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집회로 상징되는 광장 민주주의가 양질의 의사소통을 담보로 하는 민주주의 모델이 될 수 있을 것인가? 광장 민주주의는 때로는 이성에 호소하는 설득이 되기도 하고 저급한 감정에 호소하는 선동이 될 수도 있다. 상식과 이성을 잃어 민중의 감정에 휘둘리는 광장 민주주의는 우중민주주의에 불과하다. 바람직한 소통의 모델로서 광장 민주주의가 되기 위해서는 광장에 참여하는 사람들 모두 자기절제력을 가져야 한다.

광장은 여러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다. 여러 사람들이 모이기에 애환도 있고 주장도 있으며, ‘엔터테인먼트’도 있다. 또 흥분과 기대가 교차하는 곳이기도 하다. 호기심을 가진 사람도 모여들고, 쇼맨십을 가진 사람도 모여들며, 심지어 물건을 사고파는 상인도 모여든다. 바로 그런 곳이기에 광장처럼 여러 사람들이 공동의 관심사를 나누기 안성맞춤인 곳도 없다. 바로 우리의 시청 앞 광장이 그런 곳이 되었다. 2002년 월드컵을 계기로 시작된 이 광장 문화는 엊그제 쇠고기수입반대 촛불집회에서 다시 한 번 절정에 달했다.

누가 왜 이 촛불집회에 나왔는가. 넥타이부대, 유모차부대도 나왔고 각종 노동사회 단체, 이익집단, 재야진보세력은 물론 해고노동자, 환경운동가까지 나왔다. 다양한 참가자들이 뒤엉켜 다양한 구호를 외쳤다. 이들이 참가한 까닭은 서로가 같지 않았으나, 그들을 묶는 공통점이 있었다. 촛불을 들고 무엇인가 한 마디 해서 자신의 뜻을 표현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 그것이었을 게다. 또 누군가 자신의 마음속을 속 시원히 꿰뚫어보는 사람들의 발언과 연설을 듣고 싶어 하는 욕구도 있었다.

촛불집회, 바람직한 민주주의 모델이 될 수 있을까

역사적으로 보아도 그러한 곳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존재했다. 아테네 사람들은 그러한 곳을 ‘아고라(agora)’라고 했고, 로마인들은 ‘포로 로마노(Foro Romano)’라고 했다. 이 로마시대의 광장인 ‘포로’는 오늘날 담론의 장을 의미하는 ‘포럼(forum)’이라고 하는 영어의 어원이 되기도 했다.

이 촛불집회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있다. 그것이 무엇인가. 그 동안 우리는 권위주의에서 민주주의로 이행은 했지만 어떤 민주주의모델을 정착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그 후보 가운데 하나가 엊그제의 촛불집회로 상징되는 광장 민주주의다. 관심의 초점은 이 광장 민주주의가 양질의 소통을 담보하는 민주주의 모델이 될 수 있을까하는 점이다.

광장이라고 해서 백가쟁명(百家爭鳴)처럼 모든 발언자나 연설가들이 기분 내키는 대로 이야기를 하면 ‘공론’이 되기보다 ‘중구난방(衆口難防)’이 될 수밖에 없다.

광장에는 고유한 특징이 있다. 광장은 여러 사람들이 모이지만, 공원과 다른 곳이며, 시장과도 다르다. 특징 가운데 하나가 이곳에 사람들이 모이면 그들 가운데 연설을 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나온다는 데 있다. 연설가들이 연설을 하면 오다가다 경청하는 사람들이 생기고, 인기가 있으면 구름처럼 모여들게 된다. 거기서 ‘위대한 의사소통자’가 나오는가하면 ‘열혈 선동가’도 나오게 마련이다.

아테네의 역사를 보면 그런 사람들 중에 도편투표로 추방되는 운명을 맞은 데모스테네스가 있었고, 아테네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페리클레스도 있었으며, 그 뒤를 이어 받은 클레온도 있었다. 그들은 모두 이 광장에서 ‘나라의 일’, 즉, 플라톤이 ‘폴리테이아(politeia)’로 불렀던 것, 혹은 로마인들이 ‘레스 푸블리카(res publica)’로 지칭했던 것들에 대하여 연설을 했다. 그 과정에서 때로는 청중들을 감동시켜 눈물을 흘리게 하였고 때로는 조국애에 불타오르도록 했으며, 혹은 성난 파도처럼 분노의 함성을 지르게 하기도 했다.

많은 시민들 앞에서 하는 연설은 엄숙한 일이다. 엄숙했기에 고대 로마 사람들은 이 행위를 ‘오라치오(oratio)’라고 했고, 연설가들을 ‘오라톨(orator)’이라고 했다. 연설이란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특별한 능력, 즉, ‘이성의 능력’에서 나온 것이며 ‘이성적 존재’이기에 말로 하는 ‘소통’이 가능하고 ‘설득’이 가능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성’을 의미하는 라틴어의 ‘라치오(ratio)’가 ‘연설’을 의미하는 ‘오라치오(oratio)’로 전이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광장 민주주의의 비극

그렇다면, 엊그제 우리의 광장 민주주의에서 주류를 이루었던 발언과 연설들은 어떤 성격의 발언과 연설이었을까. “정의란 강자의 이익”에 불과하다고 외치는 트라시마쿠스와 같은 소피스트의 연설이었을까. 민중들의 감정에 불을 지피는 클레온처럼 ‘선동가’의 연설이었을까. 그것도 아니라면, 전쟁에서 전사한 사람들을 위해 추모사를 한 페리클레스처럼, 나라가 위기에 차환 상황에서 합심을 당부하는 감동적 연설이었을까.

역사는 절제력이 없는 광장 민주주의의 비극을 고발하고 있다. 기원전 406년 아르기누사의 해전 후에 벌어진 역사적 사실에서 충동과 감정, 편견에 휘둘리는 광장 민주주의의 모습이 그대로 담겨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성에 호소하는 설득을 위한 연설이었을까, 아니면 저급한 감정에 호소하는 선동을 위한 연설이었을까. ‘설득’과 ‘선동’의 차이는 이성과 감성의 차이를 넘어서서 분별력과 무책임의 차이로 읽혀진다. 광장 민주주의가 제대로 꽃피려면, 절제는 필수적이다. 광장이라고 해서 백가쟁명(百家爭鳴)처럼 모든 발언자나 연설가들이 기분 내키는 대로 이야기를 하면 ‘공론’이 되기보다 ‘중구난방(衆口難防)’이 될 수밖에 없다. 어중이떠중이가 말하는 ‘중구난방’이 되지 않고 ‘품격을 가진 공론’이 되기 위해서는 절제력이 요구된다.

역사는 절제력이 없는 광장 민주주의의 비극을 고발하고 있다. 기원전 406년 아르기누사의 해전 후에 벌어진 역사적 사실에서 충동과 감정, 편견에 휘둘리는 광장 민주주의의 모습이 그대로 담겨있기 때문이다.

아테네군이 아르기누사의 해전에서 어렵게 스파르타군과 싸워 승리하여 돌아오는 과정에서 전투의 지휘자들이 승리감에 도취되어 물에 빠진 병사들을 구조하는 것을 소홀히 했다는 고발이 제기되었다. 고발자들은 그 장군들을 처형하고 그들의 재산을 몰수하라고 주장했으며, 많은 민중들이 이 주장에 동조하였다. 널빤지를 타고 있다가, 구조된 한 병사가 동료들이 죽어가면서 장군들을 고발해 줄 것을 당부했다는 증언을 하면서 민중들의 흥분은 극에 달했다.

그 결과 전투에 참전했던 장군들은 모두 유죄판결을 받았고, 이들을 옹호했던 장군들을 포함하여 여섯 명의 장군들이 사형을 당했다. 이 투표에서 소크라테스 혼자만이 반대를 했지만 대세를 되돌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민중들은 유능한 장군들을 스스로 죽인 것에 대하여 후회하고, 이번에는 장군들을 고발했던 자들을 재판해서 유죄판결을 내리게 된다.

품위 있는 소통의 광장 민주주의가 되기 위해서는 광장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모두, 즉 광장에서 발언하는 사람들이나 그 발언을 듣는 청중들이나 할 것 없이 모두가 자기절제력을 가져야 한다. 절제력이 없는 한, 광장 민주주의의 미래는 없다.

그리스의 역사가 크세노폰은 이 사건과 관련, 순간적인 격정에 빠지는 민회의 취약성, 대중적 결정의 불안정한 기반, 충동적 행위에 대한 견제 체제의 부재로 인한 정치적 불안정의 잠재성, 변론 기술에 따라 결정되는 행위 방향, 파벌들 간의 충동 등을 읽을 수 있다고 비판한다.

광장 민주주의, 절제력을 가져야

그로부터 2400년 후에 펼쳐진 한국의 촛불집회가 그의 비판을 경청해야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품위 있는 소통의 광장 민주주의가 되기 위해서는 광장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모두, 즉 광장에서 발언하는 사람들이나 그 발언을 듣는 청중들이나 할 것 없이 모두가 자기절제력을 가져야 한다. 절제력이 없는 한, 광장 민주주의의 미래는 없다. 어찌 광장 민주주의뿐이겠는가. 국가공동체의 전도도 암담한 것이다.

출범한 지 100일 밖에 되지 않는 정부를 두고 퇴진하라고 주장하는 것은 ‘대선불복종행위를 하겠다는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말이다. 광장 민주주의가 빛을 발하려면, 그런 부조리한 선동과 자극보다 이성과 절제가 살아 꿈틀거려야 한다. 대의 민주주의가 잘못하는 것을 지적하는 것, 혹시 그게 아니라면 선거 민주주의가 채워주지 못하는 갈증을 풀어주는 것이 광장 민주주의의 어젠다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 혹여 선거로 잃어버린 권력을 길거리에서 다시 찾으려고 한다든지, 이른바 ‘종이 돌(paper stone)’이라고 할 수 있는 투표에 의하여 심판받은 것을 폭력시위로 되돌리려고 하는 것은 그리스말로 채울 수 없는 ‘탐욕’을 의미하는 ‘플레오녹시아(pleonoxia)’나 권력에 대한 금단현상에 불과할 뿐이다.

민주사회의 시민들이라면 교회지휘자의 말을 듣는 성가대원처럼 항상 유순하게 행동할 필요는 없다. 혹은 오케스트라 지휘자의 말을 듣는 오케스트라 단원들처럼 순종적으로만 살 수는 없다. 때로는 이의도 제기하고 비판도 제기하며 혹은 성난 목소리로 고함을 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침몰하는 난파선의 사람들처럼 상식과 이성을 잃을 정도로 무례해서는 안된다. 그런 광장 민주주의라면 이성을 가진 대중 민주주의가 아니라 변덕스러운 민중의 감정에 휘둘리는 우중민주주의에 불과하다.

바람직한 소통의 모델로서 광장 민주주의가 ‘지속가능성’을 지니기 위해서는 난폭한 수사법을 동원해서 사람들의 마음을 격동시키려 하는 자극형 선동가들보다는 냉철한 이성의 힘으로 사람들을 설득하고 분별력 있는 모습으로 대중들에게 호소하는 발언자와 연설가들이 필요하다. 그런 연설가들이 많아야 광장민주주의는 성공한다. 이번의 광장민주주의가 그런 냉철한 발언자와 연설가들을 다수 선보였는가. 지금이야말로 한번쯤 뒤를 돌아보며 성찰할 때다.■

박효종 교수 / 서울대 윤리교육과

2008년 06월 12일
Posted by 자유기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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