자 국회의원을 상대로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고 입법을 요구하는 로비는 언론의 자유이자, 헌법에서 표현하는 `청원권`에 포함되는 활동이다.

그러나 현재 로비는 법적으로 금지 되어 있어 불법 정치자금이 불법로비로 이어지는 악순환을 끊기 어려운 구조다. 따라서 미국처럼 로비스트를 양성화하고, 누구를 위해 어떤 목적으로 일하는지 투명하게 공개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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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안번호 1809709 하도급거래 공정화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 -

들어가는 말

지난 10월 29일 한나라당의 서민정책특별위원회(서민특위)가 「하도급거래 공정화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을 국회에 발의했다. 한나라당 김기현 의원 외 15인이 발의한 이 안의 핵심 내용은 대중소기업 거래관계에 있어서 ‘제3자 협의권’과 ‘징벌적 손해배상제도’를 도입하자는 것이다. 자금력, 정보력, 시장지배력 등에서 대기업에 비해 상대적으로 열악한 환경에 처해 있는 중소기업은 대기업과의 계약관계에서 불이익을 볼 수밖에 없으며, 이러한 관계는 일종의 시장실패로 볼 수 있으므로 정부의 규제를 통해 극복해나가야 한다는 것이 본 개정안의 기본취지라 할 수 있다.

‘제3자 협의권’이란 하도급 관계를 맺고 있는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하도급대금 조정신청을 계약 당사자가 아닌 제3자가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해당 중소기업이 아니라 그가 속한 협동조합이 대신 협상에 임하도록 함으로서 협상테이블의 균형을 맞추고, 익명성을 보장하여 추후에 불이익을 당하지 않도록 하자는 것이 그 목적이다. 또 ‘징벌적 손해배상제도’란 대기업이 하도급 중소기업이 보유한 기술을 부당하게 탈취할 경우 피해를 당한 기업이 이로 인해 발생한 손해액의 최대 3배까지를 손해배상 청구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중소기업이 안심하고 기술개발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그 기본적인 목적이다.

그 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이번 개정안은 그대로 통과될 경우 대중소기업 간의 거래관계에 심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으며, 우리 기업 구조와 나아가 국가 경제 전반에 미칠 파급효과가 클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이 두 사안에 대해 그 법적경제적 타당성을 검토해 보고 개선방안을 제시코자 한다.

제3자 협의권

두 경제주체가 자발적으로 맺은 계약관계의 존중은 시장자본주의의 근간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비록 경제력의 불균등으로 인해 불공정한 계약이 성립될 가능성이 있다 하더라도 규제를 통한 해결은 최후의 선택이 되어야 한다. 우선 공정성에 대한 객관적인 기준을 찾기 어렵고 그러한 기준이 있더라도 다양하고 복잡한 경제요인들이 반영된 기업 간의 자율적인 계약을 획일적인 규제로 다스린다면 부작용이 상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제3자 협의권’이 기업 간 계약의 규제를 통해 국가경제의 기반에 되는 기업활동에 미치는 영향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선 우선 이번 개정안의 대상인 하도급법의 성격부터 규명할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는 이미 계약을 통한 기업 간 거래에 대해 상당히 강한 규제를 가하고 있다. ‘사법(私法)’인 계약법을 통해 불공정한 계약으로 인해 입은 피해를 사후적으로 소송을 통해 구제받을 수 있도록 하고 있으며, 추가적으로 ‘공법(公法)’인 공정거래법 제23조에서 거래상 지위남용행위를 불공정거래행위의 한 유형으로 규정하여 대기업이 자신의 우월적인 지위를 이용하여 불공정거래를 할 수 없도록 하고 있다. 이러한 제도는 우리나라와 일본에서만 찾아볼 수 있을 뿐 다른 선진국에는 존재하지 않는 규제이다.

이렇듯 이미 기업 간 거래에 관련하여 강력한 규제가 존재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번 개정안의 대상인 하도급법이 추가로 제정되었는데, 그 이유는 다름 아니라 공정거래위원회가 불공정거래 입증책임을 제대로 소화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즉 하도급법은 구체적인 행위내용을 법위반행위로 선제적으로 간주해 버림으로써 공정거래위원회가 특정 거래행위의 불공정 여부를 법정에서 증거에 의해 입증할 책임을 해소해 주는 수단으로서 도입이 된 법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 법의 도입으로 계약의 공정성 판단의 근거원칙이 ‘합리의 원칙’에서 ‘당연위법의 원칙’으로 대체됨으로서 자발적 계약의 본질이 침해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경쟁력 있는 기업 간의 자발적 계약은 가깝게는 거래 당사자들의 후생을 증진하고 멀리는 소비자 후생의 증진을 통해 국가경제에 이바지한다. ‘제3자 협의권’은 계약의 기능을 회복시킨다는 명목 아래 이미 기형적인 하도급법을 한 단계 더 강화함으로써 오히려 이러한 계약의 본질적인 순기능을 위축시켜 경제 전반의 활력을 떨어뜨리는 결과를 초래할 가능성이 크다.

‘제3자 협의권’은 이러한 근본적인 문제 이외에 실천적 측면에서도 문제가 많다. 우선 중소기업 협동조합과 같은 조직이 협의권을 가질 경우 이것이 납품업체 간의 경쟁을 제한하는 일종의 카르텔로 작용할 수 있다. 그럴 경우 ‘제3자 협의권’은 조합이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 원사업자를 압박하는 수단으로 사용될 수 있으며 이로 인해 초래되는 제품가격의 인상부담은 소비자가 떠맡게 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또한 ‘제3자 협의권’이 해당 기업이 아닌 조합에 부여될 경우 협상의 성격이 기업 차원의 개인적인 것에서 조합차원의 집단적인 것으로 변질되게 된다. 조합이 협상을 통해 얻어낸 결과는 애초 협상을 제기했던 기업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조합이 대변하는 모든 중소기업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럴 경우 기술력과 같은 기업의 특성이 계약조건에 반영되지 못하게 되고, 기업은 경쟁력 제고를 위한 동기를 상실하게 될 것은 자명한 이치이다. 이는 본 개정안이 의도하는 중소기업의 경쟁력 향상과도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제3자 협의권’이 하도급 업체에만 적용되도록 되어 있어 대기업에 납품하지 않는 중소기업과 형평성 문제가 제기될 수 있으며 이들로 하여금 제품가격 인상을 위한 단체행동의 근거로 악용될 소지가 있다.

징벌적 손해배상제도

중소기업의 기술보호는 중소기업의 경쟁력 향상을 위해 매우 중요한 사안이다. 그래서 현재 우리나라는 하도급법, 대중소기업 상생법, 저작권법 등 다양한 제도를 통해 중소기업의 기술보호를 도모하고 있다. 그 중에서 최근 활발히 활용되고 있는 것으로 기술자료 임치제도를 들 수 있는데, 2008년 26건에 불과하던 대중소기업 협력재단 임치건수가 2010년 들어 205건으로 크게 늘어나는 추세이다. 아직 그 인지도가 높지 않은 편이긴 하지만 앞으로 이러한 제도를 이용한 기술보호 노력이 급속히 확대되리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징벌적 손해배상제도’의 도입은 기술보호라는 순기능보다는 부작용을 초래할 가능성이 크다. 우선 형사적인 성격이 강한 ‘징벌적 손해배상제도’가 민사법에 도입될 경우 법체계의 혼란이 발생하게 된다. 또한 개정안에서 명시된 손해배상액의 3배에 대한 근거가 뚜렷하지 않아 공정성의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더불어 기술탈취로 인해 발생한 손해액의 3배에 달하는 금액은 고소인에게 지대추구 동기를 부여하여 소송의 남발을 초래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중소기업은 대부분 그 규모가 영세하여 자체적인 기술개발을 수행할 여력이 그리 크지 않다. 대기업과의 공동기술개발이 강조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징벌적 손해배상제도’가 도입될 경우 대기업의 공동기술개발 노력은 위축될 수밖에 없으며 결과적으로 중소기업의 기술경쟁력이 오히려 낮아지는 결과가 나타날 가능성이 크다.

맺음말

지금까지의 논의로 볼 때 김기현 의원 등이 발의한 「하도급거래 공정화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은 장기적인 관점에서 중소기업의 경쟁력 강화보다는 대·중소기업 간의 협력관계를 훼손할 가능성이 높다. 대기업은 국내 중소기업과 계약을 하기 보다는 규제부담을 피하기 위해 경쟁력 있는 파트너를 찾아 해외로 눈길을 돌리게 될 것이며, 그것이 여의치 않을 경우 스스로 자체 생산을 시도하게 될 것이다. 그 결과 우리나라의 산업공동화가 더욱 가속화되고 대·중소기업 간의 격차가 더욱 벌어지게 되는 현상이 빚어질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러한 부작용을 피하고 개정안이 의도하던 본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노력이 필요하다. 우선 ‘제3자 협의권’과 관련하여 새로운 규제를 도입하여 기업의 부담을 가중시키기보다는 기존의 사법적 구제시스템의 절차를 개선하여 중소기업의 계약적 권리가 실질적으로 보장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한 정책방향이라 할 수 있다. ‘징벌적 손해배상제도’와 관련해서도 같은 논리가 적용될 수 있다. 손해액의 3배와 같은 애매모호한 기준을 정하여 비생산적인 혼란을 초래할 것이 아니라 기존의 기술임치제도와 병행하여 이미 민법에 존재하는 위자료 제도를 효과적으로 활용함으로써 부당한 기술탈취 행위를 방지하도록 하는 것이 더욱 바람직할 것으로 판단된다.

이번 개정안이 발의된 배경에는 기본적으로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수익률 격차가 심화되고 있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그러나 1997년 외환위기 이후 두 기업집단의 수익률의 장기추세를 비교해 보면 이러한 인식이 잘못된 것임을 알 수 있다. 한국은행의 통계에 따르면, 1998년 이후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수익률 격차는 2000년대 초반까지 확대되다가 2004년을 전후하여 점차로 줄어들고 있으며, 최근 들어 그 추세가 더욱 가속화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만약 수익률 격차가 역전된다면 지금과 같이 중소기업에게 대기업과 이익을 배분하라고 요구할 수 있을지 궁금해진다. 수익률은 단순한 증상에 불구하며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변화할 수 있는 가변적인 요소이다. 반면에 한번 도입된 제도는 다시 되돌리기 어려운 항구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이번 개정안은 근본적으로 그 초점이 잘못 맞추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림>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매출액 대비 영업이익률 추이

(단위: %)

자료: 한국은행,「기업경영분석」

우리나라 규제제도의 특징은 어떤 사안이 발생했을 때 기존의 제도를 유연하고 효과적으로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안에만 적용되는 새로운 제도를 도입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그 결과 규제제도가 지나치게 복잡해지고 준수비용이 과도하게 높아져 결국 아무도 지키지 않는 무용한 법률조항으로 남게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하도급 관련 규제도 예외가 아니다. 정책당국은 새로운 규제를 덧붙여 기업의 활동을 어렵게 하고 규제제도 전반의 비효율성을 심화시키기 보다는 기존의 제도가 잘 활용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는 기본적인 사실을 새삼 인식할 필요가 있다. ▌

 

Posted by 자유기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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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일 간의 선거 운동
이승만의 불출마 선언
민의(民意) 가동과 이승만의 번의
선거 양상
이승만의 재 당선

18일 간의 선거 운동

1952년 7월 4일 밤 늦게 국회를 통과한 발췌 개헌안은 7월 7일에 공포되고 7월 18일에는 정. 부통령 선거법이 공포되었다. 선거법 시행령에서 제2대 대통령 및 제3대 부통령 선거일을 2주 남짓 뒤인 8월 5일로 확정했다. 원래 정. 부통령 선거법에는 선거일 40일 전에 선거일자를 공고하도록 명시해 두었으나 1952년의 선거만은 예외 규정을 두어 공고 17일 만에 선거를 치룰 수 있게 만들어 놓았다. 야당 후보에게 선거운동을 할 넉넉한 시간을 주지 않기 위해서라고 알려졌다.

여당인 자유당은 7월 17일 대전에서 열린 전당대회에서 대통령 후보에 이승만, 부통령 후보에 이범석을 지명했으며, 야당인 민국당은 대통령 후보에 이시영, 부통령 후보에 조병옥을 입후보시켰다. 대통령에는 이승만, 이시영 외에 조봉암, 신흥우 두 사람이 무소속으로 출마했고, 부통령에는 이범석, 조병옥 외에 함태영(무소속), 전진한(대한노총), 정기원, 이갑성, 임영신(이상 자유당 합당파), 백성욱(무소속), 이윤영(무소속)등 9명이 출마했다. 이들 부통령 후보 중 조병옥과 전진한을 제외한 나머지 7명은 전부 대통령 이승만을 지지하고 있었다.

 

자유당 전당대회에서 부통령 후보로 추대된 이범석은 당내 주류였던 족청파가 밀어서 지명을 받기는 했으나 선거 도중 이승만의 의사가 이범석이 아닌 무소속 함태영을 택하는 바람에 결과적으로 낙선의 고배를 마시게 되고 그 때까지 거의 무명에 가까웠던 함태영이 부통령에 당선되는 이변이 생겼다.

정부는 선거의 자유 분위기를 보장한다는 취지로 이미 발췌안의 통과와 더불어 사실상 불필요해진 비상 계엄령을 해제하면서 공정하고 자유로운 선거가 될 것이라고 약속했다. 그러나 지속되는 삼엄한 분위기로 말미암아 그러한 정부의 공언을 믿는 국민은 많지 않았다.

이승만의 불출마 선언

이승만은 7월 19일에 있은 자유당 전당대회에 매시지를 보내 자신은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기를 원치 않는다고 통고했다. 그리고 자유당에서 당수, 부당수의 이름을 제거해 줄 것을 요청했다. 당시 언론에서는 이 같은 요청을 그가 이범석의 부통령 후보 지명을 마땅치 않게 생각한다는 의사 표시로 생각했다. 그러나 이승만의 최종적인 속마음은 아예 자유당을 주도하고 있던 족청파와 그 파를 대표하는 이범석의 거세에 있었던 것으로 뒤에 가서야 밝혀졌다. 대통령으로 추대된 자신이 지명하지 않는 부통령 후보를 자유당이 당론으로 결정한다면 그 당사자가 이범석이 아닌 다른 누구라도 이승만은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 분명했지만, 그보다도 그는 날로 세력을 확장해 가는 족청을 그냥 봐 넘길 수 없다고 판단했고 그러한 의사를 대통령 후보 지명 거부라는 형식으로 당에 전달한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았던 것 같다.

이승만의 단호한 의사 표시에도 불구하고 자유당 전당대회는 사태를 너무 안이하게 받아들였다. 비록 피지명자가 사의를 표명하더라도 전당대회의 결정을 거부할 수는 없을 것이고, 당수인 이승만은 전당대회의 결정에 따를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 같다. 자유당의 창당을 직접 지시받은 것이 이범석이었고 족청이 앞장서서 이승만을 지지하는 원외 자유당을 그리고 나아가 자유당을 창당해 냈고 이승만을 대통령 후보로 추대하기로 했는데 설마 그가 족청과 이범석을 버릴 수 있겠느냐고 믿었던 모양이다. 전당대회는 후보 지명을 강행키로 결의하고 계획대로 대통령 후보에 이승만, 부통령 후보에 이범석을 지명한다.

이 결정에 대해 이승만은 "나는 자유당 당수를 수락한 일도 없으며 부당수가 누군지도 모른다"고 한층 더 격한 담화를 내었다. 그런데도 족청파 주도의 자유당은 이를 무시하고 당초의 결정대로 후보지명을 고수하기로 했다.

민의(民意) 가동과 이승만의 번의

대통령 후보로 지명 받은 이승만은 거듭 본인은 대통령으로 재선되기에는 너무나 고령이며 젊고 정력 있는 인사가 국사를 맡는 것이 좋겠다는 담화를 발표했다. 자신의 재선을 위해 엄청난 무리수를 둔 그가 불출마 선언을 한다는 것은 누가 보더라도 정치적 제스츄어라고 볼 수밖에 없었다. 아마 족청파의 판단도 이범석의 부통령 지명 문제보다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기 위한 이승만의 정치적 제스츄어라는 쪽에다 무게를 두었던 것이 분명하다.

이승만의 사의 표명을 번복시키기 위해 자유당이 다시 바빠졌다. 족청파 주도의 자유당은 민중자결단 등 각종 관제 데모대를 동원해서 이승만의 재출마를 요구하고 나섰다. 데모대는 종일 대통령 임시 관저 앞에서 재출마를 촉구하는 연좌데모를 벌렸다. 자유당은 이승만의 재출마를 요구하는 탄원서가 350만 통이나 들어왔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그것이 관제 탄원서라는 것은 누구 눈에나 훤히 보였다.

마침내 입후보 마감일을 눈앞에 두고 이승만은 번의를 하게 된다. "전국 방방곡곡과 각계 각층에서 재출마를 요청하는 탄원서가 밀려 왔으나 그 중에서도 본인을 깊이 감격케 한 문자는 '민의를 존중하는 대통령이시니 당신의 재선 입후보를 주장하는 전 국민의 의사를 존중하라’는 것이었다"는 불출마 번의 담화를 발표한다.

이승만의 불출마 선언과 그 번의 담화는 두 가지 의미로 풀이될 수 있다. 첫째 의도는 강압적인 방법으로 대통령 직선제를 성사시켰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대통령 선출에 국민의 직접적인 뜻을 반영하기 위한 것이었지 자신의 재선을 목적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며, 자신은 민의의 요청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출마를 하게 된다는 점을 국․내외에 선전하고, 둘째는 자신은 어느 당의 추대보다도 국민들의 민의에 의해 대통령 출마를 하느니 만큼 설사 자기를 지지하는 당이라 할지라도 당내의 어느 정파가 세(勢)를 키워 자신의 의사에 반하는 일을 자의대로 할 수 없다는 뜻을 강조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자신의 존재가 어느 일개 정당을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당이라는 울타리를 넘어선 존재임을 과시하기 위해 그는 초대 때에도 자신을 대통령으로 당선시키는데 절대적인 공을 세운 한민당을 대통령이 되자마자 버렸으며, 이번에도 자신이 자유당을 좌지우지 해야지 당의 다른 어떤 세력이 자신의 의도에 영향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불출마 선언과 번의 담화를 통해 세상에 알렸다고 볼 수 있다.

그러는 동안에 그는 부통령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이미 결정해 두고 '부통령에 대해서는 누구를 추천하고자 아니하고 오직 동포들의 공결(公決)에 붙이는 바’라고 자유당이 부통령 후보로 지명한 이범석에 대해 무관심하다는 것을 분명히 시사했다.

선거 양상

대선을 눈앞에 두고 민주당은 전혀 선거체제를 갖출 틈을 갖지 못했다. 선거운동을 할 만한 충분한 시간도 없었을 뿐더러 특히 선거에서 가장 효율적인 무기라고 할 수 있는 자금이 태부족이었다. 자금 동원 능력도 그럴 시간도 없었다. 싸울 태세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으니 전의도 그만큼 저조했다. 민국당의 대통령 후보 이시영은 노약한 몸이어서 활발한 선거유세를 할 수가 없었고, 부통령 후보 조병옥만이 고군분투하는 격으로 전국 주요 지점만 몇 번 돌며 불법적인 부산정치파동이 이승만이 종신 대통령으로 군림하면서 독재를 하려는 음모라고 역설했다. 그러나 정부에 대한 국민의 불신감을 불러일으키기에는 시간과 자금이 너무 빈약했다. 민주당은 후보자 결정을 늦게 하는 통에 선거운동을 할 수 있는 시일이 5, 6일에 불과했다. 야당은 이승만이 계산한 대로 정부에 대한 국민의 불신감을 투표로 연결시킬 수 있는 분위기 조성에 실패하고 만 것이다. 역부족이었다.

선거전은 이미 거의 부동의 승세를 굳힌 대통령 선거보다 부통령 경쟁에 더 많은 힘을 쏟는 양상으로 변했다. 국민들의 흥미와 관심도 부통령 쪽으로 기울어졌다. 선거전은 여․야의 대립이라기보다 이승만 지지자들 끼리 누가 더 이승만의 지지를 받고 있는가 하는 싸움으로 변해 갔다. 그런 속에서 경찰이나 행정 조직이 부정선거를 하고 있다는 증거는 사방에서 노출되었다. 선거를 감시한 유엔 감시위원단이 작성한 보고서 내용도 그 사실에 언급하고 있다.

"선거에 나타난 비난점은 주로 등록 마감일(7월26일)과 투표일(8월5일)의 사이가 짧다는 것이었다. 7월 4일에 겨우 국민의 직접선거가 있으리라고 결정되었기 때문에 선거운동을 할 수 있는 기간이 얼마 있지 않았다. 이런 환경이기 때문에 재직자(이승만을 말함)는 아주 유리하였다. 특히 벽지에서는 이승만을 제외하고는 어느 후보자의 인격, 경력 또는 정강도 잘 알려지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을 위원단은 발견하였다. 경찰이 간섭하였다는 비난에 대해서는 의심할 바가 없이 어떤 간섭이 있었으나 대통령의 선출에 관한한 어떤 중요한 차이도 자아내는 것이 아니었다."

보고서는 '경찰이 간섭하였다는 비난은 의심할 바가 없으나 그것이 대통령의 선출에 대해서는 아무런 중요한 변화를 자아내지를 못했다’고 적고 있다. 이승만이 자유당에서 추대한 이범석을 거부하고 자신이 낙점한 함태영을 부통령으로 밀었다는 사실을 유엔 감시단은 잘 알고 있었으며, 조직력이 우세한 자유당의 이범석이 떨어지고 무명에 가깝던 함태영이 당선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경찰의 강력한 간섭이 있었음을 시사해 주는 것이라고 알고 있었다. 그러한 결과는 이승만의 의도대로 움직이는 경찰에게 이승만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을 것으로 짐작이 간다. 사실 경찰의 선거 개입은 이승만의 의중을 알아차린 총리 장택상과 내무장관 김태선이 면밀한 전략을 세움으로써 조직적으로 이루어졌다고 알려져 있다.

이승만의 의중을 알기 전까지는 경찰 조직력은 집권당인 자유당의 공천자 이승만과 이범석의 당선을 위해 힘을 썼다가 투표일을 불과 수일 앞둔 시점에서 부통령을 함태영 지지로 바꾸었다. 경찰에게 이 정도의 공작은 그다지 어려운 작업이 아니었다. 결과적으로 선거전은 경찰의 조직력과 족청파 조직력 간의 싸움으로 변했는데, 원래 경찰조직의 힘을 빌려 조직을 짠 자유당 내 족청파가 경찰조직을 당하기는 처음부터 역부족이었다.

이승만의 재당선

선거는 자유당의 대승으로 막을 내렸다. 투표결과는 총유권자 825만9428명 중 727만여명이 투표에 참가하여 자유당의 이승만이 예상한대로 유효투표의 72%인 523만8769표로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부통령에는 무소속의 함태영이 유효투표의 40%인 294만3813표로 당선되었다. 투표결과는 다음과 같다.

이어 이윤영, 전진한, 임영신, 백성욱, 정기원의 순서로 득표했다.

선거에서 패배한 이범석은 경찰의 선거간섭을 비난하면서 이승만에 대해서는 언급함이 없이 경찰의 책임자 격인 총리 장택상과 내무장관 김태선을 고발하고 나섰다. 그러나 결과는 무위(無爲)였다. 자유당 족청파는 선거 직후 몇몇 주요 장관직에도 발탁되고 장택상 총리, 김태선 내무장관을 사임시키는 등 한때 당세를 회복하는 듯이 보였지만 얼마 가지 못해 서서히 이기붕에게 주도권을 내어주고 만다.

패배한 민국당은 원내에서의 세력이 크게 위축되어 갔다. 야당세력은 민국당계와 조봉암 지지세력 간의 대립이 표면화되었으며 그때까지 야당 편향의 의원들 중 다수가 여당으로 이탈해 가는 통에 원내의 야당세력은 급속도로 약화되었다. 한 때 큰 세력으로 움직였던 원내 자유당 신라회, 무소속 구락부 등도 교섭단체를 해체하고 말았다. <다음호에 계속> ▌

이 형 / 평론가ㆍ전 한국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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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췌안의 발상

- 대한민국 국회이야기 제14화 -

정치적 소용돌이가 계속되는 속에서 야당계 의원들은 국회출석을 거부하고 있었다. 등원을 하고 싶지 않아서 거부한 것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 구속이 될지 모르는 불안한 상태에서 피신을 하느라 사실상 국회출석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국회 밖에서 매일 같이 데모를 벌이고 있던 백골단 땃벌떼 등 어용단체는 원외에서 마주치는 국회의원들에게 폭언과 폭력을 서슴치 않아 국회 주변의 상황은 무질서라기보다 차라리 무법천지에 가까웠다.

그러는 사이에도 국회 야당 측이 제출한 내각책임제 개헌안과 정부가 제출한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이 모두 국회에 상정되어 있었으나 이 두 법안이 심의에 들어가기도 전에 다른 한편으로 신라회(新羅會)주도의 이른바 발췌개헌안이 준비되고 있었다. 발췌개헌안의 주역을 맡은 장택상은 이 개헌안이 정부의 대통령 직선제와 야당의 내각책임제를 절충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었으나 이승만이 의도하는 직선제가 개헌안의 핵심이 되어 있어 실질적으로는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이었고 국무위원에 대한 국회의 불신임권은 그저 모양세로 갖다 부친 것에 불과했다.

1952년 6월 20일에 국무총리 장택상은 자기가 주도하는 신라회와 원내의 이승만 지지 세력을 합쳐서 이른바 발췌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발췌안의 주요 골자는 1. 대통령 직선제 2. 상․하 양원제(단 정부안에 있는 '상원의원의 3분의 1은 국가유공자 및 학자, 명망가를 국무위원의 의결을 거쳐 대통령이 임명한다’는 항목은 삭제하였다.) 3. 국무총리 요청에 의한 국무위원의 임명과 면직 4. 국무위원에 대한 국회 불신임안은 총선 후 1년이 지난 후에 할 수 있다는 내용 등이었다. 대통령 직선제가 유일한 목적이었던 이승만에게 다른 지엽적인 조항은 아무런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었다.

국제적 조언

발췌 개헌안이라는 전무후무한 변칙적인 개헌안이 나오게 된 이면에는 국제적인 조언이 작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허정의 회고록이나 장택상의 회고록에 의하면 발췌개헌의 구상은 당시의 주한미국대사 무초와 유엔 한국위원회 사무총장 매듀가 한국의 정치적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제안한 것으로 되어 있다.

매듀는 “적군을 앞에 두고 정치 싸움만 할 것이 아니라 이 대통령의 뜻도 이루게 하고 국회의 체면도 세워주는 수습 방안을 찾아야 한다”고 허정에게 발췌안을 제시했는데, 허정은 그것이 변칙적인 헌법 개정이라고 해서 거간 역할을 거절했고 장택상은 그것을 받아드려 국회 간부들에게 정식으로 제의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얼마 후 국회의장단은 크라크 유엔군 사령관을 방문했다. 크라크는 '현재 전선에서는 전쟁이 계속되고 있는 어려운 상황인데 이 정세 속에서 정국의 혼란이 가중된다면 신탁통치를 하게 될지도 모른다’ 고 사태의 긴박성을 얘기했다고 한다. 이승만을 대체할 인물이 없다는 전제 아래 미국 측이 택한 일종의 최후통첩과도 같은 성격의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 말에 불안을 느낀 의장단이 원내 각 정파를 설득해서 정부와의 타협이 불가피하다는데 합의를 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승만은 이 같은 미국측의 속셈을 미리 읽고 자신 있게 직선제 개헌 강행을 추진하지 않았나 하고 추정하는 학자들이 적지 않다. 장택상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신라회에서 발췌개헌안을 제출하여 가까스로 난국을 수습하게 되었는데 그 이면에는 공개할 수 없는 국제적인 모종의 계책이 있었다. 이 내용은 당시 국회에서 의장단과 각 교섭단체 대표들에게 공개한바 있었는데 어쨌든 그와 같은 난국에 처해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서 발췌개헌안이 채택되었던 것이다”라고 저간의 경위를 말해주는 글을 적고 있다.

이승만의 뜻을 이루게 한다는 것은 결국 직선제 개헌을 받아들인다는 뜻인데 장택상은 이 내막에 대해 '공개할 수 없는 국제적인 모종의 계획이 있었다’고 밝히면서 발췌개헌안이 난국에 처해 있는 당시의 사정에서는 유일한 해결 방법이었음을 강조하고 자신의 발췌안 주도 역할을 합리화하고 있다.

의원 몰이: 강제연행과 연금

발췌개헌안이 제출된 지 닷새 만에 발생한 대통령 저격 미수사건으로 민국당을 비롯한 야당의원들의 사기는 어쩔 수 없이 저하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분위기를 이용해서 경찰은 출석을 거부하는 야당의원들을 일일이 찾아서 국회로 연행했다. 연행된 의원들은 계엄군에게 인계되고 무장군인들이 이들을 의사당에 수용했다. 말은 일시적인 연금이라고 했지만 실상은 자유행동이 제한된 완전한 감금이었다. 감금된 의원들은 이틀간이나 외출이 통제되고 급하게 외출이 불가피해진 의원들은 동료의원인 남송학의원(원외 자유당파)이 발행하는 허가증을 가져야만 외출이 가능했다. 국회의원이 같은 동료 국회의원을 감시하고 행동의 자유마저 속박하고 있었으니 이미 국회는 상식이 통하는 정상적인 국희가 아니었다. 국회의원의 체통도 체통이려니와 국회 자체가 한 나라의 입법을 담당하는 입법부로서의 권위를 완전히 상실한 꼴이 된 셈이다. 잡혀오는 국회의원들에 대한 계엄군의 대접도 거칠고 소홀했다.

야당 의원들을 연행하는 과정에서는 여러 가지 웃지 못 할 사건과 사연이 많았지만 그 중에서도 계엄사령관 원용덕과 최성웅 의원 간의 주먹다짐은 당시 뉴욕 타임즈나 워싱턴 포스트 등 미국의 유명 일간지에까지 보도된 정도로 특기할만한 사건이었다. 최성웅은 피신을 다니다가 경찰에 발각되어 7월 3일 국회로 연행되어 왔는데 최성웅을 본 원용덕이 “네가 최성웅이냐? 오라면 빨리 오지 어디서 꾸물대다가 이제사 오는거냐”고 호통을 쳤다. 이 말에 격분한 최성웅은 주먹으로 원용덕의 따귀를 갈기고는 멱살을 움켜잡았다. 급습을 당한 원용덕이 권총을 빼들자 보좌관이 그의 손을 붙잡아 총을 넘겨받았다. 둘은 서로 멱살을 잡은 채 실랑이를 벌렸는데 원용덕은 “이게 미쳤나”하고 소리를 지르고 최성웅은 “이 XX 어디다 대고 반말이야. 헌병이라는 작자가 국회의원 더러 어디서 꾸물대다 오느냐고? 이 XX의 발바닥이나 핥다가 죽을 XX야”하고 고함을 쳤다. 보좌관들이 둘을 겨우 떼어놓기는 했으나 최성웅은 저고리와 와이셔츠가 찢기고 원용덕은 전투복 계급장 중 별 2개가 떨어져 나갔다. 국회의원을 대하는 계엄군의 자세가 대저 이러했다.

국회는 7월 3일과 4일 이틀 동안 발췌개헌안을 중심으로 형식적인 토론을 벌렸으나 그 보다 먼저 개헌안 통과에 필요한 정족수를 채우는데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국제구락부 사건과 국제공산당 관련 사건으로 10여명의 의원이 구속되어 있은 데다가 신변에 위험을 느낀 상당수 야당의원들이 행방을 감추고 있었기 때문에 개헌 통과에 필요한 성원을 채울 수가 없는 형편이었다. 이렇게 되자 직선제 개헌 추진 의원들은 이범석 내무장관과 상의해서 구속된 의원을 석방조치하도록 하는 한편, 숨어 있는 의원들의 수색에 박차를 가하도록 독촉했다. 명색이 국제공산당사건이라는 중대 범죄에 계류되어 있는 의원들까지 국가의 기간이 되는 헌법개정안 투표에 동원을 했으니 희극인지 비극인지 국민들은 웃을 수도 없는 한심한 심경이었을 것으로 짐작이 간다.

발췌개헌안 통과

1952년 7월 4일 밤 9시 30분 무장경찰, 헌병, 테러단이 포위한 국회에서 발췌개헌안은 기립 표결로써 재석 166명 중 찬성 163표, 기권 3표 (양병일, 윤담, 김영선)로 통과되었다. 자유 분위기가 보장되지 않은 여건 아래 비밀 투표도 아닌 기립표결이라는 민주주의 방식과는 거리가 먼 방법에 의한 표결의 결과였다. 이로써 법과 질서가 무시되고 짓밟힌 가운데 우리나라 헌정 사상 첫 개헌이라는 것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 발췌개헌안에 의해 대통령 중심제이면서 총리제를 두는 기형적인 정부형태가 생겨났다. 개헌안이 통과 된지 한 달, 그 법이 공고된 지 17일 만인 8월 5일에 정․부통령 선거가 실시되었는데 정․부통령 선거 사상 전무후무한 최단기 선거 운동 기간이었다.

발췌 개헌안은 그 내용의 시(是)와 비(非)를 떠나서라도 어떤 경로를 겪어 어떠한 방법으로 국회에서 통과되었는지 그 경위를 우리의 헌정사에 분명히 기록해 두어야 할 중대사라는데 이론을 달 사람은 없을 줄로 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발췌개헌안의 통과는 군대와 경찰을 동원하여 의회의 기능을 파괴한 반(反)의회주의적 일종의 쿠데타 행위였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발췌안이 남긴 자국

발췌안 통과를 반의회주의적 쿠데타로 보는 이유는, 첫째, 발췌개헌안의 통과가 국회의 기능을 마비시킨 상태에서 강압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정상적인 의사 진행에 의한 통과라고 보기는 어렵다.

둘째는 출석을 거부하는 의원들을 경찰이 강제 연행을 해서 의사당에 연금을 시키고 투표를 강요한 일들이 정상적인 민주국가에서는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일들이었다. 이것은 민주국가의 기본인 의회정치를 송두리째 무너지게 만든 처사였다.

셋째는 권력으로써 군(軍)을 사용(私用)했다는 점이다. 국가 긴급권인 계엄령 선포권을 정권 유지용으로 이용했으며, 이와 같이 물리적 강권으로 정권을 유지하려 드는 것은 민주제도의 존립을 위협하는 짓이 아닐 수 없다. 이 같은 전례 때문에 일부 정치군인들에 의한 정치개입이 뒤를 이었고, 수 차래의 군사 쿠데타가 초래되는 토양이 배양되었다.

넷째는 관제 민의를 조작해서 민의에 의해 선출된 국회를 무용화시키려한 일이다. 관제 민의는 경찰에 의해 조작되었으며 그 후 계속 권력유지의 방편으로 경찰이 선거에 관여하는 등 경찰권을 남용하게 된다. 거의 모든 선거에서 경찰은 여당 후보자의 당선을 위해 개입하는 관례를 만들었고, 이 같은 관례는 발췌개헌안 때부터 생겨난 폐습이다. 자유당 정권과 그 후의 군사정권 하에서 경찰이 얼마나 많은 선거를 자신들의 뜻대로 요리했는지는 선거사의 기록에 생생히 남아 있다.

다섯째는 권력이 시중의 폭력배들과 결탁해서 이들을 권력 유지의 보조역으로 이용했다는 사실이다. 경찰이나 헌병대 같은 강권적 권력기관이 앞장서서 공개적으로 하기 힘든 일을 이들 폭력배들한테 맡겨서 처리하게 만들었다. 4.19 의거 때 데모를 하고 귀교하는 고려대 학생들을 습격해서 많은 부상자를 내게 만든 사건이 정치 깡패들의 마지막 소행이 되었으며 자유당 정권의 명맥을 끊는 계기를 만들었다.

여섯째는 정적을 제거하거나 견제할 목적으로 걸핏하면 용공사건을 꾸며 상대방을 공산당으로 몰아세운 일이다. 발췌 개헌안 통과 때만 하더라도 유명한 반공검사를 공산당과 접선해서 정치자금을 유입해 오고 그가 접선한 간첩이 몇몇 유명 정치인들의 암살을 계획했다는 죄목으로 구속했으며, 야당계 유력인사들을 세칭 국제공산당의 비밀 정치 공작에 관련시켜 구금했다. 국가보안법을 정적을 제거하거나 그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악용한 좋은 예라고 하겠는데 그 후의 정권에서도 용공 조작 수법은 기회 있을 때마다 선을 보였다.

부산 정치 파동과 발췌개헌안의 통과는 우리나라 의정사에 씻을 수 없는 오점을 남긴 불상사였다고 말해야 옳을 것이다. <다음호에 계속> ▌

이 형 (평론가ㆍ전 한국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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