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적 자유주의에 입각했던 이 대통령의 정책이 근자에 들어 민중주의적 정책으로 바뀌었다. 이 대통령이 정책 방향을 돌린 까닭은 그에 대한 낮은 지지 때문이다. 민중주의적 정책들은 시민들의 긍정적인 반응을 얻었지만, 궁극적 효과는 거의 언제나 해롭다. 이러한 정책들은 자유민주주의를 적어도 부분적으로 부정하기 때문이다. 민중주의적 정책은 그것을 만든 사람의 정치적 자산을 늘리는 것일 뿐 세상을 보다 더 좋게 만들기 위한 좋은 정책과는 관련이 없다. 그러므로 이 대통령은 자신의 정책을 진지하게 성찰해야 할 것이다. |
근자에 이명박 대통령의 정책이 갑작스럽게 바뀌었다. 정치 분야에선 '중도강화론’을 내세워 이념적 이동을 했다. 경제 분야에선 '서민을 위한 정책’이라는 구호 아래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배려를 강조한다.
이런 변화는 그저 정책의 내용이 부분적으로 수정된 것이 아니라 그가 추구하는 정책의 방향 자체가 크게 바뀌었음을 뜻한다. 그는 자유민주주의에 바탕을 둔 한나라당 후보로 대통령이 되었다. 따라서 중도적 입장으로의 이동은 근본적인 변화다. 그의 경제 정책은 '기업 프렌들리’라는 구호가 상징하듯 경제적 자유주의에 대체로 충실했었다.
민중주의 정책을 내건 이유는?
이제 그가 내놓는 경제와 사회 분야의 정책들은 모두 민중주의(populism)의 빛깔을 짙게 띠었다. 오후 10시 이후의 과외 학습 금지, 대학생들을 위한 장학금의 조건 완화, 기숙형 고교의 기숙사비 경감, 교통범칙금의 소득에 따른 차등 부과, 음주 운전 초범자의 사면과 같은 조치들은 모두 민중주의적 정책들이다.
이 대통령이 그렇게 방향을 돌린 까닭은 그에 대한 낮은 지지이다. 그를 지지하는 시민들의 비율과 강도는 다른 대통령들에 비해 현저히 낮다. 특히, 정권이 출범하자마자 나온 '촛불 시위’는 그가 이끄는 정권을 거의 마비시켰다. 그는 정책의 방향을 바꿈으로써 이런 상황에서 탈출하려 한다. 대통령 선거에서 그에게 투표했으나 뒤에 그를 떠난 중도적 시민들을 다시 불러들이고 서민들을 위한다는 정책들도 너른 지지층을 얻겠다는 계산이다.
아직까지는 상황이 대통령의 계산대로 돌아간다. 그가 내놓은 민중주의적 정책들은 대체로 시민들의 긍정적 반응을 얻었다. 그런 정책들은 좌파인 제일야당이 설 땅을 좁히는 효과도 지녔다. 문제는 민중주의적 정책들의 궁극적 효과가 거의 언제나 해롭다는 사실이다. 이번 경우도 예외가 아닐 터이다.
이 대통령의 '중도강화론’은 부정적 함의들을 여럿 품었다. 근본적 문제는 그것이 자유민주주의를 적어도 부분적으로 부정한다는 사실이다.
사람들이 중도에 이끌리는 심리적 원인은 물질세계와 지적세계를 혼동한 유추다. 중력이 작용하는 물질세계에선 어떤 물체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늘 가운데다. 가운데가 약하면, 물체는 부서지므로, 가운데를 강화하는 것은 늘 좋은 처방이다. 그러나 중력의 영향을 받지 않는 지적 세계에선 사정이 전혀 다르다. 개념이나 아이디어를 다른 것들과 섞어서 묽게 하는 것은 흔히 일을 그르치는 처방이다.
또 하나의 원인은 우리 사회에서 좌파 이념과 우파 이념이 대칭적이라는 가정이다. 이념을 논의할 때, 우리는 이념들을 하나의 스펙트럼에 배열하고 양쪽의 이념들이 대체로 대칭적이라고 여긴다. 이것은 자연스럽고 나름으로 타당성을 지닌 관행이다.
중도는 뚜렷한 이념이 아니라 이념의 결핍
그러나 특정 사회의 맥락에서 이념을 다루게 되면, 이런 대칭은 무너진다. 어떤 사회든 특정 이념을 자신의 구성 원리로 삼기 때문이다. 그렇게 구성 원리가 된 이념은 정설의 지위를 차지하고 다른 이념들은 모두 이단이 된다. 대한민국의 경우, 헌법은 “자유민주적 질서”를 지향했다. 자연히, 우파라 불리는 자유민주주의는 우리 사회의 정설이다. 다른 이념들은, 좋게 얘기해서, 잠재적 대안들일 따름이다.
이런 상황에서 중도란 말은 일상적 의미를 잃는다. 정설과 이단의 중간이라는 자리는 존재할 수 없다. 정설을 선택적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허용되지 않는다. 대한민국 국민들은 헌법의 규정들을 선택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당연히, 대한민국 대통령은 자신의 이념적 좌표를 중도에 둘 수 없다. 그는 자유민주주의를 추구할 책무가 있다.
현실적 차원에서도 사회의 중심인 자유민주주의에서 벗어나 중도라는 변두리로 옮겨가는 것은 현명하지 못하다. 요즈음 자신이 본래 지녔던 이념에서 벗어나 중도적 정책을 펴서 성공한 정치 지도자들이 자주 거론된다.
그러나 그들의 이념적 이동에서 중요한 것은 중도라는 자리보다는 움직이는 방향이다. 그들은 원래 정통적 사회주의자들이었는데 집권한 뒤에 자본주의와 시장경제에 호의적인 정책들을 펴서 성공한 것이다. 중국의 덩샤오핑, 영국의 토니 블레어, 인도의 '국민회의당’, 그리고 브라질의 룰라 다 시우바는 익숙한 예들이다. 자본주의와 시장 경제가 다른 체제들보다 우월하다는 것이 증명되었으므로, 그들의 성공은 당연하다.
여기서 강조되어야 할 것은 이 대통령이 내비친 중도 세력에 대한 기대가 환상이라는 점이다. 중도는 뚜렷한 이념이 아니라 이념의 결핍이다. '제3의 길’은 없다. 자연히, 중도에 속한 사람들은 이념적 동질성을 지니지 못하고 응집력을 지닌 집단을 이루지 못한다.
실은 그들의 대부분은 이념에 대한 관심과 지식이 적은 사람들이고 체제의 유지에 마음을 쓰지 않는 무임승차자들이다. 그런 사람들을 뚜렷한 정체성과 정치적 일정을 지닌 집단으로 만들어 정치 기반으로 삼는 일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안팎의 위협으로부터 대한민국을 지켜온 열정적 자유주의자들을 외면하고 중도 세력이라는 허상을 좇는 것은 현명한 선택이 되기 어렵다.
민중주의적 정책들은 거의 언제나 해롭다
민중주의적 경제정책들도 궁극적으로는 큰 폐해를 낳을 것이다. 실제적 손실도 크겠지만, 자유주의를 약화시키고 사회주의적 경향을 강화시키리라는 점은 훨씬 큰 문제다. 이 점은 현 정권이 “사교육과의 전쟁”이라 부른 사교육 억제 정책에서 잘 드러난다.
현재 “사교육과의 전쟁”에서 핵심적 조치는 학원들이 오후 10시 이후엔 교습을 할 수 없도록 한 조치다. 먼저 우리를 실망스럽게 만드는 것은 교육 개혁을 위한 조치가 규제의 모습을 하고 나왔다는 점이다. 모두 동의하는 것처럼, 우리 교육은 더할 나위 없이 엄격히 규제된 산업이다. 따라서 규제를 푸는 조치가 먼저 나오는 것이 순리다.
사교육을 나쁜 것으로 보는 견해는 교육과 지식에 대한 이해의 부족에서 나온 단견이다. 똑 같은 지식인데, 학교에서 교사들이 가르치면 좋고 학교 밖에서 다른 사람들이 가르치면 나쁘다는 생각이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겠는가? 지식은 무엇보다도 소중하므로, 사교육은 폄하가 아니라 권장되어야 한다.
오후 10시라는 기준도 참으로 자의적이다. 가르치는 사람들과 배우는 사람들이 모두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일에서, 관리들이 자의적으로 설정한 특정 시간이 지나면 그 일이 불법이 되도록 하는 것은 자유주의의 원칙에 명백히 어긋난다.
사교육은 본질적으로 공교육을 보완하므로, 공교육이 잘 이루어지면, 사교육은 저절로 사라질 것이다. 당연히, 교육 개혁은 공교육의 문제들을 푸는 조치들이어야 한다. 우리 사회의 공교육은 교사들에겐 직무의 어려움보다 보수가 훨씬 높은 천국이지만 학생들은 제대로 배우지 못하는 연옥이다.
지금 우리 공교육은 너무 엄격한 규제 때문에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다. 그런 규제를 조금이라도 줄이는 것이 개혁의 요체지만, 규제 완화나 철폐는 무척 힘들다. 정부 관리들도 교사들도 규제에서 혜택을 입기 때문이다. 역대 정권들이 교육 개혁을 부르짖었지만 모두 실패한 까닭이 거기 있다.
당연히, 학원 교습을 규제하는 이번 조치는 적잖은 사회적 비용을 늘리고 실패할 것이다. “사교육과의 전쟁”이란 표현도 적절하지 못하지만, 그 “전쟁”은 정부가 이길 수 없는 것이다. 공교육이 개혁되어 제대로 이루어지려면 아득한 세월이 걸릴 터인데, 사교육이 어떻게 쉽게 없어지겠는가?
세상을 좋게 만드는 정책은 민중주의와 관련이 없다
이 대통령의 민중주의적 행보는 이미 그의 취임사에서 징후를 드러냈다. 그는 “이념을 넘어선 실용”을 내세웠다. 실용이 워낙 빈약하고 모호한 개념이므로, 이념의 도움을 받지 못하면, 그것은 표류하게 마련이고 결국엔 정권에 이익이 되는 것들을 뜻하게 된다. 그래서 당장 현 정권의 지지도를 높이는 도움이 되는 민중주의적 정책들이 '실용’이 되었다.
비스마르크는 “정치는 가능한 것들의 예술이다”고 말했다. 성공하려면, 정책은 일단 시민들에게 인기가 있어야 한다. 따라서 정책을 되도록 시민들의 입맛에 맞게 포장하는 일은 현명하다. 이런 사정은 현실적이고 성공적인 정책들이 때로는 민중주의적 빛깔을 띠도록 한다.
그러나 좋은 정책은 본질적으로 민중주의와는 관련이 없다. 좋은 정책은 세상을 보다 낫게 만드는 것이 목적이다. 민중주의적 정책은 그것을 만든 사람의 정치적 자산을 늘리는 것이 목적이다. 바로 그것이 예술과 외설물을 가르는 기준이다. 예술은 감상자들에게 예술가가 본 진실을 보여준다. 외설물은 그것을 만든 사람의 이익을 위해서 감상자들의 성욕을 의도적으로 조종한다. 이 대통령은 자신의 정책이 “가능한 것들의 예술”에서 “정권을 위한 외설물”로 바뀌지 않았는지 진지하게 성찰해야 할 것이다. ■
복거일 / 소설가
저자소개: 소설가 복거일은 서울대학교를 졸업하고 작가, 경제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비명을 찾아서’. '진단과 처방’, '이념의 힘’, '자유주의의 시련’ 외 다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