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25일 민노총은 “소고기 수입반대라는 국민의 요구를 반영한 파업”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총파업 출정식을 개최했다. 민주노총은 노동자의 권리보호를 위해 존재하는가? 아니면 소고기 수입반대를 명분으로 한 정치싸움에 열중하는 단체인가? 현장을 방문한 객원기자는 정치파업일뿐이라고 이야기한다.

민노총의 총파업으로 ‘촛불집회’와 연계된 노동계의 ‘하투’(夏鬪)가 본격화될 전망이다.

오종렬·한상렬 등 재야의 친북좌파가 주도하는 ‘광우병국민대책회의’(이하 대책회의)는 최근 7월1일~6일을 ‘국민승리주간’으로 정하고 대(對)정부 총력투쟁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대책회의는 구체적으로 5일을 ‘국민승리의 날 100만 촛불대행진’으로 정하고 지난 6월10일 국민대행진에 버금가는 전국적인 행사로 열겠다고 선포했다. 민노총 역시 7월 첫째 주를 기점으로 총파업에 돌입하는 등 촛불집회에 적극 동참한다는 방침을 정했다.

민노총 등 좌파단체 시위 수그러들지 않을 것

이런 가운데 9일에는 전국 농민대회가 예정되어 있어 촛불집회와 연계된 좌파단체의 각종 시위는 다음 달 중반까지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대책회의 대표급 인사로 활동 중인 이석행 민노총 위원장은 1일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정부가 미국산 쇠고기 수입 조건을 재협상하라는 촛불집회의 요구에 2개월째 버티고 있고, 민노총 조합원들을 무더기로 연행하는 등 막무가내로 나오는 상황에서 우리는 투쟁역량을 보일 수밖에 없다”면서 총파업에 나설 것임을 밝혔다.

이 위원장은 “(민노총의 총파업이) 생산에 타격을 주더라도 국가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최소화하기 위해 노력하겠다”면서도 “정부의 탄압이 계속된다면 전기를 끊고 철도를 멈추는 등의 방식으로 투쟁 수위를 더욱 높여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올 여름 ‘하투’(夏鬪)의 종료 시점과 관련, “공공부문 구조조정 방안 등을 감안할 때 9월까지는 계속될 것”이라고 언급한 뒤, “정부와의 대타협이 도출되지 못할 경우 ‘최후의 수단’을 강구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화력을 있는 대로 다 모아서 갈 작정이니 정부가 재협상을 하지 않으려면 우리 모두를 다 잡아가야 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민노총 산하 금속노조 파업투쟁에 ‘쇠고기 재협상’ 채택

이에 앞서 민노총 산하 최대 산별조직인 금속노조는 최근 총파업 찬반투표에서 재적인원 14만1천178명 가운데 12만7천187명(68%)이 참가해 9만6천36명(75.5%)으로 파업을 가결시켰다. 재적대비 찬성률 기준으로는 기아차(64.85%), 대우차(67.08%), 쌍용차(63.26%) 등 완성차 4사가 모두 파업 요건을 갖췄다.

이런 가운데 반미(反美)성향의 금속노조는 미국의 독립기념일인 7월4일을 기점으로 이틀간 1만여 명의 조합원이 참여하는 ‘쇠고기 전면 재협상과 중앙교섭 쟁취를 위한 전 간부 상경투쟁’을 벌이기로 했다.

주목할 것은 ‘임·단협’의 파업투쟁에 ‘쇠고기 재협상’을 기꺼이 채택했다는 점이다. 현행법상 불법으로 규정되어있는 ‘정치파업’ 구호를 섣불리 꺼내들지 못할 것이라는 일각의 예상을 뒤엎고 과감한 행보로 민노총 지도부에 강력한 힘을 실어준 것이다.

금속노조의 이 같은 지지에 화답이라도 하듯 민노총은 장관고시가 관보에 게재된 지난 달 25일부터 미국산 쇠고기를 보관하고 있는 전국 곳곳의 부두와 냉동 창고에서 쇠고기 반입저지를 위한 소위 ‘봉쇄투쟁’을 전개하고 있다.

일례로 부산항에서는 노동자 200여명이 미국산 쇠고기 3300톤이 보관되어 있는 감만 부두 어귀 4개 차로 가운데 3개 차로를 점거한 뒤, 경찰 저지선을 뚫고 몸싸움을 벌였다. 2066톤의 미국산 쇠고기를 보관 중인 경기도 광주와 용인·이천 등의 냉동 창고 12곳에서는 300여명의 노동자들이 시위를 벌이며 쇠고기 반출을 저지했다.

민노총, 7월 한 달 ‘총파업 투쟁의 달’로 정해

비슷한 시기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강동 제2냉장 어귀에서는 천영세 민노당 대표를 비롯, 강기갑 의원, 민노총 공공노조 소속 조합원 50여명, 등이 미국산 쇠고기 반출을 막았다.

인천에서는 민노총 인천본부 집행부 관계자들과 노동자들이 인천공항 인근 국립수의학검역원 인천지원 영종계류장 정문 앞에서 봉쇄투쟁을 벌였다. 민노총은 이달 24일까지 경인 냉장 등 경기 광주지역 6개 냉동 창고와 경기도 이천 로지스올인터네셔널 냉동 창고 앞에서 ‘광우병 고시 철회 및 운송저지 촉구대회’를 진행해 투쟁 수위를 한 층 높일 태세다.

7월 한 달을 ‘총파업을 포함한 총력 투쟁의 달’로 정한 회원 수 80만의 민노총이 노동자의 권익보호와 무관한 파업자체를 위한 파업, 그것도 대다수 노동자가 반대하는 ‘정치파업’을 강행한 이유는 그동안 이 단체가 추구해온 ‘좌파적 이데올로기’와 ‘일맥상통’(一脈相通)한다.

민노총은 단체 강령(綱領)에서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을 보장하는 참된 민주사회 건설’을 목표로 하고 있는데 실제 행태는 ‘반(反)자본주의·반(反)세계화’에 가깝다. 민노총의 이 같은 좌파적 성향은 노조간부 등을 대상으로 하는 각종 교육 자료에 상세히 나타나 있다.

민노총, 연방제와 미군철수 국보법 철폐 주장하는 이유는??

일례로 민노총은 2005년 ‘제5기 노동자학교’를 위해 제작한 자료집 가운데 ‘자본주의 바로알기’에서 자본주의를 △상품생산경제로서 황금만능의 사회 △자본가계급이 사회의 주인이 되는 사회 △이윤창출경제로서 부익부·빈익빈의 사회 등으로 규정한 뒤,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붕괴될 수밖에 없으며 새로운 경제제도로 대체될 수밖에 없다”고 밝히고 있다.

민노총은 그동안 NL(민족해방)이 아닌 PD(민중민주)계열의 단체로 분류되어 왔다. 그러나 그 행태는 오종렬·한상렬 등이 주도하는 ‘한국진보연대’ 등의 좌파단체와 마찬가지로 북한 정권을 옹호하고 연방제·주한미군철수·국보법철폐를 주장하는 행태를 보이고 있다.

민노총은 2002년 대의원대회에서 통과된 사업계획안에서 △조국통일3대원칙(자주·평화통일·민족대단결)과 ‘4대 정치적과제(국보법철폐·평화협정체결·주한미군철수·연방제통일방식)’의 실현을 위한 투쟁지속 △미국과 수구냉전세력의 반(反)통일 움직임 분쇄 및 6·15공동선언 관철 △모든 형태의 침략전쟁에 반전평화운동 전개 등을 설정한 바 있다.

구체적으로 단체는 4대 정치적과제로 설정한 국보법철폐, 평화협정체결, 주한미군철수, 연방제통일을 위해 통일강연회 및 순회간담회, 통일학교 개최, 미군장갑차 여중생살인규탄투쟁, 용산미군기지반환운동, 불평등한SOFA전면개정투쟁 등 수많은 세부사업들을 규정했다.

이명박 정부, 불법파업 세력 엄단해야

이와 함께 2006년 4월20일 평택 대추리 대추 초등학교에서 가진 민노총 통일위원회 회의에서 단체는 “반북전쟁책동과 민족분열 이데올로기 공세를 일삼는 미국과 수구반통일세력에 대한 공세적 투쟁을 적극 전개한다”는 사업목표 아래 “당면한 평택미군기지확장저지투쟁을 주축으로 주한미군철수투쟁을 힘 있게 전개 한다”는 투쟁 사업을 결의했다.

회원 수 80만에 수십억 대의 예산을 주무르는 ‘갈등(葛藤)의 핵’ 민노총. 이들은 지금 ‘미국산 쇠고기 수입=인간 광우병 감염=노동자 권익 침해’ 식으로 ‘견강부회’(牽强附會)하면서 노동자들을 파업으로 내몰고 있다. 민노총의 주장은 조류 인플루엔자(AI)가 확산돼도, 뇌염모기가 기승을 부려도 노동자들이 건강을 잃을 우려가 있어 파업을 해야 한다는 논리다.

‘파업의 달인’ 민노총의 가세로 ‘제2라운드’에 접어든 ‘촛불집회’를 해결할 열쇠는 불법집회에 대해 공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이명박 정부에 있다. 이제 정부는 ‘미국산 쇠고기를 먹으면 광우병에 걸린다’는 거짓논리로 ‘불법파업’을 주도하는 세력을 엄단해야 한다. 이를 위해 정부는 대한민국의 성장 동력을 갉아먹는 ‘암세포의 종심’(縱心)인 민노총을 해체해야 한다.●

김필재 객원기자 (spooner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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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단은 지난 주 불법집회에 대한 정부의 경찰권 행사를 폭력으로 규정지으며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지킨다는 명목으로 시국미사와 집회를 주도했다. 객원기자는 그 현장을 취재하고 사제단이 촛불집회에 참여한 계기해 대해 이야기한다.

촛불폭도의 불법행위엔 침묵, 경찰의 합법적 법집행은 비난!?

일부 종계단체들이 촛불난동(亂動)의 구원투수로 나섰다. 폭동(暴動)으로 번진 촛불집회에 대한 비판여론을 무마시키며 촛불집회에 동참하고 나선 것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사제단)은 2일 오후 7시 서울 시청 앞 서울광장에서 ‘국민주권을 선언하고 교만한 대통령의 회개를 촉구하는 비상 시국회의 및 미사’라는 이름의 3번째 시국미사를 가졌다.

이들의 행사는 소위 촛불문화제라는 이름의 야간不法집회로 이어졌다. 3일부터 같은 장소에서는 YMCA 전국연맹과 예수살기 등 개신교 연대체인 광우병 기독교대책회의의 시국기도회로 이어졌다.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참상이 벌어진다?”

현재 사제단은 근거 없는 광우병 선동과 함께 정부의 공권력 행사를 비난하는데 열을 올리고 있다. 그러나 경찰은 물론 민간인까지 폭행하고 각종 시설물을 파괴하고 있는 촛불집회 참가자들의 행태에 대해선 철저히 침묵한다.

사제단은 30일 작성한 성명을 통해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참상이 벌어지고 있다. 국민을 상대로 마구 저지르는 오늘의 폭력상과 거짓...몽둥이와 방패로 시민들을 패고 내려찍으며 무참히 폭력을 행사했다”며 촛불폭도에 대한 정부의 경찰권 행사를 ‘국민을 상대로 마구 저지르는 폭력’으로 비난했다.

또 “국민이 그토록 간절하게 호소했건만 정부가 미국의 압박에 자진 굴복하여 문제의 쇠고기와 위험한 부속물 수입을 전면 허용해버렸기 때문...”“그저 미국에 충성하려드는 맹목적 사대주의” 운운하며 미국산 쇠고기 수입이 ‘미국에 굴복한 위험해 위험한 부속물 수입을 한 것’이라는 선동에 나섰다.

사제단은“우리 사제들은 무장경찰들의 폭력에 숭고한 촛불의 뜻이 꺼지지 않도록 지켜드리고자 한다”“이 땅에 하느님 나라를 선포해야 하는 사제의 양심에 따라 오늘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다”며 촛불폭도의 不法的 폭동은 숨기고 경찰의 合法的 법집행만 비난하는 이중적 태도를 보였다.

심지어 “정부는 원천봉쇄와 강경진압 그리고 오늘 아침에 벌어진 광우병 국민대책회의 압수수색과 체포 따위로 진실을 어둠에 가두려고 하겠지만 국민이 받은 상처와 모욕은 더욱 깊어만 갈 것”이라며 주한미군철수와 연방제통일을 주장하며 각종 反美폭동을 주도해 온 자들에 대한 법집행을 ‘진실을 어둠에 가두려고 하는 것’이라고 비방했다.

송두율 입국과 석방 앞장서

사제단이 촛불난동에 동참하게 된 배경에는 ‘이념(理念)’이 자리해 있다. 1974년 결성된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은 87년 민주화 이후 국가보안법폐지-주한미군철수-연방제통일 등 북한의 對南노선을 추종하는 단체로 변질돼 왔다.

국보법폐지는 사제단이 주장해 온 첫 번째 사업이다. 이 단체는 ‘국가보안법폐지국민연대’참여단체로서 ‘송두율’ 입국·석방 및 利敵단체 ‘한총련’ 비호에 앞장섰다.
사제단은 2003년 8월 송두율 입국을 위해 결성된 ‘해외민주인사 명예회복과 귀국보장을 위한 범국민 추진위원회’를 주도했고, 한국에 온 송두율이 구속되자 ‘宋교수 석방과 학문·양심의 자유를 위한 대책위원회’에 참여했다.

2002년 7월18일과 2003년 4월8일에는 각각 ‘한총련의 합법적 활동 보장을 위한 종교인 선언’과‘양심수와 정치수배 전면해제 촉구선언’에 사제단 소속 신부들이 대거 참여, 한총련 합법화와 수배해체를 주장했다.

“미군이 물러가길 예수의 정의로 결단!”

사제단은 이미 1989년 6월6일 ‘민족통일을 향한 우리의 기도와 선언’에서 “민족의 삶에 배치되는 군사동맹 해체”와 “주한미군의 단계적 철수”를 주장했다.

2000년 8월2일 ‘불평등한 SOFA전면개정과 매향리 폭격장 폐쇄촉구 서명’에서는 “미군이 물러가는 진정한 민족통일의 그 날까지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정의와 평화로 결단한다.”고 주장했다.

이후에도 사제단은 2002년 미선이·효순이 사건을 비롯해 매향리·직도·평택 등 전국 각지에서 벌어진 反美집회에 참여해 ‘미군철수’를 주장해왔다.

이 단체는 ‘평택 미군기지 확장 저지 범국민대책위(평택범대위)’와 ‘이라크파병반대범국민행동’에도 이름이 올라 있다.

“고려연방제 연구하고 논의하라”촉구

6·15선언 실천을 주장해 온 사제단은 2002년 2월18일 ‘한(조선)반도 평화선언’을 통해 “6·15선언이 한(조선)반도에 평화를 이룰 수 있는 최선의 현실적 방안임을 인정한다.”며 “북의 고려연방제와 남의 국가연합제(남북연합제) 통일방안에 대해 깊이 연구하고, 대중적 논의를 통해 한(조선)반도에 필요한 방안을 마련할 것”을 촉구했다.

2일 사제단의 행사에 앞서서는 민노총의 ‘총파업 승리 결의대회’가 치러졌다. 민노총은 이날 오후 6시 서울광장에서‘공안탄압, 미친소 수입 강행, 국민주권 팔아먹은 이명박 정권 심판 및 총파업 승리 결의대회’를 열어 “민주노총 80만 조합원이 나서 광우병 쇠고기 반대 국민촛불을 지키겠다”면서 “광우병 쇠고기 촛불시위 탄압중단과 미 쇠고기 재협상”을 촉구했다.

김성욱 객원기자 (gurkhan@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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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사람들은 우리의 역사를 두고 소수의 반민족 친일파가 지배세력으로 군림한 오욕의 역사라는 전근대적인 역사인식을 하고 있다. 그래서 여론은 친일인명사전편찬위의 친일파 명단 발표에 동조적이다. 그러나 친일문제로 우리 사회가 더 이상 갈등하고 소란스러워서는 곤란하다. 한국이 선진사회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전근대적인 역사인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역사의식이 필수적이다. 그 새로운 역사의식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 문명의 뿌리는 어디에 있는가라는 존재론적 질문에서부터 시작되지 않으면 안 된다.

지난 4월 29일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가 4천7백여 명의 친일파 명단을 발표하였다. 이후 주요 방송사를 중심으로 이를 둘러싼 찬반 토론회가 활발하게 펼쳐졌다. 각종 인터넷 매체를 통해 확인되는 여론의 동향은 동 위원회의 활동에 동조적인 것 같다.

그렇지만 역사적 사실에 대한 이해와 평가를 종다수 방식의 여론 조사에 맡겨둘 수만은 없다. 여론 그 자체가 낡은 역사의식이나 잘못된 역사교육의 산물일 수 있기 때문이다.

역사란 과거와 현실의 대화다

영국의 역사학자 카(E. H. Carr)는 역사를 두고 ‘과거와 현실의 대화’라고 했다. 이 대화가 고정적이지 않고 끊임없이 다른 방식과 내용으로 바뀌어 갈 수 밖에 없는 것은 다음의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시간의 흐름에 따라 과거에 대한 정보가 점점 많이 축적된다는 점이다. 오늘날 우리는 특정의 시대에 관해 그 시대 사람들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대량의 정보를 이용할 수 있다. 여기에는 대량의 정보를 처리할 수 있는 컴퓨터의 발달이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영국의 역사학자 카(E. H. Carr)는 역사를 두고 ‘과거와 현실의 대화’라고 했다. 이 대화가 고정적이지 않고 끊임없이 다른 방식과 내용으로 바뀌어 갈 수 밖에 없는 것은 … 시간의 흐름에 따라 과거에 대한 정보가 점점 많이 축적되고, 과거에 대한 현실의 수요가 자꾸 달라지기 때문이다.

둘째, 과거에 대한 현실의 수요가 자꾸 달라진다는 점이다. 우리가 과거사에 관심을 갖는 근본 이유는 오늘날 우리가 처하고 있는 현실과 유사한 여건에서 과거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했는지를 알고 싶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실 그 자체가 부단히 변하고 발전하기 때문에 우리가 과거사에서 얻고 싶은 교훈의 내용도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친일인명사전편찬위의 역사 평가 방식에 문제 있다

필자가 보기에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의 활동은 21세기를 사는 오늘날의 한국인이 지난 20세기와 대화하는 올바른 방식이 아니다. 동 위원회가 20세기와 대화하는 방식에는 다음의 세 가지 전제가 깔려 있다.

첫째, 1905년 또는 1910년 대한제국이 패망한 것은 소수의 반민족 친일파가 나라를 팔아먹었기 때문이다. 둘째, 일제가 한국을 강제적으로 지배한 그 시기에 친일과 반일 또는 협력과 저항의 경계선은 명확하였다. 셋째, 해방 후 반민족 친일파가 여전히 대한민국의 지배세력으로 군림하는 통에 역사의 정의가 사라지고 정치ㆍ사회의 부조리가 심화되었다.

해방 이후 얼마 동안 한국인들은 이 같은 전제에서 일제가 한국을 지배한 과거사와 대화하였다. 그 전제에서 그들은 친일파를 하루라도 빨리 청산하는 것이 새로운 국가 건설에 요구되는 필수 과제라고 생각하였다.

그렇지만 세월이 60년도 더 지난 오늘날에까지 위의 세 가지 전제가 타당한 것은 아니다. 위에서 지적했듯이 과거사에 대한 정보가 일층 풍부해진 것이 한편의 원인이라면, 과거사로부터 얻고자 하는 교훈의 내용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조선왕조 몰락, 근본적 원인은?

조선왕조 또는 대한제국은 소수의 반민족 세력이 준동했기 때문에 망한 것은 아니다.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조선왕조의 경제는 18세기 중ㆍ후반을 정점으로 19세기말까지 장기적으로 침체하였다. 19세기 후반에는 심각한 경제 위기가 조성되었다. 그에 따라 사회적 혼란이 점점 심해졌다.

이 같은 도전을 맞아 조선왕조의 정치는 새로운 돌파구를 찾지 못했다. 자연과 인간세계를 이해하는 지성도 좁은 조선성리학의 틀에 갇혀 있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상호인과의 악순환이 거듭되는 가운데, 조선왕조는 개항(1876) 이후의 내외 도전에 견디지 못하고 쓰러졌다.

조선왕조 또는 대한제국은 소수의 반민족 세력이 준동했기 때문에 망한 것은 아니다. … 조선왕조의 경제는 18세기 중ㆍ후반을 정점으로 19세기말까지 장기적으로 침체하고… 그에 따라 사회적 혼란이 점점 심해졌다. 이 같은 도전을 맞아 조선왕조의 정치는 새로운 돌파구를 찾지 못했으며, 조선왕조는 개항(1876) 이후의 내외 도전에 견디지 못하고 쓰러졌다.

전후 사정이 이러했음을 20세기 전반의 한국인들은 잘 알지 못했다. 그래서 왕조가 쓰러지는 현장에서 활동했던 몇몇 정치가에게 왕조 패망의 책임을 물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왕조 패망의 구조적 원인을 보다 과학적으로 인식하게 된 21세기 오늘날에서마저 그러한 생각을 고집해서는 곤란하다. 한 나라가 망한 것을 두고, 소수의 정치가가 나라를 팔아먹었다는 식으로 그 원인을 찾는 것은 엄밀히 말해 전근대적 역사인식이다.

민족이란 말은 20세기 일본에서 수입된 것

일제 하 식민지기에 친일과 반일 또는 협력과 저항의 경계선이 명확했다는 생각에는 당시의 한국인들 모두가 오늘날과 같은 강렬한 민족의식을 공유했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그렇지만 최근의 연구가 명확히 하고 있듯이 한국인들이 강렬한 민족의식을 공유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일제의 억압과 차별을 통해서였다.

19세기말까지는 오늘날의 ‘민족’에 해당하는 말이 없었다. ‘민족’이란 말은 20세기에 일본에서 수입된 것이다. 전통 한국어 가운데 ‘동포’나 ‘겨레’와 같은 말이 있긴 했지만, 그것들의 의미는 오늘날의 ‘민족’과 상이하였다. 그러한 의식 상태에서 많은 한국인들은 옛 종주국인 중국을 대신에서 일본이 들어오자 세상이 달라졌다고 간주했다.

19세기말까지는 오늘날의 ‘민족’에 해당하는 말이 없었다. ‘민족’이란 말은 20세기에 일본에서 수입된 것이다. 전통 한국어 가운데 ‘동포’나 ‘겨레’와 같은 말이 있긴 했지만, 그것들의 의미는 오늘날의 ‘민족’과 상이하였다.

협력과 저항의 경계선이 불투명했던 다른 한 가지 이유는 국내ㆍ외에서 벌어진 독립운동이 오늘날 우리가 전선이라 부를 정도로 강력하게 또 지속적으로 전개되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러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달라진 세상에 적응하며 살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의 일부는 일본을 통해 들어온 새로운 문명을 학습하고 실천함으로써 새로운 문명인이 되고자 노력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드높일 뿐 아니라 장차 우리 민족이 일제의 억압으로부터 벗어나 독립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다시 말해 그 시대는 오늘날의 강렬한 민족의식을 지닌 한국인이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안개 자욱한 새벽길의 혼돈이었다.

선진사회 진입을 위해 역사의식의 일대 전환이 필요하다

1948년에 세워진 대한민국이 반민족 친일파를 청산하지 못했거나, 반민족 친일파가 지배세력으로 군림한 나라였다는 인식도 실제로는 공산당을 비롯하여 대한민국의 건국에 저항했던 정치세력이 과대 포장한 선전구호에 불과한 것이었다.
경찰ㆍ헌병으로서 독립운동을 노골적으로 탄압했거나, 총독부 관리로서 일제의 지배정책에 기탄없이 협조했던 악질적인 ‘부일배’들은 대개 해방 후 지방 단위에서 자생적으로 전개된 우리 민족의 공격을 받아 제거되거나 축출되었다. 이름난 친일파가 대한민국의 고위 관리로 등용된 적은 전혀 없었다. 식민지기에 성장한 지주세력은 거의 대부분 농지개혁으로 해체되고 말았다.

총독부가 구축한 ‘식민지 국가’(colonial state)의 행정ㆍ치안ㆍ징세ㆍ사법 기능이 대한민국으로 계승된 것은 사실이다. 그 과정에서 약 12만에 달했던 총독부 각급 관서의 하급관료ㆍ경찰ㆍ군인ㆍ교사ㆍ기술직 등이 대한민국의 공무원이 되었다. 그것을 두고 친일세력이 나라를 세웠다고 할 수 있는가?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의 생각은 아마도 그럴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필자의 생각은 그렇지 않다. 전술한대로 식민지기는 세상이 바뀌는 일대 혼돈기로서 협력과 저항의 경계선은 극히 불투명하였다. 그런 가운데 ‘식민지국가’를 매개로 서양 기원의 근대문명이 전파되어 왔다. 그 문명을 선구적으로 학습하고 실천한 세력이 있었다. 새로운 문명의 학습을 위해서는 일제와의 협력이 불가피하였다. 그렇지만 그 길은 장차 우리 민족이 근대국가로 독립할 길이었다. 이른바 ‘주저하는 협력자’들의 생각은 그와 같았다.

21세기 초 오늘을 사는 한국인들은 선진사회로의 진입이라는 커다란 역사적 과제를 앞두고 있다. 거기에는 한국인들을 하나의 잘 통합된 문명공동체로 결속하는 선진적인 역사의식이 필수적이다. 그 새로운 역사의식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 문명의 뿌리는 어디에 있는가라는 존재론적 질문에서부터 시작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한 진지한 질문 앞에서 우리는 20세기 우리 민족의 고난기에, 그 억압과 차별의 시기에, 근대문명을 학습하고 실천함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던 우리 조상들의 또 다른 모습을 발견한다. 그것이야말로 20세기 우리 역사의 주류인 것이다. 그런 역사를 두고 소수의 반민족 친일파가 지배세력으로 군림한 오욕의 역사라고 매도해서야 되겠는가? 친일문제로 더 이상 사회가 갈등하고 소란스러워서는 곤란하다. 그것은 이미 그야말로 말단지엽의 문제이다. 역사의식의 일대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다. ■

이영훈 / 서울대학교 경제학과 교수
2008년 05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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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정부가 학교자율화 추진계획을 발표하자 전교조 등은 공교육 포기라며 반발하고 있다. 그러나 학교자율화 조치로 인해 지금보다는 좀 더 나은 교육이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진정한 자율화를 위해서는 교육청 단위가 아니라 학교 단위에서 자율성을 가지고 경쟁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나아가 이번 조치의 성공여부는 국민들이 자유와 자율의 가치를 얼마나 높이 평가하느냐에 달려 있다.

지난 4월 15일 교육과학기술부는 단위학교의 자율성을 확보하고 지방교육자치를 내실화하기 위한 『학교 자율화 추진계획』을 발표하였다. 이 발표에 따르면 그동안 단위학교의 자율성을 저해해온 29개 지침을 즉각 폐지하고, 규제성 법률 13개 조항을 6월 중 대폭 정비하고, 당장 폐지할 경우 공교육에 미치는 파장이 크고 현장의 수용 여건이 조성되지 않았거나, 관계부처와 협의ㆍ조정이 필요할 것으로 예상되는 법령ㆍ지침은 7월 이후 단계적으로 개선 방안을 마련하여 추진된다. 계획을 3단계로 나누어 추진함으로써 자율화의 충격과 혼란을 최소화하려고 노력하였다.

이번 계획은 “교육 관련 규제를 철폐하여 교육의 자율과 자치의 밑바탕을 마련하고 학교 교육의 다양화를 유도”하려는 이명박 정부의 국정 방향에 따라 교육과학기술부가 시ㆍ도교육청 담당자, 현장 교원들의 의견 수렴을 거쳐 마련한 것이다. 전적으로 이번 계획안은 지난 10년 정권의 청산 결과로 얻은 선물이라 할 수 있다.

이번에 추진되는 자율화 과제는 (1) 학교 운영에 관한 사항은 학교가 결정한다. (2) 초ㆍ중등 교육에 관한 교육감 권한과 책임을 강화한다. (3) 교육과학기술부는 국가수준의 기준 설정과 합리적 보완 기능을 수행한다는 것이다. 학교의 교육과정ㆍ학사 운영의 자율성이 대폭 확대됨으로써 학교장의 권한과 책무가 확대되었으며, 지역 교육청이 초ㆍ중등교육에 관한 일차적ㆍ최종적 책임기관으로 격상됨으로써 교육감의 권한과 책무도 확대되었다.

발표가 나오자마자 환영과 우려, 찬성과 반대가 엇갈렸다. 강력한 힘을 가진 일부 단체는 전면 백지화를 요구하며 철회될 때까지 국민과 더불어 강력히 대응할 것을 천명하고 나섰다. 이것은 갓 태어난 이 추진 계획의 험난한 운명을 예고하고 있다. 자율화 추진 계획의 기본 정신과 방향에는 동의하면서도 우리 교육의 현실을 감안하여 이 정책의 부작용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높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교육민주화가 아닌 교육자율화

전교조는 기자 회견을 열어 “정부는 졸속적인 ‘4ㆍ15 공교육 포기, 학교 학원화 계획’을 백지화하고, 교육 양극화 해소와 공교육 정상화 대책을 시급히 마련하라!”며 위원장은 1인 시위를 하였다. 뿐만 아니라 참교육 학부모회, 참여연대, 교수노조 등 교육ㆍ시민사회단체들은 긴급 정책 토론회를 개최하였다. 이들은 교육과학기술부의 학교 자율화 정책을 ‘학교 학원화 정책’으로 매도하면서 반대의 기치를 높이 들고 강력 투쟁을 선언하였다. 전교조와 교육ㆍ시민단체의 이러한 행동은 그들의 과거 행적으로 미루어 결코 놀랄 일이 아니다.

교육 양극화 해소와 공교육 정상화를 표면적인 명분으로 내세워 온 전교조가 교육과학기술부가 발표한 “학교 자율화 추진 계획”을 자율화를 가장한 ‘공교육 포기, 학교 학원화 추진 계획’이라고 매도한 것은 그들이 공교육 황폐화의 당사자들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처사에서 나온 행동이다.

[전교조는] 지금 우리 교육이 당면하고 있는 대부분의 문제가 교육 자율화를 가로막은 교육단체들과 교육을 통제해 온 교육 당국 때문이라는 사실을 아직까지 인정하지 않고 있다.

그들은 우리 교육이 당면한 현실에 눈을 감고 좀 더 좋은 교육을 학생들에게 제공하려는 정책에 대해서 한결같이 반대의견만 제시해 왔다. 그들의 논리는 단순하다. 그들은 좀 더 나은 학교 만들기에 도움이 될 만한 대부분의 정책에 대해, 학교를 입시전쟁터로 만들고 학교를 학원화하고 교육을 양극화한다는 동일 논리로 반대해 왔다.

그들은 많은 사람들이 환영하고 있는 이번 자율화 정책에 대해서도 이 정책이 학생들의 건강을 위협하고, 학부모의 사교육비 폭증을 유발하는 무한경쟁 입시 몰입정책이라 매도하고 있다. 자율화 정책이 공교육을 포기하는 정책이라 주장하면서 자율형 사립학교 확대 정책을 폐기하라고 외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지금 우리 교육이 당면하고 있는 대부분의 문제가 교육 자율화를 가로막은 교육단체들과 교육을 통제해 온 교육 당국 때문이라는 사실을 아직까지 인정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 그들은 이번 자율화 정책이 학생과 학부모, 교사들의 고통을 가중시킨다고 주장하면서 교육감과 교장들만의 자율화가 아니라 공교육을 정상화시킬 교육 주체들의 자율성 확보가 필요하다면서 “교직원회, 학부모회, 학생회가 법제화되어 학교를 진로와 생태, 인성과 학력이 조화로운 희망의 공동체로 만드는 것이 진정한 학교 자율이다”라면서 교육 민주화를 외치고 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교육 민주화가 아니라 교육 자율화라는 사실도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한 가장 효율적인 대처는 이들의 주장에 타협하거나 굴복하지 않고 정부가 원칙과 일관성을 가지고 자율화 정책을 추진하는 것이다.

좀 더 과감한 자율화가 필요하다.

이번 자율화 조치로 지금 보다는 좀 더 나은 교육이 가능할 수 있게 되었다. 학교장의 자율로 결정할 수 있는 사안들이 여러 가지 발표되었다. 오후 7시 이후 보충수업, 학원 강사 방과 후 학교 수업 가능, 초등학교 방과 후 학교 교과 과목 허용, 고등학교의 사설 모의고사 실시, 학교별 정기고사 문항 공개 등 학교에 활력을 일으킬 수 있는 변화들이 당장 가능할 수 있게 되었다.

이번 조치로 학교 현장에 학원 등 영리업체들이 강좌별로 공개 입찰을 통해 학교의 방과 후 학교에 참여할 수 있게 되어 학교 현장에 큰 바람을 몰고 올 수도 있다. 이런 변화가 긍정적으로 작용하면 학교의 정규 수업도 활기를 띨 수도 있다. 강좌 선택에 학부모ㆍ학생들의 의견이 반영된다면 교육 수요자의 선택이 확대되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이번 조치로 학교 현장에 … 영리업체들이 강좌별로 공개 입찰을 통해 학교의 방과 후 학교에 참여할 수 있게 되어 학교 현장에 큰 바람을 몰고 올 수도 있다. 이런 변화가 긍정적으로 작용하면 학교의 정규 수업도 활기를 띨 수도 있고 … 교육 수요자의 선택이 확대될 것이다.

그러나 교육과학기술부의 발표에는 분명하지 못한 구석이 있다. “수업과 일과 운영에 관한 초ㆍ중등교육법상의 학교장 권한을 자율적으로 행사할 수 있게 된다.”는 구절이 있는 것을 보면 위의 결정은 전적으로 단위학교장의 결정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곧 “이러한 조치는 방과 후 학습이나 수준별 이동수업, 학사운영 등에 관한 정부의 책임을 방기하는 것이 아니라 학교 운영의 책임자인 학교장과 시ㆍ도교육감이 학교와 지역의 실정에 맞게 자율 결정토록 함으로써, 각 학교가 교육과학기술부와 교육청의 직접 통제에서 벗어나 교사와 학부모, 지역인사가 참여하는 학교단위의 자율경영 구조를 갖추어 학교 중심의 실질적인 지방교육자치체제가 정착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러한 구절만 보면 학교 ‘수업과 일과 운영’이 전적으로 학교장의 권한인지, 학교장이 시ㆍ도교육감과 협의하여 결정할 사항인지, 아니면 교사와 학부모, 지역 인사가 참여하는 학교단위의 자율 경영 구조가 결정할 사항인지가 분명하지 않다.

또 “정부의 책임을 방기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교육과학기술부는 빠지고 정부가 개입하겠다는 것인가? 정부와 교육과학부의 관계는 무엇인가? 애매한 구석이 너무 많다. 자율의 가장 핵심적인 요소인 인사, 재정, 교육 과정에 대한 언급은 빠져있다. 뿐만 아니라 학생과 학부모의 학교 선택의 자유도 찾아 볼 수 없다. 개선되기는 했지만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다.

교육과학기술부의 발표가 지향하는 방향과 목표가 옳음에도 불구하고 전망이 그렇게 밝은 것만은 아니다. 교육과학기술부의 정책 전환이 개별 학교나 시도교육청의 강력한 요구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정권 교체를 통한 정치적 결단에 의해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자율의 주체가 되어야 할 개별 학교나 시도교육청이 자율의 소중함을 깨닫고 자율을 주체적으로 사용하려는 의욕과 그렇게 할 능력도 부족할 수밖에 없다.

[경험에 비추어볼 때] 자율화 조치의 성공 여부는 그것이 얼마나 교육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인가가 아니라 국민들이 자유와 자율의 가치를 얼마나 높이 평가하느냐에 달려 있다.

우리가 염려하고 있는 것은 교육과학기술부가 발표한 ‘학교 자율화 조치’가 실제로 얼마나 잘 시행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자율화 조치가 성공하려면 정부가 일방적으로 자율화를 내릴 것이 아니라 교육 주체들이 자율화를 정부로부터 싸워 빼앗아 왔어야 한다. 정부가 배급하는 자율은 자율이 아니라 변형된 타율에 불과하다. 그동안 위에서 내려온 정부 지침을 묵묵히 수행해 온 교육청이 갑자기 자율 능력을 가지고 있는가라는 의문이 앞선다.

이미 이런 우려가 현실화되고 있다. 정부가 우수반 편성과 0교시 수업을 교육청과 학교 자율에 맡기겠다고 발표했으나 결정권은 학교가 아니라 교육청이 가지게 되었다. 서울시교육청은 “서울 지역 학교에서는 우수반 편성과 0교시 수업은 금지한다.”고 발표하였다. 학교 단위가 아니라 교육청 단위에서 결정하면 자율화의 의미는 반감될 수밖에 없다.

성공여부는 국민들에게 달려 있다

따라서 우리는 타율에 길들여진 교육이 정부의 ‘학교 자율화 조치’로 당장 큰 효과를 불러올 것이라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 교육청이나 단위 학교가 자율성을 가진다고 해서 당장 교육의 질이 높아질 것이라고 기대해서도 안 된다. 타율에서 자율로 넘어가려면 많은 혼란과 대가를 지불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자율’이 산적한 교육 문제를 단기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만능키가 될 수 없기 때문에 다양한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단위 학교나 교육청의 신중하지 못한 정책 결정으로 혼란이 야기될 수도 있고, 정부에서 ‘자율 효과’라고 말한 것들이 구체적으로 일어나지 않으면 사람들은 자율의 효능을 의심하게 될 수도 있다. 자율적인 학교 운영의 결과로 학부모와 학생의 수업 부담이나 과외비 부담이 늘어날 수 있는 상황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자율이 당연히 수반할 수 있는 다양화에 대부분의 학생과 학부모들은 부담을 느낄 수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율화 이전이 좋았다는 퇴행적 태도를 취할 수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어느 누구도 자율에 높은 가치를 부여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상황이 전개되면 자율화에 대한 반대 전선이 힘을 얻어 자율화에 대한 무차별 공격이 시도될 것이다. 반 교육자율화 집단들이 결속하여 자율화의 문제점들을 온 세상에 과장하여 선전할 것이다. 국민 정서에 약한 정치인이나 관료들이 이러한 상황을 팔짱만 끼고 바라보지는 않을 것이다. 교육과학기술부는 어디에 있느냐는 비판이 나오면서 교육자율화는 조종(弔鐘)을 울릴 수도 있다.

‘자율’ 자체가 무엇보다 소중한 가치라는 사실에 사회적 합의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는 자율은 항상 위험에 처할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시행된 여러 자율화 정책들이 실패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자유와 자율을 으뜸 가치로 여기는 자유주의가 뿌리를 내리지 못한 상황에서 자율화는 항상 풍전등화와 같은 처지에 놓이게 된다.

교육과학부가 발표한 이번 자율화 조치의 성공 여부는 그것이 얼마나 교육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인가가 아니라 국민들이 자유와 자율의 가치를 얼마나 높이 평가하느냐에 달려 있다. 이번 조치는 우리 국민들의 자유에 대한 확신과 믿음을 판가름할 수 있는 시험대가 될 것이다. ■

신중섭 / 강원대 윤리교육과 교수
2008년 05월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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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산 소고기 문제가 괴담을 넘어 가두행진, 촛불시위 등으로 일파만파 번졌다. 그 동안 알려진 괴담들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나고 있지만, 시위는 확산되었다. 사실 안전성이 국제적으로 증명된 미국산 소고기는 소비자를 위해 수입해야 마땅하다. 아울러 우루과이라운드 협상에 따라 소고기 뿐 아니라 다른 농축산물도 개방해야 한다. 오히려 농축산물 수입을 저지하는 것은 국민들의 엥겔계수를 높여 그 고통을 고스란히 국민들에게 전가할 것이다.

소고기 파동 일명 ‘미친 소’ 논쟁은 어차피 예견된 것이었다. 한국인들은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을 항시 부르짖으며 살아왔고 토지(土地)에 대한 강한 집착을 보인다. 다들 글로벌리즘의 물결이 휩쓸며 세계는 개방화되고 있는 추세여서 할 수 없이 그 대세를 순응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속마음은 전혀 그렇지 아니하다.

대부분의 국민들은 농축산 수입개방이 이루어지면 농촌이 다 망한다고 생각한다. 만약 농축산물 완전개방에 대하여 여론조사를 계속 해왔다면 그 조사의 결과는 완전개방론자의 형편없는 완패로 쭉 나왔을 것이다. 지금의 ‘미친 소’ 파동은 좌파가 이를 이용한 일시적 승리를 만끽하고 있는 현상이다.

개방은 누구라도 선택해야 할 과제

그러나 이명박 대통령이 아닌 정동영, 문국현, 이회창 등 다른 누가 집권했어도 아마도 소고기는 개방해야 할 것이다. 사실 소고기를 비롯한 한미 FTA 문제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임기 내에 처리했어야 할 사안이다. 국회의원들의 직무태만과 지도자의 리더십 부재로 인해 17대 국회와 노무현 정부에서 이 문제는 처리되지 못하고 현 정부와 18대 국회로 이양된 것이다.

어쨌든 이명박 정부에서 소고기 장관 고시가 감행되었다. 이미 협상을 통해 도장을 찍은 사안을 이행할 의무가 있는 정부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국가 간 계약을 파기하는 것은 대한민국의 신용도를 떨어뜨리는 일로 대한민국을 국제적으로 믿지 못할 국가로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소고기 장관고시는 불가피하다. 필자는 이런 정부의 강행이 옳았다고 본다. 물론 국민을 어떻게 설득할 것이냐에 대한 이명박 정부의 위기관리능력은 다른 문제이다.

아울러 수입을 막아 소비자들의 선택권을 제한하는 것은 문제다. 수입하면 먹겠다는 여론이 25% 밖에 안 된다고 해도 이런 소수의 선택권을 박탈해서는 안된다. 이는 명백한 다수의 횡포다.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나는 소고기 괴담

하지만 소수의 선택권을 보장하는 길은 순탄하지 않아 보인다. 수입반대론자들의 공세가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수입반대론자들은 ‘미친 소’에서 ‘월령 미친 소’로 전략을 바꾸어 공세를 계속한다. 처음에는 미국인들은 24개월 이하 월령의 소만 먹고 30개월 이상 도축소는 한국에 몽땅 떠넘긴다며 공세를 폈다.

그 공세 중에 나온 괴담은 하나는 “미국에서 30개월 이상 도축소는 동물사료용이다.”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말이 사실과 다름이 판명되자 이번에는 30개월 이상의 도축소는 가공식품용이라고 우겨댔다. 그리고 미국에서 사용되는 소고기 등급이 도축월령에만 따라 분류되는 것처럼 떠들어 댔다.

그렇다면 지난 4월 19일 이명박 대통령이 부시 대통령과 캠프 데이비드 정상회담에서 먹은 스테이크는 무엇이란 말인가? 그 당시 이명박 대통령은 32개월 된 텍사스산 소를 도축해 스테이크를 먹었다고 한다. 수입반대론자들의 주장이 옳다면 이 스테이크는 동물사료 공장이나 가공공장에 가는 것을 특별히 빼낸 고기인 셈이다.

이미 협상을 통해 도장을 찍은 사안을 이행할 의무가 있는 정부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국가 간 계약을 파기하는 것은 대한민국의 신용도를 떨어뜨리는 일로 대한민국을 국제적으로 믿지 못할 국가로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괴담들은 하나하나 밝혀지는 바와 같이 전혀 사실이 아니다. 공기로 전염 된다느니 크리넥스 사용도 위험하다는 이야기들만이 괴담이 아니다. 물론 30개월 이상의 소들에게서만 광우병 소가 나온다. 이는 소의 광우병 잠복기가 3년이니 너무도 당연하다. 그렇다면 30개월 미만의 소는 절대 안전한가? 즉 잠복기 중의 소는 먹어도 광우병에 걸리지 않는가의 문제이다.

이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는 일치하지 않지만, '안전하다고 결코 말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이는 역으로 이야기하면 위험부위를 제거한 30개월 이상 도축소가 그렇지 않은 24개월 도축소 보다 더 안전할 수도 있음을 의미한다.

광우병에 대해 확실하게 아는 것은 하나도 없다

광우병이 가장 유행했던 곳은 영국이며 그로 인해 사람이 많이 죽은 곳 또한 영국이다. 따라서 안 그래도 바이오산업 선진국인 영국이 광우병 연구를 제일 많이 한 것은 당연하다. 그 연구진 중 한 명에게서 나온 말은 자못 의미심장하다.

"광우병에 대하여 확실한 것은 우리가 확실하게 아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순식물성 사료만을 먹인 소는 100% 안전하다는 공식화된 명제도 소수 학자들은 부정한다.

그렇다면 “미국에서 이렇게 했더니 지난 20년간 광우병이 발생하지 않았다”라고 하는 경험칙상 사실 보다 신뢰할 수 있는 것은 지금까지 없다. 나머지는 미지의 영역이다. 물론 미지의 영역에 도사린 위험도 분명히 존재하며 수입반대론자들의 염려는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염려임을 필자는 인정한다. 하지만 이런 미지의 영역에 대한 염려는 해도 해도 끝이 없다.

서민을 위한다는 말을 항상 입에 담는 자들이 국민들의 엥겔계수를 높여 그 고통을 서민에게 고스란히 전가하는 고농축산물 가격 유지(維持)를 위해 그렇게나 악을 써대는 모습도 본인이 보기에는 정말 기막힌 아이러니다.

인간이 우주로 가면 다른 환경 속에서 체내 세균이 급 돌연변이를 일으켜 변형되어 인류를 공격하면 그 파괴력을 감당하지 못하여 큰 재앙이 올 것이라고 우려하는 학자가 지금 미국소가 위험할 수 있다는 우려를 하는 학자(그들의 견해는 반대론자들이 즐겨 인용한다) 보다 훨씬 많으며 실제로 미국은 이를 염려하여 우주에 갔다 온 우주인들을 상당 기간 격리하여 관찰한다. 그렇게 따지면 그런 상당한 관찰기간도 없이 귀국한 ‘한국의 최초 우주인’ 이소연은 상당히 위험할 수 있으며 '이런 위험한 러시아 우주선을 태운 행위'는 영락없이 촛불시위감이다.

정말로 소비자나 국민을 위한다면 개방해야

‘미친 소’가 설득력을 상실해 가자 이제 반대론자들은 이명박의 굴욕외교에 초점을 맞춘다. 필자는 이에 대해서도 부정적이다. 소고기 협정 하나만 뚝 떼서 본다면 분명 한국이 양보한 것이다. 그렇지만 농수산 협상팀과 대통령은 외교 자체가 다르다. 소고기를 양보하고, 미국 비자 면제협정이나 미국산 무기 수입국 지위 향상의 거래를 할 수 있는 것이 정상외교이다. 이런 점에서 소고기 수입의 대가는 캠프데이비드 만찬이었다는 주장은 순 억지다.

그리고 우리는 우루과이라운드에 서명해 한미 소고기협정에 관계없이 프로그램대로 농축산물을 개방해야 하는 처지이며 한미 FTA 비준을 위한 미 의회의 협조가 절실한 시점이다. 지금 막더라도 그것은 막음이 아니라 유예일 뿐이며 일시적인 버티기일 뿐이다. 이 점은 지금 버티기 중인 일본도 마찬가지이다.

더구나 본문에서 계속 강조해 왔듯이 위험하지 않다면 굴욕 외교란 말은 상당 부분 설득력이 상실된다. 값싼 먹 거리의 공급이야 말로 정말 국민들에게는 최대의 복지이다. 개방으로 인해 종전보다 싸게 물건을 살 수 있어 실질소득이 늘어나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서민을 위한다는 말을 항상 입에 담는 자들이 국민들의 엥겔계수를 높여 그 고통을 서민에게 고스란히 전가하는 고농축산물 가격 유지(維持)를 위해 그렇게나 악을 써대는 모습도 본인이 보기에는 정말 기막힌 아이러니이다.

설사 백보를 양보하여 협상 내용에 문제가 있다고 하여도 이는 국내 책임자들을 추궁할 사안이지 장관고시 철회 요구나 재협상 요구를 할 일이 아니다.■

벨 헤는 솔 

* 이글은 ‘벨 헤는 솔’님이 “장관 고시는 옳으며 어쩔 수 없다”라는 제목으로 폴리젠(www.polizen.com)에 2008년 5월 30일자로 기고한 것으로 저자와 폴리젠의 동의를 거쳐 독자 여러분들께 편집하여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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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집회로 상징되는 광장 민주주의가 양질의 의사소통을 담보로 하는 민주주의 모델이 될 수 있을 것인가? 광장 민주주의는 때로는 이성에 호소하는 설득이 되기도 하고 저급한 감정에 호소하는 선동이 될 수도 있다. 상식과 이성을 잃어 민중의 감정에 휘둘리는 광장 민주주의는 우중민주주의에 불과하다. 바람직한 소통의 모델로서 광장 민주주의가 되기 위해서는 광장에 참여하는 사람들 모두 자기절제력을 가져야 한다.

광장은 여러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다. 여러 사람들이 모이기에 애환도 있고 주장도 있으며, ‘엔터테인먼트’도 있다. 또 흥분과 기대가 교차하는 곳이기도 하다. 호기심을 가진 사람도 모여들고, 쇼맨십을 가진 사람도 모여들며, 심지어 물건을 사고파는 상인도 모여든다. 바로 그런 곳이기에 광장처럼 여러 사람들이 공동의 관심사를 나누기 안성맞춤인 곳도 없다. 바로 우리의 시청 앞 광장이 그런 곳이 되었다. 2002년 월드컵을 계기로 시작된 이 광장 문화는 엊그제 쇠고기수입반대 촛불집회에서 다시 한 번 절정에 달했다.

누가 왜 이 촛불집회에 나왔는가. 넥타이부대, 유모차부대도 나왔고 각종 노동사회 단체, 이익집단, 재야진보세력은 물론 해고노동자, 환경운동가까지 나왔다. 다양한 참가자들이 뒤엉켜 다양한 구호를 외쳤다. 이들이 참가한 까닭은 서로가 같지 않았으나, 그들을 묶는 공통점이 있었다. 촛불을 들고 무엇인가 한 마디 해서 자신의 뜻을 표현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 그것이었을 게다. 또 누군가 자신의 마음속을 속 시원히 꿰뚫어보는 사람들의 발언과 연설을 듣고 싶어 하는 욕구도 있었다.

촛불집회, 바람직한 민주주의 모델이 될 수 있을까

역사적으로 보아도 그러한 곳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존재했다. 아테네 사람들은 그러한 곳을 ‘아고라(agora)’라고 했고, 로마인들은 ‘포로 로마노(Foro Romano)’라고 했다. 이 로마시대의 광장인 ‘포로’는 오늘날 담론의 장을 의미하는 ‘포럼(forum)’이라고 하는 영어의 어원이 되기도 했다.

이 촛불집회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있다. 그것이 무엇인가. 그 동안 우리는 권위주의에서 민주주의로 이행은 했지만 어떤 민주주의모델을 정착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그 후보 가운데 하나가 엊그제의 촛불집회로 상징되는 광장 민주주의다. 관심의 초점은 이 광장 민주주의가 양질의 소통을 담보하는 민주주의 모델이 될 수 있을까하는 점이다.

광장이라고 해서 백가쟁명(百家爭鳴)처럼 모든 발언자나 연설가들이 기분 내키는 대로 이야기를 하면 ‘공론’이 되기보다 ‘중구난방(衆口難防)’이 될 수밖에 없다.

광장에는 고유한 특징이 있다. 광장은 여러 사람들이 모이지만, 공원과 다른 곳이며, 시장과도 다르다. 특징 가운데 하나가 이곳에 사람들이 모이면 그들 가운데 연설을 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나온다는 데 있다. 연설가들이 연설을 하면 오다가다 경청하는 사람들이 생기고, 인기가 있으면 구름처럼 모여들게 된다. 거기서 ‘위대한 의사소통자’가 나오는가하면 ‘열혈 선동가’도 나오게 마련이다.

아테네의 역사를 보면 그런 사람들 중에 도편투표로 추방되는 운명을 맞은 데모스테네스가 있었고, 아테네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페리클레스도 있었으며, 그 뒤를 이어 받은 클레온도 있었다. 그들은 모두 이 광장에서 ‘나라의 일’, 즉, 플라톤이 ‘폴리테이아(politeia)’로 불렀던 것, 혹은 로마인들이 ‘레스 푸블리카(res publica)’로 지칭했던 것들에 대하여 연설을 했다. 그 과정에서 때로는 청중들을 감동시켜 눈물을 흘리게 하였고 때로는 조국애에 불타오르도록 했으며, 혹은 성난 파도처럼 분노의 함성을 지르게 하기도 했다.

많은 시민들 앞에서 하는 연설은 엄숙한 일이다. 엄숙했기에 고대 로마 사람들은 이 행위를 ‘오라치오(oratio)’라고 했고, 연설가들을 ‘오라톨(orator)’이라고 했다. 연설이란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특별한 능력, 즉, ‘이성의 능력’에서 나온 것이며 ‘이성적 존재’이기에 말로 하는 ‘소통’이 가능하고 ‘설득’이 가능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성’을 의미하는 라틴어의 ‘라치오(ratio)’가 ‘연설’을 의미하는 ‘오라치오(oratio)’로 전이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광장 민주주의의 비극

그렇다면, 엊그제 우리의 광장 민주주의에서 주류를 이루었던 발언과 연설들은 어떤 성격의 발언과 연설이었을까. “정의란 강자의 이익”에 불과하다고 외치는 트라시마쿠스와 같은 소피스트의 연설이었을까. 민중들의 감정에 불을 지피는 클레온처럼 ‘선동가’의 연설이었을까. 그것도 아니라면, 전쟁에서 전사한 사람들을 위해 추모사를 한 페리클레스처럼, 나라가 위기에 차환 상황에서 합심을 당부하는 감동적 연설이었을까.

역사는 절제력이 없는 광장 민주주의의 비극을 고발하고 있다. 기원전 406년 아르기누사의 해전 후에 벌어진 역사적 사실에서 충동과 감정, 편견에 휘둘리는 광장 민주주의의 모습이 그대로 담겨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성에 호소하는 설득을 위한 연설이었을까, 아니면 저급한 감정에 호소하는 선동을 위한 연설이었을까. ‘설득’과 ‘선동’의 차이는 이성과 감성의 차이를 넘어서서 분별력과 무책임의 차이로 읽혀진다. 광장 민주주의가 제대로 꽃피려면, 절제는 필수적이다. 광장이라고 해서 백가쟁명(百家爭鳴)처럼 모든 발언자나 연설가들이 기분 내키는 대로 이야기를 하면 ‘공론’이 되기보다 ‘중구난방(衆口難防)’이 될 수밖에 없다. 어중이떠중이가 말하는 ‘중구난방’이 되지 않고 ‘품격을 가진 공론’이 되기 위해서는 절제력이 요구된다.

역사는 절제력이 없는 광장 민주주의의 비극을 고발하고 있다. 기원전 406년 아르기누사의 해전 후에 벌어진 역사적 사실에서 충동과 감정, 편견에 휘둘리는 광장 민주주의의 모습이 그대로 담겨있기 때문이다.

아테네군이 아르기누사의 해전에서 어렵게 스파르타군과 싸워 승리하여 돌아오는 과정에서 전투의 지휘자들이 승리감에 도취되어 물에 빠진 병사들을 구조하는 것을 소홀히 했다는 고발이 제기되었다. 고발자들은 그 장군들을 처형하고 그들의 재산을 몰수하라고 주장했으며, 많은 민중들이 이 주장에 동조하였다. 널빤지를 타고 있다가, 구조된 한 병사가 동료들이 죽어가면서 장군들을 고발해 줄 것을 당부했다는 증언을 하면서 민중들의 흥분은 극에 달했다.

그 결과 전투에 참전했던 장군들은 모두 유죄판결을 받았고, 이들을 옹호했던 장군들을 포함하여 여섯 명의 장군들이 사형을 당했다. 이 투표에서 소크라테스 혼자만이 반대를 했지만 대세를 되돌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민중들은 유능한 장군들을 스스로 죽인 것에 대하여 후회하고, 이번에는 장군들을 고발했던 자들을 재판해서 유죄판결을 내리게 된다.

품위 있는 소통의 광장 민주주의가 되기 위해서는 광장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모두, 즉 광장에서 발언하는 사람들이나 그 발언을 듣는 청중들이나 할 것 없이 모두가 자기절제력을 가져야 한다. 절제력이 없는 한, 광장 민주주의의 미래는 없다.

그리스의 역사가 크세노폰은 이 사건과 관련, 순간적인 격정에 빠지는 민회의 취약성, 대중적 결정의 불안정한 기반, 충동적 행위에 대한 견제 체제의 부재로 인한 정치적 불안정의 잠재성, 변론 기술에 따라 결정되는 행위 방향, 파벌들 간의 충동 등을 읽을 수 있다고 비판한다.

광장 민주주의, 절제력을 가져야

그로부터 2400년 후에 펼쳐진 한국의 촛불집회가 그의 비판을 경청해야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품위 있는 소통의 광장 민주주의가 되기 위해서는 광장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모두, 즉 광장에서 발언하는 사람들이나 그 발언을 듣는 청중들이나 할 것 없이 모두가 자기절제력을 가져야 한다. 절제력이 없는 한, 광장 민주주의의 미래는 없다. 어찌 광장 민주주의뿐이겠는가. 국가공동체의 전도도 암담한 것이다.

출범한 지 100일 밖에 되지 않는 정부를 두고 퇴진하라고 주장하는 것은 ‘대선불복종행위를 하겠다는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말이다. 광장 민주주의가 빛을 발하려면, 그런 부조리한 선동과 자극보다 이성과 절제가 살아 꿈틀거려야 한다. 대의 민주주의가 잘못하는 것을 지적하는 것, 혹시 그게 아니라면 선거 민주주의가 채워주지 못하는 갈증을 풀어주는 것이 광장 민주주의의 어젠다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 혹여 선거로 잃어버린 권력을 길거리에서 다시 찾으려고 한다든지, 이른바 ‘종이 돌(paper stone)’이라고 할 수 있는 투표에 의하여 심판받은 것을 폭력시위로 되돌리려고 하는 것은 그리스말로 채울 수 없는 ‘탐욕’을 의미하는 ‘플레오녹시아(pleonoxia)’나 권력에 대한 금단현상에 불과할 뿐이다.

민주사회의 시민들이라면 교회지휘자의 말을 듣는 성가대원처럼 항상 유순하게 행동할 필요는 없다. 혹은 오케스트라 지휘자의 말을 듣는 오케스트라 단원들처럼 순종적으로만 살 수는 없다. 때로는 이의도 제기하고 비판도 제기하며 혹은 성난 목소리로 고함을 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침몰하는 난파선의 사람들처럼 상식과 이성을 잃을 정도로 무례해서는 안된다. 그런 광장 민주주의라면 이성을 가진 대중 민주주의가 아니라 변덕스러운 민중의 감정에 휘둘리는 우중민주주의에 불과하다.

바람직한 소통의 모델로서 광장 민주주의가 ‘지속가능성’을 지니기 위해서는 난폭한 수사법을 동원해서 사람들의 마음을 격동시키려 하는 자극형 선동가들보다는 냉철한 이성의 힘으로 사람들을 설득하고 분별력 있는 모습으로 대중들에게 호소하는 발언자와 연설가들이 필요하다. 그런 연설가들이 많아야 광장민주주의는 성공한다. 이번의 광장민주주의가 그런 냉철한 발언자와 연설가들을 다수 선보였는가. 지금이야말로 한번쯤 뒤를 돌아보며 성찰할 때다.■

박효종 교수 / 서울대 윤리교육과

2008년 06월 12일
Posted by 자유기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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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정부 때 본격적으로 시작된 공공부문 민영화는 노무현 정부 들어 중단되었다. 이명박 정부는 전기, 가스, 수도, 전력 등 공공부문 민영화를 다시 추진하고 있다. 공공부문 민영화가 필요한 이유는 경쟁이 없는 곳에 경쟁을 도입해 생산성을 높이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공공부문 개혁 일환으로 거론되는 구조조정도 시장의 자율성과 창의성 제고를 위한 민영화를 향한 길이어야 한다.

공공부문의 개혁은 공공부문의 기능에 시장의 자율성과 창의성을 도입해 생산성과 효율성을 제고하는 것이다. 경제발전의 원동력은 자율적 거래에 있고 자율과 창의는 강제적인 지시와 명령에 의해서는 그러한 자율과 창의가 발현되지 않는다. 일방적 지시와 명령으로 업무가 수행되었던 공공부문에서는 순응하는 노력만이 인정받았을 뿐이다. 공공부문에서 시장의 자율과 창의가 발휘될 수 있도록 종사자의 유인 구조를 변경하는 제도적 틀을 정비하는 것이 개혁의 기본 정신이다.

공공부문에 자율과 창의를 도입하는 과정은 간단히 말해 시장친화 또는 시장기능의 도입이라 불린다. 시장기능은 자발적 거래의 집합을 압축적으로 표현하는 용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발적 거래는 민간의 협조와 협력에 기초하는 비영리활동에 의해서도 수행되기 때문에, 시장기능보다 더 포괄적인 용어로서 민영화(Privatization)라고도 한다. 여기서 민영화란 공공부문이 수행하던 기능에서 민간부문의 역할을 강화하는 일체의 노력을 의미한다.

공공부문에서 자율과 창의가 발휘될 수 있도록 종사자의 유인 구조를 변경하는 제도적 틀을 정비하는 것이 개혁의 기본 정신이다. … 공공부문에서 자율과 창의가 제고되는 그러한 변화가 없다면 그것은 진정한 개혁이라 말할 수 없다.

공공부문 개혁은 결국 시장친화, 시장기능, 민영화 등 다양한 용어로 불릴 수 있지만 그 기본 정신은 시장의 자율성과 창의성을 도입해 생산성과 효율성 제고에 있다. 다시 말해 공공부문에서 자율과 창의가 제고되는 그러한 변화가 없다면 그것은 진정한 개혁이라 말할 수 없다.

공공부문 개혁 방법

공공서비스의 공급을 민간에 맡겨 민영화하는 방법은 몇 가지 존재한다. 우선 공공서비스 공급을 사적재(Private Goods)와 동일하게 취급해 민영화하는 방법이다. 이 경우 공공기관의 소유권을 주식매각 등의 방법을 통해 민간에 이전하고 민간이 서비스를 공급하도록 한다. 이 때 정부는 생산원가를 전혀 보전하지 않으며 또 서비스 내용을 민간의 수요와 공급에 의해 결정되도록 한다.

그런데 이와 같은 형태의 민영화 외에도 다양한 형태의 민영화 방법이 존재한다. 정부가 지속적으로 생산원가의 일부를 보전해주고 또 서비스의 내용과 품질을 계속 규제하면서 민영화하는 방법도 존재한다. 따라서 민영화를 하면 공공서비스 가격이 급격하게 인상한다거나 서비스 품질이 저하한다는 주장은 민영화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민영화 이후에도 정부는 마음만 먹으면 당해 서비스의 가격과 품질을 통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부가 민영화된 기업을 통제하는 제도적 수단은 크게 네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 상법이나 공정거래법 등과 같은 일반적인 기업 법률에 의한 규제(수단 ①) 둘째, 은행법이나 상수도법 등 특정 산업법에 의한 규제(수단 ②) 셋째, 전기위원회나 통신위원회 등과 같은 독립적 위원회 구성을 통한 규제(수단 ③) 넷째, 사회기반시설 민간투자사업이나 민간위탁 등 개별 계약에 의한 규제(수단 ④) 등이 있다. 정부는 이러한 제도적 수단을 통해 공공서비스를 생산하는 민간 기업을 충분히 규제할 수 있다.

민영화하는 방법은 공공기관의 소유권을 주식매각 등을 통해 민간에 이전하고 민간이 서비스를 공급하고 정부는 생산원가를 보전해 주지 않고 서비스 내용을 수요와 공급에 의해 결정되도록 하는 방법과, 정부가 지속적으로 생산원가의 일부를 보전해주고 또 서비스의 내용과 품질을 계속 규제하면서 민영화하는 방법 등이 존재한다.

정부가 개별 계약을 통해 공공서비스의 가격과 품질을 지속적으로 규제하는 경우에 적용되는 민영화는 ‘위탁형 민영화’라 부를 수 있다. 1994년 이후 우리나라에서는 ‘사회기반시설에 대한 민간투자법’을 활용하여 고속도로, 항만운영, 하수처리 등의 공공서비스를 민간기업에 위탁하고 있다. 만약 이러한 방식을 공공부문이 이미 수행하고 있던 사업에 적용한다면 ‘위탁형 민영화’가 가능할 것이다. 더구나 공공부문 내부에서 직접 생산할 필요가 있는 공공서비스에 대해서도 먼 미래의 민영화를 대비하여 정부와 공공기관 사이에 위탁협약을 체결하는 것이 필요하다.

역대 정부의 공공개혁 평가

지금까지 우리나라 정부는 독점적 지위를 누리는 공기업을 민영화해 경쟁체제로 전환했다. 민영화된 기업들은 일반적인 기업 법률(수단 ①)이나 특정 산업에 관한 법률(수단 ②)에 의해 규제되었다. 1960년대 말에 민영화된 기업으로는 대한통운, 조선공사, 대한해운 등이 있으며, 1980년대 초에는 시중금융기관, 1990년대 말에는 두산중공업(구 한국중공업), KT&G(구 한국담배인삼공사), POSCO(구 포항제철) 등이 있다.

1990년대 말 김대중 정부는 민영화의 범위를 확대하기 위하여 자연독점의 네트웍 산업에 대해서도 민영화를 통해 경쟁체제로 전환을 시도했다. 그 대표적인 사례는 통신, 전기, 가스, 철도사업 등이다. 또한 정부는 독립적 위원회를 설치하여(수단 ③) 그러한 서비스의 가격과 품질을 지속적으로 규제했다. 김대중 정부는 네트웍 공동사용과 규제위원회를 채택하며 KT(구 한국통신)를 민영화하였고, 또한 한전, 가스공사, 철도공사 등에 대해서도 같은 방법을 적용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노무현 정부는 전력, 가스 산업의 구조조정을 중단하였고, 철도공사, 우정사업의 공사화 및 민영화 추진을 보류하였다. 이뿐만 아니라 이미 경쟁체제가 형성되어 있는 공적자금투입 공기업들에 대한 민영화 작업도 중단하였다. 대신 노무현 정부는 공공기관의 지배구조(Governance)가 더 중요하다는 시각에서 획일적이고 강제적인 방법으로 지배구조를 설계하며 사실상 정부의 개입과 간섭을 강화해 왔다.

공공기관 구조조정: 정부 개입의 유혹

공공부문 개혁의 본질은 정부의 개입과 간섭을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시장의 자율성과 창의성 제고에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경쟁체제가 이미 형성되어 있는 공기업은 민영화하고, 여전히 독점체제를 유지하고 있는 네트웍 산업 등에 대해서는 경쟁체제를 위한 구조조정과 함께 민영화를 추진하고, 위탁형 사업에 대해서는 개별 계약을 통한 ‘위탁형 민영화’를 도입해야 한다. 그리고 공공부문 내부에서 직접 생산되어야 할 공공서비스에 대해서도 정부와 공공기관 사이에 중장기 '성과협약(Performance Agreements)'을 체결하여 먼 미래의 민영화를 한 걸음 한 걸음 대비해야 한다.

공공부문 개혁의 본질은 정부의 개입과 간섭을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시장의 자율성과 창의성 제고에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경쟁체제가 이미 형성되어 있는 공기업은 민영화하고, 여전히 독점체제를 유지하고 있는 네트웍 산업 등에 대해서는 경쟁체제를 위한 구조조정과 함께 민영화를 추진하고, 위탁형 사업에 대해서는 개별 계약을 통한 ‘위탁형 민영화’를 도입해야 한다.

공공부문의 구조조정은 궁극적으로 시장의 자율성과 창의성 제고를 위해 민영화를 향한 길이어야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공공부문 개혁의 일환으로 민영화와 함께 구조조정이 곧잘 거론되고 있다. 현재 구조조정은 공공기관의 통폐합, 일부사업 매각, 기능폐지, 기능이양, 민간위탁 등을 강제하고 또 공공기관의 인력절감 목표를 강제적으로 요구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러한 구조조정은 공공부문을 축소한다는 점에서 개혁이라 할 수 있지만, 통폐합, 사업매각, 인력절감 목표를 강제적으로 할당한다는 측면에서는 개혁에 부합하는 것이 아니다.

공공부문 구조조정은 공공부문에 시장의 자율성과 창의성을 제고하는 방법으로 추진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공공부문의 구조조정은 중장기적으로 공기업의 민영화를 추진하는 과정의 일부로 이해되어야 한다. 물론 정부가 민영화 방향으로 키를 잡기 위하여 강제력을 발휘하는 것은 필요하다. 그러나 이 경우에서도 공공기관에 거시적 성과목표를 제시하여 자율적이고도 점진적인 구조조정이 이루어지도록 가능한 유도해야 한다. 1990년대 말 김대중 정부의 강제적 구조조정은 국가위기에 따른 부득이한 측면이 있었지만 진정한 공기업 개혁이라 할 수는 없다. MB정부의 공공부문 구조조정이 민영화라는 궁극 목표를 향해 보다 세련된 방법으로 유도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옥동석 / 인천대 무역학과 교수
 2008/06/19

Posted by 자유기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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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을 사랑했던 다산 정약용도 관존민비의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200여년이 지난 지금도 많은 사람들은 정부 의존적 사고를 하고 있다. 그러나 정부는 인간이 운영하기 때문에 전지전능한 신이 아니다. 국민이 정부가 많은 일을 하기를 기대하면 할수록, 정부는 그 규모나 권한에서 커지고, 큰 정부는 그 만큼 많은 규제를 하게 되고, 세율은 높아지고, 기업의 활동은 위축되게 마련이다. 선진국으로 발돋움하기 위해서는 정부 의존적인 사고를 버려야 할 때이다.

우리의 삶은 만남의 역사라고도 할 수 있다. 우리는 이 만남을 통해 이해하고 사랑하고 배우고 돕고 하며 삶을 엮어가는 것이다. 부모와의 만남, 스승과의 만남, 좋은 책과의 만남, 친구와의 만남, 연인과의 만남 모두 만남들이다. 이러한 만남을 생각하며 필자는 “다산이 맬서스를 만났었더라면 우리사회가 지금보다는 더 좋아 졌을 터인데”하는 생각을 자주하곤 한다.

과거의 일은 이미 지나간 일이다. 그런 것을 어찌 됐었더라면 하고 이야기를 하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다. 그러나 이미 지난 일이지만 지금에라도 우리가 바람직한 방향으로 우리의 갈 길을 선택하기 위해서 한번쯤 과거 가정법을 상상해 볼 필요가 있다.

다산 정약용과 맬서스 사상의 차이

공우리나라의 다산 정약용(1762~1836)과 영국의 토마스 맬서스(T. Malthus, 1766~1834)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인물들이다. 두 사람 모두 18세기에서 19세기에 걸쳐 산 사람들로 다산은 맬서스보다 4년 일찍 1762년에 태어나 그보다 더 오래 살다가 1836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들이 만일 같은 나라에서 태어났었더라면 분명히 서로 알만한 사이였을 것이다.

다산은 그의 명저 “목민심서”를 포함해 여러 분야에 걸쳐 많은 저술 활동을 했으며, 맬서스는 우리에게도 그의 명저 “인구론”으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그러나 그들이 산 시대에는 오늘날과 같은 통신체계가 없었기 때문에 서로 그 존재를 모른 채 동시대에 지구상에 살다가 간 것이다.

다산은 정부나 관료가 가난이란 문제를 해결하는데 큰 역할을 할 수 있으며 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것이 목민심서의 중요한 내용이다. 그러나 맬서스는 빈민구호를 위한 재정부담은 바람직하지 않으며 빈곤의 해결책은 당사자 개인의 태도에서 찾을 수 있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우리나라의 다산과 영국의 맬서스는 경제문제에 관한 관심을 가졌던 점에서는 비슷했지만 그 견해가 대조적인 면이 있었다. 두 사람 모두 가난이란 문제를 놓고 많은 고심을 했다. 그러나 같은 시대를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의 문화적 배경이 다른 탓인지 대조적인 생각을 했다. 다산은 가난을 보고 가난을 해결하기 위해 정부의 관료들이 해야 할 일에 대해 많은 생각과 논의를 했다. 그는 정부나 관료가 가난이란 문제를 해결하는데 큰 역할을 할 수 있으며 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것이 목민심서의 중요한 내용이다.

그러나 다산과는 대조적으로 맬서스는 빈민구호를 위한 재정부담은 바람직하지 않으며 빈곤의 해결책은 당사자 개인의 태도에서 찾을 수 있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만일 이들이 글로라도 만나 교우 했더라면 다산의 생각도 맬서스를 포함한 동시대의 영국계몽사상가들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그리하여 경제문제에 관련해 우리나라 사람들도 정부 의존적 사고에서 벗어나게 하는데 도움이 됐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다산이 살던 조선 시대는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이 강조되던 유교문화의 중심에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그는 당시에 조선에 전파되어 들어온 기독교를 만날 수 있었다. 그의 매형 이승훈과 큰형 정약현의 처남 이벽이 모두 기독교 전파의 선구자들이었음을 보면 그가 쉽게 기독교를 만날 수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런 연유로 그의 대표적 저서 목민심서의 중요한 부분이 애민육조(愛民六條)인 점에서 보듯 그는 사랑 애(愛)를 많이 생각했다. 그는 그의 저서 목민심서(牧民心書)의 서문에서 자신이 인용한 “목민(牧民)하는 것을 가축을 기르는 것”에 비유한 맹자의 말대로 관(官)은 목동(牧童)처럼, 백성은 양(羊)떼처럼 생각했던 것이다.

인간 삶의 개선은 어떤 지배계층이나 단체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구성원 각자가 책임을 지고 점차적으로 이루어 나가는 것이다. … 가난은 가난한자의 잘못 때문이라며 스스로 해결해야지, 그것을 구제하는 것은 가난한 사람을 의타적으로 만든다.

그는 목민관이 백성을 청렴결백하게, 공평무사하게 다스려 나갈 것을 강조했다. 즉 목민심서의 애민육조에서도 나타나듯이 노인을 봉양하고, 어린이를 사랑으로 기르고, 불쌍한 사람을 구원하고, 가난을 구제 하는 등 백성을 기르려는 마음이 가득하다. 심지어 그는 가난하여 혼기가 지나도록 혼인을 하지 못한 사람은 마땅히 관에서 성혼시켜야 한다고 주장할 정도로 관의 역할과 능력이 미치지 못하는 곳이 없을 정도로 생각 하였다. 그의 생각에 의하면 어디까지나 관은 베풀고 지배하는 위치이고 백성은 동정의 대상, 지배의 대상이었다.

다산이 맬서스를 만났더라면

그는 정조(1752-1800)의 신임과 사랑을 받아 많은 일을 했다. 그의 업적과 저서를 보면 그는 매우 지혜로운 사람이었다. 이 지혜로운 사람이 애담 스미스(Adam Smith, 1723~1790), 리카도(D. Ricardo, 1772~1823) 등을 포함한 동시대 영국 계몽사상가(Anglo-Scottish Enlightenment) 중의 한사람인 맬서스라도 만났었더라면 우리나라에 일찍이 이 사상이 전파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즉 다산의 지적능력에 기초해 영국계몽사상이 일찍이 우리사회에 소개되고 전파되어 우리의 시장경제 사상이 이해되고 정립 됐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 말이다. 그랬더라면 우리나라가 보다 빨리 보다 더 살기 좋은 나라가 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영국계몽사상의 요점은 “사회의 변화는 그 구성원의 변화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즉 인간 삶의 개선은 어떤 지배계층이나 단체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구성원 각자가 책임을 지고 점차적으로 이루어 나가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맬서스는 그의 인구론에서 가난은 가난한자의 잘못 때문이라며 스스로 해결해야지, 그것을 구제하는 것은 가난한 사람을 의타적으로 만든다고 주장했다.

맬서스의 인구론 하면 우리에게는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늘어나는 반면에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라는 명제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가 추가적으로 주장한 인구증가의 억제 필요성에 대한 주장은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사실 그는 만혼 교육 등의 예방적 억제책과, 전쟁 질병 기아 가혹한 노동 등의 적극적 억제책 그리고 도덕적 억제에 의해 인구증가가 억제돼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이러한 주장 때문에 결혼을 집례하기도 하는 목사이기도 했던 그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물론 그는 훗날 주로 교수생활을 했지만 말이다.

정부는 천사나 요정이나 전능한 존재가 아닌 인간이 운영하는 것이다. 국민이 정부가 많은 일을 하기를 기대하면 할수록, 정부는 그 규모나 권한에서 커지고, 큰 정부는 그 만큼 많은 규제를 하게 되고, 세율은 높아지고, 기업의 활동은 위축되게 마련이다.

이런 의미에서 어느 남자가 아이가 많은 것이 가난의 원인이라고 자신의 성기를 자른 소식을 접하고 애절양(哀絶陽: 아이 많은 가난한 남성이 성기를 자른 것을 슬퍼한 다산의 시)을 지었다던가, 가난하여 혼기가 지나도록 혼인을 하지 못한 사람은 마땅히 관에서 성혼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한 다산은 맬서스와 대조가 된다. 다산은 관의 역할과 능력이 미치지 못하는 곳이 없을 정도로 생각하였다. 그의 생각에 의하면 어디까지나 관은 베풀고 지배하는 위치이고 백성은 동정의 대상, 지배의 대상이었다.

정부 의존적 생각의 굴레를 벗자

우리는 아직도 정부를 무소불위(無所不爲)적 존재로 생각하고, 정부 의존적 생각, 관존민비적 생각의 굴레를 벗어버리지 못하고 있다. 지금도 고시 준비하느라 생산대열에 참가치 못한 수많은 젊은 인력이 소모되고, 대학이 있기만 하면 행정학과가 있고, 이공계를 경시(일본도 이 때문에 발목이 잡혀 있다)하고, 지나치게 권력을 추구하고 있는 나라가 현재 우리나라의 모습이다.

그나마 1950년대 이후 자의에서건 타의에서건 영미사상을 받아 들여 이 나마의 성취를 이룩한 것이다. “정부란 국민들이 개별적으로 할 수 없는 일들을 전체국민을 위해 공동으로 하기 위해 존재 하는 것이다”라는 링컨(1809-1965)의 말이나, “영어에서 가장 폭력적인 아홉 개의 단어는 ‘나는 정부공무원인데 도와주려 여기에 있습니다(I'm from the government. I'm here to help you)’이다”라는 레이건(1911~2004)의 말을 우리는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정부는 “금 나와라 뚝딱 은 나와라 뚝딱”의 도깨비 방망이를 갖고 있지 않다. 그리고 정부는 언제나 공정하고 효율적이지도 않다. 정부는 천사나 요정이나 전능한 존재가 아닌 인간이 운영하는 것이다. 국민이 정부가 많은 일을 하기를 기대하면 할수록, 정부는 그 규모나 권한에서 커지고, 큰 정부는 그 만큼 많은 규제를 하게 되고, 세율은 높아지고, 기업의 활동은 위축되게 마련이다.

우리는 그동안 많은 발전을 해 왔다. 정부가 알파요 오메가인 북한과 우리를 비교하면, 그나마 우리가 영미사상을 부분적으로나마 받아 들여 부분적이나마 민간주도의 시장경제를 운용하여 이 나마의 성취를 이룬 것이다. 현재 국민 총생산 기준 남한은 북한의 26배의 생산을 하고 있는 것이다.

명실 공히 선진국대열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영국계몽사상이 보다 더 이 사회에 전파돼야 하겠다. 사회의 변화는 구성원 즉 모두 각기 자신이 변해야 된다는 것, 가난으로부터의 탈피도 내가 해야 된다는 생각이 보다 널리 전파되고 수용돼야겠다. 다산이 2백여 년 전에 만나서 전파했었더라면 더 좋았겠지만, 이제라도 널리 전파하며 실천해야 하는 일은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들의 과제이다. ■

이경원 / 대진대 미국학과 교수
2008/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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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은 삼익악기의 영창악기의 기업결합이 경쟁을 실질적으로 제한하는 것이므로 공정거래위원회가 그 주식을 매각하라고 시정명령을 내린 것은 합당하다는 판결을 내렸다. 법원의 판결처럼 피아노 시장에서 경쟁이 제한되어 소비자들의 이익을 침해하는 것일까? 별로 그럴 것 같지 않다. 노동집약적인 피아노 시장에서 우리나라가 국제경쟁력을 갖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무역 자유화의 결과 외제 피아노는 어디가도 쉽게 볼 수 있다. 이런 상황에 있는 시장에 국내 회사가 하나인 경우와 둘인 경우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1970년대 중반 필자가 법학을 처음 공부할 때 우리나라 법학교과서에서 다루지 않는 것이 있었다. “정책”이었다. 논란이 있는 대목에서 “이것은 입법정책의 문제이다”라고 하면 더 이상 논의가 진전되지 않았다. 법문의 의미를 다투는 이른바 ‘학설’에서도 직접 경제 정책적 관점에서 논리를 전개하는 경우는 별로 없었다. 정부가 경제개발계획을 수립하고 집행하던 시대라서 그랬는지 아니면 군부 독재시대라서 그랬는지 법률가에게 ‘정책문제’는 일종의 금기였고 법률가와 정책은 부적절한 관계였다.

10년 뒤 1980년대 중반 미국 로스쿨에서 공부할 때 받았던 충격의 하나는 끊임없이 ‘정책’을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주요 쟁점마다 거의 예외 없이 정책적 논점(policy questions)이 다루어졌고, 아예 교과서 제목이 “Law and Policy of ○○○" 식으로 되어 있기도 했다. 필자의 눈에는 전혀 법률문제로 보이지 않는 ‘정책적 문제’들을 미국 시민들은 법원으로 갖고 왔고, 미국 판사들은 그런 문제에 대해 판결의 이름으로 결정을 했으며, 미국 사회는 그에 따라 변화하는 것이었다. 지구의 반대편에서 ‘법학’을 공부한 필자는 법이 이렇게 나서도 되나 하는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충격이 정점은 코이퍼(Thomas E. Kauper)교수의 강의였다. 필자는 당시 우리나라에 도입된 지 얼마 안 된 공정거래법을 전공하고 싶었다. 그래서 미국 법무부에서 공정거래 담당 법무차관으로 AT&T의 분할을 주도했던 코이퍼 교수를 지도교수로 정하였다.

코이퍼 교수는 공정거래법 수업을 “공정거래법은 정책이다”라는 말로 시작했고, 수업은 끊임없이 무엇이 좋은 정책인가에 대한 토의로 이어져나갔다. 정책은 빼고 법규정의 문언적 해석으로 가득했던 까칠한 식단에 익숙했던 필자에게 정책으로 가득 찬 호화로운 식단은 소화하기 힘들었고 결국 공정거래법 전공을 포기해야 했다. 귀국한 후 정책을 논하는 법학자로 살기는 힘들 것 같았기 때문이다.

[법의 이름으로 정잭을 논하는 것은] … 사회가 좋은 방향으로 발전해 간다는 증거이다. 중요한 문제를 힘 있는 사람이 일방적으로 결정하는 대신 합리성과 타당성을 판단하도록 훈련된 조직이 결정하는 것이 낫기 때문이다.

시대가 달라져서 이제는 우리나라에서도 법의 이름으로 ‘정책’을 논하는 것이 이상하지 않게 되었다. 국가가 간척사업을 해도 되는지, 회사를 사도 되는지, 시각장애인이 아닌 사람도 안마를 해도 되는지 법원에 물어 보는 세상이다. 이러한 변화는 사회가 좋은 방향으로 발전해 간다는 증거이다. 중요한 문제를 힘 있는 사람이 일방적으로 결정하는 대신 합리성과 타당성을 판단하도록 훈련된 조직이 결정하는 것이 낫기 때문이다.

삼익악기의 영창악기 기업결합 경과

대법원은 지난 5월 29일 공정거래위원회가 삼익악기와 삼송공업이 영창악기의 주식을 인수한 것은 경쟁을 실질적으로 제한하는 것이므로 그 주식을 매각하라고 시정명령을 내린 것은 합당하다는 판결을 내렸다. 이 판결을 읽으면서 법원의 “정책” 판단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한 번 하게 되었다.

영창악기 사건의 시작은 외환위기가 있었던 1990년대 후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56년 창업한 영창악기는 우리나라 피아노시장의 60%이상을 점유하고 있었고 수량기준으로는 세계 3대 피아노 메이커의 하나이기도 했다. 영창악기는 1990년대 후반 약 4천만불을 중국에 투자했는데 노동집약적인 악기산업의 특성이나 영창악기의 자금력으로 볼 때 무리한 결정은 아니었다고 한다.

그러나 외환위기로 자금사정이 악화되어서 1998년 8월 워크아웃에 들어갔고, 2002년 6월에 워크아웃을 졸업하였지만 경영정상화계획은 제대로 시행되지 않아 부채 상환은 물론 퇴직금도 지급할 수 없었다. 자본의 부분잠식으로 유상증자가 어려운 상황에서 법인세 추징까지 있자 결국 증자나 차입을 포기하고 회사를 인수할 사람을 찾게 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경쟁사인 삼익악기에 인수를 제안하여 2004년 3월 삼익악기등이 제3자 신주배정방식으로 영창악기의 주식 48%를 인수하고 경영권을 인수하게 되었다.

삼익악기는 경쟁사인 영창악기를 인수하고 공정거래위원회에 기업결합신고를 했는데 이에 대해 공정거래위원회는 2004면 9월 삼익악기의 영창악기 주식인수는 경쟁을 실질적으로 제한하는 행위라고 보아 1년 이내에 인수한 주식 전부를 제3자에게 매각하라는 시정명령을 내렸다. 시정명령 이후 삼익악기는 투자를 중단하였고 영창악기는 자금압박을 견디지 못하여 부도가 났다. 이후 이 사건은 두 회사로 나뉘어 아래 표와 같이 진행되었다.

<삼익악기>

 

 

 

<영창악기>

영창악기 주식 48% 취득

-

2004.  3. 12.

 

 

공정거래위 주식 매각 명령

-

2004.  9. 24.

 

 

 

 

2004. 10. 20.

-

영창악기 회사정리절차 개시

공정거래위에 이의신청

-

2004. 11.  1.

 

 

공정거래위 이의신청 기각

-

2005.  1.  5.

 

 

서울고등법원에 항소

-

2005.  2.  4.

 

 

 

 

2006.  3.  2.

-

현대산업개발 우선협상대상자 선정

서울고등법원 항소 기각

-

2006.  3. 15.

 

 

대법원에 상고

-

2006.  4.  7.

 

 

 

-

2006.  5. 22.

-

현대산업개발 지분 57.3% 취득

 

-

2006.  7.  6.

-

회사정리절차 종료

대법원 상고 기각

-

2008.  5. 29

 

 

사건의 법리적 쟁점과 법원의 판결

공정거래법 전공을 포기한 필자는 이 사건의 법리적 쟁점들, 예를 들면 신품 피아노와 중고 피아노를 같은 시장으로 봐야 하는지 다른 시장으로 봐야 하는지, 시장 점유율을 경쟁의 결과로 봐야 하는지 경쟁제한의 이유로 봐야 하는지, 국내 시장이 중요한지 국제시장이 중요한지를 판단할 처지에 있지 못하다. 그렇지만 이 사건의 진행경과는 공정거래법에 관한 문외한들에게도 여러 가지 생각할 거리를 던져 주고 있다.

서울고등법원에 소송이 제기된 2005년 2월에는 영창악기에 대해 회사정리절차가 개시되어 진행되는 중이었고 판결을 내린 2006년 3월에는 이미 정리회사 영창악기의 M&A가 진행되어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된 현대산업개발이 기업인수를 위한 실사를 하고 있었다. 영창악기에 대한 회사정리절차는 삼익악기와 공정거래위원회와의 다툼과는 무관하게 진행되고 있어 서울고법이 원고의 주장을 인정해서 공정위의 주식매각명령을 취소해도 영창악기를 회사정리절차개시 이전 단계로 돌릴 수는 없는 것이었다. 서울고법이 어떻게 판단하든지 대주주인 삼익악기가 갖고 있는 영창악기 주식은 회사정리절차에서 대부분 소각되어 삼익악기가 주식취득을 위해 투자한 100억여원을 회수할 기회가 없게 되었다. 만일 서울고법이 공정위의 명령이 위법하다고 판단하면 삼익악기는 공정위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을 뿐이었다. 이 점은 대법원 상고심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행정부의 정책이 법의 이름으로 시행되는 한 법원 역시 행정부에 못지 않는 정책적 고민을 하고 판단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공정위는 자신의 정책판단대로 법을 집행할 것이고 법원은 면죄부를 주는 역할만 하게 된다.

이미 새 주인이 나온 상태에서 옛 이야기를 들추어내어 잘잘못을 가리는 일은 법원으로서도 재미없는 일이다. 일만 복잡하게 만든다는 소리를 들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행정부의 정책이 법의 이름으로 시행되는 한 법원 역시 행정부에 못지 않는 정책적 고민을 하고 판단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공정위는 자신의 정책판단대로 법을 집행할 것이고 법원은 면죄부를 주는 역할만 하게 된다.

대법원 판결은 고등법원 판결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는데 원고의 상고를 기각하는 이유로 우리나라 신품 피아노 시장을 관련시장으로 획정하여, 이 시장에서 영창악기와 삼익악기가 결합하면 시장을 사실상 독점하게 되고, 이 결합이 효율성을 증대하거나 회생이 불가능한 회사와의 결합이 아니라는 점을 들었다. 이러한 사실판단과 법리적용에 대해서는 논자에 따라 다른 의견이 있을 수 있다. 그렇지만 좀더 근본적인 정책적 쟁점에 대해 대법원이 침묵하고 있는 점은 못내 아쉬움으로 남는다.

우선 영창악기에 대한 회사정리절차가 이미 시작된 후 내려진 고등법원 판결이나 종결된 이후 내려진 대법원의 판결에서 먼저 결정해야 했던 것은 부실기업의 구조조정이 부도 전 제3자 인수에 의한 방식이 더 나은 것인지 아니면 회사정리절차(현행 도산법이라면 회생절차)에 의한 방식이 더 나은 것인지에 관한 “정책적 판단”이였다.

이 사건의 본질은 회사와 그 이해관계자의 이익과 소비자의 이익 중 누구의 이익을 우선해야 하는가 하는 “정책 판단”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법원의 판결은 이 문제에 대해 분명한 언급을 하지 않고 있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당사자의 합의에 따른 구조조정이 가능하다면 그것이 회생절차를 통해 구조조정을 하는 것보다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회생절차는 일반적으로 채권자나 기존 주주의 권리를 감축하고, 절차를 진행하는데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회사와 그 이해관계자들에게 상당한 불이익을 주게 된다. 이 사건에서도 영창악기가 회사정리절차에 들어감으로써 21개월 동안 법원의 감독하에 관리인이 경영권을 행사하였다.

영창악기의 회사정리계획을 정확하게 알지 못하지만 일반적인 관행을 미루어 짐작해 보면 기존의 주주는 권리를 모두 잃었을 것이고 채권자들도 채권을 전액 변제받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사건의 본질은 회사와 그 이해관계자의 이익과 소비자의 이익 중 누구의 이익을 우선해야 하는가 하는 “정책 판단”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법원의 판결은 이 문제에 대해 분명한 언급을 하지 않고 있다.

정책 판단자로서 법관의 역할

설사 소비자의 이익을 우선한다고 하여도 삼익악기와 영창악기의 기업결합으로 피아노 시장에서 경쟁이 제한되어 우리나라 소비자의 이익이 정말 침해되었을까? 공정거래법을 잘 모르는 필자로서는 나서기가 조심스럽지만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에 기대어 참견을 한다면, 별로 그럴 것 같지 않다. 노동집약적인 피아노 시장에서 우리나라가 국제경쟁력을 갖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고급 피아노의 대명사인 야마하는 바다 건너 일본 회사이고, 중국은 저렴한 노동력을 바탕으로 세계 3대 피아노 메이커 중 하나를 갖고 있다. 무역 자유화의 결과 외제 피아노는 어디가도 쉽게 볼 수 있다. 이런 상황에 있는 시장에 국내 회사가 하나인 경우와 둘인 경우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우리나라 피아노 산업은 자식을 많이 낳고, 낳은 자식마다 피아노를 가르치던 세대가 만들어 준 것이다. 이제 자식도 많이 낳지 않고, 피아노 말고도 가르칠 것이 많은 시절이 되었다. 더욱이 피아노는 보호받을 상품도 아니어서 국제적인 경쟁에 완전히 노출되어 있다. 이런 상황에서 피아노 산업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보다 근본적인 정책 판단을 판결에서 듣고 싶었다.

지금 당장 법원의 판단에 따라 해당 회사의 운명이 달라지는 것은 아닐지라도 법원이 근본적인 정책 문제에 대한 판단을 해 줘야 공정거래위원회가 그에 맞추어 법을 집행하게 된다. 그런 판단 없이 공정거래위원회의 처분이 옳다고 판결을 하면 그 전제가 되는 정책적 쟁점에 대해서도 같은 생각을 하는 것인지 아닌지 알 수가 없다. 법집행의 전제가 되는 근본적인 정책적 쟁점에 대해 법원이 더 적극적으로 판단해 줄 것을 기대한다. ■

오수근 / 이화여대 법과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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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자재 가격과 유가 급등, 물가상승 등으로 인해 경기침체가 지속되고 있다. 혹자는 재정과 금융정책 등 각종 대책을 주문하고 있으며, 정부도 유가안정 대책, 물가안정 대책 등을 마련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들은 실효성이 없는 일시적인 미봉책에 불과하며 자원배분을 왜곡시키고 부작용만 키워 경제를 더욱 악화시킬 뿐이다. 그러므로 물가정책이나 고유가 문제 등은 시장원리에 따라 해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정부는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목표치 3%보다 훨씬 높은 5%를 넘어서고 하반기 성장률도 3%대로 떨어질 것이 우려되자 경제정책의 기조를 대폭 수정하였다. 수정이 아니라 정책기조의 변경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 성장우선 정책이 물가안정 정책으로 급선회하였기 때문이다. 현 정부는 다급하고 초조한 듯하다. 어떤 정권도 대선 공약을 지켜내지 못했지만 그래도 현 정권처럼 이렇게 정권을 잡자 말자 물거품처럼 서민들의 가슴을 허하게 만든 적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국민들에게 별 면목이 서지 않은 것은 당연하다. 현 정권의 지금 처지는 사면초가, 내우외환으로 말하기도 부족할 정도이다. 무능력, 무소신, 무책임하기까지 하다는 등 갖은 험한 소리를 다 듣고 있다. 안타까울 따름이다. 이 대통령은 지금의 상황을 지난 10년 집권 세력의 끈질긴 저항과 준동으로 해석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현 정권이 극복해 내야 할 과제들이다. 어려울수록 원칙에 충실하고 시장의 흐름을 거스르지 않는 것이 지도자의 올바른 처신이다. 그것이 국민들에게 당장은 감동을 주지는 못할지언정 결국 한국 경제를 위하는 길이다.

시장이 살려준 쇠고기 정국

쇠고기 파동은 정치적으로는 미숙하였을지 모르지만 경제적으로는 무엇이 올바른 길인지를 처절하게 경험하게 하였다. 삶이란 최고가 아니라 최선의 추구이며, 검역권보다 앞서는 것이 자기주권이다.

현 정부는 섣부르게 미국과 쇠고기 협상을 타결하였고 그것이 반대세력의 빌미를 제공하였다. 어떤 경우에도 최고와 안전을 들이대는 이상 그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의 전략은 아주 성공할 수 있었다. 2개월이 넘는 동안 이 나라는 아수라장이 되었고 국가의 기운이 조금씩 쇠락의 길로 접어드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갖게 하였다.

선택거리가 많아지고 경쟁이 심화되면 업자에게는 이익 보는 자와 손해 보는 자가 생기지만 소비자에게는 손해 보는 자 없이 모두에게 더 큰 혜택이 가기 마련이다. 우리 모두는 업자이기 이전에 소비자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지금 쇠고기 시장을 가보아라. 그러면 지난 몇 달 동안 한국에서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났는지를 슬픔과 분노로 다가올 것이다. 한우를 비롯하여 수입 쇠고기의 가격이 급락하였고, 쇠고기의 대체재인 돼지고기의 가격도 크게 떨어졌다.

우리는 무엇 때문에 피터지게 싸우면서 그 난리를 쳤는가? 단지 축산 농가를 위해서 그러했는가? 선택거리가 많아지고 경쟁이 심화되면 업자에게는 이익 보는 자와 손해 보는 자가 생기지만 소비자에게는 손해 보는 자 없이 모두에게 더 큰 혜택이 가기 마련이다. 우리 모두는 업자이기 이전에 소비자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성장보다 물가안정 정책이 친시장적이다

어떤 돌파구도 보이지 않던 쇠고기 정국은 이처럼 미국산 쇠고기가 시장에 풀리면서 순식간에 해결되었다. 무엇이 진실인지를 시장이 판가름해준 것이다. 시장은 이처럼 무서울 정도로 한 점의 거짓 없이 세상 사람이 원하는 바를 온전히 드러내준다.

시장의 이런 진실은 그러나 누구의 간섭도 없어야 한다는 절대적인 조건을 전제로 한다. 현 정부는 시장의 힘을 알기 때문에 갖은 욕과 비판을 감내하면서 어리석을 정도로 기다렸을 것이다. 그래서 일견 현 정부는 아주 시장지향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실은 결코 친 시장적인 정권이 아니다. 정권을 잡은 지 고작 5개월 남짓 하지만 도처에 비 시장적인 정책들이 난무하다. 사실 현 정권의 대선 공약인 7-4-7 구호만큼 시장 개입적인 의사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은 없다. 그의 성장 우선 정책은 불행하게도 세계 경제 상황의 악화와 맞물리면서 취임 5 개월 만에 좌초하고 말았다. 어쩌면 그것이 한국 경제의 미래를 위해 약일는지도 모른다.

현 정권의 정책기조가 시장 친화적이라면 성장이 아니라 물가안정이 우선 되어야 했다. 성장은 현재 소비를 억제한 결과이며, 시장경제에서 그 억제의 정도는 개인의 자유로운 의사에 따라야 한다.

현 정권의 정책기조가 시장 친화적이라면 성장이 아니라 물가안정이 우선 되어야 했다. 성장은 현재 소비를 억제한 결과이며, 시장경제에서 그 억제의 정도는 개인의 자유로운 의사에 따라야 한다.

그러나 성장 목표를 설정해놓고 이를 밀어붙이기 위해서는 정부가 어떤 형태든지 개인의 의사를 무시하는 시장 개입 정책을 구사하지 않을 수 없다. 반면에 물가안정은 그 자체로 시장의 불확실성을 제거하여 개인의 자유로운 거래를 뒷받침한다. 그래서 현 정부의 정책목표와 정책기조는 처음부터 엇박자였다. 시장 친화적이라고 하면서 성장우선 정책을 추진한 것은 시장을 어설프게 알고 있었든지 아니면 정직하지 못한 포퓰리즘의 또 다른 모습일지 모른다.

성장을 희생하지 않고서는 물가를 잡을 수 없다

주요 포털사이트인 네이버의 경제면에 올려 진 신문사들의 최근 기사 제목을 보면 한국경제는 곧 절단이 날 것만 같다. 2차 외환위기라는 말이 나오고 스태그플레이션 국면에 이미 진입한 것처럼 보도되고 있다. 위기의 경보를 알리는 이 모든 외침은 정부를 향하고 있다. 정책수단을 강구하여 이 위기를 수습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원자재와 유가의 급등과 같이 비용 상승으로 인한 경기침체와 물가 상승에는 안타깝게도 마땅한 묘책이 없다. 혹자는 재정과 금융 정책의 적절한 혼합을 주문하기도 한다. 이론적으로는 그럴듯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대내외 경제 환경이 급변하고 내일의 유가도 정확히 예측하기 힘든 상황에서 경제를 악화시킬 가능성을 높일 뿐이다.

원자재와 유가의 급등과 같이 비용 상승으로 인한 경기침체와 물가 상승에는 안타깝게도 마땅한 묘책이 없다. 혹자는 재정과 금융 정책의 적절한 혼합을 주문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대내외 경제 환경이 급변하고 내일의 유가도 정확히 예측하기 힘든 상황에서 경제를 악화시킬 가능성을 높일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몇 가지 원칙에 충실 하는 수밖에 없다. 먼저 성장을 희생하지 않고서는 물가를 잡을 수 없으며 물가가 안정된 후에야 성장을 위한 여러 정책 대안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스태그플레이션이 무서운 것은 그것이 비용-물가-임금 인상의 악순환적인 고리를 낳기 때문이며 그 고리를 끊기 위하여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은 물가 상승을 억제하는 것이다. 지속적인 물가 상승은 화폐적인 현상이므로 정부는 통화정책으로 그것의 통제가 가능하다.

특히 작금의 어려운 세계경제는 석유 수급의 불안 외에 글로벌 유동성의 과도한 팽창이 그 원인이기 때문에 무엇보다 유동성 관리를 위한 긴축 금융정책이 필요하다. 유동성 공급을 억제하게 되면 취약한 가계와 중소기업이 힘들어지게 마련이다. 그러나 이 고통을 피하려다 보면 더 많은 사람들이 더 큰 충격을 오래 동안 겪을 수밖에 없다. 여우 굴 피하려다 호랑이 굴을 만나는 짝이다. 비록 어려운 시기를 겪을지라도 먼저 경제체질을 단단히 해놓는 것이 양심적인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이다.

가격 관리 환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 대통령은 취임 후 한 달도 지나지 않아 불쑥 50개 생필품의 가격상승을 억제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정부는 이 지시에 따라 공공요금의 동결, 생필품의 유통체계 개선, 원재료의 할당관세 인하, 수입원가 공개, 부가세 면제 추진, 시민단체로 하여금 가격 인상 업체의 감시 등의 부산을 떨었다.

이 중에는 정부가 감내하면서 할 수 있는 일도 있고 시장을 직접 교란하는 정책도 있다. 그런데 이들 품목들 중 상당수의 가격은 소비자물가보다 더 높게 상승하였다. 정부의 노력이 전혀 힘을 쓰지 못한 것이다.

그것[가격관리]의 실효성은 그다지 높지 않으며 자원배분의 왜곡과 같은 부작용만 키울 뿐이다. 가격관리의 환상에서 벗어나고 공공요금도 시장의 원리에 따라 점진적으로 현실화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동수 기획재정부 차관은 지난 7월 22일 서민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주요 품목의 가격을 점검하여 다시 선제적 대응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인플레이션 기대 심리를 낮추고 미시적 조정으로 서민생활의 충격을 조금씩 가중시키고자 하는 의도는 알겠지만, 그것의 실효성은 그다지 높지 않으며 자원배분의 왜곡과 같은 부작용만 키울 뿐이다. 가격관리의 환상에서 벗어나고 공공요금도 시장의 원리에 따라 점진적으로 현실화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개인은 힘들겠지만 유가급등과 물가상승에 순응하는 길밖에 없다

생필품 가격의 상승은 수입 농산품 및 원자재 가격의 상승과 유가의 급등과 같은 해외 요인, 그리고 성장을 위한 정부의 잘못된 고환율 정책에 기인하였다. 정부는 잘못된 환율 정책을 깨닫고 있기 때문에 그나마 다행이지만, 해외 요인은 정부로서도 어떻게 할 마땅한 대안이 없다.

문제를 어렵게 만드는 것은 지금의 유가 급등이 과거 두 차례의 석유 파동 때와는 달리 신흥국가들의 경제발전으로 인한 세계 석유 수요의 증가에 기인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지금의 고유가 추세가 추가적인 공급 증대나 대체 에너지의 개발이 없는 한 세계 경제가 건강하다면 항상 같이 가야할 짐이며 동반자일 수밖에 없음을 시사한다.

그래서 개인은 고유가에 가능한 빨리 적응하는 길밖에 없다. 보조금 지급이나 유류세 인하와 같은 조치는 일시적인 미봉책에 불과하며 결국 우리의 부담으로 남게 된다.

시장은 우리 모두에게 새로운 대체 에너지 개발과 석유 자원의 절약을 명령하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환경론자들이 원하는 것이고 우리의 미래 세대를 위하는 길이 아닌가? 시장은 결코 환경을 파괴하고 낭비를 부추기는 기구가 아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단지 이익 집단의 요구에 굴복하는 정부일 뿐이다. ■

배진영 / 인제대 국제경상학부 교수

2008/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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