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와병설이 기정사실화되고 있어 한반도 주변의 정세에 커다란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이 글에서는 김 위원장의 건강악화가 북한 내부의 권력구도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 것인지, 그리고 북한의 대외정책은 어떻게 바뀔 것인지, 북한이 가용한 핵 협상 시나리오는 무엇인지, 그리고 한국은 급변하는 국제 정세에 어떻게 대비해야 하는 지 등을 다루고 있다. |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9월 9일 북한정권 수립 60주년 기념식에 불참함으로써 증폭된 ‘와병설’이 기정사실로 정착되고 있다. 약간의 병세호전을 전하고 있는 국내외 정보와 북한의 5대 권력기관들이 ‘영도자를 중심으로 일심단결(一心團結)’을 외치면서 충성을 서약하는 것을 보면 곧바로 ‘권력공백’이 도래할 가능성은 적어 보인다. 하지만 김 위원장의 건강악화가 한반도 정세에 미칠 영향은 곧바로 현실문제가 될 수 있다.
이와 관련해서 우선 주목해야 할 분야는 북한내부의 권력구도, 북한의 대외정책, 북핵 협상 등이다. 이 세 분야는 상호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김 위원장의 건강상태가 악화될수록 권력후계 문제가 부상할 수밖에 없고, 그 과정에서 실세들의 역할이 커질 것이며, 이들의 판단에 따라 대외정책과 핵협상도 달라질 수 있음이다. 때문에 한국으로서도 김정일 위원장의 건강악화 및 통치불능 가능성을 가정한 각종 대비책들을 마련해 두어야 한다.
북한의 권력구도는 어떻게 될까?
우선 예상해야 하는 다음 사태는 북한에 사실상의 집단지도체제가 등장할 가능성이다. 김정일 위원장에게는 김정남(37), 김정철(27), 김정운(25)이라는 세 아들이 있지만 이들 중 하나가 곧바로 권력을 승계받기는 어렵다는 것이 중론이다. 통상 권력자의 자녀가 권력을 인계받기 위해서는 ‘3P'가 필요하다. 즉, power(권력기반), policy(정책능력), personality(지도자 자질) 등이 필요한데, 이 세 가지를 겸비한 아들은 없다고 보는 것이 정설이다. 때문에 김 위원장의 통치가 불가능해진다면 일단은 집단지도체제가 등장하고 그 이후에 권력투쟁이 전개되어 세 아들 중 한사람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후계자’ 구도가 정착될 수도 있고, 권력투쟁에서 승리한 다른 개인이나 집단이 권력을 장악하게 될 수도 있다.
통상 권력자의 자녀가 권력을 인계받기 위해서는 ‘권력기반, 정책능력, 지도자 자질 등이 필요한데, 이 세 가지를 겸비한 아들은 없다. 때문에 김 위원장의 통치가 불가능해진다면 집단지도체제가 등장하고 그 이후에 권력투쟁이 전개되어 세 아들 중 한사람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후계자’ 구도가 정착될 수도 있고, 권력투쟁에서 승리한 다른 개인이나 집단이 권력을 장악하게 될 수도 있다. |
이런 관점에서 우선 주목해야 할 것은 김정일 위원장의 통치불능 사태직후 권력기관들에 포진하고 있는 직계세력들에 의한 집단지도체제의 가능성이다. 이 경우 최고 권력기관이라 할 수 있는 국방위원회, 노동당중앙위원회, 노동당중앙군사위원회 등 3대 기관에 포진한 측근인물들이 전면에 등장할 가능성이 가장 높다. 하지만 당(黨)ㆍ군(軍)ㆍ정(政)이 골고루 대변되는 ‘모양새’를 중시한다면 일단 헌법상 국가수반인 김영남 최고인민회의상임위원장을 필두로 그 휘하에 당과 군의 인물들이 포진하고 내각의 김영일 총리까지 포함되는 체제를 예상할 수 있다.
하지만 북한의 권력이 당과 군에 집중되어 있다는 점과 김 위원장이 체제생존 차원에서 선군(先軍)정치를 이끌어왔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국방위원회, 인민무력부 등에 포진한 군 인사들이 핵심이 될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와 관련하여 조명록 차수(80), 현철해 대장(74), 이명수 대장(71), 박재경 대장(75), 김명국 대장(68) 등이 이미 언론에 거명되고 있다. 김영남 최고인민회의상임위원장도 그렇지만 군부실세 중 상당수가 혁명 제1세대 출신으로 고령이다. 집단지도체제가 등장하더라도 이어서 새로운 권력투쟁이 시작될 것으로 보는 것은 이 때문이다.
대외정책, 경직될 가능성 커
군부중심의 집단지도체제가 등장한다면, 북한의 대외정책은 당분간 현재보다 더 경직될 것으로 보인다. 중국 및 러시아와의 전통적인 우호ㆍ동맹관계에 의존하면서 미국과 일본 그리고 한국에 대해서는 보다 강경한 자세로 나오기 쉽다.
이러한 예상을 가능하게 하는 주된 요인으로는 ‘체제에 대한 집착’을 들 수 있다. 이들 원로 군부그룹은 북한정권 수립이후 지금까지 최고위직에 머물면서 ‘혁명의 최대 수혜자’로 살아온 사람들이기에, 이들에게 있어 체제수호는 목숨과 동일하다. 서방세계로부터의 고립이 강화된다면 북한주민의 경제난과 식량난은 악화될 것이나, 군부 원로들에게 있어 주민의 삶의 질을 해결하는 것은 체제생존 다음의 문제일 뿐이다.
[북한은] 중국 및 러시아와의 전통적인 우호ㆍ동맹관계에 의존하면서 미국과 일본 그리고 한국에 대해서는 보다 강경한 자세로 나오기 쉽다. 이러한 예상을 가능하게 하는 주된 요인으로는 ‘체제에 대한 집착’을 들 수 있다. |
이 경우 현재 진행 중인 미북 관계개선, 북일 수교를 위한 대일협상 등이 보류되면서 중국과 러시아를 향한 북한의 구애(求愛)공세가 강화되는 국면을 예상할 수 있다. 현재의 세계구도를 감안할 때 북한의 이러한 시도는 일단 효과를 발휘할 것이다. 중국은 ‘도광양해(韜光養晦), 유소작위(有所作爲)’의 구호아래 굴욕의 현대사를 청산하고 중화(中華)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 절치부심하고 있으며, 내부적으로는 2020년에는 미국 경제력의 1.5배를 능가하는 경제력과 현대화된 국방력을 보유한 초강국 지위를 달성한다는 목표를 수립해 놓고 있다. 러시아 역시 푸친 대통령 이래 과거 초강국으로서의 영향력을 되찾고자 노력 중이며, 미국의 일방주의를 견제하는데 중국과 합작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북한의 친중ㆍ친러 시도는 중국과 러시아로부터 화답을 받은 가능성이 높다. 이 과정에서 남북한 관계는 불가피하게 경색될 것이다. 이명박 정부 이후 지루하게 지속되고 있는 남북간 기(氣)싸움도 좀 더 길게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북한의 핵 협상 시나리오
현재 북한에게 가용한 핵 시나리오는 4가지 정도이다. 첫째는 최대한의 반대급부를 받고 핵을 완전히 포기하는 시나리오이며, 둘째는 핵무기 개발을 재개하면서 국제사회와의 대결로 회귀하는 시나리오이다. 셋째는 최대한 시간을 끌면서 미북관계 개선 등 최대한의 반대급부를 얻어내다가 마지막 순간에 핵을 포기하는 경우이며, 넷째는 최대한 시간을 끌고 꾸준히 반대급부를 얻어내지만 결국 핵을 고수하는 시나리오이다.
현재로서 첫 번째 및 두 번째 시나리오의 가능성은 희박하다. 어떤 경우에도 체제를 수호해야 하는 북한 지배자들의 체제 딜레마는 여전히 그대로이며, 그렇다고 해서 북한의 정책결정자들이 취약한 정치적 입지를 가진 부시 대통령과 진행 중인 대미관계 개선 과정을 차버릴 만큼 어리석지는 않을 것이다.
[북한이] 가용한 핵 시나리오는 첫째 최대한의 반대급부를 받고 핵을 완전히 포기, 둘째 핵무기 개발을 재개하면서 국제사회와의 대결로 회귀, 셋째 최대한 시간을 끌면서 미북관계 개선 등 최대한의 반대급부를 얻어내다가 마지막 순간에 핵 포기, 넷째는 최대한 시간을 끌고 꾸준히 반대급부를 얻어내지만 결국 핵 고수 등 4가지다. |
그러나 군부의 실세들이 북한의 대외정책을 장악하는 상황이 온다면 네 번째 및 두 번째 시나리오의 가능성이 높아질 것이다. ‘핵무기는 체제생존 수단’이라는 등식이 더욱 설득력을 발휘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결정권을 장악한 군부실세들의 핵문제 접근은 두 가지 경로로 예상할 수 있다. 주민의 삶의 질 개선이라는 실용주의적 측면이 중시된다면, 네 번째 시나리오를 선호하게 될 것이다. 즉, 핵을 포기할 의도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장 핵 대화의 틀을 깨어버리지는 않을 것이다.
이 상태에서의 핵협상이 진행된다면 국제사회는 미북 양자대화 고수, 한국배제, 한미간 이간, 한국 내 남남갈등 자극 등 북한의 과거 협상전략들을 다시 보게 될 것이다. 위기조성, 벼랑 끝 핵외교, 의제 추가하기, 의제 쪼개기, 꼬리 짜르기(salami tactics), 강탈적 요구에 의한 기선제압 등 각종 협상전술들도 다시 목도하게 될 것이다. 1993년 북한은 느닷없이 경수로 건설을 요구하는 ‘의제 추가하기’ 전술을 구사하여 1994년 제네바합의에서 이를 관철했고, 1994년에는 ‘서울 불바다’ 발언으로 한국을 겁주어 대화의 테이블에서 밀어내고 미국과의 직접대화를 이끌어내는데 성공했었다. 미국의 핵 탑재 군함이나 항공기의 한반도 접근이나 출입까지 금지하고 한국 내 미군기지들을 조사해야 한다는 북한판 ‘조선반도 비핵화’ 방안을 다시 들고 나오는 것은 강탈적 요구로 비대칭 세력인 미국의 기를 꺾는 협상전술이 될 것이다.
그러나 김정일 위원장의 와병과 함께 정책결정권을 쥐게 된 군부가 체제위기를 느끼고 모든 것에 앞서 체제단속을 시도하고자 한다면, 북한의 핵문제 접근법은 좀 더 두 번째 시나리오 쪽으로 가까이 가게 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생각하기조차 싫은 일이지만 북한이 검증체제 협상을 거부하고 핵실험을 재개하는 최악의 시나리오도 일단 상정할 수 있다.
한국은 모든 가능성에 대비해야
김정일 위원장의 통치불능 사태가 도래할 경우 군부중심의 집단지도체제가 등장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나 그 이후 새로운 권력투쟁이 벌어져 보다 안정적인 권력이 탄생할 것이라는 것은 합리적 추론에 의한 예상일 뿐이다. 현실에서는 강경군부 대신 실용주의 세력이 먼저 등장할 가능성도 있으며, 집단지도체제 이후에 실용주의적인 정권이 등장할 수도 있다. 미국과 중국이 한반도의 미래를 놓고 일정한 역할을 하게 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으며, 어쩌면 평화통일의 기회가 다가올지도 모른다. 김정일 위원장의 와병이 한반도에 복(福)을 가져올지 화(禍)를 가져올지는 아직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특히, 임종을 앞둔 통치자의 심리적 요인을 중시한다면 완전히 다른 시나리오가 전개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예를 들어, 김정일 위원장이 병상에서나마 권력을 위임하지 않고 상당기간 통치를 이어가는 가운데 심경의 변화를 일으킨다면 상기의 예상과는 다른 대외정책 행태가 나타날 수 있다. 김일성 주석이 죽음을 앞둔 시기에 남북 정상회담을 수락했듯이 또는 고 정주영 회장이 말년에 고향인 강원도 통천을 그리며 소떼를 몰고 방북하여 햇볕정책의 물꼬를 텄듯이, 권력자들도 인간이라면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을 앞둔 상태에서는 심리적 변화를 겪게 될 것이다. 그러한 심리변화가 북핵문제 등에 긍정적인 역할을 하게 될 가능성을 부인할 수 없다. 이러한 때에 한국이 해야 할 일은 딱 한가지이다. 큰 소리를 내지 않는 가운데 차분하게 모든 가능성에 대비하는 것이다. ■
김태우 / 한국국방연구원 부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