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효종 | 2011-03-21 | 조회수 : 429
[요약] 일본이 대재난으로 신음하고 있는 이 때 이익과 불이익을 따지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 "어려울 때 도와주는 친구가 진정한 친구“라는 말이 있듯이 고통받는 이웃인 일본에게 따뜻한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야 한다. 성경에서 착한 사마리아인이 그랬던 것처럼 이웃의 고통에 공감하고 역지사지할 수 있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국가’가 되어야 한다. 일본과의 과거사에 얽매여 그들의 아픔을 외면하는 것은 새로운 악연을 만드는 일이다. 일본의 대지진은 우리의 공감능력, 역지사지 능력, 인류애와 도덕적 감수성을 시험하는 시험대이다.

이웃나라 일본이 형언하기 어려운 대재난으로 신음하고 있다. 대지진이 땅의 지축을 흔들어 놓는가하면 쓰나미가 마을과 사람들을 휩쓸어 갔고, 원전까지 위험해져 방사능 공포가 엄습하고 있다. 하늘과 땅, 그리고 바다에서 비롯된 세 가지의 재난에 직면하고 있는 것이다. 가히 삼중고(三重苦)가 아니겠는가. 대피소에서는 노약자들이 땔감과 먹을 것을 구하지 못해 저체온증으로 죽어가고 있고, 원전주변에는 방사능피폭을 무릅쓰고 자위대원들과 결사대들이 원전폭발을 막고자 밤낮으로 포진하고 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일본의 재앙이 우리경제와 산업에 미치는 영향을 면밀히 검토하는 것도 필요하다. 아니면 부품산업의 차질로 우리도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 확실하니, 이에 대한 대비책을 서두르는 것도 절실하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지금 우리의 최우선적 관심사항은 아니다.

일찍이 프랑스의 철학자 엠마뉘엘 레비나스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면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다고 했다. 마찬가지로 상대방의 근심어린 얼굴을 보면서 내 잇속만을 생각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또 상대방의 절규하는 모습을 보면서 내게 이익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따지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

“어려울 때 도와주는 친구가 진정한 친구”

지금 재난을 맞은 일본인들의 얼굴을 보라. 물론 그들이 대성통곡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악을 쓰며 울부짖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들에겐 재난을 이겨내는 놀라운 시민정신이 살아있다. 죽음 앞에서도 자기희생과 헌신을 아끼지 않은 감동스토리가 계속해서 나오고 있다. 하지만 그들의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하고, 그들의 표정엔 두려움이 드리워져 있지 않은가. 엄마와 딸, 아빠와 아들, 남편과 아내가 생과 사를 사이에 두고 갈라선 경우가 한 두 가지가 아니다. 폐허가 된 마을엔 사라져간 사람들의 행방을 묻는 애끓는 쪽지들만이 빼곡하다.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무기력한 현실 앞에 오직 기적만을 바라며 망연자실해 있는 그들의 모습이야말로 그냥 바라만 볼 수 없는 애처로운 모습이 아닌가.

일본전체가 하늘을 향해, 땅을 향해, 바다를 향해 간절히 부르짖고 있다. 또 도와 달라며 손을 내밀고 있다. 지금이야말로 그들의 부르짖음을 귀담아 들어주는 응답자가 되어야하고, 슬피 우는 그들에게 따뜻한 말을 건네는 위로자가 되어야 할 때다.

우리가 어려서부터 들어온 말이 있다. “어려울 때 도와주는 친구가 진정한 친구”라는 말이다. 마찬가지로 어려울 때 도와주는 이웃이 진정한 이웃이다. 고통받는 이웃나라인 일본을 불문곡직 도와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바로 그것이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삶의 도리고 또 친구로서 우정을 나누게 되는 도리가 아니겠는가. 대재난으로 고통받고 있는 그들의 눈에서 하염없이 흐르고 있는 눈물처럼, 우리를 향해 간절히 호소하는 것도 없다. 사람들은 길가에서 깔깔거리며 웃고 있는 어린아이들 곁은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칠 수 있으나 길에서 울고 있는 어린아이들 곁은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울음소리에는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길을 붙잡는 도덕적 호소력이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야말로 지금 현해탄 건너 “힘들다” “도와달라” “살려달라” “물을 달라”는 그들의 부르짖음에 대해 외면할 수 없는 이유다

선린의 역사를 시작하는 '착한 사마리아인’이 되자

바이블에 나오는 이야기를 들어보았는가. 예루살렘에서 예리고로 내려가는 길에 강도를 맞아 쓰러져 있는 행인에 관한 이야기다. 중상을 입어 쓰러져 있는 그의 곁을 여러 사람들이 지나간다. 랍비도, 율법학자도 지나갔다. 그러나 그들은 한결같이 쓰러져 있는 사람의 고통에 무심했다. 오직 한 사람, 사마리아인이 그를 보살폈다. 그를 업고 병원까지 간 것이다. 그리고 치료비까지 부담했다. 그에겐 다른 사람의 고통을 자기고통처럼 생각하는 뛰어난 공감능력이 있었고 자신의 편안한 처지와 그의 불쌍한 처지를 바꾸어 생각하는 놀라운 역지사지능력이 있었던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 그런 아름다운 사연이 있었다면, 21세기의 우리나라는 모름지기 이웃의 고통에 공감하며 역지사지했던 사마리아인처럼 행동하는 '착한 사마리아인 국가’가 되어야하지 않겠는가.

반론이 있을 수 있다. “과거에 일본이 잘못했으면서도 사죄조차 없으니 어떻게 하느냐”고. 물론 그런 질문은 당연한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질문을 할 때가 아니다. 매사에는 때가 있는 법이 아닌가. 사람들이 슬피 울고 있는 초상집에 가서 과거에 진 빚을 갚으라는 이야기를 꺼내서는 안 되는 이유는 빚 이야기가 잘못되어서가 아니라 빚 이야기를 할 때가 아니기 때문이다.

과거사는 과거사고, 휴머니즘은 휴머니즘이 아니겠는가.

일본 대지진은 우리의 인류애와 도덕적 감수성의 시험대

과거사의 굴레에 묶여 이웃의 아픔을 외면하면 역사의 새로운 악연을 만들게 된다. 과거사와 휴머니즘을 무분별하게 섞는 것은 결코 지혜로움이 아니라 어리석음일 터이다. 우리는 이웃의 아픔을 위로하는 착한 이웃이 되고 그를 돕는 착한 사마리아인이 됨으로써 '선린(善隣)의 역사’를 시작하는 주인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는 고통을 당하고 있는 이웃을 돕는 마음으로 일본에 따뜻한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야한다. 이번 일본의 대지진이야말로 우리에게 공감능력이 있는지, 역지사지능력이 있는지, 선린의식이 있는지 묻고 있다. 또 우리의 인류애와 도덕적 감수성까지 시험하고 있다. 우리 모두 힘을 합쳐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그들의 손을 잡아주는 '착한 사마리아인’이 되자.

박효종 / 서울대 교수, 윤리교육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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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통상 농산물 등 국제원자재 가격의 상승이 현재의 인플레이션의 원인이라고 분석하고 있지만, 이는 틀린 분석이다. 정부와 중앙은행의 팽창적 통화정책이 인플레이션의 근본 원인이다. 즉 2008년 이후 우리나라를 포함한 세계 각국이 불황극복을 이유로 이자율을 사상 최저로 낮추고 통화공급을 지속적으로 확대한 것이 그 원인이다. 인플레이션에 대한 잘못된 분석을 기초로 하게 되면 정부와 중앙은행은 정책실패에 대한 면죄부를 받음과 동시에 인플레이션 해결을 어렵게 만들고 또 계속해서 반복하게 할 소지가 크다. 인플레이션 유발자는 다름 아닌 정부와 중앙은행이다.

지난 1년 사이에 국제 상품시장에서 옥수수 가격은 90%, 밀과 콩 가격은 30-60% 정도 상승했다. 국제 유가도 상승세를 타고 있다. 물가상승도 세계적인 현상이다. 지난 1월 전년 대비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중국 4.9%, 브라질 6.0%, 인도네시아 7.0%, 영국 4.0%, 미국 1.6%, 유로존 2.4%, 우리나라 4.5%(2월 상승률) 등이다.

유가, 농산물 등 국제원자재 가격 상승이 인플레이션의 원인?

이러한 세계 각국의 물가 동반 상승을 통상 유가, 농산물 가격 등 국제 원자재 가격의 빠른 상승이 원인이라고들 분석한다. 농산물 가격을 포함한 국제 원자재 가격 상승이 이를 원료로 하는 각종 재화의 가격 상승을 초래하고 종국에는 전체 물가상승으로 이어진다는 논리다. 이러한 설명은 일견 그럴듯하게 보이지만 틀린 것이다.

몇 개의 재화, 예를 들어 옥수수, 밀, 콩, 원유 등의 국제 원자재 가격이 급격하게 오르는 이유는 크게 구분하여 두 가지다.

첫째, 재화 시장에서 수요 또는 공급(때로는 두 가지 모두)에서 변화가 발생하는 경우이다. 기상 악화로 인한 흉작으로 콩의 국제 가격이 오르고 콩을 원료로 하는 국내 식료품의 가격을 끌어올린다. 특기할 점은 각각의 재화 시장의 수요나 공급의 변화는 인플레이션을 초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국제 콩 가격이 오른다고 노트북PC의 가격이 오른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콩 가격이 오르면 소비자는 콩과 관련제품의 소비를 줄이고 생산자는 콩과 관련제품의 생산을 늘리고자 하기 때문에 콩과 관련제품 가격의 상승은 장기간 지속되지 않는다.

정부의 팽창적 통화정책이 인플레이션의 근본적 원인

둘째, 통화공급의 증가가 재화와 용역 시장의 수요를 증가시키는 경우이다. 정의상 이 경우만을 인플레이션으로 지칭한다. 인플레이션이라도 모든 재화가 동시에 상승하는 것도 아닐 뿐 아니라 같은 속도와 정도로 상승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증가된 화폐공급이 어떤 산업이나 시장으로 먼저 흘러 들어가느냐에 따라 재화와 용역은 순차적이면서 불연속적으로 상승한다. 그러므로 '물가수준’이라는 말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인플레이션의 정도와 지속 기간은 통화공급의 증가량과 증가의 지속 기간에 달려있다. 인플레이션 중에도 일부 재화의 가격은 내릴 수 있다. 지난 20 여 년 동안 컴퓨터를 포함한 정보통신 기기와 그 악세사리의 가격이 그렇다. 그러므로 '에그플레이션’, '피시플레이션’이라는 용어는 잘못 만들어진 합성어이다.

그러면 다수 국제 곡물, 원유, 구리와 같은 원자재 가격과 국내 농수축산물 가격의 상승과 국내외 소비자 물가가 크게 오르고 있는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2008년 세계 경제위기 이후에 불황을 극복하기 위하여 각국이 이자율을 사상 최저로 낮추어 지난 2년 이상 통화공급을 지속적으로 늘린 결과 원유, 곡물 등의 가격이 상승하고 있을 뿐 아니라 설상가상으로 흉작으로 공급이 감소하는 등의 각 재화 시장의 변화가 그 재화의 가격을 밀어 올리는 상황이 동시에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지금은 소수의 재화 가격만 상승하는 인플레이션 초기를 지나서 서서히 다른 많은 재화와 용역의 가격이 순차적으로 상승하고 있는 인플레이션 중기 상황이다.

인플레이션 원인에 대한 잘못된 분석은 정부에 면죄부를 주는 일

화폐공급의 증가로 유발된 인플레이션과 각 재화 시장의 변화가 초래한 해당 재화만의 가격 상승을 현실에서 구분하기는 어렵다. 두 힘이 동시에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우는 연구자의 마음속에 지닌 경제이론, 그것도 정확한 경제이론으로만 이해할 수 있을 뿐이다.

작금의 전 세계적인 인플레이션을 에그플레이션 등으로 지칭되는 국제 원자재 가격, 유가 등의 상승 탓으로 돌리는 것은 문제의 원인을 잘못 분석한 것이다. 이러한 잘못된 분석은 중앙은행과 정부의 인플레이션 유발 책임을 부지불식간에 면제해줌으로써 인플레이션 해결을 어렵게 할 뿐 아니라 인플레이션을 반복하게 만들 소지가 크다. 역사적으로 언제나 그렇게 되어왔다. 인플레이션이 더 악화되면 한 걸음 더 나아가 정부(인플레이션 유발자)가 투기자(흔히 부동산의 경우), 원자재 생산자(흔히 산유국), 유통업자(흔히 담합), 모든 시민(흔히 인플레이션 기대심리) 등을 비난하고 단속하는 일이 반복되어 왔다.

전용덕 / 대구대학교 교수, 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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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대중소기업 간의 동반성장에 주력하고 있는 이명박 정부와 동반성장위원회의 최근 행보는 개발연대로의 회귀이며, '설계주의'의 '치명적 자만'의 발로이다. 동반성장지수 개발 및 순위 발표는 필연적으로 '지식의 문제’에 부딪쳐 작위적이고 무리한 평가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이익공유제는 사회주의적 발상이며, 그 속의 내용을 보면 황당하기까지 하다. 상생협력을 통한 동반성장은 기업들의 자율적인 선택과 경쟁에 맡겨야 한다. 정부가 시장을 대체하겠다는 '치명적 자만'을 부려서는 동반성장은커녕 '동반지체’라는 심각한 부작용을 초래할 수 있다.

MB의 동반성장 접근, '개발연대’로의 회귀

이명박 정부는 최근 대․중소협력업체 간의 '동반성장’에 온 힘을 쏟고 있다. 사회적 양극화의 진원지가 기업 양극화이기 때문에, 기업 양극화를 풀면 사회적 양극화가 완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굳이 양극화를 거론하지 않더라도 '동반성장’은 당위적 명분을 갖는다. 글로벌 경제에서의 경쟁력의 요체는 대기업과 협력업체 간의 '클러스터 경쟁력’이기 때문이다. 대기업만으로는 그리고 협력업체만으로는 어떤 경쟁력도 가질 수 없다. 동반성장이 시장생태계의 기업문화로 정착되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와 관련해서 정부의 역할은 명료하다. 동반성장이 서로에게 이득이 되도록 '여건’을 만들어 주는 것이다. 상생협력을 통한 동반성장은 서로의 이익에 부합하기 때문에 구체적 방법은 당사자들이 자율적으로 선택하도록 하고, 정부는 울타리만 쳐주면 된다. '울타리’는 대기업이 우월적 지위를 이용해 중소기업에 부당한 부담을 떠넘기지 못하도록 감시하는 것을 의미한다. 공정거래정책이 사실은 '동반성장의 기반’인 것이다.

이명박 정부의 동반성장 정책은 사전적 의도와는 달리 철저히 실패할 것으로 예견된다. 화근(禍根)은 동반성장에 대한 정부의 몰이해와 무리한 정책접근에 있다. 정부의 구상은 '동반성장위원회’라는 민간기구를 신설해 '동반성장지수’를 개발하고, 56개 대기업에 대해 동반성장 이행실적을 평가해 순위를 매기고 이를 공개하겠다는 것이다. 우수 대기업에게는 유인제공 차원에서 조세감면과 더불어 공정거래조사를 일정부분 면제해 주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업종과 업태(業態)가 천차만별인 기업을 획일적 잣대로 평가하고 순위를 공개하는 것은 위험하다. 이명박 정부는 정책의 시계(視界)를 '개발연대’로 되돌리고 있다.

동반성장지수는 대기업의 중소기업에 대한 동반성장 '이행노력’ 평가와 중소기업의 대기업의 노력에 대한 '체감도’ 평가로 이루어진다. '이행노력’에 대한 평가는 정량화가 가능할지 모르지만, 정성변수일 수밖에 없는 '체감도’를 정량화하는 것은 상당한 무리가 따를 수밖에 없다. 채점표는 절대적으로 완벽하게 만들 수 없다. 시장의 평가가 아닌 인간의 이성에 의한 작위적 평가는 필히 '지식의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또한 56개 대기업에 걸쳐 평가하겠다는 것은 “서로 다른 것을 동일한 기준으로 평가해 비교하는” '범주의 오류’를 범할 수밖에 없다. 평가결과를 공개하겠다는 것은 대기업을 한 줄로 세우겠다는 것이다. 그러면 뒤에 서게 되는 기업은 동반성장에 별반 관심을 갖지 않은 '악덕기업’으로 비춰질 수밖에 없다. 반(反)기업정서를 다시 불러들일 것인가? '줄 세우기’는 동반성장위원회의 위상을 작위적으로 끌어올리려는 꼼수일 수도 있다.

동반성장위원회는 형식적으로는 '민간위원회’이다. 하지만 무늬만 민간위원회일 뿐이다. 진정 민간위원회가 되려면 위원장도 전(前)국무총리가 아니라 재계 또는 재계에서 추천한 인사가 맡아야 한다. 56개 대기업을 평가한 뒤 우수 기업에 대해 조세감면과 공정거래조사를 면제해주겠다는 것은 '민간위원회의 영역’을 넘는 것이다. 동반성장위는 정부에 건의만 할 뿐 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정부 대리인’으로서의 역할수행이라는 본질은 그대로이다.

동반성장 전략, 기업 자율에 맡겨야

<그림-1>


<그림-1>은 30대 그룹의 2011년 협력사 지원규모를 나타낸 것이다. 30대 그룹은 올해 대·중소기업 동반성장을 위해 1조808억원을 투자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지난해 8652억원보다 24.9% 늘어난 액수이다. 정부의 동반성장 정책에 호응하기 위해서라는 게 기업들의 설명이다. 분야별 비중에서는 판매·구매 지원이 32.9%로 가장 크다. 그 뒤로 R&D 지원, 생산성 향상 지원, 보증·대출 지원 등이 이어지고 있다. 지원내역을 보면, 협력업체들의 경쟁력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되는 항목으로 보여진다.

상생협력을 통한 동반성장은 이해당사자의 자율에 맡겨져야 한다. 상생협력을 통한 기업의 성공은 그 자체가 성공사례로 시장에 확산될 것이다. 각양각색의 협력방안이 경합을 벌려야 승자가 시장에 안착된다. 국가개입은 '동반성장의 다양한 경로’를 차단할 수도 있다. 각 그룹별로 동반성장 성공사례를 공개하도록 해 확산을 돕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다.

이익공유제는 사회주의적 발상

정운찬 위원장의 대기업과 협력사의 '이익 공유제’(profit sharing)는 황당하기까지 하다. 우선 주주의 동의는 차치하더라도 초과이윤을 어떻게 정하고 얼마를 '토해내라’는 건지 출발부터 불분명하다. 대기업의 이익 중 협력업체의 기여분을 산정하고, 개별업체들의 기여분을 다시 계산해 이익을 배분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이익공유제가 강제되면, 상당수 대기업은 부품업체를 수직계열화하거나 해외조달을 하려 할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협력업체가 설 땅은 좁아지게 된다.

'이익공유제’의 파장이 일파만파로 퍼져 나가자, 정운찬 위원장과 청와대는 확대해석을 하지 말 것을 당부하며 진화에 나서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정위원장은 예상을 깨고 자신의 입장과 주장을 강화하는 기자회견을 했다. 기자회견은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도 막지 못하게” 일을 악화시킨 측면이 있다.

쟁점은 크게 3가지이다. 첫째는 초과이익을 협력업체와 나누자고 하는 데, 초과이익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정위원장은 예상이익에서 실제이익을 빼면 초과이익을 계산할 수 있다고 했다. 논리적으로 허술하기 짝이 없다. '초과이익’ 이라기보다 '예상외 이익’이 더 적합한 표현일 것이다. 만약 정위원장식으로 초과이익을 협력사에 배분하라고 하면, 실제 배분액은 영(零)이 될 것이다. 예상이익을 높여 초과이익이 발생하지 않도록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이익이 예상이익을 넘을 것 같으면, 기업들은 더 이상 애써 이익을 올리지 않을 것이다. 초과이익은 그 기업의 몫이 아니기 때문이다. 매출액도 아니고 '이익의 예상치’를 발표하라는 것은 '무지’를 반영한 것이다. 이익은 '사후적 잔여’이다. 이익의 목표치를 사전에 설정하기에는 경제의 '불확실성’이 너무 크다.

둘째는 협력업체에 대한 이익배분이 현실적으로 가능하겠느냐는 것이다. 정운찬 위원장은 애플을 예로 들면서, 애플은 아이폰 응용프로그램(App) 개발자에게 이익의 70%를 돌려준다면서, 마음만 먹으면 이익을 공유할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이는 '인식의 오류’이다. 사실 '애플’사가 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온라인 장터를 개설해 주고, 도리어 자릿세 명목으로 '응용프로그램 개발자’에게 이익의 30%를 요구한 것이다. 이는 엄밀한 의미에서, 애플이 App 개발업자에게 이익을 나누어 준 것이 아니라 도리어 개발자의 이익을 '갈취’한 것이다. 하지만 시장은 이 같은 갈취에 분노하거나 비난하지 않는다. 이익을 반분(半分)하는 것만이 동반성장이 아니다. 이해 당사자가 이윤을 나누는 방식에 동의하고 계약을 통해 서로의 경제적 처지를 개선했다면, 이것이 바로 동반성장인 것이다. 온라인 장터가 여기 저기 개설된다면 애플의 자릿세는 30%에서 내려 갈 것이다.

셋째는 대기업의 초과이익을 동반성장기금으로 활용하는 것이 최선인가 하는 점이다. 기금은 '공유지의 비극’(tragedy of commons)을 부를 뿐이다. 기금을 관리하는 주체의 재량권만 높일 뿐이다. 동반성장은 말 그대로 대기업과 중소협력업체간의 상생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설령 초과이익을 나누더라도 협력업체에 바로 도움이 되어야 한다. 대기업과 중소협력업체 간에 '기금’이라는 제3자가 낄 이유는 없다.

설계주의의 치명적 자만을 경계해야

동반성장 정책은 이명박 정부의 철학빈곤과 정책능력 부재를 여실히 드러낸 것이다. 웹 2.0 시대의 경제시계를 개발연대로 돌리고 있다. 동반성장이란 용어 자체가 그렇고 이윤을 공유하자는 발상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이명박 정부는 동반성장을 '2인 3각(脚)’경기로 착각하고 있다. 어떤 조(組)가 다리를 풀어지지 않게 잘 묶었나를 심사하겠단다. '2인 3각’ 경기식의 동반성장은 '동반지체’를 부를 뿐이다. 동반성장 정책은 '공정거래정책’의 기반 위에서 기업의 자율을 존중하는 선에서 그쳐야 한다. 동반성장은 '현장지식에 밝은’ 이해당사자의 몫이다. 동반성장위원회가 무슨 수로 동반성장의 내용까지 제시할 것인가? 그리고 동반성장은 결과이지 목적일 수는 없다. 동반성장은 시장 생태계의 몫이기 때문이다.

'이익공유제’는 '이익사유화’를 대척점에 놓고 있다. 이익을 '공동의 노력’으로 얻은 '같이 나누어야 할 공동재원’으로 왜곡시키고 있다. 이익은 혁신과 시장에서의 위험부담 행위에 대한 정당한 '대가’인 것이다. 정당한 대가를 갖지 못하게 하면 시장은 이내 질식된다. 기업은 이익이 아닌 성과를 나누어야 할 것이다. 소비자에게 물건 값을 할인해 주고 협력업체와 공동으로 기술개발을 하는 것은 성과를 나누는 한 예이다. 성과를 나누는 것도 기업의 자율적인 판단에 기초해야 한다.

'동반성장지수’를 개발해 기업의 동반성장 노력을 정량화해 그 결과를 공표하고 이익을 협력사와 나누어야 한다는 것은, 시장을 '인간의 이성’으로 대체하겠다는 '설계주의’의 발로가 아닐 수 없다. 이런 치명적 자만의 끝은 사회주의의 길목이다. 친시장,국민성공,일류기업,선진국 진입을 주장하던 이명박 정부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조동근 / 명지대학교 교수, 경제학 한국하이에크소사이어티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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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호 | 2011-02-28 | 조회수 : 458
[요약] 전세난에 대한 최근의 대책들은 미봉책일뿐만 아니라 사태를 더욱 악화시키는 원인이 될 뿐이다. DTI 규제 등으로 주택구입을 어렵게 만들고 이는 결국 주택의 공급부족으로 이어졌다. 신규 주택공급은 부족한 상황에서 거주에 대한 수요는 변함없거나 오히려 증가하고 있으므로 임대료가 상승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전세대출확대 정책은 주택공급을 늘리지는 못하면서 전세가격만 상승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또한 전월세 상한제는 셋집공급만 더욱 위축시켜 전세난을 가중시킬 것이다. 지금의 전세난은 각종 규제로 인한 공급부족에서 야기된 것으로 따라서 단기간에 효과를 나타낼 비책은 없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보유와 매매에 대한 규제를 풀어 시장을 정상화시키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다.

전세 대책이라고 나오는 것들을 보면 속이 답답해진다. 문제의 거죽만 덮으려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이미 시행되고 있는 전세자금 대출 확대는 공급은 늘리지 못한 채, 전세에 대한 수요를 더욱 늘려서 전세 가격을 더 높여놓을 것이다. 전월세 상한제로 가격을 억지로 낮출 수는 있겠지만, 셋집의 공급을 더욱 줄여 새로 집을 구할 사람들에게 고통을 줄 것이다.

주택에 대한 거주수요는 계속 증가

왜 그럴까. 이번 전세난의 배후에는 부동산 매매시장이 완전히 죽었다는 사실이 놓여있다. 주택을 사려는 사람이 없으니 집을 지어도 팔리지 않는 지경이 되었다. 빈 채로 버려진 미분양 아파트들이 그 증거다. 집은 집인데 소유하지 않으려 하니 집 구실을 못하고 있는 것이다. 새로 나오는 아파트들이 눈에 띄게 줄어든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집을 구입하지 않는다고 해서 주택에 대한 수요가 줄어든 것은 아니다. 더 넓은 집에, 더 쾌적하게 살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욕구는 지금도 끊임없이 커지고 있다. 24평에 살던 사람은 32평에 살고 싶어지고, 부모님 눈치 보며 살던 자식은 돈 좀 벌었다고 혼자 방 얻어 살겠다고 한다. 이런 저런 이유로 주택에 대한 '거주’수요는 계속 늘고 있는 것이다.

'거주’수요라는 단어에 주목해주시기 바란다. 주택 보유에 대한 각종 중과세와 사회적 편견, 그리고 DTI, LTV 규제 등의 각종 금융 규제로 인해 주택에 대한 보유수요 및 구매 수요는 줄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거주수단으로서의 주택에 대한 수요, 즉 거주수요가 줄어든 것은 아니다.

주택 구매에 대한 규제가 주택 공급 부족 초래

혹자들은 주택보유의 인기가 떨어지는 것을 대세의 변화로 보기도 한다. 필자가 보기엔 전혀 아니다. 특히 지금처럼 돈의 가치가 떨어지는 인플레 시대에는 주택처럼 가치보전하기 좋은 대상은 없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지금처럼 주택 구입을 꺼리는 이유는 LTV, DTI 규제 같은 것으로 주택구입을 위한 자금줄을 끊어 놓았기 때문이다. 그것들로 인해 거주수요가 보유수요로 연결되지 못하게 되었고, 그것은 공급의 부족으로 이어졌다.

거주수요는 중단 없이 늘고 있는데, 매매수요의 위축으로 들어가 살 수 있는 주택들의 공급량은 제대로 늘고 있지 않은 것이다. 거주수요와 매매․보유 수요의 불일치가 셋집의 공급부족을 초래한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민간임대주택이란 1가구 다주택자가 자기가 직접 살지 않는 집을 세놓고 있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1가구 다주택을 엄격히 규제한다는 것은 민간임대주택의 공급을 옥죈다는 말이기도 하다. 결국 주택의 보유와 구입에 대한 규제가 신규 주택 공급의 부족을 불러왔고, 그것은 다시 전세 등 임대료의 상승을 불러왔다는 말이다.

전세대출 확대정책과 전월세 상한제는 사태를 더욱 악화시킬 것

이렇게 보면 지금 나와 있는 전세대책들의 문제도 분명히 드러난다. 전세대출 확대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이 정책이 전세에 대한 수요를 늘린다는 것은 자명하다. 그런데 전세든 월세든 이 정책이 주택의 공급을 늘리지는 못한다. 그 결과 가격만 올리는 결과가 초래된다. 요행히 대출을 받은 사람은 조금 처지가 나아지겠지만 그렇지 못한 보통의 세입자들은 더욱 큰 고통을 당하게 될 것이다. 정말 실효성이 있으려면 미분양 주택에 사람이 들어가거나 새로운 주택이 공급될 수 있도록 매매자금을 대는 것이 더 낫다.

한편, 전월세 상한제는 부족한 셋집의 공급량을 더욱 줄일 것이다. 또 세입자 측면에서도 한번 세 들어 사는 사람은 웬만해선 그 집에서 나오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셋집은 줄어들고 기존 세입자는 나오지 않으니 새로 셋집을 구할 사람은 막막한 지경에 처하게 된다. 집이 없어서 결혼을 미루는 사람도 나올 것이고 여관에 살아야 하는 지경이 될 수도 있다.

주택시장 정상화만이 유일한 대책

지금의 전세난은 주택 보유를 지속적으로 억제해서 나타난 결과다. 공급이 부족해서 나타난 문제인 만큼 당장의 비책도 없다. 주택의 보유와 매매에 대한 규제를 없애면서 서서히 문제가 해결되도록 기다리는 것만이 유일한 대책이다.

김정호 / 자유기업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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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정치권에서의 개헌논의는 항상 권력구조 개편 문제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국가권력을 제한하는 헌법규정이다. 우리 헌법에는 국가권력으로부터 개인의 자유와 재산을 효과적으로 보호하는 장치가 아주 미흡한 실정이다. 현재 개헌 관련 논의는 정부의 자의적인 개입을 더욱 강화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정부의 개입을 강화하는 것이 아닌 자유와 번영을 약속하는 개헌이 되어야 한다.

 

정치권, 권력구조 개편에만 관심

정치권에서 개헌논의가 부침을 거듭하고 있다. 18대 국회 전반기에는 국회의장 주도로 `국회헌법연구자문위원회`가 구성되고, 여야 의원 180여 명이 참여한 `미래한국헌법연구회`가 개헌논의의 불씨를 지폈다. 하지만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개헌논의가 시큰둥하다가 여당 일각에서 이를 열정적으로 재개하고 있다.

정치권의 개헌논의에서 늘 중심에 있는 것은 권력구조 개편을 추구하는 개헌론이다. 논의의 출발은 장기집권을 방지하기 위해 마련한 대통령 5년 단임제이다. 제왕적 권력집중, 막강한 권좌를 차지하기 위한 정치적 경쟁, 퇴임 후의 직간접 보복 등의 폐해를 피할 수 없다는 지적이 많다. 이 부작용을 막을 권력구조의 대안으로 분권형 대통령제, 의원내각제 등이 정치권에서 제시되고 있다.

대통령 단임제에서는 장기적인 정책을 추진할 수 없다는 이유로 4년 중임제를 제안하기도 한다. 그러나 권력 집중 등 그 폐단이 장기화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때문에 대통령의 권력 분산을 위한 제도적 장치로 '부통령제’를 둘 필요가 있다는 견해도 있다.

중요한 것은 국가 권력을 제한하는 헌법규정

권력구조를 개편하여 이상적인 '민주헌법’을 만들겠다는 정치권의 개헌론 그 자체는 나무랄 이유가 없다. 하지만 권력구조보다 더 중요한 것이 정부의 권력을 제한하는 헌법규정이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가 있다. 헌법경제학이 보여주고 있듯이, 아무리 권력구조가 이상적이라고 해도 정부권력을 제한하는 헌법규정이 없으면, 지지표를 얻기 위한 정치적 경쟁은 필연적으로 정부의 개입과 규제를 불러오기 때문이다. 정부지출이나 적자예산의 헌법적 제한이 없으면 정치적 논리에 따라 정부부채의 증가도 필연적이다. “적자 속의 민주주의”라는 뷰캐넌(J. M. Buchanan)의 유명한 말은 국가권력을 제한하는 헌법이 없는 민주정치의 치명적 결함을 가장 적절히 표현한 것이다.

현행 한국헌법의 치명적인 결함은 경제에 대한 정부의 자의적인 규제와 간섭을 효과적으로 제한하는 헌법장치가 없다는 점이다. 오히려 헌법 제119조 2항이 보여주는 것처럼 헌법은 정부에게 간섭권한을 거의 무제한으로 허용하고 있다. 이같은 헌정질서로 중앙집권의 강도가 점차 심화되어 지방자치는 실종된 지 오래다. 정부지출과 부채도 급증하고 있다. 규제는 우리 경제를 겹겹이 포위하고 있다. 헌법을 통해서 국가권력을 효과적으로 제한하지 못하면 자유와 재산을 침해하는 입법과 경제정책이 난무하기 마련이다.

정치권의 개헌론이 이 같은 사실을 간과하고 권력구조에만 치중하는 것은 유감이 아닐 수 없다. 개헌론이 주장하는 5년 단임 대통령제의 병폐도 권력을 제한하는 헌법규칙이 없기 때문에 생긴 것이라는 점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4년 중임 대통령제가 장기적인 '원칙의 정치’를 자동적으로 보장하는 것도 아니다. 이는 헌법을 통해서 보장할 경우에만이 가능하다.

우리 헌법, 민주헌법이지만 자유헌법은 아니다

우리헌법은 '민주헌법’임에는 틀림이 없다. 어떤 정책도 다수의 지지가 없으면 그 실행이 헌법적으로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것은 '자유헌법’은 아니다. 국가권력의 자의적인 행사로부터 개인의 자유와 재산을 효과적으로 보호할 헌법적 장치가 아주 미흡하기 때문이다. 한국의 민주주의 지수는 세계 상위권이지만 경제자유 지수는 중위권이라는 '프레이저 연구소’나 미국의 '헤리티지재단’의 보고서는 우리의 헌정질서를 또렷하게 반영하고 있다. 우리가 일인당 소득 3만 달러, 4만 달러의 사회로 진입할 수 있다고 확신할 수 있으려면 헌법을 자유헌법으로 고쳐야 한다.

독일 기본법 개정의 의미

헌법개정과 관련하여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은 독일이다. 두 가지 오랜 질병에 시달리는 '병든 연방국가(der kranke Bundesstaat)’라고 불려진다. 질병 하나는 주(州)정부의 자율성과 독립성의 상실에서 비롯된 '경쟁적인’ 연방주의의 실종이다. 다른 하나는 고질적인 적자예산과 부채의 증가이다. 이 질병의 뿌리는 중앙집권화와 적자예산의 증가를 효과적으로 막을 수 있는 헌법장치의 부재이다.

그러나 독일 정치권은 여러 해의 길고 긴 진지한 논쟁을 거처 2007년에는 주정부의 독립성과 자율성을 보장하는 방향으로 독일 기본법을 개정했다. 이어서 2009년에는 늘어나는 중앙정부의 부채증가를 막기 위하여 '구조적’ 예산적자를 GDP 대비 0.35%를 초과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의 조항을 기본법에 새로이 도입했다. 헌법을 통해서 개인의 자유와 재산을 보호하려는 이같은 노력은 경제사적으로나 헌법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자유와 번영을 약속하는 개헌이 되어야

권력구조 개편을 중심으로 하는 우리나라 정치권의 개헌론은 말이 좋아 권력 분산이지 사실상 '권력 나누어먹기’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여당의 유력 대선후보 측이나 야당, 그리고 특히 시민들이 개헌론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는 것도 그 같은 인상때문인 듯이 보인다. 최근 이명박 대통령이 새로운 인권, 기후변화, 정보화 사회 등 시대적 변화를 반영하는 개헌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지만, 이것도 정부의 개입주의를 억제하기 위한 개헌이라기보다는 경제사회의 '자생력’을 의심한 나머지 그 개입을 더욱 강화하기 위한 개헌이라는 것을 우리가 유의할 필요가 있다.

권력구조 개편을 밀어붙이기 식으로 접근하는 대신에 '정부는 문제이지 해법이 아니다’라는 하이에크(F. A. Hayek)의 명언을 되새기면서 장기적인 안목을 가지고 자유와 번영을 약속하는 개헌에 진지하고 겸허한 자세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민경국 / 강원대학교 교수, 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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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온실가스 배출권거래제 도입을 둘러싸고 논란이 한창이다. 배출권거래제는 시장메커니즘을 이용한 효율적인 감축수단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현재 배출권거래제를 위한 인프라 구축도 마련되지 못한 상황에서 도입을 서두르는 것은 시기상조이다. 또한 다른 경쟁국들보다 앞서 도입을 한다면 국제경쟁력에도 심각한 타격을 받을 것이다. 배출권거래제 도입에 따른 국민경제 및 각 산업별 파급효과 분석, 기후변화 국제협약의 가시적 진전 등 전제조건이 충분히 성숙된 후 도입하는 신중한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이다.

이론적으로 시장 메커니즘을 이용한 배출권거래제가 직접규제 형식의 목표관리제보다 효율적인 감축수단으로 인정되고 있다. 배출권거래제는 배출상한을 설정한 후 배출원 간 거래를 통해 온실가스 배출목표를 최소의 비용으로 달성하는 제도이다. 배출권거래제 하에서는 감축비용이 상대적으로 저렴한 배출원이 주어진 목표보다 더 많이 감축을 한 후 감축비용이 상대적으로 비싼 배출원에게 판매함으로써 거래에 참여한 배출원 전체의 감축비용을 최소화하게 된다. 따라서 배출권을 더 판매하거나 덜 구매하기 위해서 기업은 비용 최소화 원리에 따라 신기술 도입, 에너지원 간 대체, 생산량을 결정하기 때문에 배출권거래제를 시장 메커니즘을 활용한 제도라 부른다. 반면 목표관리제는 배출원에게 주어진 감축목표를 각자 달성해야 하기 때문에 전체의 감축목표를 달성하는 데 있어 배출권거래제보다 비용이 많이 들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산업계가 배출권거래제에 참여하기를 주저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배출권거래제 도입 여건이 성숙되지 않았다

첫째는 배출권거래제 도입 여건이 성숙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배출권거래제를 추진하던 주요국이 자국 산업의 경쟁력 약화를 우려하여 배출권거래제 도입을 철회하거나 보류하는 상황에서 의무감축국이 아닌 우리나라가 도입을 추진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다. 유럽연합을 제외하면 미국, 일본, 호주 등의 선진국이 도입을 포기 또는 보류하고 있는 상태이고, 우리의 주요 경쟁 상대인 중국, 인도 등은 온실가스 감축 자체를 고려하지 않고 있는 상태이다.

둘째 이유는 배출권거래제가 효율적인 제도인지가 충분히 검증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배출권거래제가 시장 친화적인 제도임에도 불구하고 실제 적용에서는 다양한 부작용을 유발하고 있다. 우선 배출권의 할당 과정에서 정부와 산업계의 대립이 불가피해 보인다. EU의 경우 EU위원회와 각국 정부, 각국 정부와 기업 간 소송이 빈번히 발생하고, 독일의 경우 2005~2007년 동안 1천여 건의 법률 소송이 제기된 적이 있다. 또한 예상치 못한 경기변동에 따른 배출권 가격변동성이 심화되어 시장의 안전성이 우려되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시장참여자 수가 500여 개 업체로 전망되고, 이 중 50개 사업장이 배출량의 48%를 차지하고 있어 시장성립 여건이 매우 취약한 것이 사실이다. EU의 경우 배출권거래제에 참여하는 사업장의 수가 1만2천개에도 불구, 톤당 가격변동폭이 5~30유로에 달하고 있다.

배출권거래제 시행할 인프라 구축 미비

셋째 이유는 배출권거래제를 시행할 인프라 구축이 미비하다는 점이다. 산정·보고·검증(MRV) 시스템 구축이 미비하고, 사후적 조정이 불가능한 상태에서 배출권이 할당되고 거래될 경우 과도한 소송 및 이행비용을 유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일부 대기업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기업이 기본적인 온실가스 DB조차 구축하지 못한 상황이며, 기존에 구축한 기업의 경우도 일반적 지침이 없이 자체적으로 작성한 상태이다.

넷째 이유는 기업경쟁력이 약화된다는 점이다. 유상분배의 비중이 증가할 것이므로 기업의 생산비용 상승이 불가피하여 국제경쟁력 약화를 초래할 수 있다. 주로 철강, 석유화학 등 온실가스 배출이 많은 사업장을 대상으로 거래가 이루어지므로 이들 업종에 배출권거래제 도입에 따른 부담이 집중될 전망이다. 포스코(연간 7천만tCO2 배출)의 경우 100% 유상 할당되면 매년 1조~2조 원의 부담(약 2만 원/tCO2)이 증가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에너지집약적인 산업구조를 가지고 있어, 이들 제조업의 원가 상승으로 인한 경쟁력 약화가 심각한 수준에 달할 것이다.

국제협약의 가시적 진전 등 전제조건 충족돼야

이와 같은 이유를 들어 배출권거래제 도입은 시기상조이며, 도입을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전제조건이 먼저 충족되어야 한다고 산업계는 주장하고 있다. 배출권거래제 도입에 따른 국민경제 및 각 산업별 파급효과 분석, 이에 근거한 배출권거래제 도입관련 컨센서스 확립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목표관리제를 통해 신뢰할 수 있는 MRV 체계 등 인프라 구축과 업종별·기업별 온실가스 정보 축적이 이루어진 후에 배출권거래제 도입을 검토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후변화 국제협약의 가시적 진전, 즉 주요 경쟁국(G20)의 온실가스 배출권거래제 또는 유사 제도 도입이 이루어진 이후 도입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목표관리제와 배출권거래제를 연계하는 방안으로 배출권거래제를 위한 별도의 거래소를 설립할 필요 없이 정부가 이미 설치한 온실가스정보센터에서 관리업체의 목표 감축량 잉여분과 부족분을 거래상쇄할 수 있는 비공개시장(closed market) 형태로 운영하자고 제안하고 있다.

조경엽 / 한국경제연구원 거시경제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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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자신의 힘으로 건강한 보수주의를 확립시킨 나라는 영국과 미국뿐이다. 두 나라 모두 거대한 위기, 거대한 과제에 부딪쳤을 때 보수주의 사상이 확립되었다. 영국의 경우 프랑스 혁명에 부화뇌동한 급진 운동을 제압하는 과정에서 '옛 전통에 바탕한 점진적 변화’를 핵심 컨셉으로 삼았다. 미국의 경우 흑인노예제도를 둘러싸고 남북전쟁을 치러낸 과정에서 '다수결이라는 민주주의 원칙에 우선하는 독립선언문 및 헌법 정신’(리퍼블리카니즘)을 핵심 컨셉으로 삼았다. 우리 사회는 한편으로는 북한의 민주화와 업그레이드를 이루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초고도 지식기반사회로 도약해야 한다는 엄청난 과제를 안고 있다. 우리 보수주의의 핵심 컨셉은 '개인’을 중심으로 설정되어야 한다.

얼마 전에 보수주의 운동을 한다는 대학생이 찾아 왔다. 나를 붙잡고, 우리 사회 안에 종북-친북 인사들이 득실대기 때문에 이대로 가다가는 적화(赤化) 위기에 빠질 것이라며 비분강개와 우국충정을 쏟아냈다. 전날 밤에 원고를 쓰느라 잠을 설친 덕에 비몽사몽 상태에서 그의 말을 듣던 나는 기어코 한마디 하고야 말았다.

“이민 가.”

“네?”

“이민 가라구. 적화될 나라에서 뭐 하러 살어?”

지구에서 볼셰비키, 마오이스트, 트로츠키주의자 같은 진짜 '빨갱이’들이 멸종한 시대에, 북한 지배집단이 더 이상 '빨갱이’가 아니라 부패한 반인도(anti-humanity) 범죄집단인 상황에서 적화 공포에 시달린 나머지 보수주의를 택한다는 것은 우스꽝스러운 일이다. 보수주의에는 마땅히 반(反)김정일을 훌쩍 뛰어넘는 숭고한 비전이 있어야 한다. 그 비전을 만들지 못한다면 보수주의는 설득력과 리더십을 가질 수 없다. 이미 참된 보수주의가 아니기 때문이다.

보수주의는 위대한 통찰이었다

자신의 힘으로 건강한 보수주의를 확립시킨 나라는 영국과 미국뿐이다. 두 나라 모두 거대한 위기, 거대한 과제에 부딪쳤을 때 보수주의 사상이 확립되었다. 영국의 경우 프랑스 혁명에 부화뇌동한 급진 운동을 제압하는 과정에서 보수주의가 나왔다. 1789년 프랑스에서 혁명이 시작되자 영국 안의 급진세력이 이를 찬양하면서 혁명 운동을 시작했다. 이에 에드먼드 버크는 1년 만에 '프랑스 혁명 및 런던의 일부 단체들의 움직임에 대한 고찰’(Reflections on the Revolution in France And on the Proceedings in Certain Societies in London)이라는 책을 낸다. 이 책에서 버크는 영국은 명예혁명(1688, Glorious Revolution)을 통하여 이미 의회민주주의를 달성했으며, 사회발전은 소중한 옛 전통과 새로운 변화를 조화시키는 방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역설한다. 즉 영국이 백 년 전에 '전통적 가치 위에서 변화를 성취함으로써’ 달성한 의회민주주의 모델이, 과거단절적이며 잔혹한 프랑스 혁명 모델보다 훨씬 더 우월하다는 점을 최초로 명백하게 논증한 것이다. 이는 위대한 통찰이었다.

미국의 경우 흑인노예제도를 둘러싸고 남북전쟁을 치러낸 과정에서 보수주의가 확립되었다. 1850년대에 들면서 미국은 “흑인노예제를 준주(準州, territories, 서부 개척지)로 확장해야 한다”는 남부 노예주의 강력한 드라이브 때문에 거대한 위기로 빠져들어갔다. 마침내 민주당의 더글러스 상원의원이 “노예제를 채택할 것인가 말 것인가의 문제는, 주 별로 '인민주권’(popular sovereignty) 원칙에 따라 결정하자”라는 폭탄 주장을 한다. 한마디로 다수결이라는 민주주의 원칙으로 결정하자는 주장이었다. 이에 대해 신생 공화당의 원외 활동가였던 링컨은 “다수결 민주주의에 우선하여 독립선언문과 헌법이 존재한다. 건국의 아버지들(Founding Fathers)은 노예제를 '잠정적으로 존재하다가 소멸해야 할 필요악’으로 보았다”라고 주장했다. 링컨은 이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건국의 아버지들의 정치 활동 기록과 행적을 철저히 연구했다. '민주주의에 우선하는 원칙이 존재한다’는 믿음이 바로 공화주의(Republicanism)이며 이 공화주의의 뿌리가 건국의 아버지들이라는 점을 논증했던 것이다. 링컨의 이 위대한 통찰이 오늘의 미국을 만들어냈다.

우리의 보수주의는 개인에서 출발해야

초고도 지식기반사회의 문턱에 서 있는 우리는 모두, '글로벌 시장 경제 속의 개인’으로 하루하루를 살고 있다. 우리가 일정한 정치사상과 가치체계를 선택한다면 그 선택은 개인의 실존적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막연히 대한민국의 발전을 강조하거나 혹은 시장경제의 우월성을 내세워서는 아무 소용이 없다. 젊은이들은 “그래서 어쩌라구?”라는 반응을 보일 뿐이다. '그것이 나의 인생과 관련하여 어떤 의미가 있는가?’라는 문제가 절실하게 와 닿지 않으면 이념 혹은 가치에 대해 코웃음 친다. 보수주의가 뿌리를 박기 위해서는 개인의 실존적 차원에서 출발해야 한다.

우리 선배세대들은 자기 자신의 존재 전체를 걸고 대한민국을 만들었다. 자기 자신의 존재 전체를 걸었기에 이미 실존적인, 너무나 실존적인 차원에서 살았던 것이다. 무엇을 위해? 사유재산, 자유, 시장, 개인됨을 위해 자신의 존재 전체를 걸었다. UN군의 지원 외에, 대한민국이 6.25를 이겨낼 수 있었던 두 개의 내부적 힘은 1950년 이전에 월남한 이북민들이 가졌던 철저한 반공의식과, 토지개혁에 의해 자작농이 된 농민이 신생 대한민국에 대해 간직했던 신뢰였다. 이 둘은 모두 사유재산, 자유, 시장, 개인됨(individuality)과 직결되어 있다.

이제 우리는 선배세대의 절절한 경험을 보다 깊은 차원에서 다시 해석해서 승화시켜야 한다. 빨갱이는 멸종했고, 북한 지배집단은 부패한 반인도 범죄조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비전은 김정일이라 불리는 흉측한 종기덩어리의 처리문제를 훌쩍 뛰어넘어, 삶에 대한 숭고한 조망으로 치달아야 한다. “개인이란 무엇인가? 개인됨이란 무엇인가?”라는 화두로 진입해야 한다. 바꾸어 말하면, “나의 자아와 삶을 이끌어가는 원칙이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추켜들어야 한다. 이 철학적이기만 한 듯이 들리는 고상한 주제가 정치 이념 및 정치적 가치체계의 근본이 될 때 비로소 우리 사회의 보수주의가 확립될 수 있다.

'진실을 존중하는 자아’는 무엇을 선택할까?

자아는 진실과 함께 살고 함께 죽는다. 진실을 외면하면 세상과 당당하게 마주 서는 존재만이 가질 수 있는 긴장이 썩어 소멸하고 만다. 세상의 이미지가 거짓과 착각으로 이루어져 있는 상태에서는 세상과 당당하게 마주 설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세상과 당당하게 마주 설 때에만 성립하는 이 긴장이 바로 자아이다. 우리가 진실을 소중히 여기는 것은, 진실만이 자아를 세우는 척추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이 '냉전의 사생아 혹은 피해자’란 소리는 거짓이며 '냉전의 승리자’란 이야기가 진실이다. 그래서 우리는 대한민국과 그 성취를 인정한다. 시장은 '부자들의 천국, 서민의 지옥’이란 소리는 거짓이며 '시장 제도의 발전이 사회 운영의 중심축’이란 이야기가 진실이다. 그래서 우리는 시장 제도와 그 발전에 대해 신뢰한다. 북한의 지배집단이 '신의성실의 원칙을 지키는 민족주의 그룹’이란 소리는 거짓이며 '홀로코스트보다 더 잔혹한 반인도 범죄를 저지르고 있는 부패한 집단’이란 이야기가 진실이다. 그래서 우리는 북한인권 상황에 대해 분노한다. 대한민국을 하나의 소중한 '삶의 기반’으로서 받아들이는 것, 시장제도 및 그 발전을 신뢰하는 것, 북한 인권 상황에 대해 분노하는 것—이런 것들이 바로 한국 보수주의의 가치 아닌가!

우리는 '진실을 존중하기 때문에’ 일정한 가치평가를 내리게 된다. 이 가치평가의 결과물을 모아놓고 보니까, 그 적합한 이름이 '보수주의’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보수주의는 귀착점일 뿐 출발점이 아닌 것이다.

또한 진실은 우리로 하여금 선배 세대의 피와 땀과 고통을 고스란히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준다. 그리고 우리가 선택한 가치들이 바로 선배 세대의 노력에 의해 만들어져 왔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준다. 우리의 삶과 가치가 선배 세대와 맞물려 있다는 점을 총체적으로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과거를 인정하고 껴안는다는 점에서 그 적합한 이름 역시 '보수주의’이다. 우리의 보수주의는, '진실을 존중하는 자아’가 규정하고 선택한 것이다.

박성현 / 인터넷문화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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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소득이 높은 행복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수천가지 지수가 가능한 “국민행복”이란 개념은 “행복의 증감” 여부를 두고 소모적 논쟁을 야기할 수 있다. 개인들의 목적-수단이란 틀에서 보면 소득증가는 목적을 이룰 수단의 증가이다. 목적이 변치 않는 한 수단증가가 불행을 의미할 수는 없다. 지극히 주관적인 행복에 대해 기계론적으로 다루는 것은 사회 정치적 갈등과 부작용을 초래할 가능성이 크다.

 

성적에 매달리는 부모에 항의하는 학생의 목소리를 연상시키는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라는 책이 있었듯이, 최근 '행복은 GDP 순서가 아니다’는 생각에서 GDP 대신 국민행복지수(GNH: Gross National Happiness)를 측정하고 이를 정책의 안내자로 삼을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일부 경제학자들을 비롯하여 광범위하게 제기되고 있다.1)'행복’보다는 주로 '효용’을 말해온 경제학자들로서는 이에 대해 어떤 말을 할 수 있을까?

행복은 지극히 주관적인 것

인간의 행동에서 각 개인이 추구하는 목적과 이를 달성할 수단을 중심으로 분류할 때 소득의 증가는 수단의 증가를 의미한다. '겸손한’ 경제학자들은 감히 목적에 대해 가치판단을 하지 않는다. 어떤 목적이 더 행복을 주는지 혹은 더 가치 있는 것인지는 각 개인의 가치관에 따라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 사회의 구성원들의 평균적인 소득이라는 개념은 가능할 수 있지만, 그들의 평균적인 행복수준이라든가, 그 사회 구성원들의 행복의 총합과 같은 개념은 결코 성립될 수 없다. 어떻게 개인들의 행복을 더하고 뺄 것인가?

따라서 GDP나 국민소득의 증가가 곧 행복의 증가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즉 행복은 GDP 순서가 아니다. 그러나 GDP나 소득의 증가는 목적을 추구할 수 있는 수단의 증가를 의미하며, 이는 곧 행복을 증진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확대됨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목적이 변치 않는 한 수단의 증가가 불행을 의미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행복이란 지극히 주관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국민행복’ 등을 언급하는 사람들은 '국민행복지수’와 같은 지수들을 내세우면서 그것이 마치 객관적인 것처럼 계층간, 국가간 비교를 하곤 한다. 이들은 어떻게 만들어 질까? 대체로 국민소득에다가 이런저런 항목들을 보태고 뺄 것이고 또 각 항목에다 특정한 가중치를 주어 국민행복지수를 계산할 것이다. 그러나 어떤 특정한 절차를 정당화할 과학적 근거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무수히 많은 국민행복지수가 등장하게 되며 어떤 하나가 더 우월하다고 주장할 수 없다.

기계론적 행복지수 집착은 사회 정치적 갈등과 부작용 초래

만약 이렇게 만들어진 국민행복지수라는 것이 정부정책에 감안된다면 아마도 국민행복지수에서 특정 부분이 차지하는 비중이 클수록 유리해지는 집단 - 예를 들어 정부의 재정으로부터 더 많은 지원을 얻을 수 있는 집단 - 은 실제로 그런 국민행복지수를 선호하고 이것이 표준으로 채택되도록 정치적 투쟁을 할 것이다.

미제스는 경제학을 인간행동학(praxeology)의 중요한 한 분야로 간주하였으며, 평소에 경제학을 가장 잘하기 위해서는 경제학 이외에도 역사, 심리학, 사회학 등 광범위한 분야에 대해 많이 알 것을 주문했다. 행복은 함부로 다룰 수 없는 매우 어려운 주제임이 분명하다. 그래서 더더욱 행복에 대해 말하려면 경제학 이외에 여러 분야의 연구들이 매우 조심스럽게 통합되어야 할 것이다. 기계론적으로 지수를 개발해서 다루기에는 적합한 주제가 아닐 수 있다. 행복에 대한 관심은 정말 필요할지 모르지만, 행복을 이렇게 기계론적으로 다루는 것은,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정치적 갈등과 같은 부작용을 불러올 수 있고, 어쩌면 사람들의 행복을 증진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해를 끼칠 수 있음을 경계해야 할 것이다.

김이석 / 한국경제연구원 초빙연구위원

1) 예를 들어 조선일보 2011년 신년기획기사 [2011 한국인이여 행복하라] 2011.1.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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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최근 전세대란이 심각하다. 시장상황을 보면 전세가격 상승을 억제시키기에는 구조적인 한계가 존재한다. 현재는 특히 수도권과 관역시의 중형 아파트 전세가격의 강세가 지속되고 있다. 그 이유는 공급부족, 특히나 지역별, 평형별 수급불균형이 심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2011년 완공되는 아파트 수마저 줄어들면 총량적 수급불균형의 문제까지도 우려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당장 이 문제를 해결할 뾰족한 대안은 마땅치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선은 수요조절과 수요분산에서 해법을 찾아야 한다. 아울러 왜곡되어 있는 주택시장을 정상화하는 일도 필요하다.

연초부터 전세시장이 심상치 않다. 이번 전세가격 상승은 비수기도 없어 보인다. 이미 2년 정도 상승국면이 지속되고 있는데다가 상승 요인이나 상승폭도 지역마다 다르다. 무엇보다 매매가격이 약세를 면치 못하고 있고 이미 주택보급률은 100%를 넘어섰으며 미분양 아파트도 9만호 이상이 적체되어 있는데 전세가격만 계속 오르는 지금의 상황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일각에서는 최근의 전세문제를 주택시장의 구조변화에 따른 전환기적 현상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전세가격 상승 억제엔 구조적 한계 존재

그러나 구조적 변화를 논하기에 앞서 시장상황에 대한 정밀한 진단이 요구된다. 우선, 아래의 표에서 볼 수 있듯이, 최근 전세대란은 수치상으로는 수도권보다 지방 광역시가 훨씬 높다. 그리고 통상 중소형 평형의 전세난을 이야기 하지만 엄격하게는 중형․중가주택(20~30평형대, 전세보증금 1.5~2.5억원)의 전세난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언론에 자주 등장하는 전세난은 주로 지방보다는 임대료 수준이 높은 수도권이다. 특히 주택 구매여력이 있는 계층들이 전세수요로 전환되면서 나타나는 부작용이 크다. 이들은 지불능력이 있는 대신 도심인근, 아파트, 양호한 거주 환경과 전세계약 방식 등을 강하게 선호하고 있어 임차주택의 대체방안이 매우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이러다 보니 전세가격 상승을 억제하기에 구조적인 한계가 있다.

(단위 :%)

유형별

전국

수도권

광역시

아파트

단독

연립

아파트

단독

연립

아파트

단독

연립

가격 변동률

8.8

3.1

6.0

7.2

3.5

5.9

12.0

3.0

7.2

규모별

전국

수도권

6개 광역시

대형

중형

소형

대형

중형

소형

대형

중형

소형

가격 변동률

5.4

8.1

7.3

4.7

6.7

6.9

7.5

10.0

8.0

중소형 아파트, 특히 수도권과 광역시의 중형 전세가 강세 지속

2010년 주택 전세가격은 7.1% 상승하여 2002년 이후 최대의 상승률을 기록했다. 전세가격 상승의 가장 큰 요인은 공급이 부족하다는 것인데 총량적인 부족보다는 지역별 평형별 수급불균형이 심하며 전세에서 월세로 전환시키려는 임대인이 늘면서 전세로 계약 가능한 물량이 상대적으로 크게 부족한 상황이다. 통상 연 10%내외를 보이던 월세 이율이 점차 하락하고 있지만 임차인들의 월세 저항은 심한편이다. 마침 금리마저 낮아 전세 수요자들은 은행대출로 전세 보증금을 올려주고 있다.

반면 전세 수요는 크게 증가하고 있다. 우선 향후 집값 상승에 대한 기대감이 크게 저하된 데다가 시중보다 저렴한 보금자리 주택공급이 계속 예정되어 있어 주택구매를 포기하거나 미루는 수요자가 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지역적으로는 도심과 도시 인근, 상품으로는 아파트의 전세수요가 높다. 전세보증금이 고액화 되면서 2년 뒤 역전세난을 우려, 임차자를 구하기 쉬운 입지의 아파트를 선호하는 경향이 높다. 결국 구매력이 낮은 사람들은 비아파트와 외곽으로 밀려나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여기에 시중의 유동자금마저 임대수익을 목적으로 한 소형 주택투자에 몰리면서 중소형 주택으로의 전세 수요쏠림 현상은 더욱 심화되고 있다.

그러다보니 미분양 아파트의 해소도 지역별 온도차가 크다. 도심 인근에 자리 잡은 중소형 준공 후 미분양 주택은 전세수요자로 빠르게 소진되고 있는 반면, 교외지역의 대형 미분양 주택은 여전히 미입주로 비어있다. 여기에 2011년에는 완공되는 아파트 수마저 지난해보다 크게 줄어든다고 한다. 이제는 총량적인 수급불균형의 문제까지 가중될 우려가 있는 것이다.

당장의 묘안 없지만 수요조절과 수요분산에서 해법을

상황이 이렇다 보니 최근의 전세대란과 관련하여 당장의 뾰족한 묘안은 없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기간의 돌파구를 찾아보자면 수요조절에서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주택구입이 가능함에도 불구하고 높은 임대료를 지불하고 전세를 고집하는 가구들의 적절한 주택구매가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 첫주택구매 지원대상을 확대(자녀가 있는 결혼 후 10년 미만의 부부, 소득 기준 상향조정 등)하는 방안의 검토가 요구된다. 안정적인 이율로 월세전환을 유도하는 것도 대안이 될 수 있다. 다음은 중소형으로만 몰리는 수요를 분산하는 것이다. 기존 보유 주택을 처분하고 중대형 주택으로 교체하는 경우에 대한 한시적인 금융 및 세제지원이나 임대사업자 세제감면대상에 중대형 주택을 포함하면 전세가격 안정은 물론 중대형 미분양 아파트 해소에도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현재 크게 왜곡되어 있는 주택시장을 정상화시키는 일이 무엇보다도 필요하다.

 

김현아 / 한국건설산업연구원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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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동석 | 2011-01-10 | 조회수 : 174
[요약] 국가채무논쟁은 11년 전인 1999년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이제까지 재정범위 개편 작업은 지지부진했었다. 그런데 1월 말 드디어 정부가 펀드단위가 아닌 제도단위 기준의 재정범위 개편 초안을 내놓을 예정이다. 이는 우리나라 재정통계를 한 단계 선진화시킬 것이다. 또 이번 개편은 국가채무논쟁을 거대담론적 논쟁이 아닌 미시 실용적 논의로 전환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10년 이상이나 지속되어온 소모적인 국가채무 논쟁은 견제와 균형, 야당의 역할, 그리고 관료들의 정치적 중립성이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시켜 준다.

국가채무 논쟁은 11년 전인 199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김대중 정부 시절 야당이었던 한나라당은 공적자금이 사실상 국가채무와 다르지 않다고 비판하며 국가채무 논쟁을 촉발하였다. 당시 김대중 정부는 이 비판에 대하여 공적자금은 정부보증으로 조성되었고 또 정부보증은 국제기준의 국가채무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반박하였다. 그러나 당시 보편적인 국제기준에 의하면 우리나라의 재정범위는 일반회계, 특별회계, 기금 등 펀드단위가 아닌 기관 중심의 제도단위로 설정되어야 했다. 제도단위 기준으로 보면 공적자금은 정부보증채무가 아니라 직접채무가 될 가능성이 매우 높았던 것이다.

제도단위 기준의 재정범위 개편은 재정통계를 한 단계 선진화 시킬 것

제도단위 기준의 재정범위가 2001년 IMF에 의해 보다 명확하게 규정되면서, 노무현 정부는 재정범위 개편작업에 착수하였다. 그러나 '작은 정부 對 큰 정부’의 논쟁으로 재정범위 설정이 매우 민감한 문제로 부각되면서 정부는 추가적인 개편작업을 중단하였다. 이후에도 재정범위와 재정통계에 대한 논란은 꾸준히 제기되었으나, 정부는 한결같이 국가채무가 국제기준에 따라 작성되고 있다는 입장만을 고수하였다.

이명박 정부도 출범 초기 이 사안을 진지하게 검토하지 않았고, 노무현 정부의 인식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여야를 불문하고 국회의원과 전문가들이 국가채무 문제를 지속적으로 제기하자 정부는 2009년 상반기 재정범위 개편작업에 착수하였다. 드디어 2011년 1월 하순에 기획재정부는 제도단위 기준의 재정범위 개편 초안을 공식적으로 내놓을 예정이다. 재정범위의 이러한 개편은 우리나라 재정통계를 한 단계 선진화하는 역사적인 계기가 될 것이다.

이번 개편은 국가채무 논쟁을 미시 실용적 논의로 전환하는 계기가 될 것

공공부문은 일반정부와 공기업으로 구성되는데, 재정범위는 원칙적으로 일반정부를 의미한다. 일반정부는 정책활동을 수행하는 기관들이고, 공기업은 기업활동을 수행하는 기관들이다. 따라서 이번 개편작업의 핵심은 공공부문에 포함되는 기관들이 수행하는 활동의 진정한 성격을 파악하여 이들을 일반정부와 공기업으로 다시 구분하는 것이다. 그리고 일반정부의 기관 내에서 이루어지는 일부 기업활동은 준기업으로, 또 공기업 내에서 이루어지는 일부 정책활동은 준재정으로 구분하여 이들도 재정통계에 반영해야 한다. 조만간 발표될 개편 초안은 새로운 논란거리를 다양하게 제공하겠지만, 이번 개편은 국가채무에 대한 지금까지의 거대담론적 논쟁을 미시 실용적 논의로 전환하는 계기를 마련할 것이다.

견제와 균형, 야당의 역할, 관료들의 정치적 중립의 중요성 확인

지난 10여년간 지속된 국가채무 논쟁은 재정범위뿐만 아니라 국정운영 전반에도 중요한 의미와 교훈을 주고 있다. 국가채무 논쟁 과정에서 각 정당은 집권 여부에 따라 그 입장을 극명하게 바꾸었다. 여당이 되었을 땐 재정통계 개편에 소극적이고, 야당이 되었을 땐 적극적인 입장으로 변화한다. 이는 선거와 정쟁을 의식해야하는 정치인들의 기본적인 속성이다. 어느 국가를 막론하고 여당 정치인들은 거의 예외 없이 독창적 회계를 통해 재정적자와 국가채무 증가를 암묵적으로 방조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 재정통계 개편 작업은 국제기구 등 외부의 강요가 아니라 국내의 건전한 여론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한다. 이번 개편은 대통령제를 통한 견제와 균형 그리고 야당의 역할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새삼 확인하는 계기를 제공하였다.

또 다른 교훈은 관료들의 정치적 중립성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깨닫게 한 것이다. 국가채무와 재정범위의 개념적 문제점은 이미 수년 전부터 명확하게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왜 관료들은 정치인들의 기회주의적 태도에 흔들리지 않는 굳은 기개를 갖지 못했는가! 관료들의 정치적 중립성이 확고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면 국가채무에 대한 소모적 논쟁이 10년이나 끌지는 않았을 것이다.

옥동석 / 인천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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