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당의 주도권 싸움
자유당은 족청계 거세의 마지막 마무리 작업으로 1954년 1월 이범석을 위시한 이재형ㆍ진헌식ㆍ신태악ㆍ권상남 등 족청계 거물급 인사들을 당에서 제명 처분했다. 그리고 3대 국회의원 선거 2달 전인 3월에는 자유당 혁신강화 전당대회를 서울 시공관에서 열고 선거체제를 완비했다. 그러는 중에도 자유당 안에서는 당의 주도권 장악을 위한 싸움이 계속되었다.
당초 이승만은 족청 축출을 결정한 후 그 작업을 이기붕ㆍ이갑성ㆍ배은희 세 사람에게 동일하게 지시했다. 영을 받은 세 사람은 막강했던 족청세력을 거세하기 위해서 함께 힘을 모았다. 그러나 일단 그 작업이 성공적으로 완수되자 세 사람 사이에 당 주도권 쟁탈을 위한 치열한 싸움이 전개되었다. 나중에는 이 세 사람 외에 국민회의 이활까지 가세했다. 네 사람 모두 특정한 조직체 출신이 아니었다는 점에서 모두 이승만의 선택을 받을 자격을 갖추고 있었다.
1953년 7월 27일에 휴전협정이 체결되자 정부는 그 해 8월 15일에 환도할 것을 선언했다. 국회도 9월 21일 서울로 올라와서 지금은 허물어진 구 중앙청 청사 내 의사당에 자리를 잡았다. 2대 국회는 그 임기가 끝나는 1954년 5월 30일까지 이곳에 있다가 3대국회가 개원되는 6월 9일 태평로에 있는 새 의사당(구 부민관, 현재의 서울시 의회 자리)로 옮겼다.
자유당의 주도권 싸움은 환도 후에 더 가열되었다. 경찰은 이들 사이의 경쟁 상황을 이승만에게 보고했는데 경찰 정보는 의도적으로 이기붕에게 유리하도록 꾸며졌다는 것이며 그러한 경찰 정보는 주도권 싸움에서 이기붕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이기붕은 자유당 중앙위원회 의장직과 서울 시당 위원장직을 맡고 있어 주도권 장악에 여러 가지로 유리한 고지를 점하고 있었다.
이기붕이 서울 시당 위원장직을 맡게 되는 데에는 정치 폭력배 이정재의 역할이 한 몫 단단히 했었다. 당시의 서울 시당의 세력 분포로 보아 이기붕의 위원장 당선은 어려운 상황이었는데 이정재가 부하 폭력배를 동원해서 반 강압적으로 이기붕을 그 자리에 올려놓았다고 알려져 있다. 이기붕의 기반을 결정적으로 공고히 만들어 놓은 것은 1954년에 있은 5.20 민의원 선거에서의 자유당의 압승이었다.
충성이 후보 공천의 잣대
자유당은 제3대 국회에 입후보할 후보 공천자 선정에서부터 이승만에 대한 충성심과 앞으로 3대 국회에서 있을 자유당의 개헌안에 대해 찬성하겠다는 서약을 조건으로 삼았다.
자유당이 성안해 두고 있던 개헌안은 이승만의 영구집권을 확고히 하고 야당이 제기할지도 모를 내각책임제 개헌을 봉쇄할 수 있는 조문을 헌법에 명문화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국가 안위에 관한 중대 사안의 국민투표제와 국회의원 소환권 조항을 신설하고 국무총리제의 폐지와 초대 대통령에 한해 3선 금지 조항을 철폐한다는 것이 개헌안의 주요 골자였다.
이 중에서도 가장 중요하고 시급한 당면 과제가 이승만에게 무제한 재선의 길을 열어 주는 3선 금지 조항의 삭제였다. 자유당이 이승만에 대한 충성 맹서를 3대 민의원 후보 공천의 기준으로 삼은 것은 "개헌 찬성을 조건부로 입후보하라"는 이승만의 지시에 근거한 것이었다. 부산에서의 재선 과정에서 애를 먹은 이승만은 일찌감치 3선 이상의 길을 확보하기 위해 급하게 개헌을 서둘 필요를 느꼈으며, 또 만약의 경우에 대비, 개헌의 당위성을 찾는 방법으로 나라의 중대사는 국민이 직접 투표로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이른바 국민 투표제를 개정 헌법에 명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개헌안에 대한 찬성 서명을 받고서야 공천을 해 주는 `조건부 공천’이 반드시 개헌안의 통과를 1백 퍼센트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니었지만 공천제의 채택으로 과거와 같은 무소속의 난립을 막는 데에는 효과가 있을 것이 분명했고 무소속이 줄어들면 그만큼 자유당 공천자의 당선 확률이 높아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자유당은 공천의 공정성과 민주성을 높인다는 명목으로 점수제라는 방식을 고안해 냈다. 지역구의 신망과 지지도를 반영하기 위해 지역구 대의원들의 비밀투표로 뽑은 후보자에게 40점, 지역구 후보에 대한 도 당부의 의견에 20점, 이를 다시 중앙당 심의에서 주는 40점을 가산해 총 1백점 만점 중 가장 높은 점수를 받은 후보를 공천자로 선정키로 했던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지역구에서 높은 점수를 받은 당선 가능성 높은 후보도 이승만의 종신집권에 찬성하지 않으면 공천을 받을 가능성이 전혀 없었다. 또 실제로 점수 상으로는 충분히 공천을 받을 수 있는 경우에도 이승만이 재가를 하지 않으면 공천에서 제외되고 말았다. 그러니까 자유당 후보의 공천은 거의가 이승만의 절대적인 재량 하에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민주당의 마지노선
선거일 공고 전까지 자유당은 전국 203개 시ㆍ군 당부의 개편을 완료했지만 민주당은 40여 시ㆍ군 지구당만을 겨우 재정비 하는데 그쳤다. 결국 전국 203개 선거구 중 민국당은 77개 지역구에서 공천자를 내게 되었고 나머지 구에서는 야당 성향의 무소속 후보를 지원함으로써 여당 세력의 확대를 막기로 전략을 세웠다. 이러한 민국당의 전략은 원내 야당 의석의 수를 개헌안 반대에 필요한 재적 3분의 1석 이상을 확보하자는데 목적이 있었다. 말하자면 민주당 선거 전략의 마지노선은 헌법 개정 저지에 필요한 67석 이상의 야당 세력 확보였다. 역으로 얘기하자면 여당 의석수를 재적 3분의 2인 136석 이하로 억제하자는 것이었다.
공천제의 채택으로 인한 무소속 후보들의 출마가 줄어들기는 했지만 3대 국회 입후보 자는 총 1207명에 이르렀다. 개헌에 필요한 재적 3분의 2이상의 의석 확보를 위해 자유당은 181명의 공천 입후보자와 61명의 무공인 입후보자를 내세웠으며 민국당은 77명, 국민회 48명, 대한국민당 15명, 조선 민주당 6명, 대한노총 5명, 기타 17명, 그리고 무소속 797명 등 총 1207명이었다.
판을 친 관권, 금권
5ㆍ20 민의원 선거는 민국당 등 야당의 주장처럼 관권과 금권이 판을 친 부정ㆍ타락 선거였다. 유권자들 눈에도 어김없이 그렇게 비쳤다. 자유당은 선거운동의 일환으로 전국적인 `개헌 촉진 국민대회’라는 것을 개최하여 이승만의 재집권만이 국가를 재건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역설했는데 말이 개헌 촉진 국민대회였지 사실상은 야당의 선거운동을 봉쇄하기 위한 일종의 협박성 국민대회였으며, 그 기세에 눌린 유권자들에게는 신상에 위협을 느낄 만큼 공포 분위기의 조성으로 비쳤다. 이러한 자유당의 공포분위기 조성에 민국당은 "선거의 자유 분위기가 보장 되지 않는 경우 입후보를 전적으로 취소할 수도 있다"면서 선거 거부 가능성을 강하게 시사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야당의 항의를 우습게 보았다. "자기들이 국회에 들어와서 요동시킬 희망이 없는 것을 완전히 각오한 모양이다. 이와 같이 공포하고도 또 선거에 들어간다면 이것은 정당한 대한민국의 한 정당으로서 있을 수 없는 일이며 또 이런 몰상식한 일을 해서는 민중의 신망을 얻을 수 없을 것"이라는 반박 담화를 발표했다. 야당이 어떤 태도로 나오든 하고 싶은 대로 해보라는 배짱이었다. 이 같은 당 총재의 뜻을 받들 듯이 전국 각지에서는 자유당의 횡포가 심했고 경찰뿐만 아니라 지방 행정관청까지 선거에 개입하는 사태가 만연했다.
이기붕이 출마한 서울 서대문 을구에서는 출마 예정자 조봉암이 등록 방해를 받아 입후보조차 하지 못했으며 민국당의 거물급 신익희ㆍ조병옥을 포함한 야당 거물 선거구에서는 야당 선거 운동원이 집단 구타를 당하거나 구속되는 등 심한 탄압을 받았다. 경남 사천에서는 집단 폭행으로 야당 선거 운동원이 사망하는 사고도 있었다. 야당 후보자들은 정도의 차는 있었으나 탄압을 받지 않은 곳이 없었다. 많은 지역에서 야당후보자의 선거용 차량은 교통 위반 딱지를 받고 경찰서 뒷마당에 견인되어 움직이지 못했으며 야당 후보의 운동원들이 갖가지 이유로 구금당하거나 여당 운동원들에게 폭행을 당하기 일쑤였다.
야당 입후보자들뿐만 아니라 자유당의 공천후보자 중에도 노골적인 경찰 간섭과 선거운동 방해를 받은 사례가 있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경북 대구 병구의 이갑성, 경북 달성구의 배은희 등 당권 경쟁에서 이기붕과 맞서고 있던 입후보자의 선거구였다. 두 사람은 말할 것도 없이 낙선되었고 그를 따르던 당내 인사들도 혹은 낙선되거나 당선이 되고서도 세리(勢利)를 쫓아 뿔뿔이 해어지고 말았다. 5ㆍ20 선거를 계기로 이기붕 파는 당권 경쟁자를 큰 힘 들이지 않고 몰아낼 수 있었다.
상처로 얼룩진 대승
총 유권자의 91.9%가 참가한 5ㆍ20 총선은 자유당의 대승으로 끝을 맺었다. 민주당의 참패였다. 선거 결과는 자유당 114명(공천자 99명, 비공인 입후보자 15명), 민국당 15명, 대한국민당 3명, 국민회 3명, 제헌동지회 1명, 무소속 67명의 당선이었다.
개헌 정족수를 채우지 못한 자유당은 부족한 의석을 무소속의 포섭으로 채웠다. 제3대 국회 개원일인 6월 9일에 13명의 포섭에 성공했으며 4일 후에는 다시 8명을 추가 포섭, 개헌 정족수에 한 석 부족인 135석을 확보했다. 그리고 개헌안 표결 직전에는 다시 나머지 1명을 포섭해서 개헌에 필요한 소기의 목적 수인 136명을 채우는 데 성공했다.
선거에서 당선자 15명을 얻은 민국당은 원내 교섭단체 구성도 할 수 없는 처지로 떨어졌다. 교섭단체 구성을 위해서는 무소속과 합류할 수밖에 없었다. 곽상훈을 중심으로 한 야당 성향 무소속 의원들과 민국당이 함쳐서 총 31명이 무소속 동지회라는 교섭단체를 만들게 된다.
자유당이 그렇게 단시일 내에 무소속 의원들을 흡수할 수 있었던 이면에는 그해 8월 20일까지로 된 선거사범 시효(時效)의 작용이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당시의 자유당의 힘으로써 선거법에 대한 처리를 좌지우지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당선된 무소속 의원 중 윤재욱(서울 영등포 갑구)ㆍ김두한(서울 종로 을구)ㆍ정성태(전남 관주구)ㆍ김우동(경북 선산구) 등에게는 이미 구속영장이 발부된 상태여서 기타의 마음 약한 무소속 의원들에게 커다란 불안 요소로 작용했다. 경찰이 한번 칼을 뽑으면 선거사범으로 옭아매어 당선 무효로 만드는 것 쯤 어려운 일이 아니었던 시절이었다. 관과 자유당한테 선거법은 사람에 따라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기 되는 편리한 마술의 작대기였다.
윤재욱과 김정호를 제외한 나머지 세명의 의원에 대한 경찰의 수사는 자유당이 필요한 개헌 정족수를 채운 후 무협의, 무죄로 처리되었다. 결국 이들의 입건은 무소속 의원들의 자유당 입당을 촉진시키기 위한 일종의 위협용이었음이 밝혀진 셈이다.
2대 국회는 1954년 5월 1일 제18회 정기회 폐회식을 마지막으로 막을 내렸다. 6ㆍ25라는 예기치 못한 변을 당해 3년여에 걸친 피난생활을 강요당하고 모진 정치파동 등 수없는 험난한 사건을 겪었던 2대 국회가 역사의 장 속으로 사라진 것이다. <다음호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