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사람들은 문제가 있을 때마다 시장에 정부가 개입해야 한다고 주장하는가? 정부기능을 시장 기능보다 더 신뢰하기 때문인가? 또 사람들은 각종 사회의 위험에 정부가 더 엄히 대처하기를 요구하는가? 위험이 실제적으로 증가해서 그런가? 아니면 위험에 대한 두려움이 커져서 그런가? 이런 질문은 엉뚱해보일지 모르나, 그것은 우리가 소고기 문제와 같은 사회문제를 정확히 이해하고 올바로 접근해 가는 데 필수적인 것이다. 사람들은 사회문제의 해결점을 찾는 과정에서 사회문제의 원인과 현상을 객관적으로 이해하고 분석해야 주관에 치우치지 않는 올바른 해답과 해결책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과연 그런가? 미국의 사례를 통해 알아보자. 우선 어떤 사람들은 국제유가가 급등하는 이유는 BRICS의 급속한 경제 발전으로 인한 수요의 급증에 비해 원유의 생산이 따라가지 못해 유가가 급등한다고 주장한다. 다른 사람들은 투기꾼이 날뛰고 있어 시장이 들끓고 있다고 주장하며 강력한 처벌이나 과세를 요구한다. 그런가 하면 변방의 국가의 일부들은 액슨모빌이나 BP 등의 메이저 석유업체

들의 독과점과 그들의 끝없는 욕심이 문제라면서 이런 시장 구조 자체를 재편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과연 누구의 분석과 주장이 옳고 그른 것인가? 우리는 어떤 의견은 옳고 어떤 의견이 그르다고 말할 수 있는가? 만일 그렇다면 그런 판단의 기준은 무엇인가? 우리는 흔히 객관적 진실과 진리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어떤 것들에는 객관적인 진리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자연현상에는 객관적 진리가 존재하고, 자연과학은 이에 관한 인간의 지식을 진보시키고 있지만, 사회현상에는 객관적 진리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없거나 있다고 해도 자연 과학적 진리와는 성질이 다르다.

  

  예로 만일 미국산 소고기에 대한 위험이 객관적으로, 과학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이라면, 전문가와 일반국민간의 위험에 대한 지각과 인식의 갭은 전문적 판단의 방향으로 좁혀져야 하고, 일반인은 교육을 통해 미국산 소고기의 위험에 대한 과학적 메시지를 분명히 전달받으면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잘 경험하고 있다시피 미국산 소고기의 위험에 대한 논란은 이런 식으로 종결되지 않고 있다. 전문가간에 의견의 불일치가 있다면 이것은 불충분한 이해 탓이므로 극복할 수 있는 일이고, 가령 어떤 전문가는 친미적 시각에서 다른 전문가는 그 반대의 시각에서 상충되는 의견을 내고 있다면 양자를 모두 배척하면 될 일이다.

 

  문제는 과학적 의견의 불일치가 사람들이 미국산 소고기의 위험을 각기 다르게 지각하고 인식하는 중요한 이유가 아니라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높은 수준의 위험을 잘 지각하지 못하는 반면, 다른 사람들은 이에 경악을 금치 못하기도 하다. 그러나 동일한 개인이, 과학적으로 매우 위험한 것으로 판명된 위험은 별로 의식하지 않는 반면, 과학적으로 그리 위험하지 않은 것으로 판명한 위험은 매우 위험하게 보는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인가?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마음속에서 진행되는 지각을 외부에 존재하는 객관적이고 물리적인 사실과 구분해 별개의 문제인 양 간주하는 것은 전혀 적절하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객관적으로 계산할 수 있는 물리적 위험과 주관적으로 편향된 개인의 지각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는 점을 부인하려는 게 아니고, 사회문제를 이와 같이 구분해 보는 것이 적절하지 않음을 얘기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면 무엇이 각 개인이, 과학적 증거와는 관계없이, 어떤 위험은 받아들일만하다고 보고 어떤 위험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고 보도록 만드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그럴듯한 대답은 요컨대 위험의 수용성은 판단의 문제이고, 이 판단은 사회마다 다를 수 있고, 시대에 따라 달라지며, 심지어 개인에 따라 달라지는 바, 이렇게 서로가 다른 판단을 갖도록 유도하는 것은 사적이고 주관적인 것과 공적이고 과학적인 것의 중간에 공유된 신념과 가치의 영역, 즉 문화라는 중간영역이 자리 잡고 있어서, 이것이 위험에 대한 지각과 인식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보는 것이다.

 

  현대사회에서 이런 문화를 형성하고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주요한 주체가 정치인과 언론매체이다. 이번 미국산 소고기 사태에서도 주요한 역할을 한 것은 이명박정부와 언론매체였다. 이명박 정부는 미국산 소고기 수입 재개를 함에 있어 국민들이 납득할 만한 이유를 대지 못했고, 여러 정황적 상황들이 국민들로 하여금 여러 가지 의구심을 가지게 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나온 MBC의 PD수첩의 보도는 이러한 의구심을 보다 형상화 시켰고, 형상화 된 의구심은 우리나라의 독특한 정치문화인 촛불 시위를 통해 표현된 것이었다. 문제는 이렇게 표출된 국민들의 의구심을 이명박 정부가 외면해버린 것이, 사태를 확대 시켰다. 결국 이명박 정부는 출범 100일도 되지 않아, 국민과 소통이 단절되었고 이명박 정부에 대한 지지도는 20%까지 추락하였다.

 

  최근 정부는 MBC PD수첩의 보도가 외곡보도였다면서 미국산 소고기 사태 자체를 날조된 괴담으로 몰아가고자 한다. 설사 PD수첩의 보도가 외곡 되었다 하더라도 PD수첩의 역할은 제기된 의구심을 형상화 한 것에 불과하다. 더 큰 문제는 옳든 그르든 국민들이 요구한 의구심에 대한 해명을 정부가 산성을 쌓고, 물대포로 거절해버린 것이다. 이명박 정부가 단절된 국민과의 소통의 복원하고 싶다면, 지금처럼 문제의 원인을 외부에 두면 안 될 것이다. 정권 출범 이제 겨우 6달이 지났다. 농사로 치면 씨를 뿌리고, 새싹이 올라오기 시작한 정도이다. 올라온 새싹에 문제가 있다면 문제의 원인이 씨앗인지 농부 자신에게 있는지 확실히 파악하고 다시 시작한다면 대풍도 바라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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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은 개인이 지니고 있는 능력을 키우고 잠재적 기능을 최대한 개발시키려는 활동이다. 이 활동은 개인의 발전은 물론 개인들이 구성하는 사회의 발전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러한 활동이 잘못될 경우 개인의 심신 및 지적 성숙뿐만 아니라 사회발전에 커다란 장해 요인이 된다. 그러므로 각 국은 교육에 많은 투자를 하면서 사회를 발전시키고 국가의 경쟁력을 높이고자 한다.


  교육은 교실이나 학교가 아닌 그 어디에서나 이루어질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그 대부분이 학교를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공교육이 곧 교육의 의미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공교육의 성과가 곧 교육의 성과로 직결되고 있다. 따라서 공교육의 성패가 우리 교육의 성패를 좌우한다.


  작금의 한국 교육은 위기의 상황이다. 학생들의 학력이 갈수록 저하되고 있으며, 조기 유학 및 교육이민의 급등과 과열과외 등의 탈학교화가 발생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 나은 교육을 받기 위해 외국으로 떠나는 학생과 가정이 해마다 늘고 있고, 과외교습이 매우 성행하며 그 규모도 급격히 증가하고 있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한국 학교의 교육 내용과 질에서 야기된 문제이다. 학생이나 학부모들이 학교에서 제공하는 교육서비스에 만족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교육위기가 초래한 원인을 교육에 대한 투자 부족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러한 주장은 그리 설득력이 없다. 지난 10여 년 동안 매년 GNP의 4% 이상이 교육재정으로 사용되었다. 이처럼 많은 자금이 교육재정으로 사용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육서비스의 질에 대한 대다수의 국민들이 학교의 교육서비스에 대한 불만족을 표시하고 있다. 이 사실은 공교육의 질적 저하로 인해 교육의 위기가 초래된 원인이 교육에 대한 투자의 부족보다는 다른 곳에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한국에서 교육에 관한 한 정부가 거의 모든 것을 독점 관장한다. 학교설립을 제한하고, 학생선발, 교과서 선정, 교육과정 등 전반적인 학교 및 학사 운영에 대해 관여하며, 학교에 대하여 검사 및 감독, 평가를 시행하고 있다. 학교가 공급하는 교육서비스의 종류와 양, 정원, 등록금, 교육과정 등 모든 것을 정부가 총체적으로 통제하고 있다.


  이러한 정부주도의 교육은 주입식 위주의 획일적 교육과 하향 평준화된 학력저하의 결과를 낳았다. 관료주의 특징은 교육의 결과를 정치적, 이념적 준거에 의한 계산을 중시하여 눈에 보이는 숫자적, 표면적인 결과에 연연하게 된다. 학생들의 탐구심이나 창의력은 중요시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에 대한 동기부여가 주어지지 않는다. 결국 강제적으로 제공되는 일률적인 교육으로 평균적인 학생만을 양산하게 되는 것이다. 또 정부 주도의 교육체제 하에서 교육체제는 점점 관료화되어 가고 의사결정은 정치적 경향을 띠게 된다. 교육 관료들은 자신들의 독점적 지위를 보호하기 위해 정치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자신들의 영향력을 확장하는데 노력을 기울인다. 비대해진 관료조직은 점점 지출을 증가시키고 교육의 질과 양을 감소시켜 전반적인 교육체제의 붕괴를 초래한다.


  정부 주도의 교육 하에서는 학교와 교사들의 창의적인 교수법과 교과과정 개발을 막는다. 학교와 교사들은 가만있어도 학생들은 고르게 나뉘어 배치되고 교사들의 능력과는 무관하게 학생들을 맡아 가르칠 수 있다. 학교와 교사는 얼마 만에 한번씩 정부에서 바꾸어 주는 교육과정에 따라 달라진 교과서를 가르치면 된다. 정년도 보장되며 근무평점도 판에 박힌 평점제도로 일관되고 있기 때문에 새로운 교수법에 대한 혁신적 활동을 할 유인이 적다.


  교육이 정부통제 하에 있는 한 학교는 효율적인 운영이나 학생과 학부모를 만족시킬 인센티브를 갖지 못한다. 고객의 욕구를 충족시켜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사기업과는 달리 학교는 잘못 운영하더라도 국민의 세금으로 망하지 않도록 보호되어 있다. 따라서 고객인 학생과 학부모들의 요구가 무시되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학생과 학부모들은 그들의 다양한 욕구를 표출할 곳이 필요했다. 그것이 과외를 비롯한 이른바 사교육시장을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소위 공교육에서 욕구충족을 하지 못한 소비자들이 학원과 과외를 통해 공교육을 대체했다. 그리고 한발 더 나아가 아예 한국이란 교육시장을 탈출하는 조기유학과 교육이민이 급등했다.


  이와 같은 한국의 교육위기를 막고 국가 경쟁력을 제고 하기 위해서는 정부 주도의 교육을  청산해야 한다. 대신 교육의 주체인 학생과 학부모와 학교자체에 그 주도권을 넘겨주어 교육에 관한 한 모든 것을 학생 및 학부모와 학교가 자율적인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 자율교육체제를 형성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단기적으로는 국공립 학교의 학교장과 학부모의 권한과 임무 확대, 학교 선택 및 이동 자유권 보장, 기업의 학교인수 허용 및 다양한 학교인가 등이 필요하다. 중장기적으로는 초·중·고등학교의 국공립학교를 사립화하고, 교육부를 폐지 축소해야 하며 교육예산을 감축해야 한다.

  그리고 지금의 치열한 대학입시경쟁을 완화하기 위해서 현재 대학에 가해지고 있는 모든 규제들을 철폐하고 정부는 대학교육에서 손을 떼야 한다. 여기에는 대학 설립, 대학의 학생모집 방법, 정원, 등록금책정, 기여입학제 등의 자율이 포함된다. 또한 서울대학교를 포함한 국립대를 민영화시켜 다른 사립대학들과 공정한 경쟁을 하게 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대학시장을 개방하여 외국대학들이 들어와 국내에서 대학교육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끝으로 우리사회의 고질적인 학연중심주의를 타파하기 위해서는 국가권력과 정치권력을 최소화는 작은 정부를 실현해야 한다.


교육은 본래 다양성과 창의성을 핵심으로 하는 활동이다. 그리고 그것은 본질적으로 자율적 성격을 띠고 있다. 교육의 효과가 가장 극대화되는 것은 그것이 자율적으로 이루어 질 때이다. 능력과 개성이 각기 다른 개인들에게 동일하고 획일적인 교육 내용을 강제할 때 그 결과는 형편없게 된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교육의 주체인 학부모와 학교가 자율권을 갖고 교육을 주도해야한다. 정부가 아닌 학부모와 학교가 교육의 주도권을 가질 때 보다 전문적이고 인간적인 교육이 실현될 수 있다. 그래서 제도화 된 것이 교육감 직선제이지만 2008년 7월 30일 최초의 민선 교육감이 국민들의 손에 의해 선출된 오늘 투표율은서울을 기준으로 15.4%의 그쳐 대표성 논란과 함께 직선제 회의론마저 고개를 들고 있다. 이렇게 대부분의 국민들의 무관심 속에 치러진 교육감 선거를 보면서 세계최고라는 우리나라의 교육열은 다 아침에 내린 소나기에 다 식어버렸나?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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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자처럼 생각하기
freemarket 2008-07-16 오전 3:35:46 | 조회수 126

오늘은 여러분과 함께 경제학자처럼 생각해 보는 기회를 갖기 위해 아래와 같이 최근 필자가 고민하고 있는 몇 가지 문제를 제시해 보았다. 더 좋은 아이디어가 있는 분께서는 이곳에서 교환의 이익을 나눴으면 한다.


1. 비 오는 날 택시 잡기 문제

누구나 한번은 비 오는 날에 택시가 잘 안 잡혀 애먹은 경험이 있을 것이다. 물론 그 이유는 날씨가 좋은 날에는 걸어가거나 버스를 이용했을 사람들이 비가 오는 날에는 여러 가지 이유(비나 북적대는 버스 피하기) 등으로 택시를 이용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어느 도시에 현재 운행되고 있는 택시는 총 100대이고, 날씨가 좋은 날에는 이에 대한 수요가 평균적으로 80명이라고 해 보자. 이러한 상황에서 비가 오는 날에는 택시에 대한 수요가 증가해서 그 수요가 120명이 된다고 하자. 그러면 20명은 택시를 잡지 못하고 발을 동동대며 계속 택시를 기다리거나, 아니면 버스 또는 걷기를 선택할 것이다(이렇게 단순화된 예에서 ‘100대의 택시가 모두 손님을 만날 수 있을 것인가’와 같은 심각한 얘기는 다음 기회로 남겨두자).


그런데 문제를 더욱 심각하게 만드는 요인이 한 가지 더 있다. 바로 비가 오면 택시의 공급이 줄어든다는 것이다. 100대 운행되고 있던 택시의 수가 예컨대 80대로 감소된다는 것이다(정확히 말하면 각 택시의 운행시간이 줄어드는 것임). 그러면 총 40명의 사람들이 택시를 잡지 못하게 된다. 필자는 이를 확인하기 위해 최근 택시를 타고 가던 도중 기사님께 실제로 비가 오면 택시 기사님들께서 운행을 줄이는지를 여쭈어 보았다. 택시 기사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비가 오면 특히 밤일 경우, 사고의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에 나이 드신 기사님들은 운행을 줄인다는 것이다. 한 가지 의문점을 빼면 일리 있는 말씀이다.


설사 비 오늘 날에 사고 확률이 더 높다고 하더라도, 분명 비 오는 날에 택시 운행을 줄이는 것이 날씨 좋은 날에 운행을 줄이는 것보다 기회비용이 높을 것인데, 왜 비 오는 날에 택시의 공급은 줄어들까. 혹시 택시 기사님들께서 비가 오는 날에는 외출하는 사람의 수(잠재적 택시 고객)가 줄어든다고 예상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2. 복권 구입 시기 문제

복권 구입도 (특히 위험 애호가라면) 누구나 한번은 해 봤을 경험이다. 어느 복권이든 그것을 구입하는 데에 따른 기댓값은 0보다 낮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대박 인생을 꿈꾸며 복권을 구입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이미 예상했겠지만, 사실 복권 구입은 큰 액수의 당첨금도 목적이지만 그보다 그것을 구입함으로써 즐길 수 있는 기대감, 즉 복권 당첨 결과를 알기 전까지 가질 수 있는 대박 인생의 꿈 때문에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다(도박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다만 그것이 집을 팔아먹을 정도로 심하지 않다면). 그렇지 않다면 복권을 구입하는 모든 사람들은 위험 애호가인 셈이다(이번 주에도 어김없이 로또를 구입하겠지만, 필자는 절대적으로 위험 회피자이다!).


여기서도 한 가지 궁금증이 생긴다. 예컨대 로또를 구입하는 이유가 당첨에 대한 기대감에 있다면, 그것을 보유하는 기간이 길수록 자신의 효용은 증가할 것이다. 즉, 필자처럼 토요일 저녁에 당첨 결과를 발표하는 로또를 토요일 오후에 사는 행위는 불과 몇 시간의 기대감만 가져다준다는 것이다. 따라서 로또를 가능한 한 빨리 구입하는 것이 두 번째 목적을 달성하는 데 더 유리하다(야구 경기를 1회 초부터 관람하는 것과 8회 초부터 관람하는 것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 하는 문제를 생각해 보면 이해가 더 쉬울 것이다). 그런데 복권을 구입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행동하는 것 같지는 않다. 왜 그럴까? 여러분은 무슨 요일에 로또를 구입하시는지.


3. 술 섞어 마시는 문제

필자는 음주를 즐기는 편이다(단, 가무는 피한다!). 소주와 맥주도 좋아하지만 그것들을 섞어 만든 이른바 ‘소맥’도 즐겨 마신다. 며칠 전에 아는 선배와 술을 한잔 하는데, 술집 벽에 붙어 있던 광고가 눈에 들어왔다. 어느 회사에서 신제품으로 나온 ‘오십세주’란 술의 광고였다. 예전에 ‘백세주’와 ‘소주’를 1:1 비율로 섞어 마시던 술을 오십세주라고 불렀는데, 술 마시는 사람들 사이에서 제법 인기를 끌었다. 그런데 이제는 이를 생산자가 직접 제조해서 상품으로 출시했다. 소비자들의 선호를 잘 겨냥한 아이디어인가.


필자가 생각하기에 이 제품은 소비자들로부터 그다지 많은 사랑을 받지 못 할 것 같다. 사람들이 술을 섞어서 마시는 이유를 생각해 보면 좀 분명해 질 것 같다. 사람들이 술자리에서 술을 섞어 마시는 이유는 그 술이 질적으로 향상(?)을 보이는 이유도 있겠지만, 술을 섞는 그 자체를 즐기기 때문일 수도 있다(술을 즐겨 하지 않은 분은 아마 이해가 안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미 술을 섞은 제품을 내놓는다는 것은 소비자들로부터 술을 섞을 기회를 빼앗아 간 것일 수 있다.


여러분은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필자는 소맥을 즐겨 마시지만, 어떤 회사에서 소맥을 신제품으로 선보인다면(기술적으로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술집에 들어가서 이렇게 주문할 것이다. “여기, 소주 한 병하고 맥주 세 병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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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사이트를 순회하면서 이런 저런 블로그를 보다가 눈에 띄는 내용이 있기에 이 내용을 갖고 곰곰이 생각을 해보았다. 부동산투자와 투기의 차이점은 무엇인지에 대한 인터넷이용자의 질문에 한 공인중개사 학원에서 교재로 쓴다는 내용을 갖고 정리한 대목이 있다.

구 분

부동산투자

부동산투기

주체면

실수요자의 행위

가수요자의 행위

대상

항구적 용도의 자산

미성숙지(잡종지,농지,임야)

목적

정당한 이익 거래

양도차익 획득

거래가격

시장가격(정상가격)

투기지역

이용?관리의사?부가가치 창출

있음

없음

구입면적

이용관리 가능면적

필요량 이상

보유기간

장기

단기

안전성

합리적인 안전성

상당한 위험부담(도박심리)

정책방향

정책적으로 조장되고 촉구되는 대상

직?간접으로 규제되거나 억제되는 대상

00 공인중개사 학원 교재

 

 한 학원에서 부동산투자와 부동산투기에 대한 여러 가지 측면에서 비교를 해놓고 있다. 물론 공인중개사 시험을 잘 치루기 위한 지극히 시험용 구분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얼핏 보면 이 구분에는 상당한 오해와 미신이 존재한다. 두 가지 구분을 놓고 본다면 결국 투기는 아주 못된 짓, 다시 말해 해로운 것으로 종결이 나고 있다. 이에 대한 구분을 해보자.

 우선, 투기와 투자에 대한 구분을 하기에 앞서, 일반재화와 부동산이라는 재화는 다른 속성을 지니고 있는 것인지에 대한 개념부터 정립하여야 한다. 토지와 주택을 연구하는 학자들, 대게 경제학을 전공한 사람들은 토지와 주택을 놓고 여러 가지 이견이 대립한다. 여기서 토지와 주택을 부동산이라는 하나의 재화로 보자. 학자에 따라 부동산은 인간의 노력적인 산물이라기보다는 태초부터 존재했다는 점과 사람들이 상호 어울려 살기에 여기서 의도하지 않더라도 나타나는 여러 외부불경제 효과 등으로 일정부분 정부의 간섭과 규제가 필요하다는 점, 그리고 인간의 기본적 생활인 의식주에 해당하기에 이를 공유재로 놓고 보는 견해가 있다.
 
이와는 반대로 부동산 역시 인간의 노력, 그 해당 목적부동산을 얻기 위해 돈이나 시간, 기타 여러 부수적인 노력의 결과로 개인의 소유가 된다는 점과 그리고 인간의 기본적인 의식주이지만 ‘문만 걸어 잠그면’ 타인으로부터 배제할 수 있다는 속성에서 사유재로 본다. 이상의 논의로부터 필자는 부동산을 사유재로 놓고 보겠다. 사유재로 본다면 부동산은 일반재화와 다르지 않다. 즉, 부동산은 일반재화이다. 여기서 부동산 투기는 해롭고, 부동산 투자는 해롭지 않다는 그런 일종의 미신으로부터 건국대 이춘섭 교수님의 예는 명쾌한 근거를 제시해주고 있다.

우선 ‘투기를 양도차익만 챙긴다’라고 놓고 보자. 그렇다고 오직 부동산만이 가만히 앉아서 양도차익만 챙기는 것은 아니다. 어느 해에 쌀농사가 풍년을 이뤄 쌀가격이 저렴해졌고, 또한 도매업자가 다음해에는 흉년이 들것을 예측하고 창고에 많은 양의 쌀을 사두었다. 도매업자의 예측과 맞게 그 다응해에 흉년이 들어 도매업자는 상당한 마진을 남기로 쌀을 팔았다. 이것이 투기인가? 이와는 달리 다음해에 풍념이 들어 그나마 창고에 있는 쌀마저 남아돌고, 썩어가고 있다. 이 넘치는 쌀을 사회에 기부한다. 이것은 사회적으로 이로운 일인가 ? 실상 이것은 사회적으로 아주 해로운 일이다. 전자의 경우, 흉년을 예측하고 쌀을 사들여 이에 대한 상당한 마진을 남기고 쌀을 팔아서, 평상시보다 많은 돈을 벌었다고 우리는 도매업자를 욕할 것인가? 여기서 도매업자는 굶어죽을 수 있는 상태에서 벗어나게 한 점에 있어서 투자의 순기능을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물론 형평에 따라 도매업자가 돈을 많이 번 것에 대해서는 부차적인 문제이다. 반대로 후자의 경우, 도매업자가 예측을 잘 못하여 투자금액의 큰 손실을 보았다. 이러한 손실은 개인에게 있어서 엄청나게 고통스러운 일이다. 이거야 말로 국가가 내릴 수 있는 벌보다 훨씬 강력한 벌인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샤뮤엘슨의 정의를 새겨 볼 필요가 있다. ‘투기꾼이 사회에 공헌하는 한 돈을 벌고, 투기꾼이 사회에 해를 끼치면, 먼저 투기꾼이 망한다.’ 돈벌이는 타인에게 기여를 하였다는 것이고, 그 대가가 돈벌이인 것이다. 샤뮤엘슨은 투기라는 것에 그 내용을 적용한 것이다. 즉, 일반재화에 있어서도 투기는 이로운 것이라 할 수 있다. 앞서 정의한 부동산도 일반재화와 같은 것이고, 이와 같은 논리가 적용된다. 따라서 부동산 투기는 해롭지 않다. 즉 이로운 것이다. 도매업자의 예와 같이 풍년이 들 것인지, 흉년이 들 것인지에 대한 예측은 시장경제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이다. 또한 이러한 예측을 정부가 하는 것보다 개인의 노력과 돈이 투입된 것에 따라 예측의 강도나 적중성은 달라진다. 광화문의 교보문고는 정부가 예측하여 제시해서 만든 것이 아닌 것처럼, 이렇듯 개인의 돈벌이는 결국 사회를 이롭게 하는 기능을 하고 있다. 이는 돈벌이를 목적으로 하는 부동산학에서도 예외는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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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서론

 

생애주기(Life cycle)에 따라 취업, 연애, 인생목표 등이 저와 같은 대학동기 K씨는 목표는 같지만 대처하는 방법은 다르다.

 

예를 들어 취업을 위해서 공모전을 한다든지 인턴쉽에 지원한다든지 혹은 토익성적을 만들기 위해 학원을 다니는 것 등등 K씨와 나는 유사한 목표를 설정한다.

 

하지만 일정한 목표가 생기면 바로 시작하는 저와 반대로 K씨는 학원을 같이 다닐 때에는 수강하자마자 “내가 단지 몇 개월을 이 학원에 다닌다고 해서 실력이 는다는 보장이 없으므로 굳이 학원을 수강할 이유가 없다”고 학원수강 첫날부터 환불을 고민을 하거나, 자격증 시험공부를 할 때는 만약에 열심히 했지만 불합격되거나 합격을 해도 자격증이 취업에 보장되는 것도 아니므로 지금 공부로 인한 기회비용(시간)이 아깝다고 푸념하기도 한다. 더욱이 연애에 대해서는 맘에 드는 사람에게 사귀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을 했는데 여성이 남자친구가 있거나 자기를 싫어해서 거절하면 그동안의 노력이 쓸데없는 짓이므로 시간이 아깝다는 말을 먼저 한다. 이처럼 K씨는 확실한 결과, 확실한 미래, 확실한 보상을 원하기에 확실한 미래가 오지 않는다는 이유로 시작도 하지 않으려고 한다.

 

물론 맞는 말이다. 영어학원을 몇 개월 다닌다고 해도 원어민 수준으로 실력이 느는 것도 아니고, 자격증을 딴다고 해도 직장이 보장이 되지 않는다. 애석하게도 맘에 드는 이성에게 최선을 다해 작업을 한다 해도 사귄다는 보장은 없다는 것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 다는 것일 뿐이다. 현재 그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연애경험도 없고, 취업에 도움이 될만한 괜찮은 자격증도 없고, 영어실력도 그리 뛰어나지 않고, 졸업 후 반년이 지났지만 아직까지 취업을 준비하고 있다.

 

이글은 K군을 비난하기 위해서 쓰는 글이 아니다. 그동안 K씨에게 했던 조언 중에서 ‘시작이 반이다’‘기회는 준비된 자에게만 온다’는 주장을 글로 다시 보여줌으로써 시장경제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경쟁력가진 사람으로 거듭나기를 바랄 뿐이다.

 

Ⅱ. 본론

 

만약 당신이 목표한 계획을 세우고 이를 행하면 결과는 성공과 실패라는 두 가지 결과만 있다고 가정해 보자. 우리 인생의 목표가 고등학교 수학시간에 배웠던 동전던지기 게임처럼 한 번의 시행으로 당신의 얻을 결과는 앞면과 뒷면 두 가지 밖에 없다는 가정과 동일하다. 이는 한 번의 시행으로 동전의 앞뒷면이 나올 확률이 각 50%인 것처럼 성공할 확률과 실패할 확률이 각각 50%를 갖는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당신이 계획을 세우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계획을 성취할 수 없으므로 그 계획이 실패확률은 100%가 된다. 하지만 계획을 행한다면 당신은 50%의 성공확률만큼 계획을 성취해 낼 수 있다. 여기에 한 번의 실패를 딛고 그 계획을 달성하기 위해서 한번 더 노력을 한다면 당신은 처음에 실패할 확률에 성공확률을 곱한 만큼 계획을 성취해 낼 수 있거나 또다시 실패할 수 있다. 두 번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계획을 달성하기 위해서 도전한다면, 두 번의 연속실패확률에 하나의 성공확률만큼 성공할 수 있거나 하나의 실패확률만큼 또다시 실패를 할 수 있다. 이렇게 다섯 번만 실패를 무릅쓰고 행한다면 당신의 성공확률은 98.4375%가 된다. (98.4375% = 50% + 25% + 12.5% + 6.25% + 3.125% + 1.5625%) 위의 내용을 공식화(일반화)해 보자.

 

한번 도전으로 성공할 확률이 X라고 해보자.

[성공확률 X(0≤X≤1) + 실패확률 1-X = 100%]

 

당신이 성공할 확률은 X

그리고 실패할 확률은 (1-X)이다.

 

비록 처음에 실패를 했지만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용기가 있다면,

당신이 성공할 확률은 (1-X)X

그리고 실패할 확률은 (1-X)(1-X)이다.

 

또 다시 실패에 다시 도전한다면,

당신이 성공할 확률은 (1-X)(1-X)X

그리고 실패할 확률 (1-X)(1-X)(1-X)이다.

 

포기 없이 성공할 때까지 도전한다면 당신의 성공확률은

[처음에 성공할 확률 X] + [처음실패에 두 번째에 성공할 확률(1-X)X] + [두 번의 실패 후 성공할 확률(1-X)(1-X)X] + [세 번의 실패 후 성공할 확률(1-X)(1-X)(1-X)X] + ………

 

이를 정리하면 S = 초항 / (1-공비)이므로 초항 S = X / {1-(1-X)}이므로 즉 ‘1’이 된다.

 

정리) 무한등비급수로 계산하면 Sn=

S = a + ar + ar^2+ ar^3+ ar^4+ ar^5+ ar^6+ ar^7+ ar^8 ……

- ) r*S = ar + ar^2+ ar^3+ ar^4+ ar^5+ ar^6+ ar^7+ ar^8 ……

등비를 곱한후 두 값을 빼면 S - r*S = a가 된다. 그리고 정리하면, S = a /(1-r)가 된다.

 

즉 무한히 반복한다면 당신은 그 목표에 대해서 100%의 성공확률을 갖는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그 계획에 대해서 성공할 확률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한도전이 성공가능성을 높인다는 것이다. 지금껏 우리는 어떤 일을 성취해내는 것에 대해서 시간과 능력이 없음을 탓하고 행하지 않으려고 들지만, 사실은 실패에 대한 두려움에 도전할 용기가 없다는 것이 더 명확한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1%영감과 99%노력을 강조한 에디슨의 일화 중 전구발명일화가 무한도전의 사고와 관련이 있다. 한때 에디슨은 전구의 필라멘트를 만들기 위해서 3000번의 시도와 9000번의 전구실험을 했지만 잘되지 않았다. 9999번째의 실패를 바라본 친구는 실패를 1만 번째 되풀이 할 셈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에디슨은 ‘나는 실패한 게 아니고, 다만 전구가 안 되는 이치를 발견했을 뿐이다’라고 말을 했다고 한다.

 

우리의 삶은 무한도전을 하면 어떤 일이든 성취할 수 있다. 아메리카의 호피인디언의 기우제처럼 비가 올 때까지 기우제를 지내면, 기우제를 지낼때마다 비가 내리는 성공적인 기우제가 되지 않겠는가?

 

이런 결론을 내어 버리면 좋겠지만 인간에게 주어진 시간은 한정적이기에 무한도전을 하다가 수명이 다해 죽음을 맞이하게 되어 숙원과제가 될 수도 있겠다. 물론 우리는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우리는 어떻게 하면 최소한의 횟수로 성공을 할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왜냐하면 X(성공확률)가 50%에서 90%가 된다면 단 두 번만에 99%의 성공확률에 도달할 수도 있겠지만, X(성공확률)가 50%에서 10%가 된다면, 99%의 성공확률을 갖기 위해서 무수히 많은 시도를 해야 한다는 결론이 내릴 수 있다.

 

결국은 어떻게 하면 X(성공확률)를 얼마나 높이는 가이다. 처음 시작을 했을 때 준비를 얼마나 잘 해서 단번에 성공을 하는 것(초기 확률 높이기)과 재시도를 할 때마다 성공확률을 높여가는 방법 두 가지가 있다. 여기서 일단은 초기 확률 높이기는 상당부분이 다음 주제인 ‘준비된 자에게 기회가 있다’와 중복되므로 재시도 할 때마다 성공확률을 높이는 방법만 이야기 하고자 한다.

 

우선 가정을 좀 더 현실적으로 수정해 보자. 앞선 동전던지기 과정처럼 각 시행의 결과들이 서로영향을 주지도 받지도 않는 독립적인 시행이 아니라 결과들이 다음 시행에 영향을 주는 종속적인 시행들이다. 쉽게 말해 실패의 경험이 다음 도전에 도움이 된다는 말이다. 앞서 에디슨의 일화처럼 필라멘트를 만들지 못하는 수천가지의 새로운 방법을 발견했다는 것은 비록 실패를 했다하더라고 이런 실패도 다음 성공에 의미가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아인슈타인은 같은 방법을 시도하고도 다른 결과를 기대하는 것은 바보천치라고 하지 않았던가?

 

대학동기인 K씨와 학교를 같이 다닐 때마다 매학기마다 all A+를 목표를 향해 노력했다. 그는 그 목표달성을 위해서 시험보기 몇 주 전부터 복습하고 예습하고 3~5번의 반복을 거치면서 시험을 준비했지만 만점을 달성하지 못했다. 하지만 K씨는 그 방법을 끝까지 고수했고 만점을 받지 못했다.

 

반면에 저는 실패를 할 때마다 매번 방법을 바꿔보고 공부해 본 결과 수업시간에 농담까지 적는 노트필기를 먼저하고 시험기간에 딱한번 정리해서 모범답안을 만든 후에 시험장에 가서 그대로 답을 적으면 고학점이 받는 것을 발견했다. (참조 : 당신의 대학생이라면) 한 두번의 세부적인 실수를 수정한 끝에 결국은 만점을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대학원 이번 학기에서 손쉽게 만점을 받을 수 있었다.

 

대학 후문가 음식점이 아무리 가격경쟁력으로 승부를 한다고 해도, 가격이 싼 것 말고도 각각의 음식점마다 알려진 음식이 있다. 예를 들어 인천의 하바드로 알려진 I대학의 후문가는 A식당은 닭도리탕이 유명하고 B식당은 볶음밥이 유명하고 C식당은 찌개류가 맛있다고 알려졌다. K씨와 함께 한 번은 볶음밥이 맛있는 음식점에 간적이 있다. K씨는 볶음밥을 먹어보고서는 참 맛있다는 감탄을 여러 번 했다. 그 이후부터 여기는 돈까스가 맛있다고 해도 볶음밥! 생선류가 맛있다고 해도 볶음밥! K군은 한중일식당, 육해공음식의 구분 없이 항상 볶음밥을 시켰다. 그 후에 식사를 다하고 나서는 여기 볶음밥이 별로다는 말을 덧붙인다.

 

K씨는 사소한 것마저 생각해보고 바꾸는 것이 귀찮기 때문에 과거의 성공에 비추어 결정을 하고자 하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전옥표씨의 ‘이기는 습관’에 따르면 큰 변화는 작은 변화로부터 커지게 된다고 한다. 그렇기에 작은 것부터 수정해 나갈 줄 알아야 다음 성공확률을 높일 수 있다. 이런 작은 부분까지 신경을 쓰고 싶지 않다고 한다면, 성공확률을 높이기 위해서 표준(많은 사람들이 행하는 것)에 모방하는 것을 권하고 싶다.

 

만약 두 사람이 수영시합을 하기로 했다고 생각해 보자. 한 사람은 자신만의 방법인 개헤엄을 어느 정도 터득한 상태였고, 다른 한사람은 거의 방법을 몰라 수영장에 가서 자유형을 배우기로 했다. 석 달 후에 와서 두 사람이 시합을 했다면 누가 이길까?

 

어떤 사람은 개헤엄이 이긴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까지 인류가 온갖 시행착오를 통해서 터득해온 수영법인 자유형이 한 개인의 개헤엄에게 질리는 만무하다. 이렇듯 다른 사람들의 시행착오(오류수정)을 통해서 다듬어온 표준을 따른다면 성공의 확률이 높아질 것이다. 예로 고시원에 가면 강사보다 출중한 배경지식을 갖춘 장수생이 합격하는 것이 아니라 강사의 방법에 따라서 공부를 하는 신출내기 어린 학생들의 합격률이 더 높다. 이는 장수생은 자신의 비법을 갖고 있었지만 강사는 합격된 사람들의 표준을 갖고 있었을 뿐이다.

 

Ⅲ. 결론

 

몇 개월 전 라디오에서 모 대학 광고를 들었었다. 나지막한 목소리의 아나운서가 만약 당신이 10년 전으로 돌아간다면 무엇을 하고 싶으세요? 라는 질문을 했다. 이에 인터뷰한 사람들의 대답이 있었다. “저는 10년 전에 제가 된다면 공부를 열심히 해서 지금 다니는 곳보다 더 좋은 곳에 취업을 하고 싶다.”, “저는 어릴 적에 미술을 좋아했는데 미술공부를 해보고 싶습니다.”, “저는 영어공부를 제대로 해보고 싶습니다.”

 

그 라디오의 광고 마지막에 아나운서가 이렇게 말한다. “왜 지금은 하시면 안되나요?”

 

 
Posted by 자유기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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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올해 들어 가장 재미있게 영화를 꼽아 보라면, 단연 영화<쿵푸 팬더_ 한국의 맞춤법에 따르면, 엄연히 ‘판다’가 맞는 표현이지만, 인지는 모르겠으나(중국어를 한국 독자가 절대 알아 없게 발음대로 표기하는 점은 정말 이해가 안됨_ex)이연걸->리롄지에, 성룡->청룽)모두들 굳이 팬더라고 쓰고 있으므로 팬더로 통일함> 뽑고 싶다. 중국을 상징하는 동시에 세계인들에게 인기가 높은 가지, 쿵푸와 팬더라는 소재를 이용했다는 점과 다양한 인물들을 재미있지만 가볍지 않게 다뤘기 때문이다.


 

특히 쿵푸팬더는 세계적으로 엄청난 수익을 내면서, 더욱 이슈화되었다. 하지만 중국에서는 다른 면에서 이슈가 되었다. 이야기의 발단은 팬더의 고향 쓰촨성(사천성)으로 돌아간다. 지난 5 12 중국 쓰촨성은 대지진이라는 엄청난 참사를 겪었다. 중국 당국의 통계에 따르면, 전체적으로 4624 명이 지진의 영향을 받았으며, 사망자는 8 이상인 것으로 추정된다고 하니 중국인들은 실로 혹독한 경험을 것이라고 있다. 지진의 피해 규모나 범위를 , 7월을 앞둔 지금도 앞으로도 재해 복구는 계속 이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세계 야생생물기금(WWF) 따르면, 팬더는 중국의 쓰촨성 서부와 북부, 그리고 깐수성, 샨시 두성의 남부 산악지구에만 겨우 1,000마리 정도가 살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쓰촨성은 과거부터 팬더의 서식지로 유명했는데, 이번 참사로 쓰촨성의 많은 팬더들이 죽음을 당하거나 대나무 숲의 파괴로 먹이부족을 겪고 있다고 한다.


 

여하튼 바로 이런 시점에서 영화 쿵푸판다가 쓰촨성에서 상영되기 시작했다. 이에 일부 누리꾼들은 이의를 제기하기 시작했다. 아직 지진참사로 인해 아물지 못한 중국인들의 마음에 상처를 준다는 것과 쓰촨성의 이재민들의 지갑을 연다는 정말 터무니 없는 주장이었다. 이를 기다렸다는 듯이 중국 영화 총국은 "20 개봉했던 '쿵푸팬더' 팬더와 쿵푸로 대표되는 중국 문화를 외국 영화사의 임의대로 비하했을 뿐만 아니라 이제 아물기 시작한 이재민들의 상처를 더욱 곯게 있다" 우려하며 쓰촨성 피해 지역 5곳의 개봉일을 보류하는 판정을 내렸다고 한다. 하지만 일주일 , 중국 언론들은 일제히 중국을 상징하는 소재로 훌륭한 영화를 만들어 미국에 대한 부러움과 중국 애니메이션과 문화 전반에 대한 비판을 하고 나섰다. 한마디로 재주는 중국의 팬더가 부리고, 돈은 미국이 거둬들였다는 것이다.


 

이렇게 급작스럽게 중국 언론이 태도를 바꾼 시장경제에 입각해, 자기가 보고 싶은 있는 중국인들의 다수가 영화 쿵푸팬더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미국 영화 쿵푸팬더가 중국박스오피스에서 3일간 3800 위안(한화 58 )이라는 엄청난 액수를 벌어들임으로써 언론의 화살은 자국의 영화 애니메이션의 문제점에 쏠리게 것이다. 일부 중국 영화 관계자들은 물론 영화가 흥행하기 위해서는 영화자체가 우수해야 하지만 시장상황이 자국영화의 흥행을 막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미국의 거대자본으로 만들어진 영화와 중국 자국의 영화는 비교가 된다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중국 애니메이션 관계자는 쿵푸팬더를 만든 드림웍스는 중국 소재를 가지고 단지, 마디 말과 CG 첨가한 것뿐이라며, 중국 젊은이들도 충분히 이런 훌륭한 작품을 만들 있지만, 전체적인 편집기획능력과 자본의 부족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사실 어떻게 생각하면 중국인들의 심정도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어느 미국의 유명 영화사가 한국의 별주부전이나 홍길동전을 이용해 애니메이션을 만들고 애니메이션이 세계적으로 히트를 대다가 그것도 모자라 시리즈로 작품을 만든다고 하면, 우리나라 내부에서도 별별 말이 나오지 않을까 싶다. 만약 최근 한국의 전체적 상황을 봤을 , 미국판 별주부전은 불매운동의 타깃이 되지 않았을까 조심스럽게 추측도 있다.


 

문화라는 것은 다양성을 내포하고 있어서 발전 가능성이 무한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21세기는 문화강국이 세계강국이 된다는 유명 인사들의 빈번한 말들이 거짓은 아닐 것이다. 김구 선생님도 진즉이 말씀하셨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도 행복을 주기 때문이다. 나는 우리나라가 남의 것을 모방하는 나라가 되지 말고, 이러한 높고 새로운 문화의 근원이 되고, 목표가 되고, 모범이 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진정한 세계의 평화가 우리나라에서 우리나라로 말미암아 세계에 실현되기를 원한다. 라고 말이다.

 

처음에는 중국이 말도 되는 이유를 붙여, <쿵푸팬더> 상영을 반대하는 것이라고 비난했지만, 과연 우리가 같은 처지라면 중국을 비웃기만 것인가는 곰곰이 생각해 필요가 있다. 많은 다양성과 다양성 사이에서 경쟁을 넘어서 우리가 우리나라가 우리자체가 높은 무언가를 이룩해 나가는 희망의 상징이 되길 기도해본다.


Posted by 자유기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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