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기업은 무너지지 않는다.’

 

80~90년대 재계가 가장 신봉해왔던 말입니다. 정부는 기업규모가 크면 경제에 미칠 영향을 고려해 최악의 상황을 막았습니다. 자금줄 역할을 하거나, 세무회계 비리를 눈 감아 주기도 했습니다. 수 십 개의 계열사를 거느린 재벌그룹의 총수가 구속되거나 기업이 공중 분해되는 사례는 아주 드물었습니다. 그래서 나온 말이 대마불사였습니다.

* 대마불사(大馬不死) : 망하기 힘들 정도로 너무 커져버렸다. (Too Big To Fail)

 

'큰 기업도 무너질 수 있다.’

 

하지만 재계가 신봉하던 대마불사의 신화는 건국 이래 최대 위기라 불린 1997년 외환위기 당시 무너져 버립니다. 대마불사로 여겨지던 재벌이 하나 둘 무너졌습니다. 당시 30대 재벌 가운데 10여개의 재벌이 해체되었습니다. 살아있는 것이 경제에 더 악영향을 준다고 본 것입니다. 이것이 대마불생입니다.

*대마불생(大馬不生) : 살아남기 어려울 정도로 너무 비대해졌다. (Too Big To Live)

남은 재벌들도 이웃집이 공중분해 되는 것을 보면서 혹독한 시련의 시간을 맞았습니다. 부채비율을 줄이고, 거미줄 같은 지배구조를 개선하는 노력을 해야 했습니다. 정부는 이들 기업에 대한 규제를 강화하면서 군살을 빼기 위한 강제 다이어트에 돌입했습니다.

사실 경제 환경의 변화를 감지하지 못한 기업은 언제든지 무너졌습니다. 재벌들의 이야기를 잠시 살펴보고 가겠습니다.

1960년대 경제개발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재벌들은 빠르게 성장했습니다. 1964년 당시 10대 재벌은 삼성, 삼호, 삼양, 개풍, 동아, 락희, 대한, 동양, 화신, 한국 글라스였습니다. 일제 강점기시대에 축적한 자본을 바탕으로 재벌이 된 개풍, 대한, 화신 등의 기업들은 급변하는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빠르게 사라졌습니다.

1970년대로 넘어오면서 10개 기업집단 중 삼양, 개풍, 동아, 동양, 화산, 한국글라스가 10위권에서 밀려났고, 현대, 한국화약, 동국, 효성, 신동아, 선경, 한일합섬이 진입했습니다. 정부의 지원에 힘입어서 건설과 중화학 공업이 급속도록 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1980년대 들어서는 동국, 대한, 신동아, 한일합섬이 밀려나고 대우, 쌍용, 한진, 대림 등이 새로 진입했습니다. 사업구조를 3차 산업까지 넓힌 기업들이 살아남았습니다.

1987년부터는 공정거래위원회가 매년 30대 기업집단을 지정하여 관리하기 시작했습니다. 재벌들의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엄청나게 컸기 때문입니다. 1997년 외환위기를 전후해 30대 그룹에서 대우, 쌍용, 기아, 한보, 한라, 동아, 고합, 아남, 진로, 신호, 해태, 거평 등이 매각되거나 정리되었습니다.

1960년대부터 현재까지 그 명성을 유지하는 기업은 삼성과 LG가 유일합니다. 왕자의 난으로 분열되기는 했지만 고 정주영 회장의 현대와 2003년에 분식회계 사건으로 큰 곤욕을 치른 SK도 포함이 가능할 것입니다. 그동안 숱한 기업이 경제 환경의 변화를 겪으면서 망하고, 이름이 바뀌고, 다른 기업에 매각되었습니다. 경쟁력이 있는 재벌만 살아남은 것입니다.

급변하는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는 기업은 망하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우리나라만 봐도 시기별로 기업들의 부침이 심했습니다. 세계적으로 보아도 1995년 상위 50대 기업 중 현재 남아있는 기업은 20여개에 불과합니다. 덩치가 크다고 무조건 좋은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왜 대마불사의 논란은 수그러들지 않고 여전히 사람들의 입에 오르고 내리는 것일까요? 대우그룹과 현대그룹의 사례를 살펴보겠습니다.

1998년 12월 대우그룹은 41개 계열사를 10개로 감축하는 구조조정 세부계획을 발표했습니다. 대우그룹이 해외 채권자들의 극심한 상환압력과 자금 흐름의 급격한 유동성으로 위기에 처하면서 내놓은 방안입니다. 1999년 7월 김우중 회장은 자신의 전 재산을 포함한 10조원의 자산 담보제공으로 위기 극복방안을 내놓게 됩니다. 채권은행단은 99년 8월 대우그룹에 대한 워크아웃을 결정했고, 두 달 뒤 김 회장은 중국 옌타이 대우자동차 부품공장 준공식에 참석한 후 잠적했습니다. 대우그룹은 해체되고 계열사는 쪼개지고, 합쳐지고, 매각되고, 퇴출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대우사태는 그동안 재계가 믿던 대마불사의 신화를 깨드린 대표적인 사건이 되었습니다.

현대그룹은 2000년 왕자의 난을 계기로 그룹의 유동성 문제가 불거졌습니다. 다음 해 대북송금과 비자금 사건으로 그룹의 핵심 계열사인 현대건설은 1차 부도를 맞게 됩니다. 당시 현대건설은 빚이 자산보다 9천억 원 이나 많은 자본 잠식 상태의 회사였습니다. 2001년 3월 29일 정부와 채권단은 현대건설에 2조9천억 원을 지원하기로 결정했습니다. 현대건설은 채권단의 손에 넘어갔지만, 현대그룹은 살아남았습니다.

두 그룹이 최악의 상황까지 가게 된 것은 사실 비슷합니다. 채권단은 자구계획만 믿고 계속 돈을 지원해주었으며, 회계법인은 부실을 눈감아 주었습니다. 경영진은 기존의 정경유착 고리에 의존했으며, 정부는 최악의 상황에 오기까지 근본적인 처방을 기피했습니다.

 

“그럼 어쩌란 말이냐”

 

정부가 가장 하고 싶었던 말입니다. 재벌에 연관된 협력업체만 수 천 개가 넘을 것이고, 또한 수 십 만개의 일자리가 걸려있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국민’기업의 이미지까지 더해져서 재벌의 문제를 쉽게 결정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여담이지만 1997년의 기아만큼 '국민’기업의 이미지를 잘 이용한 회사가 또 있을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문제는 누구는 지원이 끊겨서 죽었고, 누구는 지원을 통해서 살아남았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정부와 채권단은 재벌의 지원에 관한 일관된 원칙이 없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같은 정권 하에서 한 그룹은 채권의 회수 및 연장 불가 결정을 하고, 다른 한 그룹은 자금 지원을 통해서 살려주었습니다. 물론 부실규모의 차이는 있었겠지만, 국민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똑같이 큰 회사였습니다. 한 곳은 너무 커서 망하고, 한 곳은 너무 커서 살았습니다. 한 곳은 유동성 위기에 대해 언론을 통해서 계속 부각시키고, 한 곳은 유동성 위기가 별로 없다고 진정시켜주었습니다. 그 기준이 무엇이었을까요? 당시 정권의 실세들은 알고 있겠지요.

최근 금호아시아나그룹의 유동성 위기로 인한 구조조정을 진행 중에 있습니다. 그런데 구조조정이 지지부진하다는 이야기가 참 많이 나왔습니다. 부실경영의 책임을 지기는커녕 보유 주식을 내다파는 행태를 보여 큰 비난을 받았습니다. 결국 금호 오너일가는 채권단과 사재출연에 합의하면서 한시적인 경영권을 보장 받았지만, 여전히 재계가 대마불사의 신봉자라는 이미지를 각인시키는 사건이었습니다.

2008년 금융위기로 인해 158년 역사를 자랑하는 세계 4위의 투자은행 리먼브라더스는 미국 정부의 외면으로 문을 닫았습니다.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했던 미국 자동차업체 GM이 감원과 공장 폐쇄 등을 통해 반쪽짜리 회사의 운명을 받아들인데 이어, 시티그룹도 미국 정부로부터 자본확충판정을 받은 이후 사업부문 분리와 매각 등의 수순을 밟고 있습니다. 세계 최대의 보험사 AIG는 정부로부터 구제금융을 받는 처지로 전락했습니다.

이번 금융위기는 미국 월스트리트에서 대마불사의 신화도 깨질 수 있다는 점을 분명하게 보여줬다는 점에서 큰 교훈을 남겼다고들 합니다. 그래서 미국에서조차 부실 경영의 결과를 국민혈세로 막아주던 관행도 종지부를 찍게 됐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큰 공적자금이 지원된 금융기관이 엄청난 보너스 파티를 벌였다는 보도는 미국 국민들을 허탈하게 하고, 지도자를 열 받게 하였습니다.

세계적으로도 큰 금융기관의 대마불사에 대한 논의가 계속되는 분위기입니다. 이명박 대통령도 다보스포럼 특별연설에서 대규모 금융기관의 대마불사에 대한 개혁을 강조했습니다. 오바마 대통령은 금융기관에 대한 규제를 강화하겠다고 공언하고 있습니다.

사실 부실한 기업은 시장에서 퇴출되는 것이 원칙입니다. 이런 기업들이 퇴출되지 않으면 건전한 기업까지 자금난을 겪게 됩니다. 부실기업에 대한 대출은 금융기관도 부실하게 만듭니다. 기업의 과도한 차입은 금융기관이 돈을 너무 쉽게 빌려준 측면도 있습니다. 결국 대 기업의 부실은 금융기관의 부실을 만들고, 이러한 연속된 부실함의 사회, 경제적 파장을 우려하여 정부가 공적자금을 만들어서 투입합니다. 지금껏 이런 것이 반복되어 왔습니다. 또한 정권과의 유착에 따라서 재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였습니다.

회생기미가 보이지 않는 기업, 구조조정을 지연하는 기업은 과감하게 퇴출시키는 것이 올바른 길입니다. 회생가능성이 보인다면 대주주의 책임을 묻고 경영진을 교체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최근 금호의 사례처럼 오너일가가 자구노력을 게을리 하고 자금 지원만 요구한다면 채권단은 경영진을 교체하고 일부 한계 계열사는 법정관리를 추진하는 등의 과감한 선택을 했어야 합니다. 오너의 사재출연과 주식양도를 압박하겠다며 시장에 '퇴출’ 메시지를 던지는 채권단의 어설픈 행동은 시장을 교란시키는 행동일 뿐이었습니다.

대기업의 '위기’, '퇴출’ 이란 말에 가격이 떨어지는 채권과 주식을 던진 투자자와 반대로 가격이 떨어지는 채권과 주식을 쓸어 담은 투자자가 있다면 누가 잘할 것일까요? 정부는 부실 대기업을 망하게 놔둘까요? 아니면 살릴까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정부가 죽이기도 했고, 살리기도 했으니까요.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영원한 1등은 없다는 것이고, 경쟁력이 없는 한계기업은 반드시 퇴출된다는 것입니다. 정부가 아무리 살리려 해도 시장이 가만 놔두지 않습니다. 30년 후에, 50년 후에 지금의 재벌 중 몇 개나 있을까요? 순위는 어떻게 변해 있을까요? 시간과 환경의 변화에 민감하지 못한 기업이 살아있을 수 있을까요?

지난 50년간 재계 상위에서 꾸준히 자리 잡고 있었던 기업이 삼성과 LG, 현대, SK 정도에 불과하다고 보았을 때, 다음 50년도 이들이 계속 상위에 있을 수 있을까요?

 

제가 50년 뒤에 꼭 확인해보겠습니다.

Posted by 자유기업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