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성직자에서 민주화 운동가로
2. 시대변화에 부적응
3. 왜 북한체제에는 관대한가?
4. 미군철수를 위하여
5. 습관적 국책사업 반대
6. 성직자의 세속개입의 한계
1. 성직자에서 민주화 운동가로
“그를 만나려면 '현장’을 찾아 나서면 된다.” 서울 용산구 한강로2가 지난 1월 20일 용산참사가 발생했던 현장에서 문정현 신부는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하 정의구현사제단)의 신부들, 유족 등과 정부의 사과와 보상 등을 요구하며 농성을 벌이고 있다. 문 신부는 1940년 8월 전북익산의 가톨릭집안에서 태어나 사제가 되었고, 친 동생인 문규현 신부와 함께 이른바 운동권 신부로 유명하다.
문신부가 '길 위의 신부’, '투사’, '싸움꾼’, 심지어 '노숙자’라는 별명을 갖게 된 것은, 군산 미군기지, 부안 방폐장, 평택 미군기지 예정지 등을 거쳐 이번 용산에까지 전국의 반미반정부 투쟁의 현장에 반드시 나타나기 때문이다.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문 신부는 이른바 호사가는 아니다.
“그런데 74년 7월 6일 지학순 주교가 일본에서 김포공항으로 오던 중 행방불명이 됐어. 서울교구 소속 함세웅 신부를 비롯해 젊은 신부들과 원주교구 젊은 신부들이 급거 상경하기 시작했지. 지학순 주교님이 민청학련하고 고리가 된 것이 김지하인데 지학순 주교로부터 자금을 받았다는 거지.” 이처럼 문신부의 운동권과의 인연은 박정희정권의 유신체제하에서 지학순 주교 및 김지하 석방, 나아가 민청학련, 인혁당(2차) 석방운동을 계기로 시작되었다.
문신부가 단순한 인권운동 참여에서 급속히 투사로 변신하는 연결고리 또한 인혁당 사건이었다. 1975년 4월 8일 인혁당 관련자 8명의 사형이 대법원에서 확정되고, 4월 9일 그 집행이 전격적으로 이루어졌는데, 당국이 그 시신을 벽제화장터로 옮기는 중 응암동 인근에서 가족들이 저항을 했다. 이때 문신부가 현장에 합류했고, 경찰과의 몸싸움 와중에 크레인에서 떨어져 다리를 심하게 다쳤고 결국 지팡이 신세를 지게 되었다.
민주화운동 대열에는 학생운동에서 이론적 무장과 조직적 훈련을 거쳐 직업적으로 참여한 사람들이 주류를 이루지만, 어떤 직간접적 피해가 계기가 되어 평범한 생을 살다가 갑자기 합류한 경우가 있다. 자식이 감옥에 가면서 구속자가족모임에 참여하는 대표적 사례가 있고, 성직자, 예술가 등 비정치적 영역을 정권에서 건드리게 될 경우 민감한 반응이 증폭되어 투사를 낳기도 한다. 이때 평범한 시민이던 이들은 이념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과 공통의 피해자라는 연대의식을 갖게 되고 그 중 일부는 속성으로 운동가로 변신하게 된다.
문 신부 또한 지학순 주교의 구속이 반정부 운동 참여의 계기가 되었는데, 결국 인혁당 석방운동차원까지 나가게 되었고 예기치 않은 사건까지 겹쳐 유신체제의 직접적 피해자이자 강력한 반대자의 길을 걷게 된다. 문 신부 본인은 고1때 본 <워터 프론트(On The Waterfront)>라는 미국 영화(가톨릭 신부가 부두 노동자를 위해 저항한다는 줄거리)의 영향을 말하며 “신부가 돼서는 가난한 자, 고통당하는 자 편에 서는 것에 늘 관심이 있었어.”라며, 변신의 내적 기반을 말하고 있다. 이 진술만으로 단정하긴 어렵지만, 문 신부는 종교적 신념과는 다른 사회적 정의감이 강한 인물이며, 그만큼 매사를 선악의 개념으로 단순하게 접근할 가능성도 항상 지니고 있었다고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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