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효종 | 2011-03-21 | 조회수 : 429
[요약] 일본이 대재난으로 신음하고 있는 이 때 이익과 불이익을 따지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 "어려울 때 도와주는 친구가 진정한 친구“라는 말이 있듯이 고통받는 이웃인 일본에게 따뜻한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야 한다. 성경에서 착한 사마리아인이 그랬던 것처럼 이웃의 고통에 공감하고 역지사지할 수 있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국가’가 되어야 한다. 일본과의 과거사에 얽매여 그들의 아픔을 외면하는 것은 새로운 악연을 만드는 일이다. 일본의 대지진은 우리의 공감능력, 역지사지 능력, 인류애와 도덕적 감수성을 시험하는 시험대이다.

이웃나라 일본이 형언하기 어려운 대재난으로 신음하고 있다. 대지진이 땅의 지축을 흔들어 놓는가하면 쓰나미가 마을과 사람들을 휩쓸어 갔고, 원전까지 위험해져 방사능 공포가 엄습하고 있다. 하늘과 땅, 그리고 바다에서 비롯된 세 가지의 재난에 직면하고 있는 것이다. 가히 삼중고(三重苦)가 아니겠는가. 대피소에서는 노약자들이 땔감과 먹을 것을 구하지 못해 저체온증으로 죽어가고 있고, 원전주변에는 방사능피폭을 무릅쓰고 자위대원들과 결사대들이 원전폭발을 막고자 밤낮으로 포진하고 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일본의 재앙이 우리경제와 산업에 미치는 영향을 면밀히 검토하는 것도 필요하다. 아니면 부품산업의 차질로 우리도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 확실하니, 이에 대한 대비책을 서두르는 것도 절실하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지금 우리의 최우선적 관심사항은 아니다.

일찍이 프랑스의 철학자 엠마뉘엘 레비나스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면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다고 했다. 마찬가지로 상대방의 근심어린 얼굴을 보면서 내 잇속만을 생각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또 상대방의 절규하는 모습을 보면서 내게 이익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따지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

“어려울 때 도와주는 친구가 진정한 친구”

지금 재난을 맞은 일본인들의 얼굴을 보라. 물론 그들이 대성통곡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악을 쓰며 울부짖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들에겐 재난을 이겨내는 놀라운 시민정신이 살아있다. 죽음 앞에서도 자기희생과 헌신을 아끼지 않은 감동스토리가 계속해서 나오고 있다. 하지만 그들의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하고, 그들의 표정엔 두려움이 드리워져 있지 않은가. 엄마와 딸, 아빠와 아들, 남편과 아내가 생과 사를 사이에 두고 갈라선 경우가 한 두 가지가 아니다. 폐허가 된 마을엔 사라져간 사람들의 행방을 묻는 애끓는 쪽지들만이 빼곡하다.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무기력한 현실 앞에 오직 기적만을 바라며 망연자실해 있는 그들의 모습이야말로 그냥 바라만 볼 수 없는 애처로운 모습이 아닌가.

일본전체가 하늘을 향해, 땅을 향해, 바다를 향해 간절히 부르짖고 있다. 또 도와 달라며 손을 내밀고 있다. 지금이야말로 그들의 부르짖음을 귀담아 들어주는 응답자가 되어야하고, 슬피 우는 그들에게 따뜻한 말을 건네는 위로자가 되어야 할 때다.

우리가 어려서부터 들어온 말이 있다. “어려울 때 도와주는 친구가 진정한 친구”라는 말이다. 마찬가지로 어려울 때 도와주는 이웃이 진정한 이웃이다. 고통받는 이웃나라인 일본을 불문곡직 도와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바로 그것이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삶의 도리고 또 친구로서 우정을 나누게 되는 도리가 아니겠는가. 대재난으로 고통받고 있는 그들의 눈에서 하염없이 흐르고 있는 눈물처럼, 우리를 향해 간절히 호소하는 것도 없다. 사람들은 길가에서 깔깔거리며 웃고 있는 어린아이들 곁은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칠 수 있으나 길에서 울고 있는 어린아이들 곁은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울음소리에는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길을 붙잡는 도덕적 호소력이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야말로 지금 현해탄 건너 “힘들다” “도와달라” “살려달라” “물을 달라”는 그들의 부르짖음에 대해 외면할 수 없는 이유다

선린의 역사를 시작하는 '착한 사마리아인’이 되자

바이블에 나오는 이야기를 들어보았는가. 예루살렘에서 예리고로 내려가는 길에 강도를 맞아 쓰러져 있는 행인에 관한 이야기다. 중상을 입어 쓰러져 있는 그의 곁을 여러 사람들이 지나간다. 랍비도, 율법학자도 지나갔다. 그러나 그들은 한결같이 쓰러져 있는 사람의 고통에 무심했다. 오직 한 사람, 사마리아인이 그를 보살폈다. 그를 업고 병원까지 간 것이다. 그리고 치료비까지 부담했다. 그에겐 다른 사람의 고통을 자기고통처럼 생각하는 뛰어난 공감능력이 있었고 자신의 편안한 처지와 그의 불쌍한 처지를 바꾸어 생각하는 놀라운 역지사지능력이 있었던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 그런 아름다운 사연이 있었다면, 21세기의 우리나라는 모름지기 이웃의 고통에 공감하며 역지사지했던 사마리아인처럼 행동하는 '착한 사마리아인 국가’가 되어야하지 않겠는가.

반론이 있을 수 있다. “과거에 일본이 잘못했으면서도 사죄조차 없으니 어떻게 하느냐”고. 물론 그런 질문은 당연한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질문을 할 때가 아니다. 매사에는 때가 있는 법이 아닌가. 사람들이 슬피 울고 있는 초상집에 가서 과거에 진 빚을 갚으라는 이야기를 꺼내서는 안 되는 이유는 빚 이야기가 잘못되어서가 아니라 빚 이야기를 할 때가 아니기 때문이다.

과거사는 과거사고, 휴머니즘은 휴머니즘이 아니겠는가.

일본 대지진은 우리의 인류애와 도덕적 감수성의 시험대

과거사의 굴레에 묶여 이웃의 아픔을 외면하면 역사의 새로운 악연을 만들게 된다. 과거사와 휴머니즘을 무분별하게 섞는 것은 결코 지혜로움이 아니라 어리석음일 터이다. 우리는 이웃의 아픔을 위로하는 착한 이웃이 되고 그를 돕는 착한 사마리아인이 됨으로써 '선린(善隣)의 역사’를 시작하는 주인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는 고통을 당하고 있는 이웃을 돕는 마음으로 일본에 따뜻한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야한다. 이번 일본의 대지진이야말로 우리에게 공감능력이 있는지, 역지사지능력이 있는지, 선린의식이 있는지 묻고 있다. 또 우리의 인류애와 도덕적 감수성까지 시험하고 있다. 우리 모두 힘을 합쳐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그들의 손을 잡아주는 '착한 사마리아인’이 되자.

박효종 / 서울대 교수, 윤리교육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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