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을 만드는 국회에서조차 법을 지키지 않고 폭력을 행사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국민들은 국회의원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도록 위임한 적이 없다. 국회에서 폭력이 일어났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민주주의에 조종(弔鐘)이 울린 것이나 다름이 없으며, 국민에 대한 모독이다. 의회는 서로 의견이 다를 수밖에 없지만, 논의와 토론을 벌이고 합의를 통해 법과 정책을 만드는 곳이다. 계속해서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 때는 다수결이 대안이 될 수밖에 없다. 민주주의와 법치를 위해서도 국회폭력에 대해 응분의 책임을 물어야 하며, 국민소환제와 같은 제도도 강구해야 한다. |
세계적인 스캔들이 될 정도로 연말부터 시작하여 연초까지 이어져온 우리 국회의 폭력성은 가히 충격적이다. 그것은 가뜩이나 3류 정치로 일컬어져 온 한국정치를 몇 등급 떨어뜨리는 저급한 사태였다. ‘폭력국회’란 그 자체로 형용(形容)모순이다. 무엇보다 국민들은 국회의원들로 하여금 폭력을 행사하도록 위임한 적이 없다. 면책특권이라고 하더라도 국회에서의 발언에 해당되는 것일 뿐, 폭력에 관한 면책특권은 아니다. 그런가하면 폭력은 민주주의의 엄숙한 전통을 정면으로 위배하는 행태이다. 국회를 영어로 ‘parliament‘라고 부르는 데 그것은 불어의 ‘parler‘에서 어원을 가진 것으로 ‘말을 하는 곳’이라는 뜻이지, ‘폭력을 행사하는 곳’을 일컫는 말은 아니다.
민주주의는 인간이 이성적 존재라는 신념에서 비롯된 것
원래 사람들이 모여 정치를 하는 전통, 즉, 아리스토텔레스의 표현대로 “교대로 통치하고 통치 받는 것(ruling and being ruled in turn)”을 기조로 하는 민주주의의 전통은 그리스에서 비롯된 것이다. 물론 그리스의 민주주의는 대의민주주의가 아닌 직접민주주의의 핵심적 기구인 민회를 뜻하는 ‘불레(boule)’를 비롯하여 ‘엑글레시아(ekklesia)’, ‘디카스테리아(dikasteria)’ 등은 한결같이 사람들이 모여 발언을 통해 토론과 심의를 하는 곳이었다.
이처럼 말과 심의를 통하여 정치를 하는 민주주의 제도는 근본적으로 인간이 이성적 존재라는 신념에서 비롯된 것이다. 로마의 원로원도 마찬가지였다. 주로 귀족들이 모인 원로원에서 후대의 우리가 기억하는 중요한 연설만 해도 키케로의 ‘카틀리나 음모 규탄’, ‘필립보스 탄핵연설’ 등이다. 이들 원로원에서의 발언은 세기를 거듭하며 말과 웅변의 힘을 증명해 온 연설이다.
말과 심의를 통하여 정치를 하는 민주주의 제도는 근본적으로 인간이 이성적 존재라는 신념에서 비롯된 것이다. |
이러한 것들은 모두 인간 이성에 대한 기대와 확신에서 나온 것으로 이 때 이성을 의미하는 ‘로고스(logos)’는 바로 말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즉, 이성은 말과 설득에 의해 구현된다는 것이 그리스의 전통이었고 또 로마인들의 전통이기도 했다. 로마인들은 이성을 의미하는 ‘라치오(ratio)’에 한 글자를 덧붙여 연설을 의미하는 ‘오라치오(oratio)’를 사용했던 것이다.
이성과 말, 혹은 이성과 설득을 동일시하는 이러한 전통은 현대 민주주의에도 그대로 이어져 왔다. 심의와 토의를 하는 것이 바로 심의민주주의(deliberative democracy)의 핵심인 민의의 전당이다. 동시에 의회는 말로 하는 것이기에 섬세함과 고품격의 절정이기도 하다. 상대방을 부를 때 ‘존경하는 의원님’으로 부르는 선진 의회의 관행도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의회는 폭력을 절대로 행사하지 말아야 할 ‘민의의 전당'
이처럼 국민위임과 민주주의의 전통에 반하여 우리국회에서 일어난 폭력사태는 의회 민주주의의 핵심인 이성에 반하는 야만적 폭거가 아닐 수 없다. 흔히 언론에서는 국회라는 곳이 여당과 야당의 상호작용만으로 이루어지는 곳으로 보고 있으나, 사실은 그것이 아니다. 그보다 더 큰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곳은 입법부와 국민간의 관계라는 의미가 두드러지는 곳이다. 즉, 국회의 의석을 가진 여야 간에 합의가 이루어졌건, 합의가 이루어지지 못했건, 국민들은 언제나 두 눈을 부릅뜨고 의정 활동을 평가하고 판단을 한다. 따라서 여야 간에 합의가 안되면 난투극이나 활극이 일어나고 합의가 되어야 비로소 순기능과 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은 크게 잘못된 인식이다. 또한 싸울 때는 조직폭력배처럼 화끈하게 싸우더라도 협상을 통해 극적 합의가 이루어지게 되면, 그 전의 불법이나 폭력과 같은 것들이 없었던 것처럼 행동하거나 생각하는 것도 무지함의 소치라고 할 수 있다.
여야 간의 법안다툼과 관계없이 폭력이 일어났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ipso facto)’ 민주주의에 조종(弔鐘)이 울린 것이나 다름이 없다. 공교롭게도 2008년의 마지막 날 제야의 종소리가 보신각에서 울렸다. 사방에 울려 퍼진 그 종소리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묵은 것을 보내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인다는 전통적 의미의 송구영신(送舊迎新)의 종소리로 보아야 할까. 아니면 보내는 아쉬움만이 깊숙이 서려있는 종소리일까.
국민위임과 민주주의의 전통에 반하여 우리국회에서 일어난 폭력사태는 야만적 폭거가 아닐 수 없다. 여야 간의 법안다툼과 관계없이 폭력이 일어났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민주주의에 조종(弔鐘)이 울린 것이나 다름이 없다. |
둘 다 아니다. 그것은 분명히 연말이 되어도 폭력이 종식되지 않는 우리 국회의 의회 민주주의의 종언을 알리는 종소리이며, 대의민주주의의 장례식을 치루는 장례식의 종소리와 다를 바 없다. 그런데도 폭력 끝에 여야가 잠시 휴전과 같은 합의를 했다고 해서 큰일이라도 해낸 양 희희낙락하며 외유를 나가는 국회의원들의 속물적 모습이여!
의회야말로 폭력을 절대로 행사하지 말아야 할 ‘민의의 전당’이다. 그런 의미에서 ‘거룩한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때때로 시장에서 상인과 상인 사이에 혹은 상인과 고객 사이에 몸싸움이 일어나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가하면 지하철 안에서 취객들이 싸움을 벌이며 혹은 술집에서 작은 다툼이 큰 소동으로 확대되는 것도 보아왔다. 때로는 야구와 축구 경기장에서 선수들끼리 패싸움을 벌이는 사태도 목격해왔다. 이런 모습을 보며 씁쓸한 느낌을 갖게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시장의 종말’이나 ‘술집의 종말’, 혹은 ‘운동경기의 종말’이라는 말을 내뱉을 정도로 극도의 절망감까지 표현하는 것은 아니다. 운동경기장에서 젊은 혈기의 선수들이 자제력을 발휘하지 못한 채 승부에 집착하여 싸우는 모습을 보며 공감하지는 못하지만 이해는 할 수 있다. 또한 술집에서 술에 취해 말도 못하고 몸을 가누지 못하는 사람들끼리 언성을 높이다가 서로 간에 손찌검을 하는 것도 이해는 간다. 이성을 잃은 사람들의 행동에 대해 시시비비를 가려 못하겠는가.
그러나 만일 교회에서 폭력이 자행되거나 몸싸움이 일어난다면 아무리 선의(善意)로 이해하려고 해도 이해할 수가 없다. 그곳은 속세의 이해관계를 떠나 절대자인 신 앞에서 자신의 죄를 회개하며 용서를 비는 거룩한 곳이기 때문이다. 그처럼 거룩한 곳이기에 죄를 지은 사람이 도망쳐 와도 일반 관리가 들어와 체포하지 못했다. 세속인이 범접하지 못할 그 거룩한 곳에서 만일 폭력이 일어났다면 그것은 그 자체로 ‘신성모독’이다.
국회폭력은 국민모독이자 소수의 횡포다
그렇다면 의회는 어떤가. 의회는 이름하여 국민을 대표하는 선량(選良)들이 모인 곳이다. 이곳에서 서로 의견이 다를 수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서로 논의와 토론을 벌이고 결정을 내리고, 법과 정책을 만드는 기능을 주목적으로 한다. 그렇기 때문에 폭력은 물론 있을 수 없고 폭력적인 언어조차 금물이다. 그곳에 국회경위가 있다고는 하나 그들은 국회의원들 간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일반 사람들의 침입과 간섭을 막기 위한 것이다. 또 국회의원들은 그 하나하나가 헌법기관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곳에서 폭력이 일어났다면, 그것은 ‘신성모독’이다. 국회의원들이 심의와 토론은 방송국에서 이루어지는 심야토론에 나가서 하고 정작 국회의사당에서는 폭력을 행사했다면, 모순 중에 그런 모순이 없다. 국회의사당이 방송국의 심야토론장보다 덜 엄숙하고 덜 신성한 곳이란 말인가.
영어로 ‘sacrilege‘로 표현되는 ‘신성모독’이 세속화된 민주사회에서 너무 강한 표현이라고 한다면, ‘국민 모독‘이라고 해야 옳다. 어떻게 엄숙한 마음으로 토론과 심의를 하라고 국민들이 뽑아 준 선량들이 폭력을 행사하면서 조직폭력배를 닮아가고 또 망치와 쇠톱을 사용하는 목수들을 닮아 가는 것인가. 이것은 민주주의의 퇴행현상이다. 폭력국회가 어찌 민주주의를 말할 수 있고 헌법을 말할 수 있으며, 법치주의를 말할 수 있고 면책특권을 말할 수 있는가.
원래 의회란 의견이 다른 여야가 맞서는 곳이다. 그런데 여야 간에 의견이 같지 않고 대립과 갈등이 지속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국회의 의결은 만장일치가 바람직하지만 만장일치의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 때는 다수결이 대안이 될 수밖에 없다. 다수결로 한다고 해서 무조건 ‘다수의 횡포(tyranny of the majority)’가 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소수당의 입장에서 때로는 소수의 권리를 주장할 수도 있다. 그 경우에도 소수의 권리를 주장할 때에는 ‘방어적으로’ 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모든 것을 소수의 뜻으로 하겠다고 ‘공격적으로’ 나서게 되면, 바로 ‘소수의 횡포(tyranny of the minority)’가 된다.
이처럼 원론적 지적을 하면서도 비감한 생각과 자조적 느낌이 드는 것은 지금 소수당으로 폭력을 행사한 민주당이 과거 노무현 정부 하에서 다수당으로 있을 때 누누이 주장해 온 해묵은 논리라는 데 있다. 입장이 바뀌었다고 해서 손바닥 뒤집듯 태도 변화를 한다면, 나중에 또 다시 다수당이 되어서는 다수결의 정당성을 주장할 셈인가.
의회는 서로 의견이 다를 수밖에 없지만, 서로 논의와 토론을 벌이고 결정을 내리고, 법과 정책을 만드는 곳이다. 폭력국회가 어찌 민주주의를 말할 수 있고 헌법을 말할 수 있으며, 법치주의를 말할 수 있는가. |
다수당과 소수당이 끝내 뜻이 맞지 않다면 영어의 표현대로 ‘agree to disagree(불일치하기로 합의한다)‘를 해야 한다. 합의는 의견이 같은 것에 대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불일치하는 데에서도 가능하다. ‘합의이혼’이 바로 그러한 전형적인 사례가 아닌가. 사실 소수당이란 국민들로부터 충분한 신임을 받지 못해 소수당이 된 것이니, 충실한 의정활동을 통해 민심을 잡아 다음번 선거에서 다수당이 되도록 노력하고 또 다수당이 된 다음 법안개정을 위해 전력투구하는 것이 정도(正道)다. 어떻게 자신의 뜻이 당장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하여 ‘세상의 종말’이 온 것처럼 이성을 잃은 광인(狂人)처럼 행동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또한 항의를 한다고 해도 국회의원들만이 할 수 있는 품위 있는 방법이 있다. 고전적으로는 ‘필리버스터(filibuster)‘, 즉 의사진행방해발언이 그것이다. 달걀만 먹으면서 48시간을 버텼던 영국의 유명한 정치인도 있고, 또 우리나라에도 그런 정치인이 있었다. 다만 발언시간을 법적으로 제한함으로 ‘필리버스터‘가 금지되었다면, 그 대안으로 단식을 할 수도 있고 삭발을 할 수도 있으며, 또 사표를 제출할 수도 있다. 이것들은 물론 절박한 항의의 표시이기도 하지만, 평화로운 것이기에 국회의 품위를 훼손하지 않는 것으로 용인될 수도 있다. 이러한 품위 있는 항의에 대한 고민은 전혀 하지 않고 로마의 원형경기장에서 보았던 야수와 검투사의 결투를 흉내 내고 있으니 국민모독이 아닐 수 없다. 언제부터 우리 국회가 격투기장이나 원형경기장이 되었던가.
입법자의 폭력 좌시해서는 안된다
이미 일어난 이 폭력적인 사태는 아무리 여야 합의가 이루어졌다고 하더라도 결코 좌시할 수 없다. ‘폭력국회’는 ‘폭력가정’과 같다. 폭력이 습관화되면 어떤 사태로 발전할 것인지 아무도 모른다. 폭력가정의 시작도 처음에는 사소한 손찌검으로 시작하지만, 갈수록 흉악해져서 살인 지경까지 이를 수 있다. 이번 폭력국회도 마찬가지이다. 이번에는 해머와 쇠톱으로 시작했으나, 그냥 내버려두면 야구 방망이와 회칼이 등장할 가능성도 농후하다. ‘폭력의 확대재생산’이란 그런 것이다. 사실 이번 국회의 폭력성이 쇼킹한 것은 그전에는 기껏해야 국회에서 이부자리 펴들고 잠을 자는 농성에 불과했지만 이번에는 온갖 무기가 등장했다는 점이다. 앞으로 국회에서 의석을 가진 정당이 되려면 해머를 사용하는 목수와 전기톱을 사용하는 전기공들을 다수 확보해야 하는가.
우리는 이번 사태를 결코 잊지 않고 응분의 책임을 물어야한다. 또한 국민소환제와 같은 제도도 강구해야한다. 국회윤리위원회에만 맡길 수 없다. 우리는 그동안 민의의 전당에서 많은 불미한 일들이 있어도 그리스인들이 ‘레테강’이라고 불렀던 ‘망각의 강’에 던져왔다. 국회에서 생사결단을 하고 포악하게 싸우더라도 여야화해가 이루어진 다음에는 고소 등 법적인 절차를 취하해 버리고 심지어 서로 웃으며 상대방 칭찬까지 아끼지 않으니, 정말 지나가는 소도 웃을 일이며, 국민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된 기분이다. 이번만은 그럴 수 없다. 조폭의 폭력도 아니고, 운동선수의 폭력도 아니며, 있어서는 안 되는 금기인 입법자의 폭력이기 때문이다.
이번 사태는 국민이 용서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다. ‘레테강’에 던지기 보다는 그 ‘레테(lethe)’를 다시 살리는 ‘알레테이아(aletheia)’, 즉 그리스인들이 ‘진실’이라고 불렀던 것의 관점에서, 단죄와 책임추궁을 해나갈 필요가 있다. 국민들도 대의민주주의의 폭력성을 교정한다는 차원에서 직접민주주의의 주인으로서 정당한 권리를 행사할 필요가 있다.
오, 국회여! 그대는 자신을 아는가. ‘벌거벗은 왕’처럼 만신창이가 된 그대 자신을 알고 있는가.■
저자소개: 박효종 교수는 미국 인디애나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취득했으며, 현재 서울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요 저서로는 ‘민주주의와 권위’, ‘한국민주정치와 삼권분립’ 외 다수가 있다.
박효종 / 서울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