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의안번호 1809709 하도급거래 공정화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 -
들어가는 말
지난 10월 29일 한나라당의 서민정책특별위원회(서민특위)가 「하도급거래 공정화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을 국회에 발의했다. 한나라당 김기현 의원 외 15인이 발의한 이 안의 핵심 내용은 대중소기업 거래관계에 있어서 ‘제3자 협의권’과 ‘징벌적 손해배상제도’를 도입하자는 것이다. 자금력, 정보력, 시장지배력 등에서 대기업에 비해 상대적으로 열악한 환경에 처해 있는 중소기업은 대기업과의 계약관계에서 불이익을 볼 수밖에 없으며, 이러한 관계는 일종의 시장실패로 볼 수 있으므로 정부의 규제를 통해 극복해나가야 한다는 것이 본 개정안의 기본취지라 할 수 있다.
‘제3자 협의권’이란 하도급 관계를 맺고 있는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하도급대금 조정신청을 계약 당사자가 아닌 제3자가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해당 중소기업이 아니라 그가 속한 협동조합이 대신 협상에 임하도록 함으로서 협상테이블의 균형을 맞추고, 익명성을 보장하여 추후에 불이익을 당하지 않도록 하자는 것이 그 목적이다. 또 ‘징벌적 손해배상제도’란 대기업이 하도급 중소기업이 보유한 기술을 부당하게 탈취할 경우 피해를 당한 기업이 이로 인해 발생한 손해액의 최대 3배까지를 손해배상 청구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중소기업이 안심하고 기술개발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그 기본적인 목적이다.
그 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이번 개정안은 그대로 통과될 경우 대중소기업 간의 거래관계에 심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으며, 우리 기업 구조와 나아가 국가 경제 전반에 미칠 파급효과가 클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이 두 사안에 대해 그 법적경제적 타당성을 검토해 보고 개선방안을 제시코자 한다.
제3자 협의권
두 경제주체가 자발적으로 맺은 계약관계의 존중은 시장자본주의의 근간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비록 경제력의 불균등으로 인해 불공정한 계약이 성립될 가능성이 있다 하더라도 규제를 통한 해결은 최후의 선택이 되어야 한다. 우선 공정성에 대한 객관적인 기준을 찾기 어렵고 그러한 기준이 있더라도 다양하고 복잡한 경제요인들이 반영된 기업 간의 자율적인 계약을 획일적인 규제로 다스린다면 부작용이 상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제3자 협의권’이 기업 간 계약의 규제를 통해 국가경제의 기반에 되는 기업활동에 미치는 영향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선 우선 이번 개정안의 대상인 하도급법의 성격부터 규명할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는 이미 계약을 통한 기업 간 거래에 대해 상당히 강한 규제를 가하고 있다. ‘사법(私法)’인 계약법을 통해 불공정한 계약으로 인해 입은 피해를 사후적으로 소송을 통해 구제받을 수 있도록 하고 있으며, 추가적으로 ‘공법(公法)’인 공정거래법 제23조에서 거래상 지위남용행위를 불공정거래행위의 한 유형으로 규정하여 대기업이 자신의 우월적인 지위를 이용하여 불공정거래를 할 수 없도록 하고 있다. 이러한 제도는 우리나라와 일본에서만 찾아볼 수 있을 뿐 다른 선진국에는 존재하지 않는 규제이다.
이렇듯 이미 기업 간 거래에 관련하여 강력한 규제가 존재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번 개정안의 대상인 하도급법이 추가로 제정되었는데, 그 이유는 다름 아니라 공정거래위원회가 불공정거래 입증책임을 제대로 소화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즉 하도급법은 구체적인 행위내용을 법위반행위로 선제적으로 간주해 버림으로써 공정거래위원회가 특정 거래행위의 불공정 여부를 법정에서 증거에 의해 입증할 책임을 해소해 주는 수단으로서 도입이 된 법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 법의 도입으로 계약의 공정성 판단의 근거원칙이 ‘합리의 원칙’에서 ‘당연위법의 원칙’으로 대체됨으로서 자발적 계약의 본질이 침해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경쟁력 있는 기업 간의 자발적 계약은 가깝게는 거래 당사자들의 후생을 증진하고 멀리는 소비자 후생의 증진을 통해 국가경제에 이바지한다. ‘제3자 협의권’은 계약의 기능을 회복시킨다는 명목 아래 이미 기형적인 하도급법을 한 단계 더 강화함으로써 오히려 이러한 계약의 본질적인 순기능을 위축시켜 경제 전반의 활력을 떨어뜨리는 결과를 초래할 가능성이 크다.
‘제3자 협의권’은 이러한 근본적인 문제 이외에 실천적 측면에서도 문제가 많다. 우선 중소기업 협동조합과 같은 조직이 협의권을 가질 경우 이것이 납품업체 간의 경쟁을 제한하는 일종의 카르텔로 작용할 수 있다. 그럴 경우 ‘제3자 협의권’은 조합이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 원사업자를 압박하는 수단으로 사용될 수 있으며 이로 인해 초래되는 제품가격의 인상부담은 소비자가 떠맡게 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또한 ‘제3자 협의권’이 해당 기업이 아닌 조합에 부여될 경우 협상의 성격이 기업 차원의 개인적인 것에서 조합차원의 집단적인 것으로 변질되게 된다. 조합이 협상을 통해 얻어낸 결과는 애초 협상을 제기했던 기업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조합이 대변하는 모든 중소기업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럴 경우 기술력과 같은 기업의 특성이 계약조건에 반영되지 못하게 되고, 기업은 경쟁력 제고를 위한 동기를 상실하게 될 것은 자명한 이치이다. 이는 본 개정안이 의도하는 중소기업의 경쟁력 향상과도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제3자 협의권’이 하도급 업체에만 적용되도록 되어 있어 대기업에 납품하지 않는 중소기업과 형평성 문제가 제기될 수 있으며 이들로 하여금 제품가격 인상을 위한 단체행동의 근거로 악용될 소지가 있다.
징벌적 손해배상제도
중소기업의 기술보호는 중소기업의 경쟁력 향상을 위해 매우 중요한 사안이다. 그래서 현재 우리나라는 하도급법, 대중소기업 상생법, 저작권법 등 다양한 제도를 통해 중소기업의 기술보호를 도모하고 있다. 그 중에서 최근 활발히 활용되고 있는 것으로 기술자료 임치제도를 들 수 있는데, 2008년 26건에 불과하던 대중소기업 협력재단 임치건수가 2010년 들어 205건으로 크게 늘어나는 추세이다. 아직 그 인지도가 높지 않은 편이긴 하지만 앞으로 이러한 제도를 이용한 기술보호 노력이 급속히 확대되리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징벌적 손해배상제도’의 도입은 기술보호라는 순기능보다는 부작용을 초래할 가능성이 크다. 우선 형사적인 성격이 강한 ‘징벌적 손해배상제도’가 민사법에 도입될 경우 법체계의 혼란이 발생하게 된다. 또한 개정안에서 명시된 손해배상액의 3배에 대한 근거가 뚜렷하지 않아 공정성의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더불어 기술탈취로 인해 발생한 손해액의 3배에 달하는 금액은 고소인에게 지대추구 동기를 부여하여 소송의 남발을 초래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중소기업은 대부분 그 규모가 영세하여 자체적인 기술개발을 수행할 여력이 그리 크지 않다. 대기업과의 공동기술개발이 강조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징벌적 손해배상제도’가 도입될 경우 대기업의 공동기술개발 노력은 위축될 수밖에 없으며 결과적으로 중소기업의 기술경쟁력이 오히려 낮아지는 결과가 나타날 가능성이 크다.
맺음말
지금까지의 논의로 볼 때 김기현 의원 등이 발의한 「하도급거래 공정화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은 장기적인 관점에서 중소기업의 경쟁력 강화보다는 대·중소기업 간의 협력관계를 훼손할 가능성이 높다. 대기업은 국내 중소기업과 계약을 하기 보다는 규제부담을 피하기 위해 경쟁력 있는 파트너를 찾아 해외로 눈길을 돌리게 될 것이며, 그것이 여의치 않을 경우 스스로 자체 생산을 시도하게 될 것이다. 그 결과 우리나라의 산업공동화가 더욱 가속화되고 대·중소기업 간의 격차가 더욱 벌어지게 되는 현상이 빚어질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러한 부작용을 피하고 개정안이 의도하던 본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노력이 필요하다. 우선 ‘제3자 협의권’과 관련하여 새로운 규제를 도입하여 기업의 부담을 가중시키기보다는 기존의 사법적 구제시스템의 절차를 개선하여 중소기업의 계약적 권리가 실질적으로 보장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한 정책방향이라 할 수 있다. ‘징벌적 손해배상제도’와 관련해서도 같은 논리가 적용될 수 있다. 손해액의 3배와 같은 애매모호한 기준을 정하여 비생산적인 혼란을 초래할 것이 아니라 기존의 기술임치제도와 병행하여 이미 민법에 존재하는 위자료 제도를 효과적으로 활용함으로써 부당한 기술탈취 행위를 방지하도록 하는 것이 더욱 바람직할 것으로 판단된다.
이번 개정안이 발의된 배경에는 기본적으로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수익률 격차가 심화되고 있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그러나 1997년 외환위기 이후 두 기업집단의 수익률의 장기추세를 비교해 보면 이러한 인식이 잘못된 것임을 알 수 있다. 한국은행의 통계에 따르면, 1998년 이후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수익률 격차는 2000년대 초반까지 확대되다가 2004년을 전후하여 점차로 줄어들고 있으며, 최근 들어 그 추세가 더욱 가속화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만약 수익률 격차가 역전된다면 지금과 같이 중소기업에게 대기업과 이익을 배분하라고 요구할 수 있을지 궁금해진다. 수익률은 단순한 증상에 불구하며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변화할 수 있는 가변적인 요소이다. 반면에 한번 도입된 제도는 다시 되돌리기 어려운 항구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이번 개정안은 근본적으로 그 초점이 잘못 맞추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림>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매출액 대비 영업이익률 추이 (단위: %) |
자료: 한국은행,「기업경영분석」 |
우리나라 규제제도의 특징은 어떤 사안이 발생했을 때 기존의 제도를 유연하고 효과적으로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안에만 적용되는 새로운 제도를 도입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그 결과 규제제도가 지나치게 복잡해지고 준수비용이 과도하게 높아져 결국 아무도 지키지 않는 무용한 법률조항으로 남게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하도급 관련 규제도 예외가 아니다. 정책당국은 새로운 규제를 덧붙여 기업의 활동을 어렵게 하고 규제제도 전반의 비효율성을 심화시키기 보다는 기존의 제도가 잘 활용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는 기본적인 사실을 새삼 인식할 필요가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