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췌안의 발상

- 대한민국 국회이야기 제14화 -

정치적 소용돌이가 계속되는 속에서 야당계 의원들은 국회출석을 거부하고 있었다. 등원을 하고 싶지 않아서 거부한 것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 구속이 될지 모르는 불안한 상태에서 피신을 하느라 사실상 국회출석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국회 밖에서 매일 같이 데모를 벌이고 있던 백골단 땃벌떼 등 어용단체는 원외에서 마주치는 국회의원들에게 폭언과 폭력을 서슴치 않아 국회 주변의 상황은 무질서라기보다 차라리 무법천지에 가까웠다.

그러는 사이에도 국회 야당 측이 제출한 내각책임제 개헌안과 정부가 제출한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이 모두 국회에 상정되어 있었으나 이 두 법안이 심의에 들어가기도 전에 다른 한편으로 신라회(新羅會)주도의 이른바 발췌개헌안이 준비되고 있었다. 발췌개헌안의 주역을 맡은 장택상은 이 개헌안이 정부의 대통령 직선제와 야당의 내각책임제를 절충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었으나 이승만이 의도하는 직선제가 개헌안의 핵심이 되어 있어 실질적으로는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이었고 국무위원에 대한 국회의 불신임권은 그저 모양세로 갖다 부친 것에 불과했다.

1952년 6월 20일에 국무총리 장택상은 자기가 주도하는 신라회와 원내의 이승만 지지 세력을 합쳐서 이른바 발췌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발췌안의 주요 골자는 1. 대통령 직선제 2. 상․하 양원제(단 정부안에 있는 '상원의원의 3분의 1은 국가유공자 및 학자, 명망가를 국무위원의 의결을 거쳐 대통령이 임명한다’는 항목은 삭제하였다.) 3. 국무총리 요청에 의한 국무위원의 임명과 면직 4. 국무위원에 대한 국회 불신임안은 총선 후 1년이 지난 후에 할 수 있다는 내용 등이었다. 대통령 직선제가 유일한 목적이었던 이승만에게 다른 지엽적인 조항은 아무런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었다.

국제적 조언

발췌 개헌안이라는 전무후무한 변칙적인 개헌안이 나오게 된 이면에는 국제적인 조언이 작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허정의 회고록이나 장택상의 회고록에 의하면 발췌개헌의 구상은 당시의 주한미국대사 무초와 유엔 한국위원회 사무총장 매듀가 한국의 정치적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제안한 것으로 되어 있다.

매듀는 “적군을 앞에 두고 정치 싸움만 할 것이 아니라 이 대통령의 뜻도 이루게 하고 국회의 체면도 세워주는 수습 방안을 찾아야 한다”고 허정에게 발췌안을 제시했는데, 허정은 그것이 변칙적인 헌법 개정이라고 해서 거간 역할을 거절했고 장택상은 그것을 받아드려 국회 간부들에게 정식으로 제의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얼마 후 국회의장단은 크라크 유엔군 사령관을 방문했다. 크라크는 '현재 전선에서는 전쟁이 계속되고 있는 어려운 상황인데 이 정세 속에서 정국의 혼란이 가중된다면 신탁통치를 하게 될지도 모른다’ 고 사태의 긴박성을 얘기했다고 한다. 이승만을 대체할 인물이 없다는 전제 아래 미국 측이 택한 일종의 최후통첩과도 같은 성격의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 말에 불안을 느낀 의장단이 원내 각 정파를 설득해서 정부와의 타협이 불가피하다는데 합의를 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승만은 이 같은 미국측의 속셈을 미리 읽고 자신 있게 직선제 개헌 강행을 추진하지 않았나 하고 추정하는 학자들이 적지 않다. 장택상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신라회에서 발췌개헌안을 제출하여 가까스로 난국을 수습하게 되었는데 그 이면에는 공개할 수 없는 국제적인 모종의 계책이 있었다. 이 내용은 당시 국회에서 의장단과 각 교섭단체 대표들에게 공개한바 있었는데 어쨌든 그와 같은 난국에 처해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서 발췌개헌안이 채택되었던 것이다”라고 저간의 경위를 말해주는 글을 적고 있다.

이승만의 뜻을 이루게 한다는 것은 결국 직선제 개헌을 받아들인다는 뜻인데 장택상은 이 내막에 대해 '공개할 수 없는 국제적인 모종의 계획이 있었다’고 밝히면서 발췌개헌안이 난국에 처해 있는 당시의 사정에서는 유일한 해결 방법이었음을 강조하고 자신의 발췌안 주도 역할을 합리화하고 있다.

의원 몰이: 강제연행과 연금

발췌개헌안이 제출된 지 닷새 만에 발생한 대통령 저격 미수사건으로 민국당을 비롯한 야당의원들의 사기는 어쩔 수 없이 저하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분위기를 이용해서 경찰은 출석을 거부하는 야당의원들을 일일이 찾아서 국회로 연행했다. 연행된 의원들은 계엄군에게 인계되고 무장군인들이 이들을 의사당에 수용했다. 말은 일시적인 연금이라고 했지만 실상은 자유행동이 제한된 완전한 감금이었다. 감금된 의원들은 이틀간이나 외출이 통제되고 급하게 외출이 불가피해진 의원들은 동료의원인 남송학의원(원외 자유당파)이 발행하는 허가증을 가져야만 외출이 가능했다. 국회의원이 같은 동료 국회의원을 감시하고 행동의 자유마저 속박하고 있었으니 이미 국회는 상식이 통하는 정상적인 국희가 아니었다. 국회의원의 체통도 체통이려니와 국회 자체가 한 나라의 입법을 담당하는 입법부로서의 권위를 완전히 상실한 꼴이 된 셈이다. 잡혀오는 국회의원들에 대한 계엄군의 대접도 거칠고 소홀했다.

야당 의원들을 연행하는 과정에서는 여러 가지 웃지 못 할 사건과 사연이 많았지만 그 중에서도 계엄사령관 원용덕과 최성웅 의원 간의 주먹다짐은 당시 뉴욕 타임즈나 워싱턴 포스트 등 미국의 유명 일간지에까지 보도된 정도로 특기할만한 사건이었다. 최성웅은 피신을 다니다가 경찰에 발각되어 7월 3일 국회로 연행되어 왔는데 최성웅을 본 원용덕이 “네가 최성웅이냐? 오라면 빨리 오지 어디서 꾸물대다가 이제사 오는거냐”고 호통을 쳤다. 이 말에 격분한 최성웅은 주먹으로 원용덕의 따귀를 갈기고는 멱살을 움켜잡았다. 급습을 당한 원용덕이 권총을 빼들자 보좌관이 그의 손을 붙잡아 총을 넘겨받았다. 둘은 서로 멱살을 잡은 채 실랑이를 벌렸는데 원용덕은 “이게 미쳤나”하고 소리를 지르고 최성웅은 “이 XX 어디다 대고 반말이야. 헌병이라는 작자가 국회의원 더러 어디서 꾸물대다 오느냐고? 이 XX의 발바닥이나 핥다가 죽을 XX야”하고 고함을 쳤다. 보좌관들이 둘을 겨우 떼어놓기는 했으나 최성웅은 저고리와 와이셔츠가 찢기고 원용덕은 전투복 계급장 중 별 2개가 떨어져 나갔다. 국회의원을 대하는 계엄군의 자세가 대저 이러했다.

국회는 7월 3일과 4일 이틀 동안 발췌개헌안을 중심으로 형식적인 토론을 벌렸으나 그 보다 먼저 개헌안 통과에 필요한 정족수를 채우는데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국제구락부 사건과 국제공산당 관련 사건으로 10여명의 의원이 구속되어 있은 데다가 신변에 위험을 느낀 상당수 야당의원들이 행방을 감추고 있었기 때문에 개헌 통과에 필요한 성원을 채울 수가 없는 형편이었다. 이렇게 되자 직선제 개헌 추진 의원들은 이범석 내무장관과 상의해서 구속된 의원을 석방조치하도록 하는 한편, 숨어 있는 의원들의 수색에 박차를 가하도록 독촉했다. 명색이 국제공산당사건이라는 중대 범죄에 계류되어 있는 의원들까지 국가의 기간이 되는 헌법개정안 투표에 동원을 했으니 희극인지 비극인지 국민들은 웃을 수도 없는 한심한 심경이었을 것으로 짐작이 간다.

발췌개헌안 통과

1952년 7월 4일 밤 9시 30분 무장경찰, 헌병, 테러단이 포위한 국회에서 발췌개헌안은 기립 표결로써 재석 166명 중 찬성 163표, 기권 3표 (양병일, 윤담, 김영선)로 통과되었다. 자유 분위기가 보장되지 않은 여건 아래 비밀 투표도 아닌 기립표결이라는 민주주의 방식과는 거리가 먼 방법에 의한 표결의 결과였다. 이로써 법과 질서가 무시되고 짓밟힌 가운데 우리나라 헌정 사상 첫 개헌이라는 것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 발췌개헌안에 의해 대통령 중심제이면서 총리제를 두는 기형적인 정부형태가 생겨났다. 개헌안이 통과 된지 한 달, 그 법이 공고된 지 17일 만인 8월 5일에 정․부통령 선거가 실시되었는데 정․부통령 선거 사상 전무후무한 최단기 선거 운동 기간이었다.

발췌 개헌안은 그 내용의 시(是)와 비(非)를 떠나서라도 어떤 경로를 겪어 어떠한 방법으로 국회에서 통과되었는지 그 경위를 우리의 헌정사에 분명히 기록해 두어야 할 중대사라는데 이론을 달 사람은 없을 줄로 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발췌개헌안의 통과는 군대와 경찰을 동원하여 의회의 기능을 파괴한 반(反)의회주의적 일종의 쿠데타 행위였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발췌안이 남긴 자국

발췌안 통과를 반의회주의적 쿠데타로 보는 이유는, 첫째, 발췌개헌안의 통과가 국회의 기능을 마비시킨 상태에서 강압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정상적인 의사 진행에 의한 통과라고 보기는 어렵다.

둘째는 출석을 거부하는 의원들을 경찰이 강제 연행을 해서 의사당에 연금을 시키고 투표를 강요한 일들이 정상적인 민주국가에서는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일들이었다. 이것은 민주국가의 기본인 의회정치를 송두리째 무너지게 만든 처사였다.

셋째는 권력으로써 군(軍)을 사용(私用)했다는 점이다. 국가 긴급권인 계엄령 선포권을 정권 유지용으로 이용했으며, 이와 같이 물리적 강권으로 정권을 유지하려 드는 것은 민주제도의 존립을 위협하는 짓이 아닐 수 없다. 이 같은 전례 때문에 일부 정치군인들에 의한 정치개입이 뒤를 이었고, 수 차래의 군사 쿠데타가 초래되는 토양이 배양되었다.

넷째는 관제 민의를 조작해서 민의에 의해 선출된 국회를 무용화시키려한 일이다. 관제 민의는 경찰에 의해 조작되었으며 그 후 계속 권력유지의 방편으로 경찰이 선거에 관여하는 등 경찰권을 남용하게 된다. 거의 모든 선거에서 경찰은 여당 후보자의 당선을 위해 개입하는 관례를 만들었고, 이 같은 관례는 발췌개헌안 때부터 생겨난 폐습이다. 자유당 정권과 그 후의 군사정권 하에서 경찰이 얼마나 많은 선거를 자신들의 뜻대로 요리했는지는 선거사의 기록에 생생히 남아 있다.

다섯째는 권력이 시중의 폭력배들과 결탁해서 이들을 권력 유지의 보조역으로 이용했다는 사실이다. 경찰이나 헌병대 같은 강권적 권력기관이 앞장서서 공개적으로 하기 힘든 일을 이들 폭력배들한테 맡겨서 처리하게 만들었다. 4.19 의거 때 데모를 하고 귀교하는 고려대 학생들을 습격해서 많은 부상자를 내게 만든 사건이 정치 깡패들의 마지막 소행이 되었으며 자유당 정권의 명맥을 끊는 계기를 만들었다.

여섯째는 정적을 제거하거나 견제할 목적으로 걸핏하면 용공사건을 꾸며 상대방을 공산당으로 몰아세운 일이다. 발췌 개헌안 통과 때만 하더라도 유명한 반공검사를 공산당과 접선해서 정치자금을 유입해 오고 그가 접선한 간첩이 몇몇 유명 정치인들의 암살을 계획했다는 죄목으로 구속했으며, 야당계 유력인사들을 세칭 국제공산당의 비밀 정치 공작에 관련시켜 구금했다. 국가보안법을 정적을 제거하거나 그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악용한 좋은 예라고 하겠는데 그 후의 정권에서도 용공 조작 수법은 기회 있을 때마다 선을 보였다.

부산 정치 파동과 발췌개헌안의 통과는 우리나라 의정사에 씻을 수 없는 오점을 남긴 불상사였다고 말해야 옳을 것이다. <다음호에 계속> ▌

이 형 (평론가ㆍ전 한국일보 논설위원)

Posted by 자유기업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