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스트 사태와 시사점
올 들어 카이스트에서는 학생 4명, 교수 1명이 자살했습니다. 일부 교수와 학생들은 징벌적 수업료제, 전 강의 영어수업 등을 도입해 학생들의 공부부담을 높인 서남표 총장에게 그 화살을 돌렸습니다. 이 때다 싶었는지 좌파 언론과 국회의원들이 가세하고, 각종 진보단체들까지 달려들어 그야말로 카이스트 사태로 발전하였습니다. 전국교수노조는 서총장의 사퇴를 요구하였고, 국회 교육과학기술위원회는 서총장을 불러 책임을 추궁했습니다. 또한 그동안 대학 개혁의 모범이라며 카이스트를 치켜세우던 교과부 장관도 서총장을 냉랭하게 대했습니다.
바로 서남표 총장이 추진하던 개혁의 핵심인 '경쟁 지향적인 정책’이 이번 카이스트 사태를 불러왔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최고의 대학에서 공부와 연구밖에 몰랐던 사람들의 땀과 눈물은 짐작이 가지만,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밖에 없었을까 하는 안타까움이 매주 큽니다. 카이스트는 내부적으로 풀어야 할 갈등과 숙제가 많이 남아 있긴 하지만, 사태는 진정 국면에 접어들었고 외부의 관심은 서서히 가라앉고 있습니다.
이제는 카이스트 사태의 원인이 정말 '경쟁’ 때문이었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세계 최고를 목표로 하는 인재가 되기 위해서는 경쟁이 불가피하기 때문에 과도해 보이는 학업량과 심적 스트레스를 견뎌내야 한다는 주장과 서남표 총장의 경쟁방식은 학생들을 서열화해서 낙오자를 만들고 오히려 학업에 대한 동기부여를 약화시킨다는 주장이 맞서고 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이번 카이스트 사태가 '자살을 정당화하는 분위기를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언론, 시민단체, 국회가 나서서 징벌적 수업료, 영어수업 등 과도한 학업에 대한 부담이 학생들을 죽인 것이라고 서총장을 공격했습니다.
이번 사태에서 어느 누구도 “아무리 힘들어도 자살은 정당화 될 수 없다”고 말하지 못했습니다. 단지 “얼마나 힘들었으면 죽었을까”하는 동정어린 말만 여기저기서 계속되었습니다. 많이 배웠다는 어른들이 '힘들고 어려운 일에 부딪치면 자살 가능, 그리고 그것은 사회 탓’ 이라고 TV, 신문, 인터넷을 통해서 떠들고 다녔습니다. 그것을 본 사람들, 특히 자라나는 청소년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카이스트의 개혁을 비판하는 사람들의 말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카이스트 학생 4명은 힘들고 어려운 일에 부딪쳐서 자살을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힘들게 한 것이 카이스트 개혁이라는 것이고 그것을 밀고나가는 사람이 서남표 총장입니다. 그리고 그가 추진하는 개혁의 핵심은 '경쟁’입니다. 이렇듯 '경쟁’은 무시무시하며 사람을 궁핍하게 만들고 공포에 떨게 합니다.'
즉 '경쟁’이 이번 카이스트 사태를 불러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경쟁’이 카이스트에만 있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사회 전체의 구성원이 '경쟁’속에서 살아갑니다. 회사원, 운전기사, 환경미화원, 배달원, 의사, 변호사, 군인, 경찰, 선생, 교수, 연기자, 가수 등 모든 사람들이 각자의 분야에서, 다양한 직종 또는 다양한 사람과 경쟁하며 살아갑니다. '경쟁은 동기부여’라는 모습으로 다가오기도 하고 때론 '경쟁은 효율성’이라는 모습으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그리고 때로는 '경쟁은 어려움’라는 이름으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그럼 경쟁으로 힘들어지는 상황이 생기면 모두 죽음을 선택하는지요? 힘들다고 자살하는 것이 사회적으로 정당화되고 용인되어지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해 더 노력하고 더 열심히 일합니다. 아니면 다른 일을 찾기도 합니다. 쉬면서 재충전을 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듯 '경쟁’은 가까운 곳에서 여러 가지 모습으로 우리를 만나고 있습니다. 카이스트 총학생회에서 실시한 학생들의 투표에서도 볼 수 있듯이 서총장의 개혁에 찬성하는 사람도 있고, 반대하는 사람도 있고, 별 생각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오히려 외부의 호들갑 떠는 시선이 더 불편한 것 같은 분위기도 느껴집니다.
결국 이번 사태는 '경쟁’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닙니다. 개인의 문제에 가깝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언론매체에서는 이 사건의 단편적인 모습만을 자극적으로 보도했고, 일부 언론과 좌파단체들은 이념까지 들먹이며 카이스트 사태를 이용했습니다. 그들의 행태는 비판 받아야 마땅합니다.
<더 타임스>의 세계 대학 평가에서 카이스트의 종합 순위는 2006년 198위에서 2007년 132위, 2008년 95위, 2009년 69위로 가파른 상승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학생들의 자살에서 보듯 빛과 그림자는 늘 공존합니다. 지금 카이스트가 해야 할 일은 개혁을 지속적으로 추진하는 것 외에도, 공부만으로 학창시절을 보내온 학생들이 겪을 수 있는 정신적 위기를 적절한 상담 및 치료를 통해 극복할 수 있도록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회는 우리나라 과학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는 그들을 격려해주고, 카이스트의 모든 구성원들이 발생하는 문제점들을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기회와 시간을 주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