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인간으로서 배워야 할 건 유치원 때 다 배운다.'고 말하는데 알고 보면 그건 '다른 이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능력'을 습득한다는 뜻, 인간이 人間임을 배운다는 뜻이다. 빨간 불일 땐 건너면 안 돼. 왜일까? 사고가 날 수도 있고 교통질서가 교란돼선 안 되니까. 아무리 화가 나도 다른 아이를 때리면 안 돼. 왜일까? 그러면 그 아이가 아파하니까.
그런데 모르는 사이에 유치원의 커리큘럼이 변한 걸까. 아니면 인류의 두뇌가 그새 진보해서 미성년자들의 습득능력이 향상된 걸까. 요즘 학생들은 예상보다 훨씬 빠른 시점에 '다른 사람 입장에서 생각하기' 진도를 떼고 자기중심의 명명백백한 권리와 자유를 쟁취하려 분연히 일어선다.
'두발 자유', '체벌 금지' 등의 내용을 담고 있는 경기도 학생인권조례를 원안대로 통과시키려 애쓰는 학생들에게 <한겨레21>을 포함한 각종 언론도 초미의 관심을 표명한 최근, 학생들의 사고가 이 정도로 성숙된 거라면 해 달라는 대로 다 해 주고 투표권도 줘도 되는 게 아닐까 생각하게 되지만, 잠깐만. 사회의 다른 한 구석에서는 또 다른 의미의 조숙함이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만든다.
좋아하는 연예인에게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손목을 긋는 학생들. 왜 손목을 긋느냐 하면 그래서 나온 피로 혈서를 써야 충격적이기 때문이다. 피로 쓴 대사조차도 자의식과잉의 극치다. '넌 나 없인 안 돼', '무조건 돌아와' 류의 메시지. 결국 세상이 자기중심으로 돌아가야 직성이 풀리는 것뿐이다. "우리 집에 있는 건 다 내 꺼야!"의 중고딩버전에 해당하는 것임을 생각하면 새로운 세대의 시대정신이 보이는 듯도 하다.
다시 학생인권의 문제로 돌아가면 2009년 5월 광주의 한 여고생이 자살을 했다. 이유는 자율학습을 빼먹었다는 이유로 발바닥을 110대 맞았기 때문이다. 이걸 가지고 자살한 학생도 문제라고 보는 시선 따위는 이미 이 나라에 없다. 여학생의 발바닥은 여학생 것이니 누구도 110대를 때릴 순 없는 것이고, 결국 그녀가 자살을 하게 만든 건 체벌 때문이니 교사를 제재해야 한다고 보는 1차원적 의견뿐이다. 연예인들도 지나치게 매력적이어서 보는 이로 하여금 손목을 긋도록 만들고 있는데 어느 정도라도 규제를 해야 하는 건 아닌가?
자기중심으로 돌아가야 만족하는 아이들과 거기에 맞장구 쳐 주는 어른들. 허울 좋은 핑계를 내세우고는 있으나 결국엔 '싫은 건 죽어도 안 한다.’는 단순한 사고방식일 뿐이다. 학교는 학생들의 것이니 뜻대로 하게 해 달라고 드라마틱한 대사를 내뱉지만 학교가 어째서 학생들의 것인가? 학생은 학교의 주인이 아니다. 다만 주인공일 뿐이다. 배우가 감독과 협조를 할 수는 있겠지만 메가폰에 대한 권리까지 주장한다면 더 이상은 배우도 감독도 아닌 것이다.
자유를 확장시킨다면 그 시선엔 편협한 자기중심주의를 넘어선 균형 감각이 동반돼야 한다. 약자(弱者)로 이름이 났을 뿐 사실은 별로 약자가 아닌 학생들의 시선에서만 문제를 해석해선 결론도 빵꾸똥꾸 수준에서 벗어날 수 없다. 학생이 어른들을 평가하고 고르는 만큼 어른들도 학생들을 평가하고 고를 수 있는 시스템, 즉 양방향의 선택(자유) 확장만이 현재 한국의 교육문제를 완화시킬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대안이다.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들이 학교를 만든다면 거기에도 다양한 개성이 드러날 수밖에 없다. 못지않게 다양한 학생들이 자신에게 맞는 학교를 찾아나간다. 세상에는 누가 머리에 손만 대도 뜨악하는 사람도 있지만, 자기 미래를 향상시켜줄 수 있는 학교라면 3년 동안 헤어스타일 포기하고 몇 대 맞더라도 기꺼이 선택하는 학생도 있다. '선택의 자유'라는 보다 큰 관점에서 교육문제를 바라보는 사람은 몇이나 되는가?
당사자들끼리 각자 활발하게 교류하고 입장을 맞춰가며 해결할 수도 있는 문제를, 단지 지고 있는 농구팀을 응원하는 기분으로 학생편파적인 입장에서만 고려한다면 그것도 그 나름의 획일화가 아닐지. 그런다고 아이들이 만족한다는 보장조차도 없다. 해리라고 초장부터 '우리 집에 있는 건 다 내 꺼'라고 말한 건 아니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