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25일 토요일 오전 9시 30분부터 송파문화원에서 [한국의 길:네 가지 기본 모델]를 주제로 한 전문가 토론이 열렸다. 원탁토론아카데미(원장, 강치원 강원대 교수)가 주최하는 이 토론회는 김정호 (자유기업원 원장), 양동안 교수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오세철 교수 (전 연세대학교 교수), 주대환 (사회민주주의 연구소) 등이 토론자로 참여했으며, 아래와 같은 주제들을 중심으로 한국경제의 앞날에 대해 토론하였다.

 

1) 자본주의의 총체적 위기에 맞서는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와 공산주의자의 과제 오세철 (전 연세대학교 교수)

2) 한국사회에 사회민주주의는 왜 필요한가? 주대환 (사회민주주의연대 공동대표)

3) 한국의 방어적 자유민주주의 양동안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4) 왜 자유주의인가 김정호 (자유기업원 원장)


토론자들은 우리사회 진보와 보수의 대표적인 논객들이어서 열띤 토론이 벌어졌다.


[보수vs진보 맞짱토론] No.3 한국의 길:네 가지 기본 모델 1부 

[보수vs진보 맞짱토론] No.3 한국의 길:네 가지 기본 모델 2부 

 

 

 

진행자 : 강치원 (강원대학교 교수)

               토론자 : 오세철 (전 연세대학교 교수) 주대환 (사회민주주의연대 공동대표)
양동안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김정호 (자유기업원 원장) 

주최 : 원탁토론 아카데미

 제작 : 자유기업원 프리넷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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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정신의 비전과 목표>



1. 시대정신은 이사장님의 과거 사상에 대한 치열한 반성으로부터 출발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시대정신이 만들어진 배경과 그 동안의 활동을 소개해 주십시오.

시대정신이라는 잡지는 2004년에 뉴라이트 운동을 하며 그 기관지로써 발간이 되었습니다. 저는 시대정신 측에서 2006년에 북한인권운동을 하는데 도와달라고 부탁해서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우리시대에 필요한 운동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당시 노무현 정권이 진보정권이었잖습니까. 제가 보기에는 대북정책이 굉장히 위험하다고 봤습니다. 상당히 한국의 안보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이 돼서 반드시 정권이 교체되야겠다고 생각되어 뉴라이트 운동에 함께하게 되었습니다.

단순한 자유주의가 아닌 한국이 자유주의의 원칙 하에서 발전하자는 운동, 한국의 건국과정과 산업화 과정과 민주화 과정이 올바른 역사발전 과정이라고 여기는 것이 뉴라이트 운동입니다. 그것을 이론적으로 뒷받침 하는 잡지가 바로 '시대정신’이었습니다.

2. 살림살이는 어떠신지요? 인원과 예산 규모, 자금 조달 방법 등...

기금을 내주신 분들에 의해서, 그리고 프로젝트를 통해서 예산을 확보합니다. 일 년에 2-3억 정도 측정됩니다. 정부의 지원을 받는 것은 순수한 의미로 운동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참여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3. 한국의 발전을 위해 꼭 필요한 일인데 예산의 제약 때문에 못하시는 일이 있다면 어떤 것일까요?

나에게 돈이 굉장히 많다면, 아주 좋은 기업을 하나 만들고 싶습니다. 아니면 그 돈을 미국에 사람들처럼 사회에 환원하고 싶습니다. 기업을 기업답게 한다는 것도 사회에 공헌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식에게 재산을 물려주는 것은 자식을 버리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사회 운동 차원에서 하시고 싶은 프로젝트 같은 것은 없습니까?

독일은 좌파, 우파 활동을 뒤에서 밀어주고 방향을 제시해 주는 재단이 있습니다. 역시 한국에도 그런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익집단을 대변하는 연구소 등은 한계가 있습니다.

4. 우리 사회에 꼭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으면 해주십시오.

순수하게 시민운동차원에서 정말로 보수와 진보를 대표한다고 할 만 한 사람들이 수백명 정도 모여서 우리가 어떻게 대한민국을 중심으로 공생할 것인지를 연구하는 것이 지금부터 꼭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일제강점기를 바라보는 올바른 시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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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이사장님께서는 뉴라이트에도 뿌리를 두고 있고, 낙성대 연구소에도 사상적 배경이 있으시죠? 낙성대 연구소는 주로 역사를 연구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것을 소개해 주십시오.

제가 1987년에 동경대학에서 2년간 근무하면서 한국 대표사에 대한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일본에 가기 전까지는 한국근현대는 자주적으로 발전을 해야지, 국제협력을 통한 발전을 하게 되면 제국주의에 포섭이 되어서 끝까지 자주 독립을 획득하기가 힘들 거라고 생각되었습니다. 그것이 마르크스주의자들이나 종속 이라고 부른 그런 이론으로 사회 운동을 해 왔습니다. 동경대학에 가보니까 역시 사회주의가 미래에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그 당시 우리나라 학자들이 경제사를 접근하는 시각과 일본의 시각이 완전히 달랐던 건가요?


그런 것은 아니고, 일본에서도 자주적 발전의 길을 걸어야 종속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이론이었습니다. 그런 이론이 틀렸다는 생각을 1984년부터 일본 일부 지식인들이 하기 시작했습니다.

일본 학자들 사이에 그런 예측을 하는 사람이 나오기 시작하는 거군요?

일본 학자들 중에서도 한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제가 그들로부터 영향을 받아서, 그 이후에 7,8년 동안 쭉 공동연구를 했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한국도 자본주의의 길을 가야한다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서울대로 복귀 한 후 그 생각을 구체화하기 위해서, 또한 제자들에게 연구할 기회를 주기 위해 개인 사비를 투자해서 학교 후문 쪽에 30평에 달하는 연구소를 만들었습니다.

당시에 우리나라 사회과학이라는 게 이데올로기와 이론이 구분이 되지 않고 있었습니다. 이론이 이데올로기에 의해서 우왕좌왕 하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이를 분리해 진리 탐구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시작한 게 근, 현대의 100년간 통계의 흐름과 기술 자료 등의 객관적 사실을 토대로 이론을 정립하고자 했습니다.

사실로부터 이론을 뽑아내시면 그때까지 갖고 있던 기존의 역사에 대한 인식과는 다른 것이 꽤 많을 것 같은데요.


그 점이 대단히 중요한 점인데, 일제 강점기가 정체적인 사회인지, 동태적으로 변하는 사회인지. 그것을 알기 위해서 국민소득 추이 연구를 해 보았습니다. 일제시대의 연 평균 경제 성장률이 3.7%였습니다. 그 당시로 보았을 때 세계에서 가장 높은 성장 중 하나였습니다. 인구 통계 또한 45년동안 인구가 천만이 늘었는데, 이는 이 시기가 굉장히 동태적인 사회였다는 것을 뜻합니다.

조선인 사회도 그 과정에서 많이 변했습니다. 조선인 사회의 변화를 확인하기 위해서 근대 학교의 조선인 취학률을 조사했습니다. 통계를 내어 보니 조선인들이 매우 활발하게 근대 학교에 취학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착취와 억압을 하면 끝난다라고 하기에는 설명이 되지 않았습니다. 착취와 억압이 존재하면서도 다른 한편에서는 근대적인 시장 키우기라던지 자유경제 원리라던지 사회권리, 인권의 개념이 들어오니까 인간이 자유롭게 경쟁하고 활발하게 활동할 수 있는 자유가 보장됩니다. 근대법이 성립하는 것입니다. 조선 후기와는 전혀 다른 사회적인 동태를 띄는 사회가 됩니다.

일본의 법체계를 우리나라에 이식한 거죠? 그런 것들이 조선 사람들에게도 활동의 공간을 넓혀 준 것 같습니다. 참 불편한 진실이었겠어요.

예를 들어 형법이나 공법은 완전히 일본법과 같지만, 민법체계나 상법체계는 조금씩 다릅니다. 그것은 그 지역의 특수성을 반영한 결과입니다. 그런 부분만 조금 수정을 한 것이지, 기본적으로 일본 법 체계와 같습니다. 그런 법이 조선에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평등하게 적용이 됩니다.

왜 그런 사회가 동태적으로 되었느냐 하면 종래에 우리가 가지고 있던 전제국가의 문명을 버리면서 근대 시민사회의 문명을 받아들이는 문명 교체 과정이었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문명이나 의식, 가치를 흡수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문명에 심취해야 합니다. 새로운 문명은 일본이나 미국에서 오니까, 그런 사람들은 정신적인 상태가 친일파나 친미파가 되는 것입니다.

한국 사회에서는 친일파나 친미파가 민족 반역자라고 생각하지만, 민족 반역자는 따로 있습니다. 그것은 예를 들면 한국 권력이 있는 사람들이 권력을 외국에 팔아넘기는 이것은 민족 반역자입니다. 그러나 일반 시민이 새로운 문화를 흡수하기 위해 친일을 하고 친미를 하는 것은 죄를 짓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제가 한국에 와서 일간지에 친일파와 친미파에 대한 논문을 써서 주니까 겁이 나서 게재를 못 하더라고요. 지금도 저는 친일과 친미가 나쁜 게 아니라, 민족의 이익을 팔아 넘기는 민족 반역자가 문제지 한국 사회에서 친일, 친미를 문제 삼으면 한국 사회 자체가 성립이 안 된다고 봅니다. 그것은 민족 반역자와는 완전히 다른 차원이며, 오히려 그런 친일, 친미야말로 진정한 애국의 영역입니다.

좋은 것을 받아들여 우리 것으로 만드는 과정이 있겠네요.

외국에서 높은 문화를 흡수하려면 친일, 친미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울대학은 교수 구성원의 70%정도가 외국에서 박사를 한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회에서 친일, 친미가 없어야 한다고 운동을 하는 것은 상호 모순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사단법인 시대정신은 안병직 이사장님께서 시작하신 낙성대 연구소와 과거 역사 인식에 대한 치열한 반성, 거기에 한 뿌리를 두고 있고 또 젊은 뉴라이트 운동 하시는 분들 그 두 뿌리가 합쳐졌다라고 보면 될까요?

그렇죠. 안 그래도 양쪽에서 다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뉴라이트는 왜 앞에 뉴자를 붙이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학문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이데올로기여서, 종래의 진보 세력에 의해서 구 자유주의, 국제 협력 노선이라는 것이 한국의 발전을 촉진시킬 정당한 발전 요건이 되었다는걸 증명하면서 동시에 옛날 보수 진영이 갖고 있던 나쁜 이미지를 청산해야 한다는 생각에 그렇게 하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권위주의가 필요 없는 시대입니다. 지금부터는 그것을 청산하고 본래의 자유주의로 돌아가서 자유와 민주에 입각한 보수노선이라는 의미입니다.

그것을 주도했던 젊은 분들은 그 당시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진보 운동을 하셨던 분들이 많았다고 하던데요?

그것이 또 재미있는게 지금 보수층들 중에서 뉴라이트 이념에 앞장섰던 사람들은 모두 예전에 진보 활동하시던 분들이 전향한 것입니다. 89~90%는 그렇습니다. 옛날의 보수 운동가들은 옛날의 보수적 사상에서 거의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 당시에 민주주의가 할 수 있는 사회, 경제적 기반이 없었으니까 권위주의를 할 수밖에 없었다, 남북이 치열하게 체제 경제를 하는 상황이니까 체제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반공주의를 할 수밖에 없었다 라고 하지만 오늘날에는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충분히 민주주의를 할 수 있는 토양이 되어 있습니다. 구태여 반공주의라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현실적으로 이제는 공산주의 뿐 아니라 공산주의 체제 또한 완전히 없어져 이제는 체제 경쟁의 시대가 아닙니다. 현재 남아있는 공산주의는 옛날의 찌꺼기에 불과하지, 우리가 적대해서 대립해야 할 것은 아닙니다.











<시대정신과 사회통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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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한국이 선진국이 되려면 무엇이 필요한지요? 지금 이명박 정권은 제대로 가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북쪽에 포용정책을 쓰지 않으면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도 비핵·개방·3000구상 이지 않습니까. 이렇게 시대가 변했는데 아직도 김정일과 1:1로 싸우고 있는 듯이 하면 안 되지 않습니까. 차라리 반공주의를 포기하고 본래의 의미에서 자유민주주의를 회복하면서 도덕적으로 보수가 진보하는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보수가 도덕적 정당성을 이미 확보하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말씀이시네요?

민주주의를 실현한 것도, 경제발전을 실현한 것도 보수입니다. 자기 정당성뿐만 아니라 앞으로는 그것을 기반으로 진보, 북쪽을 끌어안아야 합니다. 아직도 옛날 시대의 보수를 생각하면 안됩니다. 지금 오히려 기업들이 자유롭고, 정부의 간섭에 제제를 가하고 있지 않습니까.

7. 다른 시민단체들과도 긴밀한 협조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떤 기관과 어떤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지요? 북한민주화네트워크, 의료와 사회 포럼 등.

우리의 역량이 부족하기 때문에 그렇지는 못합니다. 물론 몇 개 단체가 사이좋게 협력을 하고 있긴 하지만 의무적으로 연대를 맺고 있지는 않습니다.

8. 현재의 야당과 진보적 시민단체가 민주주의의 가장 큰 걸림돌이라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 당사자들에게는 치명적인 말일텐데, 어떤 뜻에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요?

한국의 진보진영이 민주주의의 걸림돌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 사람들이 실현하려는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구체적인 내용을 내놓은 적이 없습니다. 말뿐인 민주주의입니다. 민주주의의 기본은 법치인데, 그들은 그것을 존중하지 않습니다. 보수와 진보정당은 건전하게 양립해야 하는데, 지금은 그렇지 못합니다. 이것은 진보진영이 이념적 통일이 안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을 자꾸 지적을 해줘야 합니다. 형식적으로는 진보라고 하지만 사실은 진보가 아니라고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한 말입니다.

9. 이사장님께서는 보수와 진보의 통합에 적극적으로 나서셨는데요. 어떤 내용인지요? 통합을 하려면 이사장님의 노선이나 철학 자체를 타협해야 할 수도 있는데, 그것 까지 용인하시는 건지요?

사상이라는 것은 통합이 안됩니다. 붉은색은 더 붉고 푸른색은 더 푸르러야 세상이 다양해 집니다. 두 개를 합쳐 보라색을 만들자는 얘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자기의 칼라를 더 선명하게 해야합니다. 단, 이것이 다르다는 것이 확산되는 게 아니라 어느 지점에 가서 수렴을 해야 됩니다. 그래야 협력할 수 있는 공간이 생깁니다. 그게 보수와 진보가 하나의 공동체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을 자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이 잘 되기 위해서 경쟁하고 협력을 해야 한다는 겁니다. 우리 일류사회 발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원리는 경쟁입니다.

진보 쪽에서는 대한민국 정당성을 인정하면 보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닌가요?


그런 것이 아니지요. 일본, 미국, 서유럽 모두 그 사회에는 보수와 진보가 다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자기가 소속된 그 사회의 발전을 위해 자유주의는 자유주의 나름대로, 사회주의는 사회주의 나름대로 발전 플랜을 냅니다. 국민에게 지지를 받는 사람이 사회를 이끌게 됩니다. 이것이 건전한 사회입니다. 보수와 진보 한 쪽만 있거나 한 당이 영구 집권하는 것이 독재입니다. 정치 이념이 컬러풀한 집단들이 서로 경쟁하면서 협력하는 사회가 앞으로 한국이 나아가야 할 사회입니다.

이사장님께서 지향하시는 사회 통합이라고 하는 게 자유 민주주의의 기본 가치들을 받아들이자는 말씀이십니까?

제일 중요한 게 자유주의와 대한민국의 가치를 공유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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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합법적인 권한을 갖고 있는 헌법기관의 활동을 통한 정치보다 대중의 직접적인 정치참여가 헌법적인 절차가 무시되더라도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 더 중요하다는 주장을 종종 접하게 된다.

이러한 입장에 부합하는 사상가 중에 루소가 있다. 그는 민주주의를 일반의지(General Will)에 의한 정치로 규정한다. 일반의지란 일반 대중들의 일치하는 의견을 말한다. 그런데 이 일반의지가 형성되는 것은 자유로운 토론을 통해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일반 대중의 '상식’에 입각한 판단을 의미하였다. 만약 이에 수긍하지 않는 개인이나 적합하지 않은 법이 있다고 한다면 일반의지가 우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루소는 공동체가 있기에 개인의 권리와 법이 발생하는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입장과 부합하는 면은 성리학자 이이(李珥)의 사상에서도 볼 수 있다. 그는 기일원론(氣一原論)을 주장하였는데 이는 민중(氣)만이 정치적 행위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의미를 갖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신념에 따라 왕에게 언로를 열어줄 것을 건의하기도 하였고, 특히 사간원, 사헌부 등의 활동을 강화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이는 민중의 일치된 여론을 공론(公論)이라는 개념을 통해서 표현하였고, 바로 이 공론이 정치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황은 서인들의 이러한 주장에 대해 '세勢에 의한 정치’로 합법적인 권한을 무시하는 정치라고 비판한다.

이처럼 민주주의를 대중의 일치된 의견에 따라 이루어지는 정치라고 규정하는 것이 과연 합당할까? 얼핏 보기에 루소와 이이의 주장은 민주주의를 신장시키고 발전시킬 수 있는 바람직한 사상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역사적 결과를 살펴보면 그들의 주장에 대해서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기 어려워진다.

먼저 프랑스를 살펴보자. 루소의 사상을 정치 이념으로 채택하였던 자코뱅당은 프랑스대혁명의 기간에 사상 유래가 없는 폭압정치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부르주아와 농민의 연합에 의해서 시작된 프랑스 대혁명의 초기의 자유주의적인 개혁 방향이, 후반에 자코뱅당에 의해서 공포정치로 전환되고 말았다.

또한 이이의 사상을 계승한 서인들은 인조반정을 통해서 정권을 획득하게 되는데, 그들은 민중의 다양한 의견을 허용하기 보다는 자신들의 의견이 곧 민중의 의견이라는 독선으로 조선의 모든 권력을 장악하는데 온 힘을 기울인다.

이러한 의외의 결과에 대한 분석으로 토크빌의 견해를 적용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는 루소나 이이와 반대로 다수의 일치된 의견 혹은 '다수의 횡포’가 민주주의의 가장 큰 위협이라고 말한다. 프랑스는 '자유의 쟁취’라는 목적으로 대혁명을 일으키지만, 민주주의가 갖는 '나보다 뛰어난 사람들을 제제하려는’ 평등주의적 속성으로 인하여 자유를 포기하게 되었다고 그는 말한다. 그리고 결국 프랑스는 독제정치의 길로 가게 되었다고 말한다.

즉 다수의 일치된 의견인 공론(公論)이나 일반의지(General Will)에 의한 정치가 대중의 평등주의적 속성으로 인하여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독재정치의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민주주의 발전을 위한 방법은 무엇일까? 토크빌의 이야기를 더 들어 보자.

그는 영국이 평민과의 소통 의지와 책임의식을 갖고 있는 귀족의 역할로 인해서 민주주의가 평등주의에 빠지지 않고 유지될 수 있었다고 말한다. 또한 미국은 민주주의를 유지하는데 있어서 귀족은 없었지만, 상대적으로 발달되지 않은 중앙집권제도와 끊임없이 서부로 확장하는 풍부한 영토(새로운 이주민들에게 끊임없는 부의 원천이 되었다), 그리고 사법관의 역할, 정치와 분리된 종교의 헌신적인 노력 등으로 인하여 다수의 폭정이 완화되었다고 말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1980년대 후반 여러 사람들의 정치적 참여로 법과 제도적인 측면에서 민주주의를 정착시키는데 성공하였다. 이제 우리는 법과 제도를 존중하는 가운데, 개선해야 할 부분이 있다면 합법적으로 개선하고, 민주주의를 좀 더 발전시키기 위한 각 개인들의 다른 관점에서의 많은 참여와 헌신, 노력이 필요한 시점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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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前 대통령의 죽음과 과거사 청산 결부시켜
촛불집회 언급하며 현 정권을 친일파 정권으로 몰아붙여
과거사 청산이 민주주의 회복의 필수 전제라고 주장


노무현 전 대통령이 생을 마감한 지 약 2달여가 지난 22일 저녁 7시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포럼 “진실과 정의” 주최 '노무현과 과거청산’ 토론회가 열렸다. 이날 토론회에서는 인하대학교 법학과 이유정 교수가 사회를 맡고, 성공회대 한홍구 교수가 발제자로 나왔다. 그리고 前 청와대 민정수석을 지냈던 전해철 변호사와 공연기획자 탁현민씨가 토론자로 참여했다.

과거 청산이 민주주의 회복을 위한 필수 전제라고 주장

토론에 앞서 이유정 교수는 “한국사회는 1987년 이후 민주화 과정을 걸어오며 괄목할만한 업적을 남겼지만 한편으론 대단히 제한적이었다. 이는 과거청산이 이루어지지 못했기 때문”이라며 “과거청산은 민주주의 회복과 공고화를 위한 필수적인 전제”라고 주장했다.

토론회 발제자로 나선 한홍구 교수는 “노무현 대통령이 재임했던 기간은 우리 현대사에서 처음으로 과거청산작업이 본격화된 시기였다”며 “노무현 대통령이 돌아가신 시점에 과거사 청산 운동을 했던 사람들은 참으로 찹찹한 심정이었다”라고 말해 과거사 청산은 노무현 前 대통령의 전유물인 것처럼 취급했다.

그는 “촛불집회 과정에서 많은 대중들은 시민들의 엄청난 요구에도 불구하고 꿈쩍도 하지 않는 이명박 정권이 도대체 왜 저러나 고민하다가, 저들이 바로 친일파 족속들이라서 그렇다는 결론을 내렸다”며 촛불 집회 과정에서 조차도 한 번도 제기되지 않았던 내용들을 마치 실제로 있었던 것처럼 호도하면서 이명박 정권이 곧 친일파라는 매우 편향된 시각을 고스란히 내비쳤다.

노 前 대통령 죽음을 과거사 청산과 결부시켜

무엇보다 한 교수의 정치적 편향성은 국정원, 국방부, 경찰을 '권력기관’이라 규정하는 발제 내용에서 확연히 드러났다. 노무현 前 대통령이 “권력기관의 내부에서 민간의 참여 하에 자체적인 조사를 실시하여 스스로 과거의 국가폭력과 권력남용, 인권침해에 대한 반성문을 쓰게 한다는 것은 현명하고 현실적인 판단이었다고 할 수 있다”고 자평했다.

그러면서 “노무현 대통령 재임 시절 기간, 과거사 청산 작업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었다고 생각한다”며 “과거사 청산이 제대로 되지 않아 결국 죽음에까지 이르게 되었다고 생각 한다”고 했다. 그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정치자금법 위반으로 도덕성의 치명적인 타격을 입어 자살에 이르게 되었다는’ 일반적인 견해와는 확연히 다른 자신만의 입장을 밝혔다.

첫 번째 토론자로 나섰던 前 청와대 민정수석을 지냈던 전해철 변호사는 “경찰, 국방부, 법원의 과거 진상 규명 작업에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며 “청산해야 할 과거 사실이 나오지 않은 점이 아쉬웠다”고 전했다.

두 번째 토론자인 탁현민씨는 “노무현 前 대통령을 중심으로 문화인들이 결집할 수 있었다”며, “80년대 운동권출신의 진보적 문화인이 2000년대 사회에서 일정역할을 담당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자신들의 결집에 대해 노 前 대통령의 정치과정과 배경이 드라마틱하며 진정성이 느껴졌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진보인사의 주요문화단체 요직 접근에 한계가 있었기에 문화 분야에서 과거청산은 아직 이뤄지지 않았다”고 생각한다며, “이명박 정부 이후에는 더욱 힘들어졌다”고 말했다.

이념적 편향성에 치우쳐 사실 구분 못해

토론회를 듣는 내내 몇몇 참석자들은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결국 모든 토론회가 끝나고 난 후 질문시간에 '노무현 정권과 과거청산 부분을 지나치게 접목시키는 것이 아니냐’는 의견도 나왔다.

노무현 前 대통령이 서거한지 두 달째를 맞이하고 있다. 노무현 前 대통령이 죽음에 이르게 된 것은 참으로 안타깝고 슬픈 일이다. 그러나 노무현 前 대통령이 죽음에 이르게 되었던 근본적인 이유는 한 교수가 주장하는 것처럼 과거사 청산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 정치자금법 위반 행위로 인해서 발생한 문제이다.

포럼 “진실과 정의” 회원들과 몇몇 노무현 前 대통령의 지지자들 30여명이 모여 있는 자리라서 편하게 거짓과 왜곡으로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을 치켜세우고 싶었던 것은 이해하나 과거사 청산과 노무현 前 대통령의 죽음을 관련짓고 현 정권을 친일파 정권으로 말하는 것은 쉽게 납득이 되지 않는다. 진보 세력이 아니면 모두가 수구․친일파 세력이라고 몰아세우는 토론회장의 분위기를 통해 우리 사회 진보 세력들이 지닌 이념적 편향성을 엿볼 수 있었던 자리였다.

문동욱, 윤주용 /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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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했다는 릴레이식 시국선언이 한창이다. 과연 이들이 말하는 것처럼 민주주의는 위기에 처해 있는 것인가? 민주주의는 다수결의 원칙에 의해 평화적으로 정권을 교체할 수 있는 사회제도를 말한다. 그러나 시국선언자들은 좌파적 정책이 좋다고 여기는 거의 모든 것을 민주주의로 표현하고 그들이 나쁘다고 여기는 모든 것을 민주주의 위기로 기술하고 있다. 이들은 민주주의 진의를 변질시켜 더럽히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진정한 민주주의의 위기는 평화적으로 선거에 의해 창출된 정당한 정권을 불법적으로 밀어내고 권력을 차지하고자 하는 직설적 선동에 있다. 이러한 선동은 민주주의를 훼손하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의 일각에서 릴레이식 시국선언이 한창이다. 시국선언문의 공통된 내용은 이명박 정부에 들어와서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해있다는 진단과 그리고 그런 위기를 말해주는 근거이다. 민주주의라는 말을 그토록 수없이 반복적으로 이용하는 시국선언문도 드물 것이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참뜻에 비추어 민주주의 위기론에서 사용하고 있는 민주주의 개념의 문제점을 찾으면서 위기론의 허와 실을 밝히는 일이다. 그래서 우선 그 참뜻을 설명할 필요가 있다.

민주주의의 참뜻은 무엇인가?


언어는 생각이나 느낌을 음성이나 문자 등으로 전달하는 수단이다. 우리는 언어를 통해서 우리가 본 사물이나 주변 환경 등을 표시한다. 그러므로 언어는 세상에 대한 해석이다. 그래서 언어는 우리의 행동을 안내하여 불확실한 세상에서 우리의 삶의 개척을 용이하게 한다.

그리고 언어는 그 의미가 분명해야 한다. 특히 언어는 중요한 정치적 귀결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이에크(F.A. Hayek)가 그의 유명한 『치명적 자만』에서 공자(孔子)의 "만일 말이 옳지 않으면 … 국민은 손발 둘 곳이 없어진다"라는 말을 인용하여 어휘의 정확한 의미의 중요성을 강조하듯이, 말이 의미를 잃게 되면 우리는 손과 발을 움직일 여지가 없고 그래서 자유를 상실하게 된다.

민주주의의 진의(眞意)는 무엇인가? 민주주의의 기원은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 폴리스에서 유래했는데, 고대 그리스어의 데모스(Demos, 시민)와 크라티아(Kratia, 권력 또는 지배)의 합성어, 데모크라티아(democratia, 시민에 의한 지배)가 그 어원이다. 전통적으로 다수결에 의해서 지배자를 정하고 바꾸는 절차, 집행할 정책이나 법을 결정하거나 바꾸는 절차나 방법을 기술한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지배의 내용이나 법, 그리고 정책의 내용을 기술하는 어휘가 아니다. 하이에크가 『법, 입법 그리고 자유』의 제3권 「자유인을 위한 정치질서」에서 민주주의는 다수의 의지에 따라 정부의 의사결정을 위한 방법이나 절차를 지칭하는 말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미제스(Mises)도 자신의 저서 『인간행위(Human Action)』에서 민주주의란 다수의 의지에 맞추어 정치를 평화적으로 조절하는 절차를 기술하는 어휘라고 말하고 있다. 칼 포퍼(K. R. Popper)도 『열린사회와 그 적들』제2권에서 피를 흘리지 않고 피지배자에 의해서 지배자를 교체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하는 사회제도가 민주주의라는 것을 강조한다. 투표에 의해 다수결의 원칙에 따라 평화적으로 정권을 교체할 수 있는 민주주의 제도야말로 인류역사의 소중한 성취이다.

그렇다고 다수결에 의한 의사결정을 의미하는 민주의의가 문제가 없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것은 권력이나 법의 원천을 규정할 뿐 그 권력이 행사할 내용은 규정하지는 못한다. 뷰캐넌(J. M. Buchanan) 등이 지적하듯이 민주주의에 내재한 문제는 두 가지이다. 체계적으로 큰 정부를 야기한다는 의미의 '레바이어던(Leviathan) 문제’와 대표자들이 자신들을 뽑아준 시민들의 열망과는 관계없이 행동하는 것을 의미하는 '주인·대리인 문제’가 그것이다.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할 제도로서 헌법의 중요성을 강조하는데, 헌법은 효과적으로 민주주의를 제한하여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글에서 주목하는 것은 민주주의와 헌법의 문제가 아니라, 원래의 민주주의 의미와 시국선언에 등장하는 민주주의 의미 사이의 괴리를 찾는 일이다. 민주주의라는 어휘만큼 원래의 참뜻을 무시하고 다양한 의미로 변질된 정치적 어휘는 없는 것 같다. 민주주의의 진의를 변질시켜 이를 더럽히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좌파의 지식인들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그들은 좌파적 정치에서 평등과 같이 좋은 것이라고 여기는 거의 모든 것을 기술하기 위해 민주주의라는 어휘를 사용했다.

그렇게 더럽혀진 민주주의 개념은 사회구성원들이 정치를 해석하고 또 행동하기 위한 가이드 역할보다는 오히려 그들을 혼란스럽게 만들거나 그들을 잘못된 방향으로 인도했다.

민주주의 참뜻을 오용한 시국선언문

대학 교수, 시민단체, 종교계, 전교조 등의 릴레이식 시국선언문도 바로 그 같은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르고 있다. 그들은 민주주의라는 말에 온갖 의미를 부여하여 올바른 정치적 길잡이 역할을 하지 못하게 하고 사회구성원들을 황당하게 만들거나 잘못된 길로 안내하여 결국 자유를 잃게 만들고 있다.

시국선언문에 따르면 실업증가, 양극화는 민주주의의 위기의 근거라고 한다. 타인의 자유를 빼앗는 평등실현과 같은 국가의 목적은 민주적이고 감세나 규제완화 등 자유를 증진하는 것을 비민주라고 부르는 듯하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때문에 양극화 또는 실업의 증가가 야기했다는 진단 그 자체도 문제이지만 정부가 추구하는 실체적 목적과 관련하여 민주 또는 비민주라는 말의 사용은 말의 악용일 뿐이다. 왜 민주적이고 비민주적인지를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반(反)자유 또는 친(親)자유의 정책이냐로 기술하는 것이 적합하다.

남북관계가 표면적으로 악화된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이를 민주주의 위기의 근거로 보고 있다. 이 개념의 악용 또한 또렷하다. 김대중 정권과 노무현 정권의 '햇볕정책’이라고 부르는 유화정책을 통하여 북한 핵무기 개발을 결정적으로 도왔던 것은 사실이다. 핵무기를 포기하면 북한이 경제성장을 이루도록 돕겠다는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은 남북한 모두 이득을 볼 수 있는 정책임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전자를 민주적이라고 부르고, 후자를 비민주적이라고 부르는 것 그 자체도 문제이지만 유화정책이냐 상호주의이냐에 민주 개념을 이용하는 것도 말의 남용일 뿐이다.

민주주의라는 말을 악용하는 절정은 시국선언문의 폭력과 불법을 두둔하는 경우이다. 시위 가담자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폭력과 불법시위로 제3의 불특정 시민들의 재산권과 자유를 침해하고 경찰 차량을 파괴하고 심지어 많은 경찰관을 다치게 했다. 이런 폭력 불법시위 가담자들을 처벌하는 것이 법치주의 원칙에 비추어 당연함에도 불구하고 그 처벌이 민주주의 위기의 근거라는 것이다. 폭력이나 불법도 묵인하여, 법이 지배하는 사회를 포기하는 것이 민주적이라고 말하는 것 자체도 문제이지만 그런 것을 기술하기 위해 민주주의 어휘를 사용하는 것은 정말로 어처구니없다.

불법과 폭력시위를 관대하게 대하든 법을 엄격하게 적용하여 그 같은 시위를 막든, 이런 공권력의 행사에 민주 또는 비민주라는 개념을 사용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공권력의 행사내용을 기술하기 위한 적합한 어휘는 법의 지배 또는 법치주의 개념이다.

또 무조건적으로 언론 집회 결사의 자유를 보장하라는 요구는 불법집회 폭력집회를 단속하지 말라는 것인데, 폭력과 불법을 허용하는 것이 민주적이라고 보는 것, 그 자체도 문제이지만 그런 일에 민주라는 개념의 적용은 말의 악용이다. 왜 민주인지를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시국선언문에서 전직 대통령의 자살, 대운하의 변칙 추진도 민주주의 위기의 근거라고 보는데, 그것이 왜 민주주의를 위태롭게 하는지를 이해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그 개념을 잘못 이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쯤에서 우리가 시국선언과 관련하여 확인하고자 하는 것은 좌파적 정책에 좋다고 여기는 거의 모든 것을 민주주의로 표현하고 그들이 나쁘다고 여기는 거의 모든 것을 반(反)민주 또는 민주주의 위기로 기술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런 민주주의 개념은 내용 없는 유령(幽靈)과도 같다. 민주주의 위기라는 진단도 실체적 내용이 없는 말이다.

진정한 위기는 불법적 정권 교체의 선동

오히려 민주주의 위기는 다른데 있다. 릴레이식 시국선언을 보면 합법적인 정권을 불법적으로 밀어내고 정권을 차지하려는 것이 아닌가하는 의구심이 있다. '6·15 남북공동선언 기념식’에서 좌파의 궐기를 촉구하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발언이 그런 의구심을 더욱 강화하는 듯하다.

그는 “이명박 정부가 현재와 같은 길로 간다면 국민도 불행, 정부도 불행하다는 것을 확실히 말한다.”고 얘기하면서 “4,700만 국민이........ 행동하는 양심이 돼 자유, 서민경제, 평화로운 남북관계를 지키는데 우리 모두 들고 일어나서 희망이 있는 나라를 만들자”고 역설했다.

복거일이 지적하듯이 이런 발언은 정당한 정권을 불법적으로 밀어내고 권력을 차지하자는 직설적 선동으로 보인다. 그런 선동은 보통선거를 통한 정권교체를 의미하는 민주주의를 훼손한 것이다. 민주주의 위기라고 선동하여 정권을 몰아내려는 것이야말로 민주주의의 진정한 위기라고 볼 수 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이런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 원인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자신을 뽑아준 시민들의 작은 정부 요구를 망각하고 내용 없는 '실용’을 외처 왔던 탓이다. 이념적 지향을 상실한 채 어정쩡한 입장을 취하다가 자유주의 정책의 일관된 실천도 실패하고 그 정책을 지지할 세력도 잃어버린 것이다.

이명박 정부는 이제는 '중도의 길’을 선언하고 있다. 그러나 중도의 길이란 존재할 수 없다. 간단히 설명하면 이념이란 수평선을 그어 좌우를 정하는 식으로 일차원적으로 기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유와 평등의 중간은 있을 수 없다. 그리고 어느 한 분야의 평등주의 실현은 다른 분야의 자유주의 실현을 방해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중간도 없다. 그리고 특정 그룹의 이익을 보호하거나 지원한다는 의미의 “이해관계의 정책”도 성공할 수 없다. 그래서 정책에는 원칙만이 있을 뿐이다. 시장경제의 원칙 또는 자유의 원칙의 실현이 그런 정책이다.

그럼에도 촛불집회에 놀랐던 이명박 정부는 이제는 불법적으로 몰아내겠다고 선동하면서 똘똘 뭉친 좌파의 릴레이식 시국선언에 굴복한 것으로 보인다. 이명박 정부는 자기를 뽑아준 시민들의 요구인 '자유의 길’을 영원히 포기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민주주의의 문제인 주인·대리인 문제만 더욱 더 심각해지고 있다. 우리사회의 심각한 위기는 바로 여기에 도사리고 있다. ■

저자소개: 민경국 교수는 독일 프라이부르그대학교에서 경제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한국하이에크소사이어티 회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강원대학교 경제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요 저서로는 '자유주의와 시장경제’, '하이에크, 자유의 길’ 외 다수가 있다.

민경국 / 강원대 경제학과 교수


> 리버테리안 정기화 No.39 민주주의의 비극
> CFE Viewpoint No.73 '광장 민주주의’의 허와 실
> 리버테리안 신중섭 No.70 민주주의와 선거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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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국민이 일손을 놓고 거리에서 함께하자고 주장해
공무원 노조, 공무원들이 정부를 심판하고 투쟁하겠다고 밝혀

7월 19일 오후 4시 서울역 광장에서 '민주회복 민생 살리기 2차 범국민대회'가 열렸다. 이 날 행사에서는 이들의 요구사항이 가득한 플랜카드들을 여기저기서 쉽게 볼 수 있었다. ▲언론악법 철회하라! ▲시국선언 탄압중단 ▲비정규직 해고중단 ▲4대강 죽이기 절대 안 돼!가 주요 내용이었다. "요즘 신종 인플루엔자보다 더 독하게 유행하는 것이 바로 MB 인플루엔자이다. 오늘 결의대회로 쥐를 때려잡자!"라는 조금은 과격한 문구로 시작한 이 날의 행사에는 언론노조, 전교조, 민주공무원 노조, 참여연대, 한국진보연대, 민주노총, 쌍용자동차 가족대책위 등 많은 단체들이 참석했다.

공무원이 정부를 심판하겠다는 공무원노조

이 날 행사에서 민주공무원노조 정헌재 위원장은 "국민을 위한 공무원이 되겠다. 공무원들이 다시 결의해 국민 탄압을 이겨내고 이에 맞서는 조직이 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전국공무원노조 손영태 위원장도 "이명박 정부는 노동자를 탄압하고, 서민들을 울리고, 진보를 탄압하는 정부이다. 이에 공무원들이 정부를 심판하고자 모였다."며 행사의 목적을 말함과 동시에 "그 동안 공무원들의 반목을 이겨내고 KT의 민주노총 조롱까지 심판, 앞으로 강력하게 투쟁하겠다."고 결의했다. 전교조 정진후 위원장 역시 "시국선언의 물결이 온 나라로 퍼지고 있다. 국민과 소통하기를 바라는 목소리들이 커지고 있는 것이다. 정부는 지금 선택해야 한다. 국민의 뜻을 따를 것인가, 독재자로 남을 것인가. 이들을 온 힘을 다해 심판해야 한다!"고 소리 높여 주장했다.


말끝마다 '국민이 원하는 것!', 정작 시민들은 불편 겪어

이 날 행사에서 가장 많이 나온 말은 '국민의 뜻'. 하지만 정작 행사를 바라보는 시민들의 시선이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친척을 배웅 나왔다는 정가영(45세, 주부)씨는 "가뜩이나 복잡한 서울역이었는데 정신이 더 없네요. 뭐라고 외치기는 하는데, 어떤 메시지인지 시끄러워서 제대로 들리지도 않고 정신만 산란한 거 같아요. 소리 지른다고 다 되는 건 아니잖아요? 목소리 크다고 이기는 것도 아니고..."라며 눈살을 찌푸렸다. 이 뿐 아니라 서울역 곳곳에 1인 시위, 시국선언 등 단발적인 행사들이 많이 열리고 있어서 서울역을 이용하는 많은 시민들이 불편을 겪기도 했다.

또, 행사를 칭하는 명칭이 '민주회복 민생 살리기 2차 범국민대회'라는 것은 행사장 앞 무대에 걸린 플랜카드를 보고 알 수 있었다. 하지만 1부 행사에서는 사회자가 행사의 명칭을 '교사․ 공무원 시국선언 탄압규탄 국민대회'라 칭했고, 2부 행사에서는 '민주회복 민생 살리기 2차 범국민대회'라고 칭함으로써 행사를 지켜보는 시민들을 헷갈리게 만들기도 했다.


모든 국민이 일손을 놓고 총파업에 함께하자는 민주노총

민주노총 임성규 위원장은 이 날 행사에서 "시국선언을 탄압하고 선언자들을 해고하겠다고 협박하는 이들에게 맞서 더욱 분기탱천하여 투쟁해야 한다. 국회에서 미디어법이 강행되고, 비정규직 악법, 최저임금제 개정 악법이 통과된다면, 민주노총은 전면파업에 들어갈 수밖에 없다."고 말하며 굳은 결심을 내비췄다. 또 "이번 총파업은 시민을 위한 파업이므로 조직원들 뿐 아니라, 모든 국민이 함께 해야 한다."며 "모든 국민이 일손을 놓고 거리에서 함께하자!"고 어이없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이진주 /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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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을 만드는 국회에서조차 법을 지키지 않고 폭력을 행사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국민들은 국회의원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도록 위임한 적이 없다. 국회에서 폭력이 일어났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민주주의에 조종(弔鐘)이 울린 것이나 다름이 없으며, 국민에 대한 모독이다. 의회는 서로 의견이 다를 수밖에 없지만, 논의와 토론을 벌이고 합의를 통해 법과 정책을 만드는 곳이다. 계속해서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 때는 다수결이 대안이 될 수밖에 없다. 민주주의와 법치를 위해서도 국회폭력에 대해 응분의 책임을 물어야 하며, 국민소환제와 같은 제도도 강구해야 한다.

세계적인 스캔들이 될 정도로 연말부터 시작하여 연초까지 이어져온 우리 국회의 폭력성은 가히 충격적이다. 그것은 가뜩이나 3류 정치로 일컬어져 온 한국정치를 몇 등급 떨어뜨리는 저급한 사태였다. ‘폭력국회’란 그 자체로 형용(形容)모순이다. 무엇보다 국민들은 국회의원들로 하여금 폭력을 행사하도록 위임한 적이 없다. 면책특권이라고 하더라도 국회에서의 발언에 해당되는 것일 뿐, 폭력에 관한 면책특권은 아니다. 그런가하면 폭력은 민주주의의 엄숙한 전통을 정면으로 위배하는 행태이다. 국회를 영어로 ‘parliament‘라고 부르는 데 그것은 불어의 ‘parler‘에서 어원을 가진 것으로 ‘말을 하는 곳’이라는 뜻이지, ‘폭력을 행사하는 곳’을 일컫는 말은 아니다.

민주주의는 인간이 이성적 존재라는 신념에서 비롯된 것

원래 사람들이 모여 정치를 하는 전통, 즉, 아리스토텔레스의 표현대로 “교대로 통치하고 통치 받는 것(ruling and being ruled in turn)”을 기조로 하는 민주주의의 전통은 그리스에서 비롯된 것이다. 물론 그리스의 민주주의는 대의민주주의가 아닌 직접민주주의의 핵심적 기구인 민회를 뜻하는 ‘불레(boule)’를 비롯하여 ‘엑글레시아(ekklesia)’, ‘디카스테리아(dikasteria)’ 등은 한결같이 사람들이 모여 발언을 통해 토론과 심의를 하는 곳이었다.

이처럼 말과 심의를 통하여 정치를 하는 민주주의 제도는 근본적으로 인간이 이성적 존재라는 신념에서 비롯된 것이다. 로마의 원로원도 마찬가지였다. 주로 귀족들이 모인 원로원에서 후대의 우리가 기억하는 중요한 연설만 해도 키케로의 ‘카틀리나 음모 규탄’, ‘필립보스 탄핵연설’ 등이다. 이들 원로원에서의 발언은 세기를 거듭하며 말과 웅변의 힘을 증명해 온 연설이다.

말과 심의를 통하여 정치를 하는 민주주의 제도는 근본적으로 인간이 이성적 존재라는 신념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인간 이성에 대한 기대와 확신에서 나온 것으로 이 때 이성을 의미하는 ‘로고스(logos)’는 바로 말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즉, 이성은 말과 설득에 의해 구현된다는 것이 그리스의 전통이었고 또 로마인들의 전통이기도 했다. 로마인들은 이성을 의미하는 ‘라치오(ratio)’에 한 글자를 덧붙여 연설을 의미하는 ‘오라치오(oratio)’를 사용했던 것이다.

이성과 말, 혹은 이성과 설득을 동일시하는 이러한 전통은 현대 민주주의에도 그대로 이어져 왔다. 심의와 토의를 하는 것이 바로 심의민주주의(deliberative democracy)의 핵심인 민의의 전당이다. 동시에 의회는 말로 하는 것이기에 섬세함과 고품격의 절정이기도 하다. 상대방을 부를 때 ‘존경하는 의원님’으로 부르는 선진 의회의 관행도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의회는 폭력을 절대로 행사하지 말아야 할 ‘민의의 전당'

이처럼 국민위임과 민주주의의 전통에 반하여 우리국회에서 일어난 폭력사태는 의회 민주주의의 핵심인 이성에 반하는 야만적 폭거가 아닐 수 없다. 흔히 언론에서는 국회라는 곳이 여당과 야당의 상호작용만으로 이루어지는 곳으로 보고 있으나, 사실은 그것이 아니다. 그보다 더 큰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곳은 입법부와 국민간의 관계라는 의미가 두드러지는 곳이다. 즉, 국회의 의석을 가진 여야 간에 합의가 이루어졌건, 합의가 이루어지지 못했건, 국민들은 언제나 두 눈을 부릅뜨고 의정 활동을 평가하고 판단을 한다. 따라서 여야 간에 합의가 안되면 난투극이나 활극이 일어나고 합의가 되어야 비로소 순기능과 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은 크게 잘못된 인식이다. 또한 싸울 때는 조직폭력배처럼 화끈하게 싸우더라도 협상을 통해 극적 합의가 이루어지게 되면, 그 전의 불법이나 폭력과 같은 것들이 없었던 것처럼 행동하거나 생각하는 것도 무지함의 소치라고 할 수 있다.

여야 간의 법안다툼과 관계없이 폭력이 일어났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ipso facto)’ 민주주의에 조종(弔鐘)이 울린 것이나 다름이 없다. 공교롭게도 2008년의 마지막 날 제야의 종소리가 보신각에서 울렸다. 사방에 울려 퍼진 그 종소리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묵은 것을 보내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인다는 전통적 의미의 송구영신(送舊迎新)의 종소리로 보아야 할까. 아니면 보내는 아쉬움만이 깊숙이 서려있는 종소리일까.

국민위임과 민주주의의 전통에 반하여 우리국회에서 일어난 폭력사태는 야만적 폭거가 아닐 수 없다. 여야 간의 법안다툼과 관계없이 폭력이 일어났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민주주의에 조종(弔鐘)이 울린 것이나 다름이 없다.

둘 다 아니다. 그것은 분명히 연말이 되어도 폭력이 종식되지 않는 우리 국회의 의회 민주주의의 종언을 알리는 종소리이며, 대의민주주의의 장례식을 치루는 장례식의 종소리와 다를 바 없다. 그런데도 폭력 끝에 여야가 잠시 휴전과 같은 합의를 했다고 해서 큰일이라도 해낸 양 희희낙락하며 외유를 나가는 국회의원들의 속물적 모습이여!

의회야말로 폭력을 절대로 행사하지 말아야 할 ‘민의의 전당’이다. 그런 의미에서 ‘거룩한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때때로 시장에서 상인과 상인 사이에 혹은 상인과 고객 사이에 몸싸움이 일어나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가하면 지하철 안에서 취객들이 싸움을 벌이며 혹은 술집에서 작은 다툼이 큰 소동으로 확대되는 것도 보아왔다. 때로는 야구와 축구 경기장에서 선수들끼리 패싸움을 벌이는 사태도 목격해왔다. 이런 모습을 보며 씁쓸한 느낌을 갖게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시장의 종말’이나 ‘술집의 종말’, 혹은 ‘운동경기의 종말’이라는 말을 내뱉을 정도로 극도의 절망감까지 표현하는 것은 아니다. 운동경기장에서 젊은 혈기의 선수들이 자제력을 발휘하지 못한 채 승부에 집착하여 싸우는 모습을 보며 공감하지는 못하지만 이해는 할 수 있다. 또한 술집에서 술에 취해 말도 못하고 몸을 가누지 못하는 사람들끼리 언성을 높이다가 서로 간에 손찌검을 하는 것도 이해는 간다. 이성을 잃은 사람들의 행동에 대해 시시비비를 가려 못하겠는가.

그러나 만일 교회에서 폭력이 자행되거나 몸싸움이 일어난다면 아무리 선의(善意)로 이해하려고 해도 이해할 수가 없다. 그곳은 속세의 이해관계를 떠나 절대자인 신 앞에서 자신의 죄를 회개하며 용서를 비는 거룩한 곳이기 때문이다. 그처럼 거룩한 곳이기에 죄를 지은 사람이 도망쳐 와도 일반 관리가 들어와 체포하지 못했다. 세속인이 범접하지 못할 그 거룩한 곳에서 만일 폭력이 일어났다면 그것은 그 자체로 ‘신성모독’이다.

국회폭력은 국민모독이자 소수의 횡포다

그렇다면 의회는 어떤가. 의회는 이름하여 국민을 대표하는 선량(選良)들이 모인 곳이다. 이곳에서 서로 의견이 다를 수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서로 논의와 토론을 벌이고 결정을 내리고, 법과 정책을 만드는 기능을 주목적으로 한다. 그렇기 때문에 폭력은 물론 있을 수 없고 폭력적인 언어조차 금물이다. 그곳에 국회경위가 있다고는 하나 그들은 국회의원들 간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일반 사람들의 침입과 간섭을 막기 위한 것이다. 또 국회의원들은 그 하나하나가 헌법기관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곳에서 폭력이 일어났다면, 그것은 ‘신성모독’이다. 국회의원들이 심의와 토론은 방송국에서 이루어지는 심야토론에 나가서 하고 정작 국회의사당에서는 폭력을 행사했다면, 모순 중에 그런 모순이 없다. 국회의사당이 방송국의 심야토론장보다 덜 엄숙하고 덜 신성한 곳이란 말인가.

영어로 ‘sacrilege‘로 표현되는 ‘신성모독’이 세속화된 민주사회에서 너무 강한 표현이라고 한다면, ‘국민 모독‘이라고 해야 옳다. 어떻게 엄숙한 마음으로 토론과 심의를 하라고 국민들이 뽑아 준 선량들이 폭력을 행사하면서 조직폭력배를 닮아가고 또 망치와 쇠톱을 사용하는 목수들을 닮아 가는 것인가. 이것은 민주주의의 퇴행현상이다. 폭력국회가 어찌 민주주의를 말할 수 있고 헌법을 말할 수 있으며, 법치주의를 말할 수 있고 면책특권을 말할 수 있는가.

원래 의회란 의견이 다른 여야가 맞서는 곳이다. 그런데 여야 간에 의견이 같지 않고 대립과 갈등이 지속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국회의 의결은 만장일치가 바람직하지만 만장일치의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 때는 다수결이 대안이 될 수밖에 없다. 다수결로 한다고 해서 무조건 ‘다수의 횡포(tyranny of the majority)’가 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소수당의 입장에서 때로는 소수의 권리를 주장할 수도 있다. 그 경우에도 소수의 권리를 주장할 때에는 ‘방어적으로’ 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모든 것을 소수의 뜻으로 하겠다고 ‘공격적으로’ 나서게 되면, 바로 ‘소수의 횡포(tyranny of the minority)’가 된다.

이처럼 원론적 지적을 하면서도 비감한 생각과 자조적 느낌이 드는 것은 지금 소수당으로 폭력을 행사한 민주당이 과거 노무현 정부 하에서 다수당으로 있을 때 누누이 주장해 온 해묵은 논리라는 데 있다. 입장이 바뀌었다고 해서 손바닥 뒤집듯 태도 변화를 한다면, 나중에 또 다시 다수당이 되어서는 다수결의 정당성을 주장할 셈인가.

의회는 서로 의견이 다를 수밖에 없지만, 서로 논의와 토론을 벌이고 결정을 내리고, 법과 정책을 만드는 곳이다. 폭력국회가 어찌 민주주의를 말할 수 있고 헌법을 말할 수 있으며, 법치주의를 말할 수 있는가.

다수당과 소수당이 끝내 뜻이 맞지 않다면 영어의 표현대로 ‘agree to disagree(불일치하기로 합의한다)‘를 해야 한다. 합의는 의견이 같은 것에 대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불일치하는 데에서도 가능하다. ‘합의이혼’이 바로 그러한 전형적인 사례가 아닌가. 사실 소수당이란 국민들로부터 충분한 신임을 받지 못해 소수당이 된 것이니, 충실한 의정활동을 통해 민심을 잡아 다음번 선거에서 다수당이 되도록 노력하고 또 다수당이 된 다음 법안개정을 위해 전력투구하는 것이 정도(正道)다. 어떻게 자신의 뜻이 당장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하여 ‘세상의 종말’이 온 것처럼 이성을 잃은 광인(狂人)처럼 행동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또한 항의를 한다고 해도 국회의원들만이 할 수 있는 품위 있는 방법이 있다. 고전적으로는 ‘필리버스터(filibuster)‘, 즉 의사진행방해발언이 그것이다. 달걀만 먹으면서 48시간을 버텼던 영국의 유명한 정치인도 있고, 또 우리나라에도 그런 정치인이 있었다. 다만 발언시간을 법적으로 제한함으로 ‘필리버스터‘가 금지되었다면, 그 대안으로 단식을 할 수도 있고 삭발을 할 수도 있으며, 또 사표를 제출할 수도 있다. 이것들은 물론 절박한 항의의 표시이기도 하지만, 평화로운 것이기에 국회의 품위를 훼손하지 않는 것으로 용인될 수도 있다. 이러한 품위 있는 항의에 대한 고민은 전혀 하지 않고 로마의 원형경기장에서 보았던 야수와 검투사의 결투를 흉내 내고 있으니 국민모독이 아닐 수 없다. 언제부터 우리 국회가 격투기장이나 원형경기장이 되었던가.

입법자의 폭력 좌시해서는 안된다

이미 일어난 이 폭력적인 사태는 아무리 여야 합의가 이루어졌다고 하더라도 결코 좌시할 수 없다. ‘폭력국회’는 ‘폭력가정’과 같다. 폭력이 습관화되면 어떤 사태로 발전할 것인지 아무도 모른다. 폭력가정의 시작도 처음에는 사소한 손찌검으로 시작하지만, 갈수록 흉악해져서 살인 지경까지 이를 수 있다. 이번 폭력국회도 마찬가지이다. 이번에는 해머와 쇠톱으로 시작했으나, 그냥 내버려두면 야구 방망이와 회칼이 등장할 가능성도 농후하다. ‘폭력의 확대재생산’이란 그런 것이다. 사실 이번 국회의 폭력성이 쇼킹한 것은 그전에는 기껏해야 국회에서 이부자리 펴들고 잠을 자는 농성에 불과했지만 이번에는 온갖 무기가 등장했다는 점이다. 앞으로 국회에서 의석을 가진 정당이 되려면 해머를 사용하는 목수와 전기톱을 사용하는 전기공들을 다수 확보해야 하는가.

우리는 이번 사태를 결코 잊지 않고 응분의 책임을 물어야한다. 또한 국민소환제와 같은 제도도 강구해야한다. 국회윤리위원회에만 맡길 수 없다. 우리는 그동안 민의의 전당에서 많은 불미한 일들이 있어도 그리스인들이 ‘레테강’이라고 불렀던 ‘망각의 강’에 던져왔다. 국회에서 생사결단을 하고 포악하게 싸우더라도 여야화해가 이루어진 다음에는 고소 등 법적인 절차를 취하해 버리고 심지어 서로 웃으며 상대방 칭찬까지 아끼지 않으니, 정말 지나가는 소도 웃을 일이며, 국민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된 기분이다. 이번만은 그럴 수 없다. 조폭의 폭력도 아니고, 운동선수의 폭력도 아니며, 있어서는 안 되는 금기인 입법자의 폭력이기 때문이다.

이번 사태는 국민이 용서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다. ‘레테강’에 던지기 보다는 그 ‘레테(lethe)’를 다시 살리는 ‘알레테이아(aletheia)’, 즉 그리스인들이 ‘진실’이라고 불렀던 것의 관점에서, 단죄와 책임추궁을 해나갈 필요가 있다. 국민들도 대의민주주의의 폭력성을 교정한다는 차원에서 직접민주주의의 주인으로서 정당한 권리를 행사할 필요가 있다.

오, 국회여! 그대는 자신을 아는가. ‘벌거벗은 왕’처럼 만신창이가 된 그대 자신을 알고 있는가.■

저자소개: 박효종 교수는 미국 인디애나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취득했으며, 현재 서울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요 저서로는 ‘민주주의와 권위’, ‘한국민주정치와 삼권분립’ 외 다수가 있다.

박효종 / 서울대학교 교수

Posted by 자유기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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