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약용은 왕권 강화를 주장하였다. 강력한 왕권으로 민(民)이 소유하고 있는 토지를 다시 왕의 소유로 전환하고 분배하여 정전제를 실시할 것과 관료들의 업무실적을 철저하게 평가할 것(考績制度)을 주장하였다. 이런 주장들은 그가 왕 중심의 전체주의나 폐도정치, 혹은 법가사상 같은 주장을 했다고 이해되곤 하는 이유가 된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왕권강화 주장과 모순되는 주장을 하였다. <탕론>에서 탕왕이 폭군이었던 걸왕을 폭력에 의해서 몰아낸 행위를 그는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고대 중국에서 왕은 천(天)이 사람에게 부여한 것이 아니라 '아래서 위로’(下而上)의 선거제적 방식에 의해서 결정되었음을 주장한다.

또한 <원목>에서 그는 개인 간의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서 통치자가 출현했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牧들은 “한 사람이 다툼이 있어 찾아와 판결을 요청하면 귀찮아하며 어찌해서 이처럼 시끄럽게 구느냐하고 곡물과 옷감을 내어 받들지 않으면 몽둥이질, 방망이질로 피를 보고서야 그만둔다.”고하며 비판한다.

정약용의 이러한 民중심의 사상은 흔히 좌파사상과 비슷한 것으로 인식되곤 한다. 루소의 일반의지(General Will), 혹은 이이의 公論과 같은 민중 중심의 정치사상과 유사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민중이라는 '집단’의 정치 참여를 주장하는 루소와 이이의 사상이 각 개인의 권리 보호를 강조하는 정약용의 사상과 유사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그렇다면 왕권 강화와 민권 강화를 동시에 주장하는 그의 모순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지 영국의 사례를 통해서 생각해 보자.

이종흡은 <스코틀랜드 계몽주의와 자본주의적 사회 질서>라는 글에서 “영국 사회계약론의 전통은 자기 보존과 사유재산 같은 사적 요소를 공적 영역으로 편입시킴으로써 계몽주의의 중요한 목표를 실천한 주역이었다.”고 말한다. 즉 귀족과 피지배계급 사이의 '사적인’ 관계에 까지 법이 개입하여 적용됨으로써 개인의 사유재산권 등을 보장해주는 등의 자유주의적 과업이 성취되었다는 것이다.

영국의 사례에서 보았을 때 국가 권력 혹은 왕권 강화를 통한 엄격한 법의 적용이 사유재산제의 보장과 같은 개인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서 필요함을 알 수 있다. 정약용이 살고 있던 조선 후기의 상황은 권력을 갖고 있던 양반 관료들이 백성들의 재산을 마음대로 착취하여도 아무런 정치적 견제를 받지 않고 있었다.

아일런드는 자신이 쓴 <일본의 한국통치에 관한 세밀한 보고서>에서 19세기 말 조선의 상황을 '사법부와 행정부의 분리는 오직 형식적으로만 존재하고 법 집행은 여전히 탐욕스러운 행정 관료들을 만족시키는 주요 수단이 되고 있다. -중략- 경찰서 역시 종종 법원의 일부 기능을 침해했고 군부와 궁내부는 때때로 임의로 사람들을 체포하거나 실제로 죄수들에 대한 판결을 내리기도 했다. 한마디로 거의 모든 행정 부서가 상벌을 주었고 일반 대중을 희생하며 이 같은 권력을 항상 남용했다.’고 말한다.

정약용의 당시 현실인식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다. 주희에 의해서 처음 시행된 후 우리나라에 도입된 사창법(社倉法)을 '지배하는 자’가 官을 끼고 私를 부린 결과 국왕의 德義가 중간에서 소멸되어 버린 것이라고 비판한다. 또 “불가에서 이르는 아비지옥이란, 지옥 속에 또 무수한 지옥이 있다는 말인데 지금 사창이 이와 같은 것이 아닌가. 아, 슬프다! 누가 이 법을 만들었는가? 간사한 자이든지, 어리석은 자이든지 반드시 둘 중 하나였을 것이다.”고 말한다.

이러한 현실에서 정약용의 왕권강화 주장은 결국 민권의 강화로 연결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기본적인 사유재산도 지켜주지 못하고 있는 현실에서 우선해야 할 것은 왕권 강화를 통해서 관료를 엄격하게 평가하고, 이를 통해서 관료들의 착취를 억제함으로써 민권 강화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정약용이 민권과 왕권을 동시에 강조하는 것은 모순되는 것이 아니다. 영국처럼 기본적인 사유재산제의 보장이 이루어 진 후에 왕권의 견제와 국가 권력 제한의 필요성이 제기 되는 것인데, 조선의 현실은 왕권 강화에 의한 사유재산제의 보장이 급선무였던 사회였다.

탕왕에 의한 폭력적 정권 교체를 옹호한 정약용이 만약 당시의 조선 상황이 오히려 강력한 왕에 의한 착취가 발생하는 상황이었다고 한다면 결코 폭력적 정권 교체에 반대하지 않았을 것이다.

Posted by 자유기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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