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한계를 뛰어넘기 전과 그 후를 함께 바라봐야

기획 단계부터 논란이 많았던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명단사전’이 발간되었다. 그리고 그 논란의 중심에는 고(故) 박정희 대통령이 있다. 그가 24세의 늦은 나이 때문에 불가능했던 만주군관학교에 가기 위하여 쓴 혈서는 친일 행적의 대표적인 상징물이 되었다. '좌파’ 또는 '진보'진영에서는 그가 한국에서 존경받는 것에 대해 우려스럽게 여기고 있다. 그를 친일파로 매도하는 것이 역사 바로 세우기의 첫걸음인 것처럼 주장한다. 물론 지금은 많이 줄었지만, 박 대통령의 공적으로 평가받는 경제발전 역시 그가 아니라도 다른 누군가가 했을 것이라는 폄훼도 당하고 있다.

우리의 시각으로 한국 대통령을 했던 사람이 젊은 시절에 일제의 장교였다는 것을 달가워 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그것은 현재의 바람일 뿐 그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간과한 측면이 있다. 나는 인류 역사에서 많은 위인들에게서 찾을 수 있는 공통점이 하나가 있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위인이라고 하더라도 대부분은 '시대의 한계'를 뛰어넘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설령 한계를 극복하였다 해도 그 이전까지는 평범한 사람으로서 살았다는 것이 그것이다.


우리가 을사오적을 친일파라고 비판하는 이유는 나라를 지킬 수 있는 자리에 있음에도 일신의 안위를 위해서 나라를 팔아먹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을사오적이 활동하던 시기와 박정희의 청년기는 질적으로 다르다. 그래서 '친일'이라는 용어자체도 굉장히 모호하다. 일제에 나라를 뺐긴지 7년이 지난 1917년 박정희는 태어났다. 그리고 1932년부터 5년간 대구사범학교를 다녔다. 아쉽지만 그가 세상을 인식할 때쯤에는 한반도의 많은 사람들이 일제의 식민통치를 어쩔 수 없이 여기고 일본 제국의 국민으로 살 것이라고 생각할 확률이 높다. 나는 박정희 역시 그랬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런 점에서 40년대에도 독립운동을 했던 분들의 선견지명과 노고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에도 동의한다. 그들은 반드시 역사적으로 평가받고 존경받아야 한다. 그러나 독립운동가의 삶과 박정희의 선택을 비교해가면서 꼬투리를 잡는 것에는 동의할 수 없다. 마음 같아서는 40년대에 한반도에서 살던 우리 조상들의 생각이 현재의 우리와 똑같기를 바라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것이 현실적인 판단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박정희라는 한 인간을 판단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시기는 61년 5.16부터 79년 10.26까지라고 생각한다. 최고 권력자로서 한국이라는 최빈국을 선진국 문턱까지 발전시켰기 때문이다. 국민들이 박정희를 만주군 장교로 기억함에도 그를 존경하는 대통령 1위로 자리 매김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그의 업적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사람들은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키지 않았다면 장면(장면 전 총리의 이름 역시 이번 친일명단사전에 등재되었다) 정부가 경제를 발전시켰을 것이라고 주장하거나 박정희가 아니었더라도 한국은 발전했을 것이라는 낙관론을 편다.

그러나 이것 역시 '흠집 내기'에 불과하다. 우선 이승만정부나 장면정부의 경제 정책과 박정희 정부의 경제정책에는 상당히 많은 차이가 있다. 이전 정부들이 수입대체공업화 정책을 폈다면 박정희 정부는 수출주도공업화와 중화학공업의 건설을 추진했다는 특징이 있다. 지금 한국경제는 수출로 돌아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중화학공업이 수출의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는 것 역시 무시할 수는 없다.

다른 인물들이 박정희를 대체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주장 또한 그렇다. 쿠데타와 독재를 통해 정권을 창출하고 유지시킨 한계가 있지만, 한국의 경제발전은 최대 공헌자는 박정희 대통령이다. 그것을 무시하는 것은 집현전 학자들이 있었기에 세종이 아니더라도 한글이 만들어졌을 것이라는 주장과 똑같다고 생각한다. 조직을 운영하는데 있어서 리더의 역할은 굉장히 중요하다. 하물며 한 국가가 돌아가는데 있어 대통령의 중요성은 말할 것도 없다. 시스템이 잘 정착된 미국 같은 나라는 대통령 개인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크지 않지만, 60년대 한국은 현재의 미국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역사에서의 기회주의자들을 단죄하는 것에 나도 동의한다. 그런 면에서 '친일명단사전'이 갖는 의미를 모르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일제 45년을 똑같이 바라보는 것은 많은 문제점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삼성전자가 소니를 뛰어넘을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이 흔치 않았듯이 일제 강점기 말기에 우리가 독립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들도 적었을 것이다. 그것이 강제에 의해서건 자발적이건 그 시대의 분위기를 감안해야 그 시대의 사람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청년 박정희의 행동을 '친일'이라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친일'을 했다고 비난받는 그의 대통령으로서의 업적을 바탕으로 '가까운 미래에 한국이 일본을 따라 잡을 수 있다'는 주장도 가능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Posted by 자유기업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