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판 짜는 정계
5·30선거 결과 국회의원 재당선율이 15%에 불과하고 원내 다수의석을 차지했던 정당들에 소속된 당선자수가 빈약하게 되자, 각 정파들은 국회운영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다시 말해서 원내다수당이 되기 위해) 국회의원 모으기 경쟁을 벌였다. 이런 경쟁에 앞장선 것은 말할 것도 없이 민국당과 국민당이었다. 민국당과 국민당은 126명이나 되는 무소속 당선자들을 상대로 치열한 포섭공작을 전개했다.
제헌국회의 제1당이었던 민국당은 5·30선거에서 23명의 당선자를 확보했다. 민국당은 무소속 당선자들 가운데서 주로 민족연맹(약: 민련) 계통의 의원들을 상대로 포섭공작을 전개했다. 민련계 당선자들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은 원세훈과 윤기섭이었다. 민련계 포섭공작은 민국당의 신익희파가 적극적으로 나섰고, 민국당의 김성수파는 그에 소극적이었다. 민국당은 원세훈과 윤기섭 등을 포함한 민련계와 한독당계의 당선자들을 포섭하기 위해 민련과 합당하는 것도 추진했다. 그러나 민련의 지도자 김규식은 민련과 민국당의 성향이 판이하다는 점을 들어 합당에 반대했으며, 그에 따라 원·윤의 민국당 참여는 무산되었다.
제헌국회의 제2당이자 대표적 여당이었던 국민당은 5·30선거에서 25명의 당선자를 확보했다. 국민당은 무소속 당선자들 가운데서 조소앙과 안재홍으로 대표되는 반공 중도파 노선의 당선자들을 포섭하고자 했다. 국민당은 그들을 포섭하기 위해 조소앙의 사회당 및 안재홍의 신생회와 국민당의 합당을 추진했다. 국민당 혁신파가 추진한 그러한 합당 작업이 어느 정도 진전되고 있을 때, 국민당 간부층이 국민-사회-신생 합당이 이루어지더라도 ‘대한국민당’이라는 당명은 반드시 존속시켜야 한다고 나섰다. 그렇게 되면 조소앙과 안재홍이 생각하는 동등한 합당이 아닌 흡수합당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조·안이 그에 반대하여 그들의 국민당 참여가 무산되었다.
이처럼 민국당과 국민당의 무소속 포섭공작이 큰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무소속 당선자들은 그들대로 새로운 단체를 만들기 위한 공작을 전개했다. 당시 무소속은 3개 부류로 분류될 수 있었다. 과거 중간파 노선을 취했던 중간파 무소속, 민국당이나 국민당 등의 당원이면서 소속 정당의 공인후보(공천후보)가 되지 못하여 무소속으로 출마했다가 당선된 당적 보유 무소속, 중간파 노선도 취하지 않았고 어느 정당의 당적도 가지지 않은 순수 무소속 등이다.
무소속 3개 부류 가운데, 중간파 무소속은 조소앙 안재홍 원세훈 윤기섭을 중심으로 연대하여 행동통일을 모색했다. 이들은 중도노선의 새로운 정당의 창당도 고려했다. 당적 보유 무소속은 대부분이 원래의 당으로 되돌아갈 태세를 보였다. 순수 무소속에 속하는 곽상훈 김동성 김광준 오위영 박순천 윤길중 조헌영 등은 무소속 구락부를 만들어 독자적으로 활동하려 했다.
국민당과 마찬가지로 이승만을 추종하면서도 국민당과는 당을 같이 하려 하지 않는 세력들은 또 그들 나름대로 단체를 만들려 했다. 독촉국민회계 대한청년단계 조선민주당계 당선자들은 국민당의 정치노선에 불만을 가지고 있으면서 국민당과 합당하는 것을 회피했다. 이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자기들끼리 정치단체를 만들고 또 무소속을 포섭해서 독자적 단체로 활동하고자 했다.
한편, 정치노선이나 사상적 경향에 따른 군집과는 달리 종교나 출신지역을 중심으로 단체를 만들려는 움직임도 있었다. 예를 들면, 정일형 황성수 이종현 등 기독교 신자 의원들은 35명에 달하는 기독교 신자 의원들을 묶어서 기독교 사회당을 만들려 했고, 장택상 이갑성 등은 영남출신과 재경 기업인 출신 의원들을 모아서 영우회라는 단체를 조직하려 했다.
이처럼 여러 정파가 전개하는 국회의원 모으기 공작은 두 가지 당면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국회 정·부의장 선거에 자기들이 지지하는 인사를 당선시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국회법에 정해진 단체교섭회(요즈음 용어로는 교섭단체)를 구성하기 위해서였다.
정·부의장 선거와 조봉암의 급부상
제2대 국회는 1950년 6월 19일 개원되었다. 오전 10시에 임시회의가 소집되어 최고령자인 오하영의 사회로 정·부의장 선거에 들어갔다. 1명의 국회의장과 2명의 부의장을 선출하는 이 선거는 향후 한국정계의 향방을 점칠 수 있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국회의장 선출과 관련하여 각 정파는 자기들이 지지하는 후보자를 당선시키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했다. 중간파 무소속은 조소앙을 지지했다. 순수 무소속 중에는 오하영 지지자가 많았고, 이갑성 지지자와 신익희 지지자도 약간 있었다. 국민당은 조소앙을 지지하는 파와 오하영을 지지하는 파로 나누어져 있었다. 국민당 혁신파는 조소앙을 지지했고, 당명 고수파(간부층)는 오하영을 지지했다. 국민당의 일부 의원들은 신익희가 민국당을 탈당한다면 신익희를 의장으로 지지하겠다는 입장을 취했다. 대한청년단계는 이승만을 추종하고 민국당을 반대하면서도 국회의장에는 신익희를 지지했다. 민국당은 신익희를 전폭적으로 지지했다. 민국당 내 한민당 계파는 신익희 계파와 당 주도권을 놓고 갈등을 빚고 있으면서도 국회의장 선거에서만은 신익희를 지지했다.
각 정파의 입장을 고려할 때, 국회의장 선거는 신익희 조소앙 오하영 3인 각축전의 양상을 나타냈다. 신익희는 의원들의 민국당에 대한 저항감이 강하여 자신의 국회의장 당선에 민국당 소속이라는 점이 지장을 주게 된다면 민국당을 탈당할 수도 있다는 입장을 취하면서 적극적으로 득표활동을 전개했다. 그에 반해 조소앙은 국회의장직을 차지하는데 적극성을 보이지 않았다. 오하영은 3·1운동의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이라는 점 이외엔 정치적인 업적이 별로 없는데다가 나이가 많아서 의원들을 끌어들이는 힘이 부족했다.
부의장 선거와 관련하여 중간파 무소속은 부의장에 안재홍 윤기섭 원세훈 등을 지지했다. 순수 무소속 가운데 영남출신 의원들은 장택상을 지지했다. 국민당 혁신파는 안재홍을 지지했고, 당명 고수파는 조봉암을 지지했다. 민국당은 부의장 선거에서 신익희 계파와 한민당 계파가 분열되었다. 신익희 계파는 지청천을 지지하고 한민당 계파는 김용무를 지지했다. 영우회 소속 영남출신 의원들과 일부 호남출신 의원들은 장택상을 부의장으로 밀었다. 겉으로 거명되는 빈도를 놓고 보면 부의장에는 안재홍, 지청천, 윤기섭, 원세훈 등 4인이 유력시 되었다.
국회 정·부의장 선거에 대해 대통령 이승만은 방관자적 태도를 취했다. 당시 신익희는 이승만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취했고, 조소앙 오하영 안재홍 등은 이승만에 우호적인 입장을 취했다. 장차 국회가 이승만의 통치와 정치적 행보에 지장을 주지 않도록 하려면 자기에게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는 신익희를 낙선시키고 자기에게 우호적인 입장을 취하는 조소앙이나 오하영 혹은 안재홍을 국회의장 자리에 앉히는 것이 필요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자기를 지지하는 국회의원들의 표를 조소앙이나 오하영에게 몰아주도록 하지 않았다. 당시 이승만에 대해 우호적인 입장을 취하는 국회의원들은 여러 단체에 분산되어 있었지만 그들을 모두 합하면 그 숫자가 상당히 많았다. 때문에 이승만이 국회의장 선거에 개입하여 조소앙이나 오하영을 당선시키려 하면 충분히 당선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이승만은 삼권분립의 민주주의 원칙을 존중해서 입법부 내부의 일에 행정수반이 개입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의장선거는 2차 투표까지 갔다. 1차 투표에서는 신익희 96, 조소앙 48, 오하영 46, 이갑성 11, 안재홍 3표가 나왔다. 과반수 득표자가 없어서 2차 투표에 들어갔다. 2차 투표에서는 신익희 109, 조소앙 57, 오하영 46, 이용설 1표가 나와 과반수 득표를 한 신익희가 당선되었다. 의장선거 결과는 신익희 지지 정파의 응집력이 강하다는 점과 반 신익희 파는 조소앙과 오하영 중에서 단일후보를 만들 수 없을 정도로 강하게 분열되어 있다는 점이 드러났다.
부의장선거에서는 일반의 예상과 전혀 다른 결과가 나타났다. 첫 번째 부의장선거 1차투표에서는 장택상 41, 조봉암 37, 조소앙 28, 이갑성 26, 안재홍 14, 조헌영 11 기타 산표로 나왔다. 장택상과 조봉암이 조소앙 지청천 안재홍 이갑성 등을 제치고 1, 2위 득표를 한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2차 투표에서는 장택상 69, 조봉암 57, 조소앙 30, 이갑성 22, 안재홍 10, 지청천 6 등으로 나왔다. 당선자가 없어서 장택상과 조봉암 2명을 상대로 3차 투표를 실시한 결과 장택상 104, 조봉암 96이 되어 장택상이 당선되었다. 두 번째 부의장 선거도 3차 투표까지 갔다. 조봉암과 지청천 2명을 상대로 한 3차 투표에서 조봉암 104, 지청천 81로 조봉암이 당선되었다.
부의장 선거에서 당선이 유력시 되던 다른 사람들을 제치고 예상되지 않던 장택상과 조봉암이 당선되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었다. 특히 무소속에다가 돈도 없으며 표면상 어떤 유력한 정파의 지지도 받지 못한 조봉암이 부의장에 당선된 것은 더욱 놀라운 일이었다. 예상을 깬 조봉암의 부의장 당선은 장차 조봉암이 한국 정계에서 돌풍을 일으킬 가능성을 시사했다. 부의장에 당선된 조봉암은 지도자급 정치인으로 급부상했다.
전체적으로 국회 정·부의장 선거 결과는 2대 국회 임기 중 국회와 이승만 간의 관계가 제헌국회 때보다 더욱 대립적일 것임을 예고했다
개원 6일 만에 6·25전쟁
정·부의장 선거를 마친 2대 국회는 오후에 정식으로 개원식을 거행했다. 국회는 개원했지만 상임위원회는 구성되지 못했다. 국회법에 교섭단체에 따라 상임위를 안배하기로 되어 있는데 교섭단체들이 등록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국회는 상임위원회를 구성하지 못한 채 20일부터 본회의를 진행했다. 본회의는 26일까지 교섭단체를 국회사무처에 등록하도록 결의했으며, 쌀값대책, 귀속재산경매, 광목경매, 비료배급 등에 관한 당면 민생문제들에 대한 토론 및 정부 답변 청취를 진행했다.
국회가 이처럼 국회 문제와 당면 민생 문제들에 매달려 있는 동안 38선에서는 긴장이 고조되고 있었다. 북한은 6월 25일을 전면 공격일로 정해놓고 대한민국의 방어태세를 흐트려놓기 위한 일련의 평화공세를 전개했다. 6월 7일부터 평양방송을 통해 남북한 총선거를 실시하여 통일정부를 수립하자고 제의하는가 하면, 서울에서 복역 중인 남로당 간부 김삼룡과 이주하를 북한에 억류 중인 조만식과 교환하자고 제안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김삼룡 이주하를 조만식과 교환하자는 제의에 응하여 38선에서 교환을 위한 북한측의 조치를 기다렸으나 북한은 이유 설명 없이 교환을 무산시켰다. 대한민국 공보처는 23일 서울중앙방송을 통해 26일 오후 2시까지 38선 여현역 근처의 지정된 장소로 조만식과 그의 장남을 보내면 곧장 김삼룡과 이주하를 북으로 보내주겠으며, 북이 그에 응하지 않으면 북한이 교환의사 없이 장난을 친 것으로 간주하겠다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북한은 26일에 조만식을 보내는 대신 25일 새벽 5시부터 38선 전역에서 남침을 감행했다. 그날 오후에는 북한 전투기 4대가 서울 상공에 날아와 김포비행장과 여의도비행장에 기총사격을 가하였다.
26일 오전 11시부터 국회는 본회의를 열었다. 회의에는 대통령 국방장관 내무장관 군수뇌부가 출석했다. 비밀리에 진행된 이 회의에서 행정부측은 전황을 설명했다. 행정부측의 낙관적인 전황 설명 때문인지 국회의원들은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국회는 이날 오후 본회의에서 ‘미국 대통령과 의회에 보내는 호소문’, ‘유엔총회에 보내는 메시지’, ‘국회 비상대책위원회 설치 결의’ 등을 채택했다. 국회가 이러한 결의를 채택하는 동안 전황은 이미 회복불가능하게 악화되고 있었으며, 북한군은 서울에 인접한 문산과 의정부까지 진출했다.
2대 국회 원내 교섭단체 대표들은 전쟁으로 서울이 적에게 함락될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않으면서 이날 사무처에 교섭단체 등록을 마쳤다. 등록을 마친 교섭단체는 민주국민당, 대한국민당, 민정동지회, 무소속구락부, 국민구락부 등 5개였다. 무소속 구락부는 순수 무소속만으로 구성되었으며 조소앙 안재홍 원세훈 윤기섭 등을 중심으로 한 중간파 무소속은 교섭단체를 구성하지 않았다.
국회는 이날 오후 4시 산회했으며, 국회의원들은 내일 국회 본회의에 참석할 것을 예상하며 귀가했다. 그러나 27일 국회는 열리지 않았다. 공식적으로 휴회를 결의한 바도 없었고, 행정부로부터 정부피난에 대한 공식통보도 없었는데 국회의원들은 국회의사당으로 나오지 않았다. 전날 등록한 교섭단체에 따라 상임위원회를 구성해보지도 못하고 2대 국회는 기능마비상태에 빠진 것이다. 날쌘 의원들은 이미 서울을 떠났고, 일부 의원들은 개인 채널을 통해 수소문을 해가며 피난 갈 준비를 하기에 바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