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정부가 친서민 정책을 크게 강조하고 있다. 서민정책의 의도는 통상 '사회정의’를 실현한다는 데 의미가 있다고 하지만, 서민층의 삶의 개선을 목적으로 하는 사회정의는 신기루에 불과하다. 친서민정책은 목적과는 무관한 사법을 목적에 좌우되는 공법으로 전환시키는 시장경제의 공법화로서 이는 수많은 치명적인 부작용을 낳는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도덕적 정당성도, 서민층을 위한 실익도 없이 오히려 치명적인 결과만을 초래하는 정책에서 벗어나 자유시장경제를 일관되게 추진하는 일이다.
이명박 정부(MB정부)는 정부의 중요한 목적을 서민의 특수한 욕구와 희망을 충족시키는 일이라고 믿고 있다. 그래서 서민을 위한 정책을 거침없이 쏟아내고 있다. 졸업 후 상환 학자금 대출, 보금자리 주택, 공공사업을 통한 일자리 만들기 등, 다양한 정책으로 서민을 돌보려고 한다. 서민층의 '금융소외’를 완화하기 위한 미소금융과 햇살론도 있다. 서민정책은 중소기업과 대기업의 상생과 대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정책으로까지 확대되었다. 전문가조차도 전부 알 수 없을 만큼 서민정책이 아주 복잡해지고 있다.
서민정책의 의도는 서민층의 삶을 보살피는데 초점을 맞춘 '사회정의(social justice)’를 실현한다는 데에 있다고 한다. 물론 MB 정부는 이 같은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정책을 자세히 살펴보면, 정부사람들의 말을 자세히 읽으면, 사실상 분배정의를 의미하는 사회정의와 관련이 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정부가 서민층의 이익이라는 특수한 목적을 위해서 사회구성원들의 사적인 활동을 조종․ 통제하자는 것이다.
서민들의 삶의 애환을 돌보겠다는 MB 정부의 의도를 누가 나무라겠는가. 그러나 의도가 좋다고 해서 결과도 좋은 것이 아니다. 세상이 돌아가는 것은 자기 나름의 원리가 있듯이 시장경제도 자기 나름대로의 원리가 있다. 그 원리를 위반하면 의도가 아무리 좋다고 해도 치명적인 결과가 발생한다.
MB 정부의 국정철학: 사회적 시장경제
흥미로운 것은 MB 정부의 국정철학 또는 이념적 위치이다. 집권초기에는 매우 애매한 점은 있었지만, 그래도 시장경제에 매우 우호적이었다. 세금인하와 규제완화가 정책기조였다. 그래서 이념적으로 자유시장경제였다.
그러나 자유의 이념을 내치고 친 서민정책을 표방하는 국정철학으로 급선회했다. 서민정책은 어떤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컨셉트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듯하다. 그때그때 직관적으로 또는 정치적으로 필요에 따라 개별적인 정책을 수시로 토해내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MB 정부의 국정철학’이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을 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MB 정부가 지금까지 쏟아낸 서민정책들을 머릿속으로 종합하여 상상해보면 분배를 위한 “거대한 설계도”가 머릿속에 그려진다. 이념적 명찰을 붙이면 분배정의를 위해서 정부의 규제와 간섭을 제한 없이 용인하는 '사회적 시장경제 이념’이다. 흥미롭게도 이것은 분배정의를 강조하던 김대중 좌파정부의 명시적인 국정철학이었다. 노무현 좌파 정부의 그것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이 두 전임 정부는 “잃어버린 10년”의 장본인이 아니던가.
어쨌든 MB 정부의 친서민정책 올인(all-in)은 정치적 이슈를 선점당한 좌파민주당에게는 분통터질 일이고, 자유주의로 집권을 해 놓고는 반(反)자유주의로 간판을 바꾸었으니 우파지식인들의 허탈감이야 오죽하겠는가.
사회입법을 통한 시장경제의 공법화의 위험
서민층을 위한 분배정의의 실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사회입법(social law making)’이다. 이것은 서민층의 이익증진이라는 특수한 목적을 위해서 사회구성원들의 사적인 활동을 조종하고 지시하는 것을 내용으로 한다. 사회입법은 항상 특정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공법(public law)과 동일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염두에 둘 것은 자생적 질서(spontaneous order)로서 시장경제는 목적과는 독립적인 그리고 보편적 성격의 사법(private law: 영미법에 따라 민법과 형법을 포함)을 전제한다는 점이다. 이런 사법의 테두리 내에서 개인들은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자유로이 자신들의 지식을 추구한다.
따라서 MB 정부의 친서민 정책은 목적과는 독립적인 사법을 목적에 좌우되는 공법으로, 다시 말하면 시장의 자생적 질서를 특정한 목적에 좌우되는 그리고 계층적 구조를 특징으로 하는 조직(organization)으로 점진적으로 전환시킨다. 그 결과는 무엇인가?
공법은 원래 경찰조직, 사법부조직, 행정부조직과 같은 정부'조직’을 위해 정부 몫으로 할당된 인적․물적 자원의 관리운영과 관련하여 필요한 것이다. 사회입법을 통한 공법화는 이와는 전적으로 성격이 다르다. 그 같은 자원의 관리운영을 넘어서 시민들과 시민들의 재산까지도 강제적인 관리운영의 대상이 된다. 공적 영역이 사적영역으로까지 확대되는 것을 말한다. 서민층의 특수한 편익을 위해서이다.
시민들이 폭력이나 사기, 기만 또는 계약의 위반이나 불법행위와 같은 정의롭지 못한 행동을 하지 않았음에도 부자 또는 대기업이라는 또는 납세자라는 이유로 국가의 강제가 그들과 그들의 재산에 행사된다. 이것이 사회입법을 통한 시장경제의 공법화가 치러야 할 끔찍한 대가이다.
정부는 미소금융에서처럼 누가 출자하고 얼마의 이자로 누구에게 대출할 것인가를 강제적으로 지시하고 명령한다. 임대료 동결, 주택대출제한도 사법을 공법으로 전환시키는 사회입법이다. 정부가 기업들의 투자 증대와 고용확대를 독촉하는 것도 그 같은 발상에서 나온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대기업에게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것, 이에 덩달아 장관들도 대기업들에게 겁주고 옥죄는 발언도 기업들과 그들의 재산에 대한 정부의 관리운영이라는 공법적 발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우리가 주지해야 할 점은 시장경제는 자생적 질서라는 것, 그래서 그것은 정부의 특수한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것은 수많은 개인들이나 기업들이 제각기 서로 다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다목적 수단이라고 말하는 것이 옳다. 이것이 공법화할 수 없는 이유다.
시장경제의 자생적 질서와 사회정의의 신기루
흥미롭게도 서민층을 위한 정부의 끔찍한 강제행사는 분배정의를 의미하는 사회정의의 이름으로 정당화한다. 이 같은 정당화는 시장경제에는 분배하는 실체가 존재하고 있고, 그 실체의 정의롭지 못한 분배행위 때문에 서민층이 생겨나고 가난해졌다는 믿음을 전제한 것이다. 중소기업이 어려운 것은 대기업 때문이라는 주장도 그 같은 믿음에서 나온 것이다. 대기업이 없어지면 중소기업이 잘되고, 부자가 없어지면 서민층이 잘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믿음은 시장경제는 자생적 질서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 데서 생겨난 것이다. 자생적 질서란 아무도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저절로 생겨난 질서이다. 계획된 질서가 아니라는 것이다. 분배와 연관시킨다면 시장경제에는 분배하는 실체가 없다. 그것은 분배하는 인격체도 아니다. 개인들이 버는 소득은 수많은 요인들에 의해 결정된 것이다. 중소기업의 어려움은 대기업이 의도해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수많은 요인들에 의해 생겨난 것이다. 분배하는 인격체가 없기 때문에 시장경제와 관련하여 분배라는 말 자체도 어울리지 않는다.
따라서 시장경제에서 생겨나는 소득에 대하여 정의롭다거나 정의롭지 못하다고 따지는 것, 다시 말해서 사회정의는 하이에크(F. A. Hayek)가 정곡을 찌르듯이 “신기루(illusion)”일 뿐이다. 사회입법을 통한 국가의 강제는 도덕적 정당성이 없다는 말이다. 폭력이나 도둑질, 사기 등으로 돈을 벌지 않은 이상, 사법규칙으로 구현된 정의의 규칙을 지키면서 돈을 벌었다면 이를 강제로 정부가 관리운영할 이유가 없다. 이를 관리운영한다면 애초에 지켰던 정의의 규칙이 정의롭지 못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결국 사회정의 또는 분배정의는 사법규칙은 정의롭지 못한 것이기 때문에 사법을 없애야 한다는 결론을 피할 수 없다. 그 결과는 공법적 사회입법이 지배하는 끔찍한 사회이다.
서민층 구제를 위한 사회입법의 함정
정부는 서민층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다 할 수 있다는, 그리고 제거할 수 없다고 여길 수 있는 서민층의 불만은 없다는 믿음으로 서민정책을 토해내고 있다. 이런 믿음이야말로 치명적 결과를 야기하는 지적 자만이 아닌가. 여기에 서민층을 위한 사회정책의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
그 함정을 이해하기 위해서 두 가지 점에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다. 첫째로 특정한 개인이나 그룹의 불평불만을 해소하기 위해 정부가 정책적 조치를 취하면 다른 곳에서 새로운 불평들이 연속적으로 생겨난다는 점이다. 둘째로 정부의 정책적 조치는 항상 예상하지 못한 결과를 야기하고 이 결과를 제거하기 위해 취한 정책은 또 다른 문제를 야기한다. 규제는 규제를 낳고 그 규제는 또 다른 규제를 낳는다는 말이 그래서 생겨났다.
저소득층의 자활을 위한 정부주도 금융상품 공급에서 한 금융상품이 나오고, 이 상품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계층을 위해 새 금융상품이 또 나오고, 여기서도 소외된 사람의 불만을 해소하기 위해 서민대출이 확대되고 있다. 미소금융과 그 변형, 햇살론, 희망홀씨 등이 이 같은 이유로 고안된 금융 대출상품이다. 이런 식으로 가다보면 금융질서 자체가 무너질 수도 있다. 이것이 서민층 구제를 위한 사회정책의 함정이다.
또 하나의 함정이 기다리고 있다. 즉, 대출자금으로 벌이는 사업이 성공한다는 보장도 없다. 실패하여 원금과 이자를 못 갚는다면 어처구니없게도 그 책임은 납세자가 진다. 더구나 서민정책의 대부분은 정부지출의 대폭적인 증가를 야기하고 이것은 상당부분 나랏빚으로 연결된다.
적정이자율, 적정농산물가격 또는 적정 등록금인상률을 산정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자의적인 가격규제는 시장의 행동조정을 교란하여 자원배분이 왜곡된다는 것도 사회정책의 함정이다.
서민정책의 함정에서 저성장-고실업이라는 곤경에 처했던 대표적인 경제가 독일과 스웨덴 경제였다는 것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 저소득층을 보호하는 정책이 보호받을 저소득층의 확대를 야기했기 때문이었다.
최근의 미국 발 금융위기의 중요한 원인도 저소득층의 주택소유를 위한 담보대출정책이었다는 것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1970년대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구제금융으로 연명할 정도로 영국경제를 파국으로 몰아갔던 것도 친 서민층 정책의 탓이었다는 것도 주지해야 한다.
사회적 시장경제가 아닌 자유시장경제를!
서민층의 삶의 개선을 목적으로 하는 사회정의는 신기루이다. 사회정의를 위한 정부의 강제는 도덕적 정당성도 없고, 서민층을 위한 보호와 규제는 성공할 수도 없고 오히려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한다. 물론 노약자나 신체적 정신적 무능력자 등의 삶을 보살피는 정부의 '서비스 기능’을 위한 사회입법은 필요하다.
MB 정부는 중소기업과 대기업의 상생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상생관계의 정립에서도 정부가 할 일은 많지 않다. 시장의 자생적 힘에 맡기는 것이 더욱 효과적이다. 중소기업이 대기업에 대한 지나친 예속에서 벗어나는 것도 중소기업 스스로 할 일이다. 중소기업에 대한 보호는 오히려 경쟁력 약화만을 초래할 뿐이다,
중소기업의 문제든, 서민층의 문제든, 해결책은 자유시장경제이다. 이것이 국민 모두에게 지속가능한 번영을 보장한다는 것은 여전히 타당하다. 헤리티지 재단이 매년 발표하는 경제자유지수가 이를 입증한다. 경제자유가 높을수록 경제적 번영이 크고 서민층의 소득도 증가한다는 것을 또렷하게 보여주고 있다. 우리나라는 경제자유도가 세계랭킹 30위이다. 그러니까 2만 달러의 일인당 소득 수준도 세계랭킹 30위 정도이다.
MB 정부는 집권초기의 규제개혁을 일관되게 지속적으로 밀고 나갔어야 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노동부분은 물론 의료서비스 부문을 비롯하여 기업부문 등 수많은 필요한 규제개혁을 중단하고 말았다. 진정으로 서민층의 이익을 증진할 절호의 기회를 잃었다.
친서민정책에 몰두하는 정부아래에서 도대체 언제 일인당 소득 3만달러의 선진국 수준에 도달한단 말인가? 한국경제가 수년 동안 2만 달러의 수준에서 오락가락하고 있으니 답답하기 그지없다. '잃어버린 5년’이라는 신조어가 이명박 정부에게 따라다닐지도 모른다.
민경국 / 강원대학교 교수, 경제학
저자소개: 민경국 교수는 독일 프라이부르그대학교에서 경제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한국하이에크소사이어티 회장을 역임했다. 현재 강원대학교 경제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한국제도경제학회 부회장 겸 편집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자유주의와 시장경제’, '하이에크, 자유의 길’, '자유주의의 지혜’ 외 다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