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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자신을 포함해서 어느 누구도 거친 경쟁을 본성적으로 달가와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생각한다. 누구나 편안함, 안전함을 선호할 것이다. 언제 해고될지 모르는 불안한 직장 생활, 언제 성적이 떨어질지 모르는 위태한 고3시절 등등 이런 강렬한 경쟁을 좋아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한 때 우리나라에서는 명문 중학교를 들어가기 위해 초등학교 학생들이 밤 늦게까지 과외 공부를 하던 시기가 있었다. 너무 어린 학생들에게 중압감을 주던 중학교 입시제도는 이후 학군제로 바뀌었다. 성적과는 상관없이 사는 동네에 따라 자신의 중학교가 결정되었다. 그러나 비록 중학교 입시 시험제도가 사라졌다고는 하지만, 초등학교에서 경쟁이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불붙는 사교육 열풍을 타고 초등학생 시절부터 공부 경쟁이 점점 뜨거워지자, 1997년부터 교육부는 초등학교에서 등위를 매기는 시험을 폐지하고 등위를 공개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점수도 알리지 않도록 했다. (현실적으로는 점수와 등위를 알려주는 경우가 많지만 원칙은 알려주지 않아야 한다.)

만약 당신이 초등학교 담임 교사라고 하자. 객관적인 점수와 등위를 공개할 수 없게 되었다면 통지표에 아이를 어떻게 평가하겠는가? 국어, 수학 등등의 분야에서 어떤 한 아이를 평가하면서 쓸 수 있는 말은 두루뭉실한 표현으로 ‘잘함’으로 표현하는 것이 가장 편할 것이다. 만약 아이의 학업 능력을 ‘노력 요함’이나 ‘부진함’이라고 평가했다고 하자. 아마 아이의 부모는 당장 자신의 아이의 점수와 등위를 알려달라고 성화일 것이다. 부모의 입김이 드센 시기에, 도대체 우리 아이가 몇 점을 받았기에 부진하다고 평가했느냐며 자료를 요구하지 않겠는가? 객관적인 점수나 등위를 공개하기 힘든 상황에서 담임 교사는 아이에 대해 평가를 솔직하게 내리기 힘들게 되었고, 자연히 별 문제가 없을 만한 (부모도 어느 정도 안심시키면서) 말이 바로 ‘잘 함’이 아닐까.

최근 어느 뉴스를 보니 초등학교 6년 내내 ‘잘 함’이라는 평가를 받은 아이들이 중학교에 놀라가서 (예를 들자면) 전교 310등이라는 (그 부모들에게는 충격적이며) 부진한 결과를 나타내자 부모들이 진작 성적을 공개하지 않은데 대해 불만을 표시하고 있다는 기사가 실렸다. 자신의 아이의 성적을 알았더라면 더 일찍 열심히 공부시켰을텐데 하는 원망일 것이다. 나는 그 기사를 보며 평등을 강조하는 좌파의 정책이란 결국 이런 비극을 낳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했다.

아이들 모두가 성적에 구애받지 않고 그저 재밌게 뛰어 놀며 인성을 기르는 초등학교 생활이 존재한다면 모두가 꿈꾸는 멋진 이상이겠지만, 현실에서는 절대 이루어 지지 않는다. 설령 정부가 나서서 성적을 감추고 시험을 치르지 않는다고 해도 말이다. 시험이 없다고 해도 아이들의 성적 차이는 반드시 뚜렷이 존재하며, 정부와 학교가 숨긴다고 해도 결국은 시간이 지나 주머니 속의 송곳처럼 드러나게 되어 있다. 물론 아이들의 성적 차이는 다수의 부모와 아이들에게 큰 스트레스가 된다. 그러나 성적 차이가 존재하기에 학생들은 더 노력하게 되고, 더 나은 교육과 취업의 기회를 위해 최선을 다하게 되고 그 스트레스 덕분에 우리의 기업들은 잘 교육된 인재를 구할 수 있다.

물론 어린 시절부터 경쟁을 유도하며 성적을 공개하는 것은 아이들의 마음에 상처를 줄 수도 있고 성적에 뒤처지는 아이들이 학교에서 주눅들게 만들 수도 있다. 그러나, 자라면서 계속 다른 학생들보다 성적이 낮은 아이들은 나름대로 전통적인 ‘공부’ 이외의 다른 분야에서 재능을 키울 수 있고, 일찍 직업을 갖고 사업을 꿈꾸는 기회를 가질 수 있다. 요즘 잘 나간다는 연예인들이나, 청과물 시장에서 자신의 가게를 갖고 성공한 사람들을 보면 대개 학창 시절 그다지 공부를 잘하지 못했다. 다소 고통스럽지만 상대적인 평가를 받았기에 다른 아이들이 잘하는 공부 쪽의 진로보다는 자신만의 남다른 끼와 재능, 사업상의 능력을 발휘할 용기와 배짱을 갖게 된 것이다.

만약 그들이 자신의 학업상 위치를 알지 못하고 부모들이 시키는대로 그럭저럭 공부만 하다가 뒤늦게 자신의 뒤떨어진 경쟁력을 깨닫게 된다면 그 얼마나 비참한 일일까. 경쟁과 그 결과를 공개하는 것은 나름 다른 재능을 가지고 태어난 아이들이 가장 효율적으로 자신의 능력을 사회에 발휘하도록 돕게 된다. 그 과정에서 생겨나는 경쟁의 고통스러움과 탈락의 고배는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받아들여야 할 과정이 아닐까 싶다.

한 때 잭 웰치의 별명은 ‘중성자탄(Neutron) 잭’이었다. 중성자탄이란 탱크나 건물 등은 손상시키지 않은 상태로 살아있는 생체만을 파괴하는 방사능 무기로서, 아마도 조직은 그냥 둔채 하위 일부 노동자를 지속적으로 해고했던 그의 경영을 비판하는 말일 것이다. 그러나 잭 웰치는 부진한 업무 성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별 말없이 3-40대까지 노동자를 끌고 가다가 회사가 부진해지고 나서야 어쩔 수 없이 해고하는 것(이렇게 되면 한창 아이들을 키우고 교육비를 대야할 가장들은 재취업의 기회마저 잃는다)보다 일찍 젊을 때 자신의 능력에 맞는 곳을 찾아가도록 해고하고 재취업을 돕는 것이 낫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초등학교 아이들을 경쟁으로 내모는 일이 다소 안타까워 보일 수 있지만, 초등학교부터 평생동안 이어지는 강렬한 경쟁과 경쟁의 결과를 제대로 아는 일은 아이의 재능을 알아내고 아이가 최선의 노력을 다하게 만드는 거의 유일한 힘이 된다. 다소 고통스러울지 모르지만 그 고통을 피하기만 한다면 6년간 ‘잘 함’이었지만 전교 310등이 된 아이의 부모가 될 것 같다.

어제 당선된 서울시 교육감도 이런 면에서 아이들이 다양한 분야에서 경쟁하도록 장려하고 그 결과를 공개하고 칭찬해주는 일을 두려워 하지 않길 기대해 본다.

Posted by 자유기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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