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산 소고기 문제가 괴담을 넘어 가두행진, 촛불시위 등으로 일파만파 번졌다. 그 동안 알려진 괴담들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나고 있지만, 시위는 확산되었다. 사실 안전성이 국제적으로 증명된 미국산 소고기는 소비자를 위해 수입해야 마땅하다. 아울러 우루과이라운드 협상에 따라 소고기 뿐 아니라 다른 농축산물도 개방해야 한다. 오히려 농축산물 수입을 저지하는 것은 국민들의 엥겔계수를 높여 그 고통을 고스란히 국민들에게 전가할 것이다.

소고기 파동 일명 ‘미친 소’ 논쟁은 어차피 예견된 것이었다. 한국인들은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을 항시 부르짖으며 살아왔고 토지(土地)에 대한 강한 집착을 보인다. 다들 글로벌리즘의 물결이 휩쓸며 세계는 개방화되고 있는 추세여서 할 수 없이 그 대세를 순응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속마음은 전혀 그렇지 아니하다.

대부분의 국민들은 농축산 수입개방이 이루어지면 농촌이 다 망한다고 생각한다. 만약 농축산물 완전개방에 대하여 여론조사를 계속 해왔다면 그 조사의 결과는 완전개방론자의 형편없는 완패로 쭉 나왔을 것이다. 지금의 ‘미친 소’ 파동은 좌파가 이를 이용한 일시적 승리를 만끽하고 있는 현상이다.

개방은 누구라도 선택해야 할 과제

그러나 이명박 대통령이 아닌 정동영, 문국현, 이회창 등 다른 누가 집권했어도 아마도 소고기는 개방해야 할 것이다. 사실 소고기를 비롯한 한미 FTA 문제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임기 내에 처리했어야 할 사안이다. 국회의원들의 직무태만과 지도자의 리더십 부재로 인해 17대 국회와 노무현 정부에서 이 문제는 처리되지 못하고 현 정부와 18대 국회로 이양된 것이다.

어쨌든 이명박 정부에서 소고기 장관 고시가 감행되었다. 이미 협상을 통해 도장을 찍은 사안을 이행할 의무가 있는 정부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국가 간 계약을 파기하는 것은 대한민국의 신용도를 떨어뜨리는 일로 대한민국을 국제적으로 믿지 못할 국가로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소고기 장관고시는 불가피하다. 필자는 이런 정부의 강행이 옳았다고 본다. 물론 국민을 어떻게 설득할 것이냐에 대한 이명박 정부의 위기관리능력은 다른 문제이다.

아울러 수입을 막아 소비자들의 선택권을 제한하는 것은 문제다. 수입하면 먹겠다는 여론이 25% 밖에 안 된다고 해도 이런 소수의 선택권을 박탈해서는 안된다. 이는 명백한 다수의 횡포다.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나는 소고기 괴담

하지만 소수의 선택권을 보장하는 길은 순탄하지 않아 보인다. 수입반대론자들의 공세가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수입반대론자들은 ‘미친 소’에서 ‘월령 미친 소’로 전략을 바꾸어 공세를 계속한다. 처음에는 미국인들은 24개월 이하 월령의 소만 먹고 30개월 이상 도축소는 한국에 몽땅 떠넘긴다며 공세를 폈다.

그 공세 중에 나온 괴담은 하나는 “미국에서 30개월 이상 도축소는 동물사료용이다.”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말이 사실과 다름이 판명되자 이번에는 30개월 이상의 도축소는 가공식품용이라고 우겨댔다. 그리고 미국에서 사용되는 소고기 등급이 도축월령에만 따라 분류되는 것처럼 떠들어 댔다.

그렇다면 지난 4월 19일 이명박 대통령이 부시 대통령과 캠프 데이비드 정상회담에서 먹은 스테이크는 무엇이란 말인가? 그 당시 이명박 대통령은 32개월 된 텍사스산 소를 도축해 스테이크를 먹었다고 한다. 수입반대론자들의 주장이 옳다면 이 스테이크는 동물사료 공장이나 가공공장에 가는 것을 특별히 빼낸 고기인 셈이다.

이미 협상을 통해 도장을 찍은 사안을 이행할 의무가 있는 정부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국가 간 계약을 파기하는 것은 대한민국의 신용도를 떨어뜨리는 일로 대한민국을 국제적으로 믿지 못할 국가로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괴담들은 하나하나 밝혀지는 바와 같이 전혀 사실이 아니다. 공기로 전염 된다느니 크리넥스 사용도 위험하다는 이야기들만이 괴담이 아니다. 물론 30개월 이상의 소들에게서만 광우병 소가 나온다. 이는 소의 광우병 잠복기가 3년이니 너무도 당연하다. 그렇다면 30개월 미만의 소는 절대 안전한가? 즉 잠복기 중의 소는 먹어도 광우병에 걸리지 않는가의 문제이다.

이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는 일치하지 않지만, '안전하다고 결코 말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이는 역으로 이야기하면 위험부위를 제거한 30개월 이상 도축소가 그렇지 않은 24개월 도축소 보다 더 안전할 수도 있음을 의미한다.

광우병에 대해 확실하게 아는 것은 하나도 없다

광우병이 가장 유행했던 곳은 영국이며 그로 인해 사람이 많이 죽은 곳 또한 영국이다. 따라서 안 그래도 바이오산업 선진국인 영국이 광우병 연구를 제일 많이 한 것은 당연하다. 그 연구진 중 한 명에게서 나온 말은 자못 의미심장하다.

"광우병에 대하여 확실한 것은 우리가 확실하게 아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순식물성 사료만을 먹인 소는 100% 안전하다는 공식화된 명제도 소수 학자들은 부정한다.

그렇다면 “미국에서 이렇게 했더니 지난 20년간 광우병이 발생하지 않았다”라고 하는 경험칙상 사실 보다 신뢰할 수 있는 것은 지금까지 없다. 나머지는 미지의 영역이다. 물론 미지의 영역에 도사린 위험도 분명히 존재하며 수입반대론자들의 염려는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염려임을 필자는 인정한다. 하지만 이런 미지의 영역에 대한 염려는 해도 해도 끝이 없다.

서민을 위한다는 말을 항상 입에 담는 자들이 국민들의 엥겔계수를 높여 그 고통을 서민에게 고스란히 전가하는 고농축산물 가격 유지(維持)를 위해 그렇게나 악을 써대는 모습도 본인이 보기에는 정말 기막힌 아이러니다.

인간이 우주로 가면 다른 환경 속에서 체내 세균이 급 돌연변이를 일으켜 변형되어 인류를 공격하면 그 파괴력을 감당하지 못하여 큰 재앙이 올 것이라고 우려하는 학자가 지금 미국소가 위험할 수 있다는 우려를 하는 학자(그들의 견해는 반대론자들이 즐겨 인용한다) 보다 훨씬 많으며 실제로 미국은 이를 염려하여 우주에 갔다 온 우주인들을 상당 기간 격리하여 관찰한다. 그렇게 따지면 그런 상당한 관찰기간도 없이 귀국한 ‘한국의 최초 우주인’ 이소연은 상당히 위험할 수 있으며 '이런 위험한 러시아 우주선을 태운 행위'는 영락없이 촛불시위감이다.

정말로 소비자나 국민을 위한다면 개방해야

‘미친 소’가 설득력을 상실해 가자 이제 반대론자들은 이명박의 굴욕외교에 초점을 맞춘다. 필자는 이에 대해서도 부정적이다. 소고기 협정 하나만 뚝 떼서 본다면 분명 한국이 양보한 것이다. 그렇지만 농수산 협상팀과 대통령은 외교 자체가 다르다. 소고기를 양보하고, 미국 비자 면제협정이나 미국산 무기 수입국 지위 향상의 거래를 할 수 있는 것이 정상외교이다. 이런 점에서 소고기 수입의 대가는 캠프데이비드 만찬이었다는 주장은 순 억지다.

그리고 우리는 우루과이라운드에 서명해 한미 소고기협정에 관계없이 프로그램대로 농축산물을 개방해야 하는 처지이며 한미 FTA 비준을 위한 미 의회의 협조가 절실한 시점이다. 지금 막더라도 그것은 막음이 아니라 유예일 뿐이며 일시적인 버티기일 뿐이다. 이 점은 지금 버티기 중인 일본도 마찬가지이다.

더구나 본문에서 계속 강조해 왔듯이 위험하지 않다면 굴욕 외교란 말은 상당 부분 설득력이 상실된다. 값싼 먹 거리의 공급이야 말로 정말 국민들에게는 최대의 복지이다. 개방으로 인해 종전보다 싸게 물건을 살 수 있어 실질소득이 늘어나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서민을 위한다는 말을 항상 입에 담는 자들이 국민들의 엥겔계수를 높여 그 고통을 서민에게 고스란히 전가하는 고농축산물 가격 유지(維持)를 위해 그렇게나 악을 써대는 모습도 본인이 보기에는 정말 기막힌 아이러니이다.

설사 백보를 양보하여 협상 내용에 문제가 있다고 하여도 이는 국내 책임자들을 추궁할 사안이지 장관고시 철회 요구나 재협상 요구를 할 일이 아니다.■

벨 헤는 솔 

* 이글은 ‘벨 헤는 솔’님이 “장관 고시는 옳으며 어쩔 수 없다”라는 제목으로 폴리젠(www.polizen.com)에 2008년 5월 30일자로 기고한 것으로 저자와 폴리젠의 동의를 거쳐 독자 여러분들께 편집하여 소개합니다.

Posted by 자유기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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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집회로 상징되는 광장 민주주의가 양질의 의사소통을 담보로 하는 민주주의 모델이 될 수 있을 것인가? 광장 민주주의는 때로는 이성에 호소하는 설득이 되기도 하고 저급한 감정에 호소하는 선동이 될 수도 있다. 상식과 이성을 잃어 민중의 감정에 휘둘리는 광장 민주주의는 우중민주주의에 불과하다. 바람직한 소통의 모델로서 광장 민주주의가 되기 위해서는 광장에 참여하는 사람들 모두 자기절제력을 가져야 한다.

광장은 여러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다. 여러 사람들이 모이기에 애환도 있고 주장도 있으며, ‘엔터테인먼트’도 있다. 또 흥분과 기대가 교차하는 곳이기도 하다. 호기심을 가진 사람도 모여들고, 쇼맨십을 가진 사람도 모여들며, 심지어 물건을 사고파는 상인도 모여든다. 바로 그런 곳이기에 광장처럼 여러 사람들이 공동의 관심사를 나누기 안성맞춤인 곳도 없다. 바로 우리의 시청 앞 광장이 그런 곳이 되었다. 2002년 월드컵을 계기로 시작된 이 광장 문화는 엊그제 쇠고기수입반대 촛불집회에서 다시 한 번 절정에 달했다.

누가 왜 이 촛불집회에 나왔는가. 넥타이부대, 유모차부대도 나왔고 각종 노동사회 단체, 이익집단, 재야진보세력은 물론 해고노동자, 환경운동가까지 나왔다. 다양한 참가자들이 뒤엉켜 다양한 구호를 외쳤다. 이들이 참가한 까닭은 서로가 같지 않았으나, 그들을 묶는 공통점이 있었다. 촛불을 들고 무엇인가 한 마디 해서 자신의 뜻을 표현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 그것이었을 게다. 또 누군가 자신의 마음속을 속 시원히 꿰뚫어보는 사람들의 발언과 연설을 듣고 싶어 하는 욕구도 있었다.

촛불집회, 바람직한 민주주의 모델이 될 수 있을까

역사적으로 보아도 그러한 곳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존재했다. 아테네 사람들은 그러한 곳을 ‘아고라(agora)’라고 했고, 로마인들은 ‘포로 로마노(Foro Romano)’라고 했다. 이 로마시대의 광장인 ‘포로’는 오늘날 담론의 장을 의미하는 ‘포럼(forum)’이라고 하는 영어의 어원이 되기도 했다.

이 촛불집회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있다. 그것이 무엇인가. 그 동안 우리는 권위주의에서 민주주의로 이행은 했지만 어떤 민주주의모델을 정착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그 후보 가운데 하나가 엊그제의 촛불집회로 상징되는 광장 민주주의다. 관심의 초점은 이 광장 민주주의가 양질의 소통을 담보하는 민주주의 모델이 될 수 있을까하는 점이다.

광장이라고 해서 백가쟁명(百家爭鳴)처럼 모든 발언자나 연설가들이 기분 내키는 대로 이야기를 하면 ‘공론’이 되기보다 ‘중구난방(衆口難防)’이 될 수밖에 없다.

광장에는 고유한 특징이 있다. 광장은 여러 사람들이 모이지만, 공원과 다른 곳이며, 시장과도 다르다. 특징 가운데 하나가 이곳에 사람들이 모이면 그들 가운데 연설을 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나온다는 데 있다. 연설가들이 연설을 하면 오다가다 경청하는 사람들이 생기고, 인기가 있으면 구름처럼 모여들게 된다. 거기서 ‘위대한 의사소통자’가 나오는가하면 ‘열혈 선동가’도 나오게 마련이다.

아테네의 역사를 보면 그런 사람들 중에 도편투표로 추방되는 운명을 맞은 데모스테네스가 있었고, 아테네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페리클레스도 있었으며, 그 뒤를 이어 받은 클레온도 있었다. 그들은 모두 이 광장에서 ‘나라의 일’, 즉, 플라톤이 ‘폴리테이아(politeia)’로 불렀던 것, 혹은 로마인들이 ‘레스 푸블리카(res publica)’로 지칭했던 것들에 대하여 연설을 했다. 그 과정에서 때로는 청중들을 감동시켜 눈물을 흘리게 하였고 때로는 조국애에 불타오르도록 했으며, 혹은 성난 파도처럼 분노의 함성을 지르게 하기도 했다.

많은 시민들 앞에서 하는 연설은 엄숙한 일이다. 엄숙했기에 고대 로마 사람들은 이 행위를 ‘오라치오(oratio)’라고 했고, 연설가들을 ‘오라톨(orator)’이라고 했다. 연설이란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특별한 능력, 즉, ‘이성의 능력’에서 나온 것이며 ‘이성적 존재’이기에 말로 하는 ‘소통’이 가능하고 ‘설득’이 가능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성’을 의미하는 라틴어의 ‘라치오(ratio)’가 ‘연설’을 의미하는 ‘오라치오(oratio)’로 전이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광장 민주주의의 비극

그렇다면, 엊그제 우리의 광장 민주주의에서 주류를 이루었던 발언과 연설들은 어떤 성격의 발언과 연설이었을까. “정의란 강자의 이익”에 불과하다고 외치는 트라시마쿠스와 같은 소피스트의 연설이었을까. 민중들의 감정에 불을 지피는 클레온처럼 ‘선동가’의 연설이었을까. 그것도 아니라면, 전쟁에서 전사한 사람들을 위해 추모사를 한 페리클레스처럼, 나라가 위기에 차환 상황에서 합심을 당부하는 감동적 연설이었을까.

역사는 절제력이 없는 광장 민주주의의 비극을 고발하고 있다. 기원전 406년 아르기누사의 해전 후에 벌어진 역사적 사실에서 충동과 감정, 편견에 휘둘리는 광장 민주주의의 모습이 그대로 담겨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성에 호소하는 설득을 위한 연설이었을까, 아니면 저급한 감정에 호소하는 선동을 위한 연설이었을까. ‘설득’과 ‘선동’의 차이는 이성과 감성의 차이를 넘어서서 분별력과 무책임의 차이로 읽혀진다. 광장 민주주의가 제대로 꽃피려면, 절제는 필수적이다. 광장이라고 해서 백가쟁명(百家爭鳴)처럼 모든 발언자나 연설가들이 기분 내키는 대로 이야기를 하면 ‘공론’이 되기보다 ‘중구난방(衆口難防)’이 될 수밖에 없다. 어중이떠중이가 말하는 ‘중구난방’이 되지 않고 ‘품격을 가진 공론’이 되기 위해서는 절제력이 요구된다.

역사는 절제력이 없는 광장 민주주의의 비극을 고발하고 있다. 기원전 406년 아르기누사의 해전 후에 벌어진 역사적 사실에서 충동과 감정, 편견에 휘둘리는 광장 민주주의의 모습이 그대로 담겨있기 때문이다.

아테네군이 아르기누사의 해전에서 어렵게 스파르타군과 싸워 승리하여 돌아오는 과정에서 전투의 지휘자들이 승리감에 도취되어 물에 빠진 병사들을 구조하는 것을 소홀히 했다는 고발이 제기되었다. 고발자들은 그 장군들을 처형하고 그들의 재산을 몰수하라고 주장했으며, 많은 민중들이 이 주장에 동조하였다. 널빤지를 타고 있다가, 구조된 한 병사가 동료들이 죽어가면서 장군들을 고발해 줄 것을 당부했다는 증언을 하면서 민중들의 흥분은 극에 달했다.

그 결과 전투에 참전했던 장군들은 모두 유죄판결을 받았고, 이들을 옹호했던 장군들을 포함하여 여섯 명의 장군들이 사형을 당했다. 이 투표에서 소크라테스 혼자만이 반대를 했지만 대세를 되돌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민중들은 유능한 장군들을 스스로 죽인 것에 대하여 후회하고, 이번에는 장군들을 고발했던 자들을 재판해서 유죄판결을 내리게 된다.

품위 있는 소통의 광장 민주주의가 되기 위해서는 광장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모두, 즉 광장에서 발언하는 사람들이나 그 발언을 듣는 청중들이나 할 것 없이 모두가 자기절제력을 가져야 한다. 절제력이 없는 한, 광장 민주주의의 미래는 없다.

그리스의 역사가 크세노폰은 이 사건과 관련, 순간적인 격정에 빠지는 민회의 취약성, 대중적 결정의 불안정한 기반, 충동적 행위에 대한 견제 체제의 부재로 인한 정치적 불안정의 잠재성, 변론 기술에 따라 결정되는 행위 방향, 파벌들 간의 충동 등을 읽을 수 있다고 비판한다.

광장 민주주의, 절제력을 가져야

그로부터 2400년 후에 펼쳐진 한국의 촛불집회가 그의 비판을 경청해야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품위 있는 소통의 광장 민주주의가 되기 위해서는 광장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모두, 즉 광장에서 발언하는 사람들이나 그 발언을 듣는 청중들이나 할 것 없이 모두가 자기절제력을 가져야 한다. 절제력이 없는 한, 광장 민주주의의 미래는 없다. 어찌 광장 민주주의뿐이겠는가. 국가공동체의 전도도 암담한 것이다.

출범한 지 100일 밖에 되지 않는 정부를 두고 퇴진하라고 주장하는 것은 ‘대선불복종행위를 하겠다는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말이다. 광장 민주주의가 빛을 발하려면, 그런 부조리한 선동과 자극보다 이성과 절제가 살아 꿈틀거려야 한다. 대의 민주주의가 잘못하는 것을 지적하는 것, 혹시 그게 아니라면 선거 민주주의가 채워주지 못하는 갈증을 풀어주는 것이 광장 민주주의의 어젠다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 혹여 선거로 잃어버린 권력을 길거리에서 다시 찾으려고 한다든지, 이른바 ‘종이 돌(paper stone)’이라고 할 수 있는 투표에 의하여 심판받은 것을 폭력시위로 되돌리려고 하는 것은 그리스말로 채울 수 없는 ‘탐욕’을 의미하는 ‘플레오녹시아(pleonoxia)’나 권력에 대한 금단현상에 불과할 뿐이다.

민주사회의 시민들이라면 교회지휘자의 말을 듣는 성가대원처럼 항상 유순하게 행동할 필요는 없다. 혹은 오케스트라 지휘자의 말을 듣는 오케스트라 단원들처럼 순종적으로만 살 수는 없다. 때로는 이의도 제기하고 비판도 제기하며 혹은 성난 목소리로 고함을 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침몰하는 난파선의 사람들처럼 상식과 이성을 잃을 정도로 무례해서는 안된다. 그런 광장 민주주의라면 이성을 가진 대중 민주주의가 아니라 변덕스러운 민중의 감정에 휘둘리는 우중민주주의에 불과하다.

바람직한 소통의 모델로서 광장 민주주의가 ‘지속가능성’을 지니기 위해서는 난폭한 수사법을 동원해서 사람들의 마음을 격동시키려 하는 자극형 선동가들보다는 냉철한 이성의 힘으로 사람들을 설득하고 분별력 있는 모습으로 대중들에게 호소하는 발언자와 연설가들이 필요하다. 그런 연설가들이 많아야 광장민주주의는 성공한다. 이번의 광장민주주의가 그런 냉철한 발언자와 연설가들을 다수 선보였는가. 지금이야말로 한번쯤 뒤를 돌아보며 성찰할 때다.■

박효종 교수 / 서울대 윤리교육과

2008년 06월 12일
Posted by 자유기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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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정부 때 본격적으로 시작된 공공부문 민영화는 노무현 정부 들어 중단되었다. 이명박 정부는 전기, 가스, 수도, 전력 등 공공부문 민영화를 다시 추진하고 있다. 공공부문 민영화가 필요한 이유는 경쟁이 없는 곳에 경쟁을 도입해 생산성을 높이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공공부문 개혁 일환으로 거론되는 구조조정도 시장의 자율성과 창의성 제고를 위한 민영화를 향한 길이어야 한다.

공공부문의 개혁은 공공부문의 기능에 시장의 자율성과 창의성을 도입해 생산성과 효율성을 제고하는 것이다. 경제발전의 원동력은 자율적 거래에 있고 자율과 창의는 강제적인 지시와 명령에 의해서는 그러한 자율과 창의가 발현되지 않는다. 일방적 지시와 명령으로 업무가 수행되었던 공공부문에서는 순응하는 노력만이 인정받았을 뿐이다. 공공부문에서 시장의 자율과 창의가 발휘될 수 있도록 종사자의 유인 구조를 변경하는 제도적 틀을 정비하는 것이 개혁의 기본 정신이다.

공공부문에 자율과 창의를 도입하는 과정은 간단히 말해 시장친화 또는 시장기능의 도입이라 불린다. 시장기능은 자발적 거래의 집합을 압축적으로 표현하는 용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발적 거래는 민간의 협조와 협력에 기초하는 비영리활동에 의해서도 수행되기 때문에, 시장기능보다 더 포괄적인 용어로서 민영화(Privatization)라고도 한다. 여기서 민영화란 공공부문이 수행하던 기능에서 민간부문의 역할을 강화하는 일체의 노력을 의미한다.

공공부문에서 자율과 창의가 발휘될 수 있도록 종사자의 유인 구조를 변경하는 제도적 틀을 정비하는 것이 개혁의 기본 정신이다. … 공공부문에서 자율과 창의가 제고되는 그러한 변화가 없다면 그것은 진정한 개혁이라 말할 수 없다.

공공부문 개혁은 결국 시장친화, 시장기능, 민영화 등 다양한 용어로 불릴 수 있지만 그 기본 정신은 시장의 자율성과 창의성을 도입해 생산성과 효율성 제고에 있다. 다시 말해 공공부문에서 자율과 창의가 제고되는 그러한 변화가 없다면 그것은 진정한 개혁이라 말할 수 없다.

공공부문 개혁 방법

공공서비스의 공급을 민간에 맡겨 민영화하는 방법은 몇 가지 존재한다. 우선 공공서비스 공급을 사적재(Private Goods)와 동일하게 취급해 민영화하는 방법이다. 이 경우 공공기관의 소유권을 주식매각 등의 방법을 통해 민간에 이전하고 민간이 서비스를 공급하도록 한다. 이 때 정부는 생산원가를 전혀 보전하지 않으며 또 서비스 내용을 민간의 수요와 공급에 의해 결정되도록 한다.

그런데 이와 같은 형태의 민영화 외에도 다양한 형태의 민영화 방법이 존재한다. 정부가 지속적으로 생산원가의 일부를 보전해주고 또 서비스의 내용과 품질을 계속 규제하면서 민영화하는 방법도 존재한다. 따라서 민영화를 하면 공공서비스 가격이 급격하게 인상한다거나 서비스 품질이 저하한다는 주장은 민영화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민영화 이후에도 정부는 마음만 먹으면 당해 서비스의 가격과 품질을 통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부가 민영화된 기업을 통제하는 제도적 수단은 크게 네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 상법이나 공정거래법 등과 같은 일반적인 기업 법률에 의한 규제(수단 ①) 둘째, 은행법이나 상수도법 등 특정 산업법에 의한 규제(수단 ②) 셋째, 전기위원회나 통신위원회 등과 같은 독립적 위원회 구성을 통한 규제(수단 ③) 넷째, 사회기반시설 민간투자사업이나 민간위탁 등 개별 계약에 의한 규제(수단 ④) 등이 있다. 정부는 이러한 제도적 수단을 통해 공공서비스를 생산하는 민간 기업을 충분히 규제할 수 있다.

민영화하는 방법은 공공기관의 소유권을 주식매각 등을 통해 민간에 이전하고 민간이 서비스를 공급하고 정부는 생산원가를 보전해 주지 않고 서비스 내용을 수요와 공급에 의해 결정되도록 하는 방법과, 정부가 지속적으로 생산원가의 일부를 보전해주고 또 서비스의 내용과 품질을 계속 규제하면서 민영화하는 방법 등이 존재한다.

정부가 개별 계약을 통해 공공서비스의 가격과 품질을 지속적으로 규제하는 경우에 적용되는 민영화는 ‘위탁형 민영화’라 부를 수 있다. 1994년 이후 우리나라에서는 ‘사회기반시설에 대한 민간투자법’을 활용하여 고속도로, 항만운영, 하수처리 등의 공공서비스를 민간기업에 위탁하고 있다. 만약 이러한 방식을 공공부문이 이미 수행하고 있던 사업에 적용한다면 ‘위탁형 민영화’가 가능할 것이다. 더구나 공공부문 내부에서 직접 생산할 필요가 있는 공공서비스에 대해서도 먼 미래의 민영화를 대비하여 정부와 공공기관 사이에 위탁협약을 체결하는 것이 필요하다.

역대 정부의 공공개혁 평가

지금까지 우리나라 정부는 독점적 지위를 누리는 공기업을 민영화해 경쟁체제로 전환했다. 민영화된 기업들은 일반적인 기업 법률(수단 ①)이나 특정 산업에 관한 법률(수단 ②)에 의해 규제되었다. 1960년대 말에 민영화된 기업으로는 대한통운, 조선공사, 대한해운 등이 있으며, 1980년대 초에는 시중금융기관, 1990년대 말에는 두산중공업(구 한국중공업), KT&G(구 한국담배인삼공사), POSCO(구 포항제철) 등이 있다.

1990년대 말 김대중 정부는 민영화의 범위를 확대하기 위하여 자연독점의 네트웍 산업에 대해서도 민영화를 통해 경쟁체제로 전환을 시도했다. 그 대표적인 사례는 통신, 전기, 가스, 철도사업 등이다. 또한 정부는 독립적 위원회를 설치하여(수단 ③) 그러한 서비스의 가격과 품질을 지속적으로 규제했다. 김대중 정부는 네트웍 공동사용과 규제위원회를 채택하며 KT(구 한국통신)를 민영화하였고, 또한 한전, 가스공사, 철도공사 등에 대해서도 같은 방법을 적용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노무현 정부는 전력, 가스 산업의 구조조정을 중단하였고, 철도공사, 우정사업의 공사화 및 민영화 추진을 보류하였다. 이뿐만 아니라 이미 경쟁체제가 형성되어 있는 공적자금투입 공기업들에 대한 민영화 작업도 중단하였다. 대신 노무현 정부는 공공기관의 지배구조(Governance)가 더 중요하다는 시각에서 획일적이고 강제적인 방법으로 지배구조를 설계하며 사실상 정부의 개입과 간섭을 강화해 왔다.

공공기관 구조조정: 정부 개입의 유혹

공공부문 개혁의 본질은 정부의 개입과 간섭을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시장의 자율성과 창의성 제고에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경쟁체제가 이미 형성되어 있는 공기업은 민영화하고, 여전히 독점체제를 유지하고 있는 네트웍 산업 등에 대해서는 경쟁체제를 위한 구조조정과 함께 민영화를 추진하고, 위탁형 사업에 대해서는 개별 계약을 통한 ‘위탁형 민영화’를 도입해야 한다. 그리고 공공부문 내부에서 직접 생산되어야 할 공공서비스에 대해서도 정부와 공공기관 사이에 중장기 '성과협약(Performance Agreements)'을 체결하여 먼 미래의 민영화를 한 걸음 한 걸음 대비해야 한다.

공공부문 개혁의 본질은 정부의 개입과 간섭을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시장의 자율성과 창의성 제고에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경쟁체제가 이미 형성되어 있는 공기업은 민영화하고, 여전히 독점체제를 유지하고 있는 네트웍 산업 등에 대해서는 경쟁체제를 위한 구조조정과 함께 민영화를 추진하고, 위탁형 사업에 대해서는 개별 계약을 통한 ‘위탁형 민영화’를 도입해야 한다.

공공부문의 구조조정은 궁극적으로 시장의 자율성과 창의성 제고를 위해 민영화를 향한 길이어야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공공부문 개혁의 일환으로 민영화와 함께 구조조정이 곧잘 거론되고 있다. 현재 구조조정은 공공기관의 통폐합, 일부사업 매각, 기능폐지, 기능이양, 민간위탁 등을 강제하고 또 공공기관의 인력절감 목표를 강제적으로 요구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러한 구조조정은 공공부문을 축소한다는 점에서 개혁이라 할 수 있지만, 통폐합, 사업매각, 인력절감 목표를 강제적으로 할당한다는 측면에서는 개혁에 부합하는 것이 아니다.

공공부문 구조조정은 공공부문에 시장의 자율성과 창의성을 제고하는 방법으로 추진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공공부문의 구조조정은 중장기적으로 공기업의 민영화를 추진하는 과정의 일부로 이해되어야 한다. 물론 정부가 민영화 방향으로 키를 잡기 위하여 강제력을 발휘하는 것은 필요하다. 그러나 이 경우에서도 공공기관에 거시적 성과목표를 제시하여 자율적이고도 점진적인 구조조정이 이루어지도록 가능한 유도해야 한다. 1990년대 말 김대중 정부의 강제적 구조조정은 국가위기에 따른 부득이한 측면이 있었지만 진정한 공기업 개혁이라 할 수는 없다. MB정부의 공공부문 구조조정이 민영화라는 궁극 목표를 향해 보다 세련된 방법으로 유도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옥동석 / 인천대 무역학과 교수
 2008/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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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을 사랑했던 다산 정약용도 관존민비의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200여년이 지난 지금도 많은 사람들은 정부 의존적 사고를 하고 있다. 그러나 정부는 인간이 운영하기 때문에 전지전능한 신이 아니다. 국민이 정부가 많은 일을 하기를 기대하면 할수록, 정부는 그 규모나 권한에서 커지고, 큰 정부는 그 만큼 많은 규제를 하게 되고, 세율은 높아지고, 기업의 활동은 위축되게 마련이다. 선진국으로 발돋움하기 위해서는 정부 의존적인 사고를 버려야 할 때이다.

우리의 삶은 만남의 역사라고도 할 수 있다. 우리는 이 만남을 통해 이해하고 사랑하고 배우고 돕고 하며 삶을 엮어가는 것이다. 부모와의 만남, 스승과의 만남, 좋은 책과의 만남, 친구와의 만남, 연인과의 만남 모두 만남들이다. 이러한 만남을 생각하며 필자는 “다산이 맬서스를 만났었더라면 우리사회가 지금보다는 더 좋아 졌을 터인데”하는 생각을 자주하곤 한다.

과거의 일은 이미 지나간 일이다. 그런 것을 어찌 됐었더라면 하고 이야기를 하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다. 그러나 이미 지난 일이지만 지금에라도 우리가 바람직한 방향으로 우리의 갈 길을 선택하기 위해서 한번쯤 과거 가정법을 상상해 볼 필요가 있다.

다산 정약용과 맬서스 사상의 차이

공우리나라의 다산 정약용(1762~1836)과 영국의 토마스 맬서스(T. Malthus, 1766~1834)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인물들이다. 두 사람 모두 18세기에서 19세기에 걸쳐 산 사람들로 다산은 맬서스보다 4년 일찍 1762년에 태어나 그보다 더 오래 살다가 1836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들이 만일 같은 나라에서 태어났었더라면 분명히 서로 알만한 사이였을 것이다.

다산은 그의 명저 “목민심서”를 포함해 여러 분야에 걸쳐 많은 저술 활동을 했으며, 맬서스는 우리에게도 그의 명저 “인구론”으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그러나 그들이 산 시대에는 오늘날과 같은 통신체계가 없었기 때문에 서로 그 존재를 모른 채 동시대에 지구상에 살다가 간 것이다.

다산은 정부나 관료가 가난이란 문제를 해결하는데 큰 역할을 할 수 있으며 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것이 목민심서의 중요한 내용이다. 그러나 맬서스는 빈민구호를 위한 재정부담은 바람직하지 않으며 빈곤의 해결책은 당사자 개인의 태도에서 찾을 수 있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우리나라의 다산과 영국의 맬서스는 경제문제에 관한 관심을 가졌던 점에서는 비슷했지만 그 견해가 대조적인 면이 있었다. 두 사람 모두 가난이란 문제를 놓고 많은 고심을 했다. 그러나 같은 시대를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의 문화적 배경이 다른 탓인지 대조적인 생각을 했다. 다산은 가난을 보고 가난을 해결하기 위해 정부의 관료들이 해야 할 일에 대해 많은 생각과 논의를 했다. 그는 정부나 관료가 가난이란 문제를 해결하는데 큰 역할을 할 수 있으며 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것이 목민심서의 중요한 내용이다.

그러나 다산과는 대조적으로 맬서스는 빈민구호를 위한 재정부담은 바람직하지 않으며 빈곤의 해결책은 당사자 개인의 태도에서 찾을 수 있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만일 이들이 글로라도 만나 교우 했더라면 다산의 생각도 맬서스를 포함한 동시대의 영국계몽사상가들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그리하여 경제문제에 관련해 우리나라 사람들도 정부 의존적 사고에서 벗어나게 하는데 도움이 됐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다산이 살던 조선 시대는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이 강조되던 유교문화의 중심에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그는 당시에 조선에 전파되어 들어온 기독교를 만날 수 있었다. 그의 매형 이승훈과 큰형 정약현의 처남 이벽이 모두 기독교 전파의 선구자들이었음을 보면 그가 쉽게 기독교를 만날 수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런 연유로 그의 대표적 저서 목민심서의 중요한 부분이 애민육조(愛民六條)인 점에서 보듯 그는 사랑 애(愛)를 많이 생각했다. 그는 그의 저서 목민심서(牧民心書)의 서문에서 자신이 인용한 “목민(牧民)하는 것을 가축을 기르는 것”에 비유한 맹자의 말대로 관(官)은 목동(牧童)처럼, 백성은 양(羊)떼처럼 생각했던 것이다.

인간 삶의 개선은 어떤 지배계층이나 단체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구성원 각자가 책임을 지고 점차적으로 이루어 나가는 것이다. … 가난은 가난한자의 잘못 때문이라며 스스로 해결해야지, 그것을 구제하는 것은 가난한 사람을 의타적으로 만든다.

그는 목민관이 백성을 청렴결백하게, 공평무사하게 다스려 나갈 것을 강조했다. 즉 목민심서의 애민육조에서도 나타나듯이 노인을 봉양하고, 어린이를 사랑으로 기르고, 불쌍한 사람을 구원하고, 가난을 구제 하는 등 백성을 기르려는 마음이 가득하다. 심지어 그는 가난하여 혼기가 지나도록 혼인을 하지 못한 사람은 마땅히 관에서 성혼시켜야 한다고 주장할 정도로 관의 역할과 능력이 미치지 못하는 곳이 없을 정도로 생각 하였다. 그의 생각에 의하면 어디까지나 관은 베풀고 지배하는 위치이고 백성은 동정의 대상, 지배의 대상이었다.

다산이 맬서스를 만났더라면

그는 정조(1752-1800)의 신임과 사랑을 받아 많은 일을 했다. 그의 업적과 저서를 보면 그는 매우 지혜로운 사람이었다. 이 지혜로운 사람이 애담 스미스(Adam Smith, 1723~1790), 리카도(D. Ricardo, 1772~1823) 등을 포함한 동시대 영국 계몽사상가(Anglo-Scottish Enlightenment) 중의 한사람인 맬서스라도 만났었더라면 우리나라에 일찍이 이 사상이 전파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즉 다산의 지적능력에 기초해 영국계몽사상이 일찍이 우리사회에 소개되고 전파되어 우리의 시장경제 사상이 이해되고 정립 됐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 말이다. 그랬더라면 우리나라가 보다 빨리 보다 더 살기 좋은 나라가 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영국계몽사상의 요점은 “사회의 변화는 그 구성원의 변화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즉 인간 삶의 개선은 어떤 지배계층이나 단체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구성원 각자가 책임을 지고 점차적으로 이루어 나가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맬서스는 그의 인구론에서 가난은 가난한자의 잘못 때문이라며 스스로 해결해야지, 그것을 구제하는 것은 가난한 사람을 의타적으로 만든다고 주장했다.

맬서스의 인구론 하면 우리에게는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늘어나는 반면에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라는 명제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가 추가적으로 주장한 인구증가의 억제 필요성에 대한 주장은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사실 그는 만혼 교육 등의 예방적 억제책과, 전쟁 질병 기아 가혹한 노동 등의 적극적 억제책 그리고 도덕적 억제에 의해 인구증가가 억제돼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이러한 주장 때문에 결혼을 집례하기도 하는 목사이기도 했던 그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물론 그는 훗날 주로 교수생활을 했지만 말이다.

정부는 천사나 요정이나 전능한 존재가 아닌 인간이 운영하는 것이다. 국민이 정부가 많은 일을 하기를 기대하면 할수록, 정부는 그 규모나 권한에서 커지고, 큰 정부는 그 만큼 많은 규제를 하게 되고, 세율은 높아지고, 기업의 활동은 위축되게 마련이다.

이런 의미에서 어느 남자가 아이가 많은 것이 가난의 원인이라고 자신의 성기를 자른 소식을 접하고 애절양(哀絶陽: 아이 많은 가난한 남성이 성기를 자른 것을 슬퍼한 다산의 시)을 지었다던가, 가난하여 혼기가 지나도록 혼인을 하지 못한 사람은 마땅히 관에서 성혼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한 다산은 맬서스와 대조가 된다. 다산은 관의 역할과 능력이 미치지 못하는 곳이 없을 정도로 생각하였다. 그의 생각에 의하면 어디까지나 관은 베풀고 지배하는 위치이고 백성은 동정의 대상, 지배의 대상이었다.

정부 의존적 생각의 굴레를 벗자

우리는 아직도 정부를 무소불위(無所不爲)적 존재로 생각하고, 정부 의존적 생각, 관존민비적 생각의 굴레를 벗어버리지 못하고 있다. 지금도 고시 준비하느라 생산대열에 참가치 못한 수많은 젊은 인력이 소모되고, 대학이 있기만 하면 행정학과가 있고, 이공계를 경시(일본도 이 때문에 발목이 잡혀 있다)하고, 지나치게 권력을 추구하고 있는 나라가 현재 우리나라의 모습이다.

그나마 1950년대 이후 자의에서건 타의에서건 영미사상을 받아 들여 이 나마의 성취를 이룩한 것이다. “정부란 국민들이 개별적으로 할 수 없는 일들을 전체국민을 위해 공동으로 하기 위해 존재 하는 것이다”라는 링컨(1809-1965)의 말이나, “영어에서 가장 폭력적인 아홉 개의 단어는 ‘나는 정부공무원인데 도와주려 여기에 있습니다(I'm from the government. I'm here to help you)’이다”라는 레이건(1911~2004)의 말을 우리는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정부는 “금 나와라 뚝딱 은 나와라 뚝딱”의 도깨비 방망이를 갖고 있지 않다. 그리고 정부는 언제나 공정하고 효율적이지도 않다. 정부는 천사나 요정이나 전능한 존재가 아닌 인간이 운영하는 것이다. 국민이 정부가 많은 일을 하기를 기대하면 할수록, 정부는 그 규모나 권한에서 커지고, 큰 정부는 그 만큼 많은 규제를 하게 되고, 세율은 높아지고, 기업의 활동은 위축되게 마련이다.

우리는 그동안 많은 발전을 해 왔다. 정부가 알파요 오메가인 북한과 우리를 비교하면, 그나마 우리가 영미사상을 부분적으로나마 받아 들여 부분적이나마 민간주도의 시장경제를 운용하여 이 나마의 성취를 이룬 것이다. 현재 국민 총생산 기준 남한은 북한의 26배의 생산을 하고 있는 것이다.

명실 공히 선진국대열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영국계몽사상이 보다 더 이 사회에 전파돼야 하겠다. 사회의 변화는 구성원 즉 모두 각기 자신이 변해야 된다는 것, 가난으로부터의 탈피도 내가 해야 된다는 생각이 보다 널리 전파되고 수용돼야겠다. 다산이 2백여 년 전에 만나서 전파했었더라면 더 좋았겠지만, 이제라도 널리 전파하며 실천해야 하는 일은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들의 과제이다. ■

이경원 / 대진대 미국학과 교수
2008/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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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은 삼익악기의 영창악기의 기업결합이 경쟁을 실질적으로 제한하는 것이므로 공정거래위원회가 그 주식을 매각하라고 시정명령을 내린 것은 합당하다는 판결을 내렸다. 법원의 판결처럼 피아노 시장에서 경쟁이 제한되어 소비자들의 이익을 침해하는 것일까? 별로 그럴 것 같지 않다. 노동집약적인 피아노 시장에서 우리나라가 국제경쟁력을 갖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무역 자유화의 결과 외제 피아노는 어디가도 쉽게 볼 수 있다. 이런 상황에 있는 시장에 국내 회사가 하나인 경우와 둘인 경우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1970년대 중반 필자가 법학을 처음 공부할 때 우리나라 법학교과서에서 다루지 않는 것이 있었다. “정책”이었다. 논란이 있는 대목에서 “이것은 입법정책의 문제이다”라고 하면 더 이상 논의가 진전되지 않았다. 법문의 의미를 다투는 이른바 ‘학설’에서도 직접 경제 정책적 관점에서 논리를 전개하는 경우는 별로 없었다. 정부가 경제개발계획을 수립하고 집행하던 시대라서 그랬는지 아니면 군부 독재시대라서 그랬는지 법률가에게 ‘정책문제’는 일종의 금기였고 법률가와 정책은 부적절한 관계였다.

10년 뒤 1980년대 중반 미국 로스쿨에서 공부할 때 받았던 충격의 하나는 끊임없이 ‘정책’을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주요 쟁점마다 거의 예외 없이 정책적 논점(policy questions)이 다루어졌고, 아예 교과서 제목이 “Law and Policy of ○○○" 식으로 되어 있기도 했다. 필자의 눈에는 전혀 법률문제로 보이지 않는 ‘정책적 문제’들을 미국 시민들은 법원으로 갖고 왔고, 미국 판사들은 그런 문제에 대해 판결의 이름으로 결정을 했으며, 미국 사회는 그에 따라 변화하는 것이었다. 지구의 반대편에서 ‘법학’을 공부한 필자는 법이 이렇게 나서도 되나 하는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충격이 정점은 코이퍼(Thomas E. Kauper)교수의 강의였다. 필자는 당시 우리나라에 도입된 지 얼마 안 된 공정거래법을 전공하고 싶었다. 그래서 미국 법무부에서 공정거래 담당 법무차관으로 AT&T의 분할을 주도했던 코이퍼 교수를 지도교수로 정하였다.

코이퍼 교수는 공정거래법 수업을 “공정거래법은 정책이다”라는 말로 시작했고, 수업은 끊임없이 무엇이 좋은 정책인가에 대한 토의로 이어져나갔다. 정책은 빼고 법규정의 문언적 해석으로 가득했던 까칠한 식단에 익숙했던 필자에게 정책으로 가득 찬 호화로운 식단은 소화하기 힘들었고 결국 공정거래법 전공을 포기해야 했다. 귀국한 후 정책을 논하는 법학자로 살기는 힘들 것 같았기 때문이다.

[법의 이름으로 정잭을 논하는 것은] … 사회가 좋은 방향으로 발전해 간다는 증거이다. 중요한 문제를 힘 있는 사람이 일방적으로 결정하는 대신 합리성과 타당성을 판단하도록 훈련된 조직이 결정하는 것이 낫기 때문이다.

시대가 달라져서 이제는 우리나라에서도 법의 이름으로 ‘정책’을 논하는 것이 이상하지 않게 되었다. 국가가 간척사업을 해도 되는지, 회사를 사도 되는지, 시각장애인이 아닌 사람도 안마를 해도 되는지 법원에 물어 보는 세상이다. 이러한 변화는 사회가 좋은 방향으로 발전해 간다는 증거이다. 중요한 문제를 힘 있는 사람이 일방적으로 결정하는 대신 합리성과 타당성을 판단하도록 훈련된 조직이 결정하는 것이 낫기 때문이다.

삼익악기의 영창악기 기업결합 경과

대법원은 지난 5월 29일 공정거래위원회가 삼익악기와 삼송공업이 영창악기의 주식을 인수한 것은 경쟁을 실질적으로 제한하는 것이므로 그 주식을 매각하라고 시정명령을 내린 것은 합당하다는 판결을 내렸다. 이 판결을 읽으면서 법원의 “정책” 판단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한 번 하게 되었다.

영창악기 사건의 시작은 외환위기가 있었던 1990년대 후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56년 창업한 영창악기는 우리나라 피아노시장의 60%이상을 점유하고 있었고 수량기준으로는 세계 3대 피아노 메이커의 하나이기도 했다. 영창악기는 1990년대 후반 약 4천만불을 중국에 투자했는데 노동집약적인 악기산업의 특성이나 영창악기의 자금력으로 볼 때 무리한 결정은 아니었다고 한다.

그러나 외환위기로 자금사정이 악화되어서 1998년 8월 워크아웃에 들어갔고, 2002년 6월에 워크아웃을 졸업하였지만 경영정상화계획은 제대로 시행되지 않아 부채 상환은 물론 퇴직금도 지급할 수 없었다. 자본의 부분잠식으로 유상증자가 어려운 상황에서 법인세 추징까지 있자 결국 증자나 차입을 포기하고 회사를 인수할 사람을 찾게 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경쟁사인 삼익악기에 인수를 제안하여 2004년 3월 삼익악기등이 제3자 신주배정방식으로 영창악기의 주식 48%를 인수하고 경영권을 인수하게 되었다.

삼익악기는 경쟁사인 영창악기를 인수하고 공정거래위원회에 기업결합신고를 했는데 이에 대해 공정거래위원회는 2004면 9월 삼익악기의 영창악기 주식인수는 경쟁을 실질적으로 제한하는 행위라고 보아 1년 이내에 인수한 주식 전부를 제3자에게 매각하라는 시정명령을 내렸다. 시정명령 이후 삼익악기는 투자를 중단하였고 영창악기는 자금압박을 견디지 못하여 부도가 났다. 이후 이 사건은 두 회사로 나뉘어 아래 표와 같이 진행되었다.

<삼익악기>

 

 

 

<영창악기>

영창악기 주식 48% 취득

-

2004.  3. 12.

 

 

공정거래위 주식 매각 명령

-

2004.  9. 24.

 

 

 

 

2004. 10. 20.

-

영창악기 회사정리절차 개시

공정거래위에 이의신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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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11.  1.

 

 

공정거래위 이의신청 기각

-

2005.  1.  5.

 

 

서울고등법원에 항소

-

2005.  2.  4.

 

 

 

 

2006.  3.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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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산업개발 우선협상대상자 선정

서울고등법원 항소 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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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3. 15.

 

 

대법원에 상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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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4.  7.

 

 

 

-

2006.  5.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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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산업개발 지분 57.3% 취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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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7.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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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정리절차 종료

대법원 상고 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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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5. 29

 

 

사건의 법리적 쟁점과 법원의 판결

공정거래법 전공을 포기한 필자는 이 사건의 법리적 쟁점들, 예를 들면 신품 피아노와 중고 피아노를 같은 시장으로 봐야 하는지 다른 시장으로 봐야 하는지, 시장 점유율을 경쟁의 결과로 봐야 하는지 경쟁제한의 이유로 봐야 하는지, 국내 시장이 중요한지 국제시장이 중요한지를 판단할 처지에 있지 못하다. 그렇지만 이 사건의 진행경과는 공정거래법에 관한 문외한들에게도 여러 가지 생각할 거리를 던져 주고 있다.

서울고등법원에 소송이 제기된 2005년 2월에는 영창악기에 대해 회사정리절차가 개시되어 진행되는 중이었고 판결을 내린 2006년 3월에는 이미 정리회사 영창악기의 M&A가 진행되어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된 현대산업개발이 기업인수를 위한 실사를 하고 있었다. 영창악기에 대한 회사정리절차는 삼익악기와 공정거래위원회와의 다툼과는 무관하게 진행되고 있어 서울고법이 원고의 주장을 인정해서 공정위의 주식매각명령을 취소해도 영창악기를 회사정리절차개시 이전 단계로 돌릴 수는 없는 것이었다. 서울고법이 어떻게 판단하든지 대주주인 삼익악기가 갖고 있는 영창악기 주식은 회사정리절차에서 대부분 소각되어 삼익악기가 주식취득을 위해 투자한 100억여원을 회수할 기회가 없게 되었다. 만일 서울고법이 공정위의 명령이 위법하다고 판단하면 삼익악기는 공정위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을 뿐이었다. 이 점은 대법원 상고심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행정부의 정책이 법의 이름으로 시행되는 한 법원 역시 행정부에 못지 않는 정책적 고민을 하고 판단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공정위는 자신의 정책판단대로 법을 집행할 것이고 법원은 면죄부를 주는 역할만 하게 된다.

이미 새 주인이 나온 상태에서 옛 이야기를 들추어내어 잘잘못을 가리는 일은 법원으로서도 재미없는 일이다. 일만 복잡하게 만든다는 소리를 들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행정부의 정책이 법의 이름으로 시행되는 한 법원 역시 행정부에 못지 않는 정책적 고민을 하고 판단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공정위는 자신의 정책판단대로 법을 집행할 것이고 법원은 면죄부를 주는 역할만 하게 된다.

대법원 판결은 고등법원 판결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는데 원고의 상고를 기각하는 이유로 우리나라 신품 피아노 시장을 관련시장으로 획정하여, 이 시장에서 영창악기와 삼익악기가 결합하면 시장을 사실상 독점하게 되고, 이 결합이 효율성을 증대하거나 회생이 불가능한 회사와의 결합이 아니라는 점을 들었다. 이러한 사실판단과 법리적용에 대해서는 논자에 따라 다른 의견이 있을 수 있다. 그렇지만 좀더 근본적인 정책적 쟁점에 대해 대법원이 침묵하고 있는 점은 못내 아쉬움으로 남는다.

우선 영창악기에 대한 회사정리절차가 이미 시작된 후 내려진 고등법원 판결이나 종결된 이후 내려진 대법원의 판결에서 먼저 결정해야 했던 것은 부실기업의 구조조정이 부도 전 제3자 인수에 의한 방식이 더 나은 것인지 아니면 회사정리절차(현행 도산법이라면 회생절차)에 의한 방식이 더 나은 것인지에 관한 “정책적 판단”이였다.

이 사건의 본질은 회사와 그 이해관계자의 이익과 소비자의 이익 중 누구의 이익을 우선해야 하는가 하는 “정책 판단”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법원의 판결은 이 문제에 대해 분명한 언급을 하지 않고 있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당사자의 합의에 따른 구조조정이 가능하다면 그것이 회생절차를 통해 구조조정을 하는 것보다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회생절차는 일반적으로 채권자나 기존 주주의 권리를 감축하고, 절차를 진행하는데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회사와 그 이해관계자들에게 상당한 불이익을 주게 된다. 이 사건에서도 영창악기가 회사정리절차에 들어감으로써 21개월 동안 법원의 감독하에 관리인이 경영권을 행사하였다.

영창악기의 회사정리계획을 정확하게 알지 못하지만 일반적인 관행을 미루어 짐작해 보면 기존의 주주는 권리를 모두 잃었을 것이고 채권자들도 채권을 전액 변제받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사건의 본질은 회사와 그 이해관계자의 이익과 소비자의 이익 중 누구의 이익을 우선해야 하는가 하는 “정책 판단”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법원의 판결은 이 문제에 대해 분명한 언급을 하지 않고 있다.

정책 판단자로서 법관의 역할

설사 소비자의 이익을 우선한다고 하여도 삼익악기와 영창악기의 기업결합으로 피아노 시장에서 경쟁이 제한되어 우리나라 소비자의 이익이 정말 침해되었을까? 공정거래법을 잘 모르는 필자로서는 나서기가 조심스럽지만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에 기대어 참견을 한다면, 별로 그럴 것 같지 않다. 노동집약적인 피아노 시장에서 우리나라가 국제경쟁력을 갖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고급 피아노의 대명사인 야마하는 바다 건너 일본 회사이고, 중국은 저렴한 노동력을 바탕으로 세계 3대 피아노 메이커 중 하나를 갖고 있다. 무역 자유화의 결과 외제 피아노는 어디가도 쉽게 볼 수 있다. 이런 상황에 있는 시장에 국내 회사가 하나인 경우와 둘인 경우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우리나라 피아노 산업은 자식을 많이 낳고, 낳은 자식마다 피아노를 가르치던 세대가 만들어 준 것이다. 이제 자식도 많이 낳지 않고, 피아노 말고도 가르칠 것이 많은 시절이 되었다. 더욱이 피아노는 보호받을 상품도 아니어서 국제적인 경쟁에 완전히 노출되어 있다. 이런 상황에서 피아노 산업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보다 근본적인 정책 판단을 판결에서 듣고 싶었다.

지금 당장 법원의 판단에 따라 해당 회사의 운명이 달라지는 것은 아닐지라도 법원이 근본적인 정책 문제에 대한 판단을 해 줘야 공정거래위원회가 그에 맞추어 법을 집행하게 된다. 그런 판단 없이 공정거래위원회의 처분이 옳다고 판결을 하면 그 전제가 되는 정책적 쟁점에 대해서도 같은 생각을 하는 것인지 아닌지 알 수가 없다. 법집행의 전제가 되는 근본적인 정책적 쟁점에 대해 법원이 더 적극적으로 판단해 줄 것을 기대한다. ■

오수근 / 이화여대 법과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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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자재 가격과 유가 급등, 물가상승 등으로 인해 경기침체가 지속되고 있다. 혹자는 재정과 금융정책 등 각종 대책을 주문하고 있으며, 정부도 유가안정 대책, 물가안정 대책 등을 마련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들은 실효성이 없는 일시적인 미봉책에 불과하며 자원배분을 왜곡시키고 부작용만 키워 경제를 더욱 악화시킬 뿐이다. 그러므로 물가정책이나 고유가 문제 등은 시장원리에 따라 해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정부는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목표치 3%보다 훨씬 높은 5%를 넘어서고 하반기 성장률도 3%대로 떨어질 것이 우려되자 경제정책의 기조를 대폭 수정하였다. 수정이 아니라 정책기조의 변경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 성장우선 정책이 물가안정 정책으로 급선회하였기 때문이다. 현 정부는 다급하고 초조한 듯하다. 어떤 정권도 대선 공약을 지켜내지 못했지만 그래도 현 정권처럼 이렇게 정권을 잡자 말자 물거품처럼 서민들의 가슴을 허하게 만든 적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국민들에게 별 면목이 서지 않은 것은 당연하다. 현 정권의 지금 처지는 사면초가, 내우외환으로 말하기도 부족할 정도이다. 무능력, 무소신, 무책임하기까지 하다는 등 갖은 험한 소리를 다 듣고 있다. 안타까울 따름이다. 이 대통령은 지금의 상황을 지난 10년 집권 세력의 끈질긴 저항과 준동으로 해석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현 정권이 극복해 내야 할 과제들이다. 어려울수록 원칙에 충실하고 시장의 흐름을 거스르지 않는 것이 지도자의 올바른 처신이다. 그것이 국민들에게 당장은 감동을 주지는 못할지언정 결국 한국 경제를 위하는 길이다.

시장이 살려준 쇠고기 정국

쇠고기 파동은 정치적으로는 미숙하였을지 모르지만 경제적으로는 무엇이 올바른 길인지를 처절하게 경험하게 하였다. 삶이란 최고가 아니라 최선의 추구이며, 검역권보다 앞서는 것이 자기주권이다.

현 정부는 섣부르게 미국과 쇠고기 협상을 타결하였고 그것이 반대세력의 빌미를 제공하였다. 어떤 경우에도 최고와 안전을 들이대는 이상 그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의 전략은 아주 성공할 수 있었다. 2개월이 넘는 동안 이 나라는 아수라장이 되었고 국가의 기운이 조금씩 쇠락의 길로 접어드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갖게 하였다.

선택거리가 많아지고 경쟁이 심화되면 업자에게는 이익 보는 자와 손해 보는 자가 생기지만 소비자에게는 손해 보는 자 없이 모두에게 더 큰 혜택이 가기 마련이다. 우리 모두는 업자이기 이전에 소비자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지금 쇠고기 시장을 가보아라. 그러면 지난 몇 달 동안 한국에서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났는지를 슬픔과 분노로 다가올 것이다. 한우를 비롯하여 수입 쇠고기의 가격이 급락하였고, 쇠고기의 대체재인 돼지고기의 가격도 크게 떨어졌다.

우리는 무엇 때문에 피터지게 싸우면서 그 난리를 쳤는가? 단지 축산 농가를 위해서 그러했는가? 선택거리가 많아지고 경쟁이 심화되면 업자에게는 이익 보는 자와 손해 보는 자가 생기지만 소비자에게는 손해 보는 자 없이 모두에게 더 큰 혜택이 가기 마련이다. 우리 모두는 업자이기 이전에 소비자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성장보다 물가안정 정책이 친시장적이다

어떤 돌파구도 보이지 않던 쇠고기 정국은 이처럼 미국산 쇠고기가 시장에 풀리면서 순식간에 해결되었다. 무엇이 진실인지를 시장이 판가름해준 것이다. 시장은 이처럼 무서울 정도로 한 점의 거짓 없이 세상 사람이 원하는 바를 온전히 드러내준다.

시장의 이런 진실은 그러나 누구의 간섭도 없어야 한다는 절대적인 조건을 전제로 한다. 현 정부는 시장의 힘을 알기 때문에 갖은 욕과 비판을 감내하면서 어리석을 정도로 기다렸을 것이다. 그래서 일견 현 정부는 아주 시장지향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실은 결코 친 시장적인 정권이 아니다. 정권을 잡은 지 고작 5개월 남짓 하지만 도처에 비 시장적인 정책들이 난무하다. 사실 현 정권의 대선 공약인 7-4-7 구호만큼 시장 개입적인 의사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은 없다. 그의 성장 우선 정책은 불행하게도 세계 경제 상황의 악화와 맞물리면서 취임 5 개월 만에 좌초하고 말았다. 어쩌면 그것이 한국 경제의 미래를 위해 약일는지도 모른다.

현 정권의 정책기조가 시장 친화적이라면 성장이 아니라 물가안정이 우선 되어야 했다. 성장은 현재 소비를 억제한 결과이며, 시장경제에서 그 억제의 정도는 개인의 자유로운 의사에 따라야 한다.

현 정권의 정책기조가 시장 친화적이라면 성장이 아니라 물가안정이 우선 되어야 했다. 성장은 현재 소비를 억제한 결과이며, 시장경제에서 그 억제의 정도는 개인의 자유로운 의사에 따라야 한다.

그러나 성장 목표를 설정해놓고 이를 밀어붙이기 위해서는 정부가 어떤 형태든지 개인의 의사를 무시하는 시장 개입 정책을 구사하지 않을 수 없다. 반면에 물가안정은 그 자체로 시장의 불확실성을 제거하여 개인의 자유로운 거래를 뒷받침한다. 그래서 현 정부의 정책목표와 정책기조는 처음부터 엇박자였다. 시장 친화적이라고 하면서 성장우선 정책을 추진한 것은 시장을 어설프게 알고 있었든지 아니면 정직하지 못한 포퓰리즘의 또 다른 모습일지 모른다.

성장을 희생하지 않고서는 물가를 잡을 수 없다

주요 포털사이트인 네이버의 경제면에 올려 진 신문사들의 최근 기사 제목을 보면 한국경제는 곧 절단이 날 것만 같다. 2차 외환위기라는 말이 나오고 스태그플레이션 국면에 이미 진입한 것처럼 보도되고 있다. 위기의 경보를 알리는 이 모든 외침은 정부를 향하고 있다. 정책수단을 강구하여 이 위기를 수습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원자재와 유가의 급등과 같이 비용 상승으로 인한 경기침체와 물가 상승에는 안타깝게도 마땅한 묘책이 없다. 혹자는 재정과 금융 정책의 적절한 혼합을 주문하기도 한다. 이론적으로는 그럴듯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대내외 경제 환경이 급변하고 내일의 유가도 정확히 예측하기 힘든 상황에서 경제를 악화시킬 가능성을 높일 뿐이다.

원자재와 유가의 급등과 같이 비용 상승으로 인한 경기침체와 물가 상승에는 안타깝게도 마땅한 묘책이 없다. 혹자는 재정과 금융 정책의 적절한 혼합을 주문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대내외 경제 환경이 급변하고 내일의 유가도 정확히 예측하기 힘든 상황에서 경제를 악화시킬 가능성을 높일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몇 가지 원칙에 충실 하는 수밖에 없다. 먼저 성장을 희생하지 않고서는 물가를 잡을 수 없으며 물가가 안정된 후에야 성장을 위한 여러 정책 대안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스태그플레이션이 무서운 것은 그것이 비용-물가-임금 인상의 악순환적인 고리를 낳기 때문이며 그 고리를 끊기 위하여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은 물가 상승을 억제하는 것이다. 지속적인 물가 상승은 화폐적인 현상이므로 정부는 통화정책으로 그것의 통제가 가능하다.

특히 작금의 어려운 세계경제는 석유 수급의 불안 외에 글로벌 유동성의 과도한 팽창이 그 원인이기 때문에 무엇보다 유동성 관리를 위한 긴축 금융정책이 필요하다. 유동성 공급을 억제하게 되면 취약한 가계와 중소기업이 힘들어지게 마련이다. 그러나 이 고통을 피하려다 보면 더 많은 사람들이 더 큰 충격을 오래 동안 겪을 수밖에 없다. 여우 굴 피하려다 호랑이 굴을 만나는 짝이다. 비록 어려운 시기를 겪을지라도 먼저 경제체질을 단단히 해놓는 것이 양심적인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이다.

가격 관리 환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 대통령은 취임 후 한 달도 지나지 않아 불쑥 50개 생필품의 가격상승을 억제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정부는 이 지시에 따라 공공요금의 동결, 생필품의 유통체계 개선, 원재료의 할당관세 인하, 수입원가 공개, 부가세 면제 추진, 시민단체로 하여금 가격 인상 업체의 감시 등의 부산을 떨었다.

이 중에는 정부가 감내하면서 할 수 있는 일도 있고 시장을 직접 교란하는 정책도 있다. 그런데 이들 품목들 중 상당수의 가격은 소비자물가보다 더 높게 상승하였다. 정부의 노력이 전혀 힘을 쓰지 못한 것이다.

그것[가격관리]의 실효성은 그다지 높지 않으며 자원배분의 왜곡과 같은 부작용만 키울 뿐이다. 가격관리의 환상에서 벗어나고 공공요금도 시장의 원리에 따라 점진적으로 현실화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동수 기획재정부 차관은 지난 7월 22일 서민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주요 품목의 가격을 점검하여 다시 선제적 대응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인플레이션 기대 심리를 낮추고 미시적 조정으로 서민생활의 충격을 조금씩 가중시키고자 하는 의도는 알겠지만, 그것의 실효성은 그다지 높지 않으며 자원배분의 왜곡과 같은 부작용만 키울 뿐이다. 가격관리의 환상에서 벗어나고 공공요금도 시장의 원리에 따라 점진적으로 현실화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개인은 힘들겠지만 유가급등과 물가상승에 순응하는 길밖에 없다

생필품 가격의 상승은 수입 농산품 및 원자재 가격의 상승과 유가의 급등과 같은 해외 요인, 그리고 성장을 위한 정부의 잘못된 고환율 정책에 기인하였다. 정부는 잘못된 환율 정책을 깨닫고 있기 때문에 그나마 다행이지만, 해외 요인은 정부로서도 어떻게 할 마땅한 대안이 없다.

문제를 어렵게 만드는 것은 지금의 유가 급등이 과거 두 차례의 석유 파동 때와는 달리 신흥국가들의 경제발전으로 인한 세계 석유 수요의 증가에 기인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지금의 고유가 추세가 추가적인 공급 증대나 대체 에너지의 개발이 없는 한 세계 경제가 건강하다면 항상 같이 가야할 짐이며 동반자일 수밖에 없음을 시사한다.

그래서 개인은 고유가에 가능한 빨리 적응하는 길밖에 없다. 보조금 지급이나 유류세 인하와 같은 조치는 일시적인 미봉책에 불과하며 결국 우리의 부담으로 남게 된다.

시장은 우리 모두에게 새로운 대체 에너지 개발과 석유 자원의 절약을 명령하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환경론자들이 원하는 것이고 우리의 미래 세대를 위하는 길이 아닌가? 시장은 결코 환경을 파괴하고 낭비를 부추기는 기구가 아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단지 이익 집단의 요구에 굴복하는 정부일 뿐이다. ■

배진영 / 인제대 국제경상학부 교수

2008/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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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권력구조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개헌 논의가 한창이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국가권력을 어떻게 제한할 것인가의 문제인데, 이에 대한 논의는 찾아보기 힘들다. 역사적으로 국가권력을 제한하는 헌법을 가진 영국과 미국은 그렇지 않은 프랑스, 독일보다 훨씬 더 큰 자유와 번영을 구가하고 있다. 구 사회주의 국가였던 동유럽 국가들 가운데 국가권력을 억제하고 경제에 대한 국가 간섭을 제한하는 나라는 승승장구를 하고 있는 반면, 그렇지 못한 나라들은 빈곤 속에서 허덕이고 있다. 그래서 국가권력을 제한하는 헌법규칙이 중요하다.

정치권이나 학계에서 개헌논의가 한창이다. 쟁점은 대체로 내각책임제냐 대통령중심제냐, 분권형 대통령제냐 또는 이원집정제냐, 대통령 연임제냐 아니냐, 부통령제를 둘 것인가 등 권력구조에 관한 것이다. 이것은 “어떻게 국가권력을 조직하는 것이 적합한가?”에 관한 문제, 즉 헌법규칙으로서 ‘조직규칙(organizational rule)’의 문제이다.

이에 집착하는 이유는 이해할만하다. 대통령을 우리 손으로 뽑기만 하면 만사가 해결될 것으로 믿고 대통령 직선을 중심으로 1987년 개헌을 했다. 그러나 우리가 믿은 대로 일이 잘돼가는 것이 아니었다. 1987년 체제는 우리를 실망시켰다. 경제는 불안해졌고 고용도 불안하고 성장도 불안해졌다. 정치권은 무책임하고 그 결과, 모든 피해는 국민들이 짊어져야했다. 개헌한지 20년이 지난 금년, 그리고 헌법을 제정한지 60년이 되는 금년,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겹겹이 쌓인 규제 덩어리와 경제의 취약성이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권력구조와 관련된 헌법을 개정하고자 논의가 한창이다. 1987년 체제의 민주주의는 지속가능하지 못하니까 새로이 ‘지속가능한 민주주의(sustainable democracy)’를 찾아야 한다고 한다. 이런 논의는 대단히 고무적이고도 매우 중요하다.

개헌한지 20년이 지난 금년, 그리고 헌법을 제정한지 60년이 되는 금년,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겹겹이 쌓인 규제 덩어리와 경제의 취약성이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권력구조와 관련된 헌법을 개정하고자 논의가 한창이다. 그러나 국가권력구조에 치중하는 개헌논의가 충분한가의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그러나 국가권력구조에 치중하는 개헌논의가 충분한가의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왜냐하면 “어떻게 국가권력을 적합하게 조직할 것인가”에 대한 해답으로서 적합한 헌법적 제도를 찾았다고 해도 이런 헌법으로는 도저히 해결 할 수 없는 아주 중차대한 문제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국가권력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제한할 것인가”의 문제, 간단히 말해서 ‘제한규칙(limiting rule)’의 문제가 그것이다. 국가권력의 조직문제와 국가권력의 제한 문제는 원리적으로나 실천적으로 분명히 구분해야 한다.

국가의 권력을 효과적으로 제한하는 헌법규칙의 문제가 우리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에 적합한 헌법 개정이 없이는 어떤 개헌으로도 규제의 늪에 빠진 오늘의 침체된 한국경제를 구출하여 번영의 길로 안내할 수 없다는 것, 이것이 우리가 개헌에 관한 거대한 담론의 장(場)에 진지하게 제시하려는 관점이다. 이를 위해서 우선, 우리가 분명히 해야 할 것은 두 가지 헌법규칙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두 가지 종류의 헌법규칙: 제한규칙과 조직규칙

조직규칙은 대통령제, 내각제, 등과 같은 문제뿐만 아니라 의회의 구성방법, 대통령이나 그 밖의 정치적 인물의 선거제도, 헌법재판소의 구성, 정당조직에 관한 헌법조항, 투표권 등도 조직규칙에 속하는 사항이다. 집단적 의사결정 방법, 또는 정부에 할당된 자원의 관리 방법 등도 조직규칙에 속한다.

그러나 이와는 엄격히 구분해야 할 제한규칙은 국가의 역할과 국가의 의무를 무제한으로 허용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엄격히 제한하기 위한 헌법규칙이다. 조직규칙은 국가의 과제가 무엇이고 국가의 활동범위가 얼마나 제한해야 하는가의 문제와는 전적으로 다르다.

<제한 규칙 사례>

  • 정부지출규모, 지출용도를 헌법으로 제한하거나 적자예산을 엄격히 제한하는 헌법규칙
  • 세율을 누진세율 대신에 단일세율로 정하는 것
  • ‘편들기’나 ‘편 가르기’ 같은 차별적인 내용을 가진 입법을 억제하는 헌법규칙
  • 개인의 자유와 재산을 보호하는 것을 국가의 제일의 의무라고 천명하는 헌법규칙
  • 복지나 재분배를 위한 정부지출을 제한하는 헌법규칙

헌법규칙으로서 이런 제한규칙은 국가의 권력을 제한하여 국가로부터의 개인의 자유와 재산의 침해를 막기 위한 것들이다. 국가라고 해서 자의적으로 민간인의 재산과 명예, 그리고 인격을 침해해도 되는 것이 아니다. 국가도 시민들과 똑같이 타인들의 재산, 명예와 인격을 침해하는 것을 막아서 모든 사람들의 자유를 보장하는 헌법을 찾는 것이다.

헌법규칙의 이와 같은 구분과 밀접한 관련을 가진 것이 ‘헌법실패’와 ‘정부실패’의 개념이다. 헌법실패는 국가의 권력을 적절히 제한하지 못하여 생겨나는 현상이다. 정부실패는 적절한 제한 규칙이 있음에도 선거제도 또는 권력배분 등과 같은 적합한 조직규칙의 불비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두 가지 규칙의 구분은 이상적인 두 가지 정부의 구분과 동일하다는 것이다. 민주주의와 자유주의의 구분이 그것이다. 조직규칙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 민주주이다. 이에 반하여 제한규칙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 자유주의이다.

중요한 것은 국가권력을 제한하는 것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조직규칙과 제한규칙 가운데 어떤 것이 더 중요한가의 문제이다. 내각제를 가진 나라와 대통령제를 가진 나라를 비교하면 무엇이 중요한가를 알 수 있다. 독일과 영국을 보자. 모두 내각제이다. 그럼에도 경제적 성과는 전적으로 다르다. 캐나다의 프레이저 연구소(Fraser Institute)의 보고에 따르면 얼마나 자유가 많은가를 말해주는 ‘자유지수’에서 영국은 경제자유가 많기로 세계에서 5위권에 속한다. 그러나 독일은 20위권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런 자유지수의 차이의 경제적 결과다. 실업률에서 독일은 영국보다 항상 2~3배 높고 성장률은 배 이상 낮다. 왜 이런 차이가 나는가? 이 문제는 조직규칙과 관련된 내각제로는 설명할 수 없다. 다 같은 내각제임에도 경제적 성과는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독일헌법에는 경제와 관련하여 국가권력에 대한 제한규칙이 없다. 헌법은 시장 간섭에 대해서는 의회의 전권에 맡겼다. 경제관련 불문 헌법이 있기는 하다. 이른바 ‘사회적 시장경제’가 그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국가의 과제와 관련하여 엄격한 제한이 없다. 오히려 국가의 권력을 제한 없이 불러오는 것이 사회적 시장경제다.

권력구조는 중요하지 않고 국가권력을 제한하는 것이 중요하다. 역사적으로 국가의 권력을 제한하여 개인의 자유와 재산을 보호한 나라는 번영했고 그렇지 못한 나라는 망했다. … 산업혁명이 중국에서 일어나지 않고 하필이면 유럽에서 발생한 이유도 시장경제의 기반이 되는 재산과 자유의 보호 때문이었다.

그러나 영국의 불문헌법은 고유한 자유주의 전통에 따라 국가권력을 제한하여 개인의 자유와 재산을 보호하는 것을 중시한다. 바로 이 차이가 독일경제와 영국경제의 차이를 설명하는 중요한 요인이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국가권력을 제한하는 헌법을 가진 나라의 경제적 번영이 그렇지 못한 나라보다 훨씬 더 크다는 것이다.

이 사실은 대통령 중심제인 미국과 프랑스의 비교에서도 드러난다. 미국의 자유지수도 역시 영국과 마찬가지로 5위권이다. 그러나 프랑스는 52위권이다. 미국의 실업률에 비하여 프랑스의 그것은 3배 정도나 된다. 미국의 성장률은 프랑스보다 2배 이상 높다. 다 같은 대통령 중심제임에도 이런 차이를 가져오는 것도 미국은 국가의 권력을 제한하는 헌법을 가진 반면에 프랑스는 그런 나라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권력구조는 중요하지 않고, 국가권력을 제한하는 것, 이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영미에나 유럽에만 적용되는 특수한 것이 아니라, 보편적 원리이다. 역사적으로 국가의 권력을 제한하여 개인의 자유와 재산을 보호한 나라는 번영했고 그렇지 못한 나라는 망했다. 로마의 흥망성쇠는 물론 남미도 국가권력을 제한하는 헌법을 가지고 있는가에 좌우되었다. 산업혁명이 중국에서 일어나지 않고 하필이면 유럽에서 발생한 이유도 시장경제의 기반이 되는 재산과 자유의 보호 때문이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권력구조에 초점을 맞추는 개헌론은 ‘1987년 체제’의 실패를 잘못된 권력구조에서 찾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착각이라는 것은 경제관련 한국헌법을 보면 또렷하게 드러난다.

헌법이 전제하는 사회적 시장경제 틀렸다

경제관련 헌법을 검토해보자. 한국헌법은 경제에 대한 정부의 간섭을 제한하는 효과적인 헌법규칙이 없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오히려 그것은 정부의 광범위한 간섭을 요구하고 있다. 그 간섭은 경제활동 규제, 특정 산업 보호육성, 복지와 분배정책 등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표 1> 헌법상 정부간섭의 유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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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 조항과 정부간섭의 내용

경제활동 규제 

  • 제119조 2항(균형성장, 경제안정, 소득분배, 시장지배와 경제력 남용억제, 경제민주화를 위한 규제와 조정)
  • 제120조(자연자원에 대한 제한적 특허, 국토와 자원의 균형개발을 위 한 계획)
  • 제121조(경자유전원칙, 농지의 임대차의 제한)
  • 제122조(국토의 균형발전을 위한 이용과 개발제한)
  • 특정산업 보호육성

  • 제123조(농어촌 개발계획, 지역의 균형발전, 중소기업보호육성, 농수산물가격안정과 농어민 보호)
  • 제124조(소비자 보호운동의 보장)
  • 제125조(대외무역의 육성, 규제, 조정)
  • 제127조(국가의 과학기술개발, 국가표준제도 확립)
  • 복지와분배 

  • 제32조(노동의 권리와 의무를 규정, 적정임금과 최저 임금 보장, 고용증대 노력, 년소자와 부녀자 특별보호, 국가유공자 유가족 고용우선)
  • 제34조(사회보장, 사회복지의 증진, 여자의 복지, 노인과 청소년 복지, 신체장애자 질병 노령)
  • 제35조(환경권과 주택개발정책)
  • 현행헌법이 추구하는 경제질서를 헌법학계에서는 ‘사회적 시장경제’라고 부르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확인하고자 하는 것은 한국헌법은 경제와 관련하여 국가권력을 효과적으로 제한하는 헌법규칙이 없다는 것, 오히려 국가에게 거의 무제한의 간섭권을 부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회적 시장경제는 국가권력을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권력을 거의 무제한 불러들이고 있다. 이 맥락에서 흥미로운 것은 왜 현행헌법은 경제와 관련하여 국가 권력을 무제한 불러들이고 있는가의 문제이다. 그것은 자유시장경제에 대한 불신 때문이다. 제헌헌법부터 현행헌법에 이르기까지 관통한 한국헌법의 기조는 자유시장경제에 대한 불신이었다. 자유시장경제는 빈곤의 문제, 성장, 분배, 환경, 고용과 같은 경제문제의 해결사가 아니라 그런 경제문제의 주범이라는 것이다.

    지난 반세기 동안 … 역사적 경험의 결과만 본다고 해도 (우리) 헌법이 전제하고 있는 경제관(사회적 시장경제)은 틀렸다. … 시장경제원칙을 확실하게 지킨 나라나 정부는 빈곤의 문제는 물론 성장과 번영 그리고 분배문제, 환경문제 심지어 주택문제까지도 성공적으로 해결했다.

    그러나 지난 반세기 동안 이론적 역사적 경험의 결과만 본다고 해도 헌법이 전제하고 있는 경제관은 틀렸다는 것이 또렷이 드러난다. 역사적 경험을 통하여 우리는 성공한 나라와 실패한 나라를 구분해주는 중요한 기준을 발견할 수 있다. 성공한 나라는 한결같이 개인의 자유와 재산을 확실하게 보호한 나라였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시장경제원칙을 확실하게 지킨 나라나 정부는 빈곤의 문제는 물론 성장과 번영 그리고 분배문제 환경문제 심지어 주택문제까지도 성공적으로 해결했다는 것이다.

    가장 최근의 사례만 보아도 확실하다. 과거 사회주의 국가였던 동유럽국가들 가운데 사회주의의 탈을 벗고 시장경제원칙을 지켰던 발틱 3국이나 헝가리, 체코 등은 버젓이 중진국의 대열에 들어섰다. 그러나 사회주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한 나라들은 아직도 빈곤에 허덕이고 있다. 개인의 자유와 재산권을 지키지 못한 남미국가들도 빈곤의 악순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매한가지이다.

    독일만 해도 그렇다. 자유시장경제를 확실히 지켰던 1950~60년대에는 생산성도 높고 성장도 높았다. 실업 문제도 만족스럽게 해결했고 분배도 양호했다. 그러나 정부의 간섭이 심해지기 시작했던 1970년대 이후에는 정부가 커지면서 생산성도 줄어들었고 성장도 느렸고 실업은 급격히 늘어났다. 흥망성쇠는 시장경제를 제대로 지키느냐에 달려있다는 것은 스웨덴과 프랑스도 예외가 아니었다. 영국의 대처수상과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은 침체의 늪에서 자국경제를 살렸다. 확실하게 시장경제원칙을 지켰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우리가 확인하고자 하는 것은 자유시장경제에 대한 한국헌법의 불신은 이론적 근거는 물론 경험적 역사적 근거도 없다는 점이다. 그리고 국가의 간섭이 성공을 거둘 수 있다는 한국헌법의 신뢰도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1987년 체제’의 실패는 국가권력을 제한하지 못한 헌법실패

    다시 ‘1987년 체제’의 실패 원인의 문제로 돌아오자. 현행헌법은 경제와 관련하여 국가권력을 제한하는 헌법조항이 없다. 그렇다면 1987년 체제의 실패원인은 뚜렷하다. 국가권력을 효과적으로 제한하는 제한규칙을 제대로 마련하지 못하고 오히려 국가에게 거의 무제한의 권력을 허용한 헌법 때문이다. 1987년 체제, 즉 이른바 민주화 체제는 국가권력을 제한하는데 초점을 맞춘 체제가 아니라 국가권력의 조직에 초점을 맞춘 체제이다. 국가권력의 제한에는 소홀이 한 체제이다. 왜 소홀이 했는가?

    현행헌법은 경제와 관련하여 국가권력을 제한하는 헌법조항이 없다. 그렇다면 1987년 체제의 실패원인은 뚜렷하다. 국가권력을 효과적으로 제한하는 제한규칙을 제대로 마련하지 못하고 오히려 국가에게 거의 무제한의 권력을 허용한 헌법 때문이다.

    그 이유는 대통령만 우리 손으로 뽑으면 만사가 해결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주민들이 자신들을 대신하여 통치할 대표자들을 다수결을 통해 주기적으로 보통, 비밀 선거를 통해 통치자를 뽑는 민주주의가 이루어지면 경제적 번영도 이루어진다고 믿었다. 1987년 헌법 개정에서 사람들은 민주적 과정만 일단 지킨다면, 국가권력에 대한 다른 일체의 제한이 불필요하다는 환상에 빠져버렸던 것이다. 이런 환상 때문에 권력을 효과적으로 제한하는 제한규칙의 마련을 소홀히 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제한되지 않은 민주주의의 위험성이 현실로 등장했다.

    정당간의 경쟁에서 집권에 승리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지지층이 필요하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지지층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지금 당장은 피해가 생긴다고 해도 모든 사람들에게 장기간에 눈에 띄지 않게 조금씩 이익을 가져다주는 장기정책보다는 특정 집단에게 집약적으로 이익을 주는 단기적인 정책을 표방하는 정당이 승리한다. 더구나 불특정 다수에게 비용을 부담하게 하고 편익은 특별한 계층이나 산업에게 주는 지출정책을 표방하는 정당이 승리한다.

    이런 정치적 과정의 결과가 현실로 나타났다. 시혜적인 복지정책이 증가하고 이를 위한 지출도 증가했다. 지지표 때문에 수도권규제도 풀지 못하고 민영화도 추진하지 못하고 있다. 서민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일시적으로는 효과가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어느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 생필품 가격규제도 도입한다. 소액주주의 운동도 강화되어 그럴듯한 이유를 들어 대기업과 경영자를 심하게 구속하는 제도도 도입되었다. 노조의 힘으로 노동시장의 경직성을 강화하는 제도도 실현되었다. 다수결논리에 따른 대기업규제, 부동산 규제가 강화되었다.

    계몽사상가들은 프랑스 혁명을 보면서 민주주의를 제한하지 않으면 그것은 왕이나 군주의 절대권만큼이나 무서운 것이라고 여겼다. 그들은 그래서 제한적 민주주의를 요구했다. 민주적이라고 해도 국가권력은 제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민주주의는 자제능력이 없다고 생각했다.

    이런 정책들의 결과, 수많은 통계가 입증하듯이 지난 10수년간 성장잠재력은 물론 경제성장률도 지속적인 하강추세를 보여주고 있다. 설비투자도 저조하다. 고용증가도 정체되었고 빈곤층도 증가하고 있다. 정치는 민주주의인데 경제는 불안하다. 이것이 1987년 체제의 실패를 상징한다.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스코틀랜드 계몽주의

    이와 동일한 실수를 이미 오래전에 저지른 것은 유럽 국가였다. 왕이나 군주의 주권이 국민자치와 국민주권으로 전환되면, 자유와 재산의 보장 문제는 자동적으로 해결될 것이라고 믿었다. 이런 믿음 때문에 절대적 권력을 제한하기 위해 고안되었던 법의 지배, 권력분립, 법 아래에서의 정부, 그리고 공법과 사법의 구분과 같은 자유주의 원칙이 경시되었다. 정부에 대한 민주적 통제가 이루어지면 권력을 자의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방지할 별도의 조치가 필요가 없다고 믿었던 것이다. 이런 믿음을 확립하고 국가권력을 조직하는 문제에 집착했던 것이 홉스(T. Hobbes) 루소(J. J. Rousseau) 전통의 프랑스 계몽주의였다.

    그러나 그들이 보지 못한 것은 민주주의는 권력의 원천을 말해줄 뿐 권력의 내용을 말해주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민주적으로 선출된 권력이라고 해도 그 권력은 스스로 제한하지 않는다는 것이 드러났다. 헌법적으로 제한을 두지 않은 ‘무제한 민주주의(unlimited democracy)’의 결과는 국내생산액(GDP) 대비 정부지출이 50~60%, 고소득층 세율이 60%였다. 노동시장의 경직성을 야기한 복지국가가 초래했다. 생산성은 줄어들고 1~2%로 성장은 둔화되었고 10%를 상회하는 실업이 일상적이다.

    그러나 민주적이라고 해도 정부의 권력은 제한해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고 왕의 주권이나 군주의 절대권을 제한하기 위해 고안했던 자유주의 원칙을 고수했던 것이 흄(D. Hume)과 스미스(A. Smith)를 비롯한 스코틀랜드 계몽주의였다. 이 사상의 추종자들은 프랑스 혁명을 보면서 민주주의를 제한하지 않으면 그것은 왕이나 군주의 절대권만큼이나 무서운 것이라고 여겼다. 그들은 그래서 제한적 민주주의(정부)를 요구했다. 민주적이라고 해도 국가권력은 제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민주주의는 자제능력이 없다고 생각했다.

    통치자의 자의적인 권력행사로부터 시민들의 재산과 인격, 그리고 자유를 보호하는 것, 이것이 헌법의 역할이었다. 개인의 자유와 권리가 정부의 권리보다 우선한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들에게 통치자의 자의적인 권력행사로부터 시민들의 재산과 인격, 그리고 자유를 보호하는 것, 이것이 헌법의 역할이었다. 개인의 자유와 권리가 정부의 권리보다 우선한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근대헌법의 뿌리로서 17세기 권리장전(Bill of Rights)이나 권리청원(Petition of Rights)이 이를 잘 말해주고 있다. 18세기에는 재산과 자유를 보호하기 위해 정부의 권력을 제한하려는 자유주의의 유서 깊은 원칙들이 확산되었다.

    미국에서 이런 확산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매디슨을 비롯한 유명한 미국헌법제정자들이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개인의 자유였다. 인격과 재산을 보호하고 자유로이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보호하는 헌법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정부권력을 제한하지 않으면 그것은 무제한적 권력을 행사하고 이로써 개인의 인격과 재산을 침해할 것을 두려워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정부가 해야 할 일을 찾기보다 정부의 권력을 효과적으로 제한하여 개인의 자유를 보호하는 헌법을 찾는데 초점을 맞추었다.

    그런 노력의 결과가 미국헌법을 구성하고 있는 원칙이다. 자의적인 국가강제로부터 개인의 권리와 자유를 보호하는 것이었다. 국가권력을 제한하는 것은 헌법이고 그래서 헌법이 중요하다는 헌법주의의 확고한 전통을 확립했던 것이다. 시장경제의 발달은 이런 제도적 산물이다. 헌법을 통하여 시장경제를 보호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미국이 누리고 있는 물질적 비물질적 번영은 그런 헌법주의의 산물이다.

    국가권력을 제한하는 경제질서 : 자유시장경제

    이제 뚜렷해진 것이 있다. 성공한 헌법은 정부의 권력을 제한하는 헌법이라는 것이다. 그런 헌법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국가 활동을 제한하는 작은 정부-큰 시장을 지향하는 헌법
    둘째, 자유와 재산권을 중시하는 헌법
    셋째, 시장경제의 원칙을 중시하는 헌법
    넷째, 특수한 집단의 이해나 산업을 보호 육성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헌법이 아니라 보편이익을 보호 육성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헌법

    이런 정신을 구현한 것이 자유시장경제이다. 이것은 국가권력을 개인의 자유와 재산을 보호하는 일에만 행사할 것을 요구하는 경제질서이다. 국가의 과제를 폭력과 기만 그리고 개인의 재산이나 명예를 침범하는 것을 막는 법과 질서의 유지를 제일의 과제로 여기는 것이다. 이 점이 국가권력과 국가과제를 거의 제한 없이 불러들이는 사회적 시장경제와 다른 점이다.

    (1) 헌법이 추구할 경제질서는 공동체자유주의가 아니다.

    한국헌법이 추구할 경제질서는 현행헌법의 사회적 시장경제가 아니라 자유시장경제라는 것이 뚜렷해졌다. 그런데 한국경제의 ‘선진화’를 위한 경제질서는 공동체자유주의라고 믿는 식자(識者)들이 있다. 그러나 이것도 한국헌법이 가야할 길이 아니다.

    그 이유로서 몇 가지를 들면, 반(反) 자유주의 성향인 공동체주의와 자유주의를 절충한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더구나 공동체자유주의도 자유주의는 약육강식이라는 등, 자유주의를 오해하고 있다. 기업을 공동체로 파악하여 기업의 소유권과 경영권을 희석시키는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로 이해하고 있다.

    노사정(勞使政)위원회 대신에 노사학(勞使學)으로 교체하여 정부가 빠지고 학자가 대신하는 새로운 집단주의를 시도하고 있다. 이것도 노사정 위원회와 다름없는 자유와 재산권을 침해하는 조치이다. 환경문제나 정치문제를 보통사람이 시행할 수없는 높은 차원의 도덕주의를 요구하는 것을 봐도 공동체자유주의는 사회적 시장경제의 친동생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따라서 공동체자유주의로는 국가권력을 제한하기 어렵다. 국가권력을 가장 효과적으로 제한하는 것은 아무리 봐도 자유시장경제이고 이 원리의 실천을 국가의무로 규정하는 것이 ‘자유의 헌법’이다.

    (2) 자유시장경제를 위한 바람직한 헌법의 세 가지 조건

    결국 한국헌법이 가야 할 길은 자유시장경제이다. 이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필연의 문제이다. 자유시장경제를 위한 헌법이 되기 위해서는 지켜야 할 세 가지 헌법적 조건이 있다. 그 조건들은 서로 연관되어 있다.

    <자유시장경제를 위한 3가지 헌법적 조건>

    첫째, 경제에 대한 정부의 권력을 제한하는 헌법
    둘째, 개인의 자유와 재산권을 보호를 최우선하는 헌법
    셋째, 복지국가의 환상에서 벗어난 헌법

    작은 정부는 개인의 자유와 재산을 보호하는 것을 제일로 여기는 정부이다. 개인의 자유와 재산을 보호하는 경우, 다시 말하면 보편적인 이익을 위해서만 국가권력을 행사하는 것이 정당하다. 왜 자유와 재산권의 보호가 중요한가? 그 이유에 대하여 이미 앞에서 언급했다. 몇 가지 간단한 예를 들면, 경제적 번영은 자유와 재산의 보호와 밀접한 관련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경제자유와 재산의 인정과 그 보호는 정치적 자유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은 아주 잘 알려진 사실이다. 빈곤문제, 고용문제와 같은 민생문제의 첩경은 자유시장경제라는 것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좋은 헌법은 정부의 시혜적 복지를 막아내고 최소의 생활보장에 정부의 복지역할을 한정하는 것이다. 복지와 관련한 국가의 역할로서 모든 사람들에게 최소의 생존을 보장하는 보편적인 사회안전망의 마련을 요구하는 것, 이것이 바람직한 헌법이다. 이런 식으로 복지부문에서 국가권력을 제한하는 것이다. 특정한 계층을 열거하여 그 계층을 돌봐야 한다는 것을 요구하는 헌법은 차별적 이고 편들기 하는 헌법이 되기 쉽다. 그리고 이런 편들기의 국가권력은 제한하기도 쉽지 않다.

    개헌논의는 국가권력의 제한규칙에 대한 논의부터

    지금까지 9차례나 헌법이 개정되었다. 그 개정 논의에서 중심된 것은 항상 권력구조의 문제였다. 이에 반하여 국가권력을 제한하는 헌법 개정에 대한 논의는 대단히 인색했다.

    그 권력구조의 개헌에서 최고 절정은 민주화였다. 민주화는 권력을 어떻게 조직하는 것이 합당한가의 조직규칙의 문제이다. 그러나 조직규칙에 치중했던 ‘1987년 체제’는 실패하고야 말았다. 내각제로의 개헌논의도 권력구조의 문제이다. 국가권력을 어떻게 제한할 것인가의 문제를 도외시하고 권력구조의 문제에 집착하는 개헌논의는 실패한 프랑스 계몽주의의 전철을 밟는 것과 다름이 없다.

    프랑스 계몽주의의 현대판이 스웨덴, 독일, 프랑스의 복지국가이다. 우리의 개헌논의는 프랑스 계몽주의를 답습하고 있는 현행헌법을 바꾸는 일이다. 국가권력을 제한하는 헌법을 구현하는 일이다. 이런 헌법이 지속가능한 헌법이다. 그래서 건설적이고 생산적인 개헌논의는 현행헌법을 어떻게 개정하는 것이 국가권력을 제한할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우리가 진정 번영의 길로 갈려면 국가가 자유와 재산을 억압하는 현행헌법을 개선하여 국가의 권력을 제한하는 것이다. ■

    민경국 / 강원대 경제무역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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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자재 가격과 유가 급등, 물가상승 등으로 인해 경기침체가 지속되고 있다. 혹자는 재정과 금융정책 등 각종 대책을 주문하고 있으며, 정부도 유가안정 대책, 물가안정 대책 등을 마련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들은 실효성이 없는 일시적인 미봉책에 불과하며 자원배분을 왜곡시키고 부작용만 키워 경제를 더욱 악화시킬 뿐이다. 그러므로 물가정책이나 고유가 문제 등은 시장원리에 따라 해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정부는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목표치 3%보다 훨씬 높은 5%를 넘어서고 하반기 성장률도 3%대로 떨어질 것이 우려되자 경제정책의 기조를 대폭 수정하였다. 수정이 아니라 정책기조의 변경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 성장우선 정책이 물가안정 정책으로 급선회하였기 때문이다. 현 정부는 다급하고 초조한 듯하다. 어떤 정권도 대선 공약을 지켜내지 못했지만 그래도 현 정권처럼 이렇게 정권을 잡자 말자 물거품처럼 서민들의 가슴을 허하게 만든 적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국민들에게 별 면목이 서지 않은 것은 당연하다. 현 정권의 지금 처지는 사면초가, 내우외환으로 말하기도 부족할 정도이다. 무능력, 무소신, 무책임하기까지 하다는 등 갖은 험한 소리를 다 듣고 있다. 안타까울 따름이다. 이 대통령은 지금의 상황을 지난 10년 집권 세력의 끈질긴 저항과 준동으로 해석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현 정권이 극복해 내야 할 과제들이다. 어려울수록 원칙에 충실하고 시장의 흐름을 거스르지 않는 것이 지도자의 올바른 처신이다. 그것이 국민들에게 당장은 감동을 주지는 못할지언정 결국 한국 경제를 위하는 길이다.

    시장이 살려준 쇠고기 정국

    쇠고기 파동은 정치적으로는 미숙하였을지 모르지만 경제적으로는 무엇이 올바른 길인지를 처절하게 경험하게 하였다. 삶이란 최고가 아니라 최선의 추구이며, 검역권보다 앞서는 것이 자기주권이다.

    현 정부는 섣부르게 미국과 쇠고기 협상을 타결하였고 그것이 반대세력의 빌미를 제공하였다. 어떤 경우에도 최고와 안전을 들이대는 이상 그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의 전략은 아주 성공할 수 있었다. 2개월이 넘는 동안 이 나라는 아수라장이 되었고 국가의 기운이 조금씩 쇠락의 길로 접어드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갖게 하였다.

    선택거리가 많아지고 경쟁이 심화되면 업자에게는 이익 보는 자와 손해 보는 자가 생기지만 소비자에게는 손해 보는 자 없이 모두에게 더 큰 혜택이 가기 마련이다. 우리 모두는 업자이기 이전에 소비자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지금 쇠고기 시장을 가보아라. 그러면 지난 몇 달 동안 한국에서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났는지를 슬픔과 분노로 다가올 것이다. 한우를 비롯하여 수입 쇠고기의 가격이 급락하였고, 쇠고기의 대체재인 돼지고기의 가격도 크게 떨어졌다.

    우리는 무엇 때문에 피터지게 싸우면서 그 난리를 쳤는가? 단지 축산 농가를 위해서 그러했는가? 선택거리가 많아지고 경쟁이 심화되면 업자에게는 이익 보는 자와 손해 보는 자가 생기지만 소비자에게는 손해 보는 자 없이 모두에게 더 큰 혜택이 가기 마련이다. 우리 모두는 업자이기 이전에 소비자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성장보다 물가안정 정책이 친시장적이다

    어떤 돌파구도 보이지 않던 쇠고기 정국은 이처럼 미국산 쇠고기가 시장에 풀리면서 순식간에 해결되었다. 무엇이 진실인지를 시장이 판가름해준 것이다. 시장은 이처럼 무서울 정도로 한 점의 거짓 없이 세상 사람이 원하는 바를 온전히 드러내준다.

    시장의 이런 진실은 그러나 누구의 간섭도 없어야 한다는 절대적인 조건을 전제로 한다. 현 정부는 시장의 힘을 알기 때문에 갖은 욕과 비판을 감내하면서 어리석을 정도로 기다렸을 것이다. 그래서 일견 현 정부는 아주 시장지향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실은 결코 친 시장적인 정권이 아니다. 정권을 잡은 지 고작 5개월 남짓 하지만 도처에 비 시장적인 정책들이 난무하다. 사실 현 정권의 대선 공약인 7-4-7 구호만큼 시장 개입적인 의사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은 없다. 그의 성장 우선 정책은 불행하게도 세계 경제 상황의 악화와 맞물리면서 취임 5 개월 만에 좌초하고 말았다. 어쩌면 그것이 한국 경제의 미래를 위해 약일는지도 모른다.

    현 정권의 정책기조가 시장 친화적이라면 성장이 아니라 물가안정이 우선 되어야 했다. 성장은 현재 소비를 억제한 결과이며, 시장경제에서 그 억제의 정도는 개인의 자유로운 의사에 따라야 한다.

    현 정권의 정책기조가 시장 친화적이라면 성장이 아니라 물가안정이 우선 되어야 했다. 성장은 현재 소비를 억제한 결과이며, 시장경제에서 그 억제의 정도는 개인의 자유로운 의사에 따라야 한다.

    그러나 성장 목표를 설정해놓고 이를 밀어붙이기 위해서는 정부가 어떤 형태든지 개인의 의사를 무시하는 시장 개입 정책을 구사하지 않을 수 없다. 반면에 물가안정은 그 자체로 시장의 불확실성을 제거하여 개인의 자유로운 거래를 뒷받침한다. 그래서 현 정부의 정책목표와 정책기조는 처음부터 엇박자였다. 시장 친화적이라고 하면서 성장우선 정책을 추진한 것은 시장을 어설프게 알고 있었든지 아니면 정직하지 못한 포퓰리즘의 또 다른 모습일지 모른다.

    성장을 희생하지 않고서는 물가를 잡을 수 없다

    주요 포털사이트인 네이버의 경제면에 올려 진 신문사들의 최근 기사 제목을 보면 한국경제는 곧 절단이 날 것만 같다. 2차 외환위기라는 말이 나오고 스태그플레이션 국면에 이미 진입한 것처럼 보도되고 있다. 위기의 경보를 알리는 이 모든 외침은 정부를 향하고 있다. 정책수단을 강구하여 이 위기를 수습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원자재와 유가의 급등과 같이 비용 상승으로 인한 경기침체와 물가 상승에는 안타깝게도 마땅한 묘책이 없다. 혹자는 재정과 금융 정책의 적절한 혼합을 주문하기도 한다. 이론적으로는 그럴듯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대내외 경제 환경이 급변하고 내일의 유가도 정확히 예측하기 힘든 상황에서 경제를 악화시킬 가능성을 높일 뿐이다.

    원자재와 유가의 급등과 같이 비용 상승으로 인한 경기침체와 물가 상승에는 안타깝게도 마땅한 묘책이 없다. 혹자는 재정과 금융 정책의 적절한 혼합을 주문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대내외 경제 환경이 급변하고 내일의 유가도 정확히 예측하기 힘든 상황에서 경제를 악화시킬 가능성을 높일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몇 가지 원칙에 충실 하는 수밖에 없다. 먼저 성장을 희생하지 않고서는 물가를 잡을 수 없으며 물가가 안정된 후에야 성장을 위한 여러 정책 대안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스태그플레이션이 무서운 것은 그것이 비용-물가-임금 인상의 악순환적인 고리를 낳기 때문이며 그 고리를 끊기 위하여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은 물가 상승을 억제하는 것이다. 지속적인 물가 상승은 화폐적인 현상이므로 정부는 통화정책으로 그것의 통제가 가능하다.

    특히 작금의 어려운 세계경제는 석유 수급의 불안 외에 글로벌 유동성의 과도한 팽창이 그 원인이기 때문에 무엇보다 유동성 관리를 위한 긴축 금융정책이 필요하다. 유동성 공급을 억제하게 되면 취약한 가계와 중소기업이 힘들어지게 마련이다. 그러나 이 고통을 피하려다 보면 더 많은 사람들이 더 큰 충격을 오래 동안 겪을 수밖에 없다. 여우 굴 피하려다 호랑이 굴을 만나는 짝이다. 비록 어려운 시기를 겪을지라도 먼저 경제체질을 단단히 해놓는 것이 양심적인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이다.

    가격 관리 환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 대통령은 취임 후 한 달도 지나지 않아 불쑥 50개 생필품의 가격상승을 억제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정부는 이 지시에 따라 공공요금의 동결, 생필품의 유통체계 개선, 원재료의 할당관세 인하, 수입원가 공개, 부가세 면제 추진, 시민단체로 하여금 가격 인상 업체의 감시 등의 부산을 떨었다.

    이 중에는 정부가 감내하면서 할 수 있는 일도 있고 시장을 직접 교란하는 정책도 있다. 그런데 이들 품목들 중 상당수의 가격은 소비자물가보다 더 높게 상승하였다. 정부의 노력이 전혀 힘을 쓰지 못한 것이다.

    그것[가격관리]의 실효성은 그다지 높지 않으며 자원배분의 왜곡과 같은 부작용만 키울 뿐이다. 가격관리의 환상에서 벗어나고 공공요금도 시장의 원리에 따라 점진적으로 현실화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동수 기획재정부 차관은 지난 7월 22일 서민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주요 품목의 가격을 점검하여 다시 선제적 대응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인플레이션 기대 심리를 낮추고 미시적 조정으로 서민생활의 충격을 조금씩 가중시키고자 하는 의도는 알겠지만, 그것의 실효성은 그다지 높지 않으며 자원배분의 왜곡과 같은 부작용만 키울 뿐이다. 가격관리의 환상에서 벗어나고 공공요금도 시장의 원리에 따라 점진적으로 현실화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개인은 힘들겠지만 유가급등과 물가상승에 순응하는 길밖에 없다

    생필품 가격의 상승은 수입 농산품 및 원자재 가격의 상승과 유가의 급등과 같은 해외 요인, 그리고 성장을 위한 정부의 잘못된 고환율 정책에 기인하였다. 정부는 잘못된 환율 정책을 깨닫고 있기 때문에 그나마 다행이지만, 해외 요인은 정부로서도 어떻게 할 마땅한 대안이 없다.

    문제를 어렵게 만드는 것은 지금의 유가 급등이 과거 두 차례의 석유 파동 때와는 달리 신흥국가들의 경제발전으로 인한 세계 석유 수요의 증가에 기인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지금의 고유가 추세가 추가적인 공급 증대나 대체 에너지의 개발이 없는 한 세계 경제가 건강하다면 항상 같이 가야할 짐이며 동반자일 수밖에 없음을 시사한다.

    그래서 개인은 고유가에 가능한 빨리 적응하는 길밖에 없다. 보조금 지급이나 유류세 인하와 같은 조치는 일시적인 미봉책에 불과하며 결국 우리의 부담으로 남게 된다.

    시장은 우리 모두에게 새로운 대체 에너지 개발과 석유 자원의 절약을 명령하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환경론자들이 원하는 것이고 우리의 미래 세대를 위하는 길이 아닌가? 시장은 결코 환경을 파괴하고 낭비를 부추기는 기구가 아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단지 이익 집단의 요구에 굴복하는 정부일 뿐이다. ■

    배진영 / 인제대 국제경상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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