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일 간의 선거 운동
이승만의 불출마 선언
민의(民意) 가동과 이승만의 번의
선거 양상
이승만의 재 당선
18일 간의 선거 운동
1952년 7월 4일 밤 늦게 국회를 통과한 발췌 개헌안은 7월 7일에 공포되고 7월 18일에는 정. 부통령 선거법이 공포되었다. 선거법 시행령에서 제2대 대통령 및 제3대 부통령 선거일을 2주 남짓 뒤인 8월 5일로 확정했다. 원래 정. 부통령 선거법에는 선거일 40일 전에 선거일자를 공고하도록 명시해 두었으나 1952년의 선거만은 예외 규정을 두어 공고 17일 만에 선거를 치룰 수 있게 만들어 놓았다. 야당 후보에게 선거운동을 할 넉넉한 시간을 주지 않기 위해서라고 알려졌다.
여당인 자유당은 7월 17일 대전에서 열린 전당대회에서 대통령 후보에 이승만, 부통령 후보에 이범석을 지명했으며, 야당인 민국당은 대통령 후보에 이시영, 부통령 후보에 조병옥을 입후보시켰다. 대통령에는 이승만, 이시영 외에 조봉암, 신흥우 두 사람이 무소속으로 출마했고, 부통령에는 이범석, 조병옥 외에 함태영(무소속), 전진한(대한노총), 정기원, 이갑성, 임영신(이상 자유당 합당파), 백성욱(무소속), 이윤영(무소속)등 9명이 출마했다. 이들 부통령 후보 중 조병옥과 전진한을 제외한 나머지 7명은 전부 대통령 이승만을 지지하고 있었다.
자유당 전당대회에서 부통령 후보로 추대된 이범석은 당내 주류였던 족청파가 밀어서 지명을 받기는 했으나 선거 도중 이승만의 의사가 이범석이 아닌 무소속 함태영을 택하는 바람에 결과적으로 낙선의 고배를 마시게 되고 그 때까지 거의 무명에 가까웠던 함태영이 부통령에 당선되는 이변이 생겼다.
정부는 선거의 자유 분위기를 보장한다는 취지로 이미 발췌안의 통과와 더불어 사실상 불필요해진 비상 계엄령을 해제하면서 공정하고 자유로운 선거가 될 것이라고 약속했다. 그러나 지속되는 삼엄한 분위기로 말미암아 그러한 정부의 공언을 믿는 국민은 많지 않았다.
이승만의 불출마 선언
이승만은 7월 19일에 있은 자유당 전당대회에 매시지를 보내 자신은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기를 원치 않는다고 통고했다. 그리고 자유당에서 당수, 부당수의 이름을 제거해 줄 것을 요청했다. 당시 언론에서는 이 같은 요청을 그가 이범석의 부통령 후보 지명을 마땅치 않게 생각한다는 의사 표시로 생각했다. 그러나 이승만의 최종적인 속마음은 아예 자유당을 주도하고 있던 족청파와 그 파를 대표하는 이범석의 거세에 있었던 것으로 뒤에 가서야 밝혀졌다. 대통령으로 추대된 자신이 지명하지 않는 부통령 후보를 자유당이 당론으로 결정한다면 그 당사자가 이범석이 아닌 다른 누구라도 이승만은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 분명했지만, 그보다도 그는 날로 세력을 확장해 가는 족청을 그냥 봐 넘길 수 없다고 판단했고 그러한 의사를 대통령 후보 지명 거부라는 형식으로 당에 전달한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았던 것 같다.
이승만의 단호한 의사 표시에도 불구하고 자유당 전당대회는 사태를 너무 안이하게 받아들였다. 비록 피지명자가 사의를 표명하더라도 전당대회의 결정을 거부할 수는 없을 것이고, 당수인 이승만은 전당대회의 결정에 따를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 같다. 자유당의 창당을 직접 지시받은 것이 이범석이었고 족청이 앞장서서 이승만을 지지하는 원외 자유당을 그리고 나아가 자유당을 창당해 냈고 이승만을 대통령 후보로 추대하기로 했는데 설마 그가 족청과 이범석을 버릴 수 있겠느냐고 믿었던 모양이다. 전당대회는 후보 지명을 강행키로 결의하고 계획대로 대통령 후보에 이승만, 부통령 후보에 이범석을 지명한다.
이 결정에 대해 이승만은 "나는 자유당 당수를 수락한 일도 없으며 부당수가 누군지도 모른다"고 한층 더 격한 담화를 내었다. 그런데도 족청파 주도의 자유당은 이를 무시하고 당초의 결정대로 후보지명을 고수하기로 했다.
민의(民意) 가동과 이승만의 번의
대통령 후보로 지명 받은 이승만은 거듭 본인은 대통령으로 재선되기에는 너무나 고령이며 젊고 정력 있는 인사가 국사를 맡는 것이 좋겠다는 담화를 발표했다. 자신의 재선을 위해 엄청난 무리수를 둔 그가 불출마 선언을 한다는 것은 누가 보더라도 정치적 제스츄어라고 볼 수밖에 없었다. 아마 족청파의 판단도 이범석의 부통령 지명 문제보다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기 위한 이승만의 정치적 제스츄어라는 쪽에다 무게를 두었던 것이 분명하다.
이승만의 사의 표명을 번복시키기 위해 자유당이 다시 바빠졌다. 족청파 주도의 자유당은 민중자결단 등 각종 관제 데모대를 동원해서 이승만의 재출마를 요구하고 나섰다. 데모대는 종일 대통령 임시 관저 앞에서 재출마를 촉구하는 연좌데모를 벌렸다. 자유당은 이승만의 재출마를 요구하는 탄원서가 350만 통이나 들어왔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그것이 관제 탄원서라는 것은 누구 눈에나 훤히 보였다.
마침내 입후보 마감일을 눈앞에 두고 이승만은 번의를 하게 된다. "전국 방방곡곡과 각계 각층에서 재출마를 요청하는 탄원서가 밀려 왔으나 그 중에서도 본인을 깊이 감격케 한 문자는 '민의를 존중하는 대통령이시니 당신의 재선 입후보를 주장하는 전 국민의 의사를 존중하라’는 것이었다"는 불출마 번의 담화를 발표한다.
이승만의 불출마 선언과 그 번의 담화는 두 가지 의미로 풀이될 수 있다. 첫째 의도는 강압적인 방법으로 대통령 직선제를 성사시켰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대통령 선출에 국민의 직접적인 뜻을 반영하기 위한 것이었지 자신의 재선을 목적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며, 자신은 민의의 요청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출마를 하게 된다는 점을 국․내외에 선전하고, 둘째는 자신은 어느 당의 추대보다도 국민들의 민의에 의해 대통령 출마를 하느니 만큼 설사 자기를 지지하는 당이라 할지라도 당내의 어느 정파가 세(勢)를 키워 자신의 의사에 반하는 일을 자의대로 할 수 없다는 뜻을 강조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자신의 존재가 어느 일개 정당을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당이라는 울타리를 넘어선 존재임을 과시하기 위해 그는 초대 때에도 자신을 대통령으로 당선시키는데 절대적인 공을 세운 한민당을 대통령이 되자마자 버렸으며, 이번에도 자신이 자유당을 좌지우지 해야지 당의 다른 어떤 세력이 자신의 의도에 영향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불출마 선언과 번의 담화를 통해 세상에 알렸다고 볼 수 있다.
그러는 동안에 그는 부통령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이미 결정해 두고 '부통령에 대해서는 누구를 추천하고자 아니하고 오직 동포들의 공결(公決)에 붙이는 바’라고 자유당이 부통령 후보로 지명한 이범석에 대해 무관심하다는 것을 분명히 시사했다.
선거 양상
대선을 눈앞에 두고 민주당은 전혀 선거체제를 갖출 틈을 갖지 못했다. 선거운동을 할 만한 충분한 시간도 없었을 뿐더러 특히 선거에서 가장 효율적인 무기라고 할 수 있는 자금이 태부족이었다. 자금 동원 능력도 그럴 시간도 없었다. 싸울 태세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으니 전의도 그만큼 저조했다. 민국당의 대통령 후보 이시영은 노약한 몸이어서 활발한 선거유세를 할 수가 없었고, 부통령 후보 조병옥만이 고군분투하는 격으로 전국 주요 지점만 몇 번 돌며 불법적인 부산정치파동이 이승만이 종신 대통령으로 군림하면서 독재를 하려는 음모라고 역설했다. 그러나 정부에 대한 국민의 불신감을 불러일으키기에는 시간과 자금이 너무 빈약했다. 민주당은 후보자 결정을 늦게 하는 통에 선거운동을 할 수 있는 시일이 5, 6일에 불과했다. 야당은 이승만이 계산한 대로 정부에 대한 국민의 불신감을 투표로 연결시킬 수 있는 분위기 조성에 실패하고 만 것이다. 역부족이었다.
선거전은 이미 거의 부동의 승세를 굳힌 대통령 선거보다 부통령 경쟁에 더 많은 힘을 쏟는 양상으로 변했다. 국민들의 흥미와 관심도 부통령 쪽으로 기울어졌다. 선거전은 여․야의 대립이라기보다 이승만 지지자들 끼리 누가 더 이승만의 지지를 받고 있는가 하는 싸움으로 변해 갔다. 그런 속에서 경찰이나 행정 조직이 부정선거를 하고 있다는 증거는 사방에서 노출되었다. 선거를 감시한 유엔 감시위원단이 작성한 보고서 내용도 그 사실에 언급하고 있다.
"선거에 나타난 비난점은 주로 등록 마감일(7월26일)과 투표일(8월5일)의 사이가 짧다는 것이었다. 7월 4일에 겨우 국민의 직접선거가 있으리라고 결정되었기 때문에 선거운동을 할 수 있는 기간이 얼마 있지 않았다. 이런 환경이기 때문에 재직자(이승만을 말함)는 아주 유리하였다. 특히 벽지에서는 이승만을 제외하고는 어느 후보자의 인격, 경력 또는 정강도 잘 알려지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을 위원단은 발견하였다. 경찰이 간섭하였다는 비난에 대해서는 의심할 바가 없이 어떤 간섭이 있었으나 대통령의 선출에 관한한 어떤 중요한 차이도 자아내는 것이 아니었다."
보고서는 '경찰이 간섭하였다는 비난은 의심할 바가 없으나 그것이 대통령의 선출에 대해서는 아무런 중요한 변화를 자아내지를 못했다’고 적고 있다. 이승만이 자유당에서 추대한 이범석을 거부하고 자신이 낙점한 함태영을 부통령으로 밀었다는 사실을 유엔 감시단은 잘 알고 있었으며, 조직력이 우세한 자유당의 이범석이 떨어지고 무명에 가깝던 함태영이 당선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경찰의 강력한 간섭이 있었음을 시사해 주는 것이라고 알고 있었다. 그러한 결과는 이승만의 의도대로 움직이는 경찰에게 이승만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을 것으로 짐작이 간다. 사실 경찰의 선거 개입은 이승만의 의중을 알아차린 총리 장택상과 내무장관 김태선이 면밀한 전략을 세움으로써 조직적으로 이루어졌다고 알려져 있다.
이승만의 의중을 알기 전까지는 경찰 조직력은 집권당인 자유당의 공천자 이승만과 이범석의 당선을 위해 힘을 썼다가 투표일을 불과 수일 앞둔 시점에서 부통령을 함태영 지지로 바꾸었다. 경찰에게 이 정도의 공작은 그다지 어려운 작업이 아니었다. 결과적으로 선거전은 경찰의 조직력과 족청파 조직력 간의 싸움으로 변했는데, 원래 경찰조직의 힘을 빌려 조직을 짠 자유당 내 족청파가 경찰조직을 당하기는 처음부터 역부족이었다.
이승만의 재당선
선거는 자유당의 대승으로 막을 내렸다. 투표결과는 총유권자 825만9428명 중 727만여명이 투표에 참가하여 자유당의 이승만이 예상한대로 유효투표의 72%인 523만8769표로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부통령에는 무소속의 함태영이 유효투표의 40%인 294만3813표로 당선되었다. 투표결과는 다음과 같다.
이어 이윤영, 전진한, 임영신, 백성욱, 정기원의 순서로 득표했다.
선거에서 패배한 이범석은 경찰의 선거간섭을 비난하면서 이승만에 대해서는 언급함이 없이 경찰의 책임자 격인 총리 장택상과 내무장관 김태선을 고발하고 나섰다. 그러나 결과는 무위(無爲)였다. 자유당 족청파는 선거 직후 몇몇 주요 장관직에도 발탁되고 장택상 총리, 김태선 내무장관을 사임시키는 등 한때 당세를 회복하는 듯이 보였지만 얼마 가지 못해 서서히 이기붕에게 주도권을 내어주고 만다.
패배한 민국당은 원내에서의 세력이 크게 위축되어 갔다. 야당세력은 민국당계와 조봉암 지지세력 간의 대립이 표면화되었으며 그때까지 야당 편향의 의원들 중 다수가 여당으로 이탈해 가는 통에 원내의 야당세력은 급속도로 약화되었다. 한 때 큰 세력으로 움직였던 원내 자유당 신라회, 무소속 구락부 등도 교섭단체를 해체하고 말았다. <다음호에 계속> ▌
이 형 / 평론가ㆍ전 한국일보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