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가 성장을 거듭해 풍요로움을 추구함에도 일부에서는 불황시절의 소비 위축과 갈등의 조장만을 강하게 주장하는 경우가 자주 발생한다. 자연스레 풍요 속의 빈곤(poverty midst plenty)이란 말을 하나의 정설로 받아들이기도 한다. 그러다보니 전문가들의 경제예측은 과장된 장난으로 치부되기도 한다. 이런 논란에서도 우리사회는 개개인의 삶의 질 향상이 성장을 넘어 사회전체의 경제력을 향상시키고 있다. 성장이 부정적이라면 지금처럼 개인의 역량이 일반화 되지 못했을 것이다.

사실상 성장이란 용어는 한국사회에서 종교적 신앙을 넘어선 믿음의 산물로 보기 쉽다. 그러다 보니 반대로 경기 침체는 경제를 포함한 사회 모든 부분의 후퇴로 규정해버리기도 한다. 이 같은 한국적 시대정신인 발전ㆍ성장의 개념은 그동안 국가의 몫이 크게 작용해 왔다. 정부가 개입했기에 한국의 고도성장에서 성장 이외의 용어는 나오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같은 관점에서 모든 것을 성장의 문제로 보는 건 혼란스럽다.

문제의 근원은 성장을 우리사회문제의 전부로 여기면서 자연스럽게 자리 잡은데 있다. 새롭게 발전된 것에 대한 불평이 대표적이라 볼 수 있다. 성장은 불평등한 관계만을 조장하고 새로움에 대한 접근성을 제한시킨다는 의미다. 사실상 성장에 따른 문제들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서서히 해결되는 상황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자신과 다르다고 성장을 하나의 인간미 없는 기계덩어리 산물로 보는 외형적 편견일 뿐이다.

앞에서처럼 경제가 발전할수록 인간의 행복이 더욱 강화되었는가? 가장 민주적인 그리스 사회보다 현재가 더 민주적인가? 찬란한 문화와 이념의 다양성이 모두 보장되었는가? 이런 질문에 경제성장은 직접적인 대답을 말하진 않는다. 다만, 인류의 생계문제가 해결되고 경제 성장 이후부터 발전되지 못하고 인지하지 못한 부분을 중요하게 받아들여 구체적 결과물로 보여주었다.

하나의 예로 녹차를 든다면, 1980년대 이후 정부의 전통문화 회복을 통한 관심의 일환으로 서서히 녹차는 대중적인 음료로 자리 잡게 되었다. 그 후 적극적인 기업참여와 서구적 식생활에 대응한 웰빙(well-being)추구의 키워드로 현재의 대중성을 지니게 되었다. 변화 없이 신라시대부터 내려온 1,200년의 전통만을 고수해왔다면 아무리 훌륭한 '차 문화’였더라도 그것은 대중과 멀어졌을 것이다.

사실상 차음료가 하나의 '차 문화’로 승격되고 그 가치를 인정받은 건 고립된 사회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정부와 기업의 적극적 개입으로 소비량과 재배면적이 늘어나던 차산업은 '농약검출 보도사건’으로 소비자들의 냉대로 하락일변도였다. 이 와중에 새로운 소비자층에 대한 이해와 전통다기와 문화를 접목하면서 현재의 '차문화산업’은 당당히 일본과 중국에 뒤쳐지지 않는 산업부문으로 성장하였다. 산업화에 따른 시장의 성장과 발전이 호황과 침체 그리고 새로운 도약을 제공하는 전 과정을 이끌어 온 것이다.

성장이란 지표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그것을 묵묵하기 지켜 온 우리의 세계적 토종기업이 없었더라면 불가능하지 않았겠는가. 이 모든 걸 부정하고 파생적 문제들에 대해서만 배척의 태도는 납득하기 힘들다. 가치 있는 이념 논쟁이 가능한 자체도 희망의 상징인 발전된 경제토대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매번 사회적 화두가 일어날 때마다, 시장의 부정적 견해를 첫머리에 두고 시작한다. 시장에 대한 시스템의 오류를 떠올리기도 하고 이제는 잊혀져버린 사회주의 이념논쟁을 다시금 부활시키기도 한다. 좋은 징조다. 다툼이 있지만 한 사회의 다양성은 존재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다만, 그것을 지키는 토대를 한번은 인식해 보는 건 어떤가. 앞선 질문에서처럼 모든 발전의 해답을 경제성장이 가지고 있지 않지만 이로 인해 경제ㆍ문화ㆍ이념 심지어 인종과 지역 성향까지도 바꾸는 지도를 만드는데 공헌해 왔다. 이 같은 시스템은 꾸준히 우리에게 다가갈 것이기에 소중히 다루어야 할 것이다.

Posted by 자유기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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