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5일, 칼이 올라갔다. 주위가 조용해진다. 칼을 내리쳤다. '휙' 소리는 바람을 갈랐다. '삼성'은 그렇게 두 동강이 났다. 태안기름유출사태부터 비자금 사건에 이르기까지 최근 시민단체의 삼성을 향한 공격은 “증오”라는 단어로 밖에 설명되지 않는다. |
화창한 주말이었던 지난 15일, 서울 청계광장으로 나들이 온 시민들은 커다란 확성기 소리에 발길을 멈춰야만 했다. 이날 청계광장에서는 "삼성은 기름유출 재앙을 책임져라" "특검은 부패 백화점 삼성의 진상을 규명하라" "삼성의 완전한 사과를 촉구한다" 등의 구호가 청계 광장에 끊임없이 울려 퍼졌기 때문.
참여연대 등 150여 진보 시민단체는 이날 '삼성의 사회적 책임을 촉구하는 시민한마당'이란 행사를 개최했다. 1부 서해안 농어민을 돕는 '서해안 살리기 농수산물 장터' 2부 ‘기름유출사고 완전해결, 이건희 회장 일가 불법규명 촉구, 가장 행진’ 3부 ‘삼성은 책임져라 시민문화제’ 등의 순서로 오전 11시부터 오후 6시까지 진행된 행사는 '삼성중공업의 서해안 기름 유출 책임 추궁'과 '백혈병에 걸린 삼성반도체 근로자에 대해 산업재해를 인정해 줄 것' '이건희 회장 일가의 부도덕한 경영권 승계 비판' 등의 내용으로 꾸며졌다. 최근 일어난 삼성 관련 계열사들의 각종 사건을 총체적으로 비난하는 자리였다.
이건희는 무릎 꿇리고, 삼성은 잘려나가고...
행사장은 시민단체 회원들로 시끌벅적했다. 한쪽에서는 기름 유출로 오염된 서해안의 실태를 보여주는 사진전과 서해안 주민을 위한 서해안 식품 장터가 열리고 있었고 또 다른 한쪽에서는 삼성반도체 작업복을 입은 사람들이 백혈병에 걸린 삼성반도체 직원에 대한 산업재해 인정을 요구하는 시위를 하고 있었다. 대학생으로 보이는 회원들은 분주히 돌아다니며 지나가는 시민들에게 '삼성중공업 고발 서명'에 참여해 줄 것을 요구하는 모습도 보였다. 다양한 퍼포먼스도 있었다. 이건희 회장의 얼굴을 본 뜬 탈을 쓴 이들을 때리거나 무릎을 꿇리고 손을 들게 하거나 ‘삼성'이라고 써진 천을 칼로 자르는 퍼포먼스 등이 행해졌다. 이날 청계광장에 모인 사람들에게 '삼성'이란 두 글자는 '증오'의 대상처럼 보였다.
연사로 나선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 한택근 사무총장은 "청계천이 요즘 많이 깨끗해졌다던데 청계천으로 오는 길에는 구린 냄새가 진동했다"며 "청계천 주변을 둘러보면 삼성생명 삼성전자 등 삼성의 회사들이 에워싸고 있다. 삼성의 구린 냄새가 전국을 진동하게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그것도 모자라 태안 앞바다에 기름 때 냄새까지 배기게 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한국진보연대 박석운 상임운영위원장은 ”기름이 유출된지 100일이나 지났는데도 책임을 회피하는 삼성이 정말 원망스럽다"며 "민주주의 회복에 국민 스스로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민주노총 오문숙 대변인은 삼성의 경영권 승계 문제를 지적하며 "삼성은 범죄 백화점”이라며 “이건희 일가는 삼성을 떠나라"고 언성을 높였다. 한미FTA 저지 범국민운동본부 오종렬 공동대표는 삼성을 국민의 기업으로 만들기 위해 투쟁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들의 주장을 얼핏 들으면 ’삼성'이란 두 글자는 '부패'와 '부정'과 '비리'의 상징으로 지탄받아야 마땅할 '대상'처럼 느껴졌다.
“삼성이~” “삼성은~” “삼성을~”, 비난을 집중시키는 시민단체들
하지만 이들의 말을 듣다보니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이들의 주장을 자세히 들어보면 비판의 대상이 ‘삼성‘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삼성의 잘못을 다루면서 삼성을 비판하는데 뭐가 이상한가라고 반문을 할 수도 있겠지만 이는 엄연히 비판의 대상을 혼동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삼성중공업' '삼성반도체' '이 회장'을 비난하며 “삼성이~” “삼성은~” “삼성을” 이라고 지칭했다. 이 회장도 ’삼성’이라고 지칭돼 졌고 삼성중공업도 ‘삼성’이라 지칭했다. 기름유출 사건을 말하며 "삼성은 스스로의 법적 책임을 여전히 인정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고 '이 회장의 경영권 승계 문제를 말하며 "삼성을 구치소로 보내자"고 말하고 있었다.
이렇게 생각하고 보면 이날 삼성중공업과 삼성반도체와 관련된 사건이 같이 다뤄지는 것도 이상한 일이었다. 그냥 지나치며 생각하면 모두 다 연관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엄연히 삼성 계열회사들은 분리돼 있고 연대 책임을 지지 않는다. 엄격히 서해안 기름유출과 삼성반도체는 연관이 없고 삼성중공업과 백혈병에 걸린 삼성반도체의 직원과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다. 또 서해안 기름 유출을 논하면서 이 회장의 경영권 승계 문제를 질타한다는 것도 이상한 일이다.
시민단체의 화법은 '증오'의 표적을 '삼성'이란 두 글자에 집중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들은 마치 '삼성'이라는 브랜드 아래 계열사가 다 무한책임을 져야한다는 위험한 시각을 가지고 있는 것만 같았다. '삼성'은 하나가 아니다. 삼성이란 브랜드로 등록한 업체 수는 어림잡아도 70여 개가 넘는다. 삼성종합화학, 삼성중공업, 삼성증권, 삼성카드, 삼성캐피탈 등 수 많은 회사가 '삼성'이란 이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시민단체들의 계열사들의 문제를 다 연관 있는 것처럼 오도하며 ‘삼성’ 브랜드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증폭시키는 것은 여간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윤리적 소비자(ethical consumer)가 증가되고 강조되고 있는 요즘 브랜드의 이미지는 중요하다. 세계적인 컨설팅회사인 맥킨지는 지난해 ‘경쟁의 새로운 규칙 형성’이라는 보고서를 발표했는데, 이 보고서에서는 “제품 구매결정을 내릴 때 적어도 몇 번 정도는 해당 기업의 사회적 평판을 감안하는” 윤리적 소비자층이 크게 증가하고 있으므로 기업들은 이 계층에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즉 '윤리적 소비'란 아무리 질 좋은 제품을 생산하더라도 기업이 사회적인 비판의 대상으로 낙인찍히면 경쟁에서 도태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 조성되고 있다는 것이다. 윤리적 소비가 이슈가 된 대표적인 사례로는 다국적 스포츠용품 회사인 '나이키'를 들 수 있다. 나이키의 경우 12세 파키스탄 소년이 나이키 로고가 선명하게 박힌 축구공을 꿰매고 있는 모습의 사진이 라이프지에 실리자 아동노동 착취 기업으로 지탄 받으면서 브랜드 이미지에 엄청난 타격을 입은바 있다. 기업평판은 하락했고 미국에서는 불매운동이 일기도 했다.
삼성 브랜드에 대한 ‘부패‘ 낙인찍기(NAME-CALLING)는 경영진을 향한 것?
시민단체의 의도가 무엇이든 간에 이들은 '삼성'이란 브랜드를 ‘부패’와 ‘비리’의 이미지로 '중상(name-calling)하는 행위를 하고 있었다. 소위 '낙인찍기'를 함으로써 삼성이란 브랜드를 쓰는 모든 기업에 해를 가하고 있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우리나라 수출의 20%를 감당하는 국내 최고 브랜드인 '삼성'의 역할은 크기 때문에 각 계열사의 문제에 대한 질타는 하더라도 삼성이란 브랜드에 대한 훼손은 삼가야 한다고 말한다. 시민단체들은 '삼성'에 대한 '증오'를 집중시키는 행위를 할 것이 아니라 개별적인 문제의 접근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행사를 주최했던 참여연대에게 계열사의 문제를 삼성전체의 문제로 부각시키는 이유에 대해 물었다. 이에 참여연대는 '삼성그룹의 구조'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참여연대 이상민 간사는 "계열사들이 분리 운영된다 해도 실질적으로 삼성 구조본을 통해 이건희 회장 일가가 장악하고 있다“고 말한 것. 결국 삼성계열사의 문제도 삼성그룹 전체의 문제로 봐야한다는 주장이었다. 다르게 보면 삼성그룹 경영진을 비판하기 위해 계열사들의 문제도 같이 거론했다는 말이다. '삼성그룹의 해체를 원하느냐'는 질문에는 "그룹 해체를 요구하는 것은 아니고 단지 (그룹 경영진의) 사회적 책임을 요구하는 것"이라고 답했다.
시민들 “삼성이 한국경제에 기여 많이 했는데...” “삼성의 잘못 누적돼”
그렇다면 시민들은 이들을 어떻게 바라볼까? 이날 행사를 지켜봤던 시민들도 우려의 목소리가 많았다. 이한필 씨는 "일개 기업을 죽이는 나쁜 행동을 하고 있다"며 "개별 기업의 문제는 법으로 처리하면 된다. '삼성'이라는 브랜드 가치가 국가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할 때 이런 움직임은 좋지 않다. '삼성'은 세계에서 한국의 국익을 상징한다. 세계적으로 '삼성'의 경쟁력을 높여야 할 때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해코지를 해서야 되겠느냐"고 반문했다. 행사장을 지나가며 "짜증난다."고 말했던 박승재 씨는 "적극적인 공감이 안 된다. 시각에 따라 다르겠지만 일부 주장이 옳다고 해도 거부감이 든다"고 했다. 행사장 근처에서 치과병원을 운영한다는 이한섭씨는 행사장 무대에까지 올라가 행사중단을 요구하기도 했다. 그는 "시끄럽다"는 단 한마디로 강한 거부감을 나타냈다.
물론 시민단체의 행동에 동조하는 시민들도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정확하게 삼성의 어떤 회사가 무엇을 잘못했는지는 지적하지 못했다. 막연하게 ‘삼성’에 대해 의혹의 시선을 보냈다. 김상진 씨는 "삼성의 잘못이 누적돼 시민단체들이 분노를 느끼는 것 같다“면서도 어떻게 잘못이 누적됐는지를 묻는 질문에는 구체적인 답변을 하지 못했다.
한편, ‘삼성 반대’가 있던 그 시간 공교롭게도 청계광장의 다른 한편에서는 아일랜드의 수호성인으로 불리는 세인트 패트릭을 기념하는 축제가 열리고 있었다. 맥주파티를 즐기는 수많은 푸른 눈의 외국인들이 청계광장에서 웃고 떠들고 있었다. 그들이 청계광장에서 찢겨나간 삼성의 브랜드를 보며 무슨 생각을 할까?
강필성 / 객원기자 (freemento@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