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정일 ICC에 회부하는 100만 서명운동 기자회견 -
구호물자 중간에서 가로채 북한 주민 300만 명 굶어죽어
북한인권단체 합동으로 김정일 ICC 제소 서명운동 진행
평시에 300만 명 굶어죽게 하고 강제수용소 설치 등 반인륜 범죄행위 좌시할 수 없어

북한의 김정일을 국제형사재판소(ICC)에 회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지난 9일 서울역광장에서 북한민주화위원회(위원장 황장엽)와 각 북한인권단체들은 '김정일을 국제형사재판소에 회부하는 100만 서명운동 북한인권단체 합동 기자회견’을 진행했다. 주최측은 “전쟁이 아닌 평상시기에 300만 명이 굶어죽고, 북한 곳곳에 강제수용소를 설치해 어린이와 부녀자들까지 죽이는 반인륜 범죄행위가 자행된다”며 “17,000명의 탈북자들이 2000만 북한 동포들을 대신해 학살자 김정일을 국제형사재판소에 고소하기로 결정했다”고 행사의 취지를 설명했다.

구호물자가 전달됨에도 300만명 굶어 죽는 것은 대량학살 행위

3시부터 진행된 기자회견에 참여한 미국 자유북한연대 수잔 숄티 회장은 “국제형사재판소는 지난 3월 30만 명이 숨지고 270만 명의 난민이 발생한 '다르푸르 학살’ 사건에 대한 책임으로 오마르 알 바샤르 수단 대통령에게 체포영장을 발부했다”며 이같은 사례가 김정일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북한에는 많은 구호물자가 전달됨에도 300만 명이 굶어죽었다”며 “김정일이 구호물자를 중간에서 가로채기 때문에 이는 엄연히 대량학살”이라고 강조했다.

기자회견에서는 2008년과 2009년 사이 입국한 탈북자들의 증언도 이어졌다. 탈북자 도명학 씨는 “남한에 호감을 갖고 있다는 이유로 어느날 갑자기 정치범수용소에 끌려갔으며, 가족들은 자신의 행방을 알지 못했다”고 증언했다. 그는 “재판도 받지 못한 채, 3년 동안 수감돼 있었다”며, 북한의 법집행 절차가 제대로 진행되지 않고 있다고 성토했다. 또한 자신이 “원래 170cm의 건장한 체구였지만 수용소에서 체중이 25kg 정도 감소했었다”며 수용소 생활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또 다른 탈북자 이용녀(가명)씨는 “중국에서 임신 10개월째에 잡혀 수용소에 수감 후 며칠 안돼 딸이 태어났지만, 2시간 만에 아이를 잃었다”며 “지금도 아이소리만 들리면 공포심이 생겨 사람 많은 곳에 가지 않았다. 하지만 죽은 아이를 생각하며 이곳에 용기 내 섰다”고 하여 많은 사람들의 눈시울을 붉히게 만들었다.

반인도범죄조사위원회, 김정일 ICC제소 서명운동 시작

김정일을 ICC에 제소하기 위해 지난 7월 출범한 반인도범죄조사위원회(www.iccnk.kr)는 8월부터 서명운동을 시작하여 현재 미국, 일본 등에서 활발하게 진행 중에 있으며, 10월 7일부터 연세대를 시작으로 대학교별로 서명운동을 진행하고 있다.

이 단체의 간사로 참여하고 있는 피랍탈북인권연대 도희윤 대표는 현재 “미국과 일본을 포함해 온라인으로 15,000명, 오프라인으로 7만명 가량이 서명에 동참했다”며 대한민국 국민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부탁했다.

국제형사재판소는 집단 살해죄, 인도에 반한 죄, 전쟁범죄 및 침략범죄 등 가장 중대한 국제인도법 위반 범죄를 저지른 개인을 처벌하기 위한 최초의 상설 국제재판소이며 UN 산하 기관이다. 현재 EU, 캐나다 그리고 우리나라를 비롯해 108개국이 당사국으로 가입해있다. 북한은 ICC 비당사국이지만 UN의 회원국이므로 김정일의 ICC 제소 근거가 충분하다.

2차 세계대전 중 600만 명의 유대인이 학살되고 있다는 증언이 제기 됐을 때, 유럽의 많은 지식인들은 그 규모와 잔인함에 사실이 아닐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고 살아남은 유대인들의 증언이 쏟아지자 진실을 믿지 않은 지식인들은 행동하지 않았던 부끄러움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지난 90년 대 중반부터 식량난을 비롯해 300만 명의 아사자, 10만 명의 재중탈북자, 20만 명의 정치범수용소, 2000만의 억압받는 북한주민 등 김정일 정권의 폭정에 대한 참상이 끊임없이 제기 되고 있다. 유럽 지식인들이 저질렀던 후회스러운 역사를 되풀이해서는 안 될 것이다.

문동욱 기자

Posted by 자유기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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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를 겪다 보니, 실패를 즐기는 지경까지 되었어요.” 필자가 고정출연하고 있는 으로 출연하는 모 라디오 방송국 스튜디오에서 어떤 출연자의 멘트가 밖으로 방밖으로 흘러나왔다. 그 말은 평소 나의 지론과 같았다. 자유는 실패까지도 책임져야 한다. 실패를 받아들일 수 없다면 자유를 누릴 자격도 없는 것이다. 누가 그런 용감한 말을 했을까. 궁금해서 스튜디오 안을 들여다봤다. 눈에 들어온 사람은 어디서 본 듯한 얼굴이었다. 누굴까 기억을 더듬는 사이에 그는 방송을 마치고 방을 나갔다. 작가에게 들어보니 전철우란다. 맞다! 요즈음 나의 기억력이 이렇다. TV에서 숫하게 봐 놓고도 기억을 못하다니. 알았다면 인사라도 해둘걸...

방송을 끝내고 사무실로 돌아오는 내내 그에 대한 궁금증이 가시지 않았다. 왜 그런 말을 했을까. 인터넷을 뒤져봤더니 바로 이유를 알만했다. 우리와는 완전히 다른 체제에서 교육을 받은 사람답지 않게 탈북하여 남한에 온 후 크게 성공을 거둔다. 코미디언으로도 이름을 날리고, 고향랭면이라는 음식점을 차려서 프랜차이즈로까지 발전시켰으니 큰 돈도 벌었다. 그러나 사업도, 인생도 큰 실패를 맞이하고 만다. 자포자기하여 자살할까 고민할 정도까지 밑바닥으로의 추락을 경험한다.

하지만 그는 낙천적인 태도를 다시 찾았고, 무일푼의 상태에서 재기에 성공한다. 2900원짜리 국밥을 파는 ‘고향국밥’ 음식점을 개업해서 연매출 80억원을 올리고 있다. 그뿐 아니다. 홈쇼핑과 할인점에까지 판매망을 넓혀 놓았다. 그가 대표로 있는 코레푸드의 연매출이 400억 원에 달한다니, 실패를 딛고 정말 큰 장사를 만들어 낸 셈이다. 결혼도 다시 해서 행복한 가정도 만들었다. 그 정도가 되니 실패를 즐긴다는 말이 나올 법도 하겠다 싶다.

탈북 동포들 중에서 전철우 만큼 자유의 의미를 잘 이해하고 실천하는 사람도 없을 것 같았다. 그만큼 남한의 체제에 잘 적응한 새터민도 없을 것 같았다. 파란만장한 삶의 이야기도 들을 겸 또 그의 탈북 새터민들과 북한 이야기도 들어볼 겸 인터뷰 요청을 했고, 어렵사리 바쁜 시간을 쪼개어 줬다.


오늘은 자유의 소중함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아실 꼬레푸드의 전철우 사장님을 모셨습니다. 자유를 찾아 남한에 막 오셨을 때부터 부지런하게 학생, 코미디언 등 여러 가지 활동을 많이 하셨어요.

네. 당시를 생각해 보면 1인 3역을 했어요. 한양대 전자공학과 학생이자, 방송인이고, 대우전자 산학프로그램 연수생이기도 했습니다. 제가 북에서부터 김책공업종합대학 졸업하고 동독에서도 기계를 전공했거든요. 그래서 남에 와서도 자연스럽게 전자공학을 전공하고 대우 전자에서도 산학 연수생으로 일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한국이 독일 기계를 많이 쓰고 있었고 동독 진출을 위해 그 쪽 문화를 아는 사람이 필요했었거든요.

그럼 방송 쪽으로는 어떻게 진출하게 되신 건가요? 제 기억에 당시 여러 프로그램에서 굉장히 활발한 활동을 하셨는데요.

제가 처음에 왔을 때는 TV에 나가지도 못했어요. 제가 워낙 말을 솔직하게 거침없이 하니까 국정원에서 방송을 나가지 말라고 하더군요. 저도 물론 관심이 없었고요. 북에서는 방송인이라는 직업이 딴따라라고 해서 아직도 많이들 무시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뜻하지 않게 KBS의 “남북의 창”이라는 프로그램에 나가게 되었어요. 눈이 오는 날 방송 녹화를 했는데 사회자가 제게 북에서는 눈이 오면 어떻게 하냐고 묻더라고요. 그래서 귀찮아 죽겠는데 치우라고 한다고 솔직하게 얘기를 해줬더니 너무 재밌어 하시는 거예요. 그 간 다른 북한 출신 출연자들은 딱딱하게 각 잡고 앉아서는 당에서 강제로 시킨다고 똑같이 대답했거든요. 그런데 전 격식 차리지 않고 주절주절 재밌게 얘기를 한 거예요. 저의 그런 모습을 시청자들이 좋아했던 모양입니다. 시청률도 높았다고 하더라고요.

방송사에서도 좋아했겠군요. 다른 방송사에서 섭외가 들어오지는 않던가요?

네. 그러고 나니까 여기저기서 섭외가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MBC가 먼저였는데요. 거기서 통일전망대라는 프로에 출연했습니다. 남한의 축제나 여러 장소를 방문해서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과정을 보여주자는 취지의 프로그램이었어요. 성격이 밝고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 편이라서 저도 즐겁게 촬영을 했지요. 같이 촬영했던 남한 사람들도 신기해하고 친근하게 잘 해주셨고요. 그 프로그램이 인기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SBS에 까지 진출하게 되었어요. 당시 감동과 눈물이 있는 코미디 “대동강편지”를 기획하면서 제게 섭외요청을 했던거죠. 그리고 그 해 활발한 활동으로 방송 3사의 신인상을 모두 휩쓸었습니다. 그 때 저와 같이 경합했던 친구들이 요즘 한창 인기 좋은 컬투입니다. 하하하!

그렇군요. 방송3사에 모두 나가게 되셨군요. 방송만으로도 바빴을텐데, 고향냉면은 어떻게 시작된 건가요?

당시 저는 SBS 코미디언실에서 방송만 열심히 했습니다. 제가 등촌동 공개홀 바로 뒤에 살아서 녹화 쉬는 시간이 되면 동료들을 집으로 불러 밥을 해주곤 했습니다. 그러면 다들 맛있다고 난리였습니다. 이봉원 선배님은 제게 냉면 하나만 잘해도 음식점 사업하면 대박 날거라고 입버릇처럼 말씀해주셨어요. 그때야 방송하기도 너무 바빠 그런 생각 제대로 못했지만 음식 사업을 하겠다고 마음먹게 된 건 그런 칭찬을 많이 들어서 아닐까 싶습니다.

사업을 하게만든 결정적 계기가 있었나요?

그러던 와중에 남영동에 선배님 한 분이 계셔서 드나들다가 빌딩에 빈 가게 자리가 있는 것을 봤습니다. 그 전에도 서너 가게가 망해 나가서 아주 폐허가 된 곳이었습니다. 그 때는 상권이라던가 이런 것을 전혀 볼 줄 몰랐거든요. 빌딩 주인한테 물어보니 워낙 싸게 임대가 가능하다길래 냉큼 친구와 동업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삼천만원으로 시작했습니다. 돈 아껴보겠다고 저희가 인테리어 공사까지 직접 해가면서 말이죠.

사업이 처음부터 쉽지만은 않았을 것 같은데요.

그렇더라고요. 그 당시 방송활동이 활발할 때라 주방장 모집할 때 내 얼굴보고 찾아온 지원자가 꽤 많았습니다. 계약을 구두로나마 끝내고 막상 가게를 보여주고 나면 다들 꼬리를 빼는 겁니다. 가게 자리가 너무 나쁘다는 거지요. 이런 자리에서는 도저히 장사가 불가능하다는거죠. 몇 달 안에 망할 거라고 다들 거절하더군요. 그래서 주방장을 급을 한 단계 낮춰서 뽑았어요. 그리고 제가 음식을 꽤 하는 편이니 옆에서 돕기도 하고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대박이 난 겁니다. 손님들이 줄을 서서 기다릴 정도가 되었지요.

북한 출신이라는 것이 우리 사회에서 핸디캡으로 작용할 수 도 있다고 보는데요, 사업하는데 문제가 있거나 하진 않았나요?

글쎄요, 전 어떠한 위기나 약점도 기회로 바꿔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북에서 왔다 그러면 저한테 안 좋은 선입견을 많이 가질 수 있겠죠. 그래서 역으로 이용하기로 했습니다. 저희 가게 전단지를 북에서 온 삐라마냥 아주 자극적으로 만들었습니다. 빨간 종이 위에 “위대한 고향랭면 만세! 냉면 먹으로 우리 모두 떨쳐 나서자!”라는 등의 자극적인 문구를 삽입했어요. 사람들이 한 번 받아들게 되면 안 볼 수 없게 그리고 안 웃을 수 없게요.

핸디캡을 오히려 장점으로 활용하신 셈이네요.

그렇지요. 그것으로 손님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눈길을 끈 거죠. 북한 출신이니까 북한 출신다운 정통 냉면을 만들고 있다고 선전했고요. 그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끔 냉면을 만들 때도 특별한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당시에는 냉면의 면발이 다들 두꺼웠는데 저희 가게는 굉장히 얇게 뽑아내 식감을 달리했습니다. 지금이야 다들 냉면 면발이 얇지만 그 때는 저희 가게만 그래서 다들 신기해하고 맛있어 하시더라고요. 이런 제 생각들이 다 잘 맞아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20평이 안 되는 가게에서 하루 매출은 200백만원 가까이 되었었습니다. 손님들이 가게 점원들이 서빙하는 모습을 보고 쿵푸하는 사람들처럼 날라다닌다고 할 정도였으니까요.

탈북자라는 이미지를 제대로 파셨군요. 그런데 사장이 북한 출신의 유명 방송인이라는 이유만으로는 그렇게 까지 장사가 잘 되기는 쉽지 않을텐데요. 음식은 어떻게 했습니까? 저만 해도 평양 음식은 간이 너무 심심하던데요.

예, 맞습니다. 그래서 남한 사람들 입에 맞추려고 노력했습니다. 지금 이북 사람들이 먹는 거 가지고 장사한다고 그러면 남한 사람들 모두 안 먹을 겁니다. 가난해서 음식 재료가 영 부실합니다. 그런데 옛날 이북 양반 음식은 참 맛있습니다. 한국도 잘 팔리는 한정식이나 궁중요리는 부자들 음식 아닙니까? 북한도 그렇지요. 그래서 만두전골, 냉면 다 책에서 보고 예전 양반 음식들 형태로 재료와 만드는 방법을 바꿨습니다.

그리고 저희가 녹두전이랑 만두를 만드는 과정을 일부러 손님들께 다 보여드렸습니다. 직접 과정을 보는 그 시각효과라는 게 참 커요. 전 카운터에서 맷돌에 간 녹두로 녹두전 부치고 앞에 직원 하나가 만두를 빚고 그러면 음식이 더 먹음직스러워 보이기 마련이거든요. 그래서 냉면만 드시러 오시다가도 녹두전, 만두도 다 드시고 가셨습니다.

그래서 당시 가맹점이 60여개가 되셨는데, 가맹점들을 운영하는 일은 어떠셨는지요?

당시 가맹점들을 운영할 때는 문제가 좀 있었습니다. 우리의 가장 큰 문제는 가맹점 간에 음식 맛을 일정하게 지속시키기가 힘들다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야 우리 공장에서 제공하는 육수와 재료를 쓰니 문제가 없었죠.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면 주방장들이 잘 모르면서 대뜸 자기가 직접 해보겠다고 점주들한테 우기는 거예요. 행여 주방장이 갑자기 일이라도 그만둘까봐 점주들은 그러라고 하고요. 그 다음부터야 뻔하지 않겠습니까! 어설픈 솜씨로 음식 맛 떨어지고 한 번 기분 상한 손님은 다시 안 오니 가맹점들은 운영에 계속 문제를 겪고요.

한 번 실패한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지금은 그런 것만큼은 아주 철저하게 관리하죠. 모든 재료를 완전 가공해서 팩으로 꽁꽁 싸 보내요. 프랜차이즈를 운영하는데 있어 브랜드 관리, 맛의 일정한 수준 관리만큼 어렵고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그렇게 좋은 시절을 지나 한 번 실패를 겪으셨습니다.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또 이렇게 새 사업을 시작하셨습니다. 어떤 계기로 새 인생을 시작할 용기가 나신건가요?

거창한 용기, 계기 그런 거 없습니다. 그저 먹고 살려다 보니 이렇게 또 시작을 하게 됐습니다. 과거에는 혼자라 외로움 투성이에 빈틈이 많아서 사기 당하고, 실패도 했습니다. 한 때는 죽고 싶을 정도로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전 어차피 이 사회에 빈손으로 왔는데요, 뭘. 못 일어나면 내 손해다 싶었습니다.

게다가 가족은 모두 북에 계시니 위로해줄 사람도 없었겠네요.

아닙니다. 제 주변에 참 좋은 분들이 많이 계셔서 계속 위로해주시고 응원해주셨습니다. 저녁 되면 행여 저 외로울까 불러주시고 일부러 심부름 시켜서 남은 돈으로 용돈하게 해주시고 그랬어요. 매일 같이 넌 잘 될 것이다, 금방 일어나 성공할 것이다 - 라고 좋은 말씀도 많이 해주시고요. 그래서 기운을 차리게 됐습니다.

새 사업은 어떻게 시작했습니까?

사실 지금은 꼬레 푸드라고 큰 회사가 되었지만 시작은 10평짜리 고향국밥이었습니다. 그것도 제 돈은 얼마 들어가지도 못했고요. 지금 이 기회만큼은 놓칠 수 없다는 생각에 죽을힘을 다 해 덤볐어요. 지금은 프랜차이즈, 유통 모두 매출이 나날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그러게요. 홈쇼핑에서 연일 매진에다가 유명 대형마트마다 사장님 이름이 들어간 음식들이 있더라고요. 지금 현재 일본으로도 사업을 확장하고 계시죠?

예, 현재 진행 중에 있습니다. 그 쪽에서 제의가 와서요. 지금 꼬레푸드는 사업 규모를 늘리려고 여러 사람의 투자를 받고 있습니다. 제가 가진 재주 중에 참 귀한 재주가 제 사람, 제 편을 잘 만드는 겁니다. 저는 사업 열심히 해서 잘 키워 동업자들끼리 후하게 나누자는 주의거든요. 그래서 그런지 동업자들도 절 좋아해 주세요. 자화자찬이긴 하지만 저는 여지껏 동업자랑 동업 하다 깨진 적도 원수가 된 적도 없습니다. 아마 제가 남한에 혼자 왔기 때문 일겁니다. 혼자라서 더 서로 이해하고 양보해서 내 사람 만드는 법을 열심히 배울 수 있었어요.

사장님은 남한 사회에 적응을 참 잘 하셨습니다. 그런데 다른 탈북자들 중 적응을 못하시는 분들이 있죠? 왜 그렇다고 보십니까?

난 제일 중요한 게 성격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굉장히 민감하고 세심한 사람들은요, 남한 사람들 중 누가 웃기만 해도 나보고 웃나 해서 상처받고 그럽니다. 난 그런 성격 아니거든요. 지금도 누가 내 말 이해 못해도 그냥 막 말해 버리는 성격이지요. 그런데 이런 문제에 상처 받는 사람들은 점점 자신감을 잃어가고 남한 사람들, 남한 사회에 나서는 게 겁이 나고 싫어지게 되요. 그럼 적응이 점점 어려워지죠. 지금 탈북자들 중에 성공하신 분들은 하나 같이 성격이 다 낙천적이고 자기 페이스로 사는 분 들이예요.

북한 출신이라는 이유로 남한 사회에서 차별은 많이 받습니까? 사회생활에 핸디캡이 될 수 있나요?

그럼요, 북한 출신이라는 것은 분명히 핸디캡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원래 핸디캡이라는 것이 본인이 핸디캡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핸디캡이 되는 것이거든요. 그래서 전 그것을 자기 장점으로 극복하려는 노력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개인의 노력만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 할 수는 없습니다. 사회에서도 해결할 문제가 있습니다. 가령 북한 사람을 하나 고용해서 택배 심부름을 보낸다고 하면 한 시간이 걸립니다. 택배란 무엇인지, 우체국 가는 길, 요금 내는 법 모든 것을 설명해야 하니까요. 그래도 결국 중간에 길을 잃거나 방법을 몰라 헤매고 그냥 들어오는 경우가 허다해요. 사람이 전혀 다른 시스템 아래서 적응 한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닌 것이지요. 본인이 열심히 하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이런 차이가 메꿔지지 않는 이상 남한에서 제 밥벌이를 한다는 게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남한 사람들이 어떤 도움을 드려야 할까요?

정부가 오자마자 교육시키고 근로장려금으로 기업에 50만원 씩 보조하는 것은 물론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아주 세세한 생활의 지식이 워낙 부족하다보니 단순 노동직 말고는 일자리를 구하고 유지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속적으로 남한 시스템에 대한 세세한 교육이 지속적으로 꾸준히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뵌 새터민들 중에서 다단계의 유혹에 넘어갈 뻔 했던 분들이 계셨어요. 그런 어려움이 일반적인 현상일까요?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들이니 그런 피해를 당할 수 있겠지요. 저희 누나만하더라도 재작년에 갓 왔을 때 돈도 못 벌면서 보험을 막 들어놨더라고요. 보험설계사들의 단 소리에 넘어갔더군요. 그래서 일부러 누님께 잠시동안만이지만 파출부 일을 해보시라고 했습니다. 남한 사회의 힘든 면을 누님이 느꼈으면 해서요. 본인의 일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돈도 못 받고 멸시 받고 하는 게 남한 사회의 한 단면이라는 것을 온 몸으로 느끼길 바랐습니다. 이 사회가 만만치 않다-라는 사실을 새터민들은 기억해야합니다.

북한이 참 현재 살기 어렵습니다. 북한이 어떻게 해야 잘 살 수 있다고 보세요?

많이 투자하는 거죠. 그런데요, 전 지금 당장 통일을 하는 것은 반대합니다. 남한의 일반 국민들은 세금 때문에 힘들어 질 겁니다. 북한도 남한 기업들이 쑤욱 밀고 들어오면 자생력도 다 잃고 말테고요. 북한이 점진적으로 개방을 하고 한국 기업이 진출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남한 기업은 북한의 낮은 임금으로 물건을 만들고, 북한은 자생력을 조금씩 키우면 서로 윈윈이 될 것이라고 봅니다만.

그런데 지금 북한이 너무 꽉 막혀 있어서요. 그렇게 북한의 속사정을 내 보일 자신이 없을까요?

물론이죠, 아마 개방하면 김정일 정권은 끝날 겁니다. 왜 지금까지 우리만 이렇게 가난하게 살았냐고 난리겠지요. 그런데 원래 나라가 변할 때는 지배계급이 한 번 뒤집혀야 되요. 이전 정권을 비판할 명분이 필요하거든요. 김정일이 김일성의 아들인 이상 절대 북한은 지금의 실수를 만회할 기회를 얻지 못할 겁니다.

하지만 정권이 바뀌면 얼마든지 바뀔 수 있어요. 개방을 하고 자본주의가 꽃피고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북한에도 기업을 할 만한 사람이 있나요?

재작년에 북에서 온 우리 누나만 봐도 북한에 사업할 사람 참 많습니다. 지금은 시장에서 장사도 다 허용되고 돈도 벌어도 되거든요. 우리 누나는 시장에서 열심히 장사해서 본인 집도 짓고 북에서는 큰 손 소리 치고 살았대요. 얼마나 잘 살았냐면 당 간부들 집에 유리도 놔주고, 집에서 기르는 세퍼드한테는 고기만 먹였답니다. 하하하

시장에서 장사를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주로 밀주가 많답니다. 그런데 우리 누나같은 경우는 신용을 제법 쌓아서 북한 당국의 물건을 팔기도 했대요. 처음에는 내가 북에서 장사해봐야 뭘 했겠어 싶어서 우리 누나를 무시하려고 했거든요. 그런데 웬걸요. 나름 원가 계산하고 북한식으로 회계장부 작성해서 이익이 얼마나 남을지 똑 부러지게 계산해내는 모습을 보니 깜짝 놀랐어요. 그래서 장사하는 사람은 세계 어느 나라를 가도 다 똑같겠구나 싶었어요.

북한 사람들과 남한 사람들 간에 차이가 있습니까?

성격 상 차이가 조금은 있습니다. 남한 사람들이 더 차분하고 여유 있어요. 반면에 북한에는 산세가 많아서 그런지 사람들이 억세고 성격이 아주 급해요. 게다가 자존심이 엄청 강합니다. 만약 북한 사람들과 잘 지내고 싶다면 북한 사람들의 자존심만큼은 절대 건드리지 마세요. 아직 남한에 와서도 자존심 때문에 수억의 대가가 되는 일을 거절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북한 내의 지역 격차는 있습니까?

있지요. 평양과 함경도는 차이가 좀 있습니다. 평안도 쪽이야 공업지대도 있고 그렇지만 함경도는 무슨 일 터졌다하면 굶어죽기 시작하는 동네인걸요. 지역마다 키도 다를 정도인데요. 사실 북한 사람들이 다 작긴 하지만 말입니다.

그러게요. 남한의 젊은이들이 다 부모세대에 비해 키가 큰 반면 북한의 젊은이들은 부모 세대보다 작더군요.

예, 저만해도 저희 아버지보다 작았고요. 제 조카도 저나 지 아버지보다도 작습니다. 학생들이 틈만 나면 모내기, 가을추수는 물론 도로 청소 같은 온갖 잡일에 다 동원되거든요. 밥도 많이 안 주면서 그 무거운 지고 밤늦게까지 일하면 정말 배 많이 고픕니다.

한 가지 재밌는 건요, 제가 어릴 때 북에서는 사회가 진화할수록 사람 키가 작아진다고 배웠어요. 진화할수록 걷지는 않고 생각만 많이 하니까 자연스레 키가 작아지고 머리는 커진다는 거예요. 그래서 저도 그걸 철썩 같이 믿었습니다. 물론 동독에 유학 가서 깜짝 놀랐죠. 북한 보다 훨씬 발전했는데 키랑 덩치는 엄청 크잖아요. 그 때 알았죠, 뭐. 다 거짓말이구나 싶었고요.

북한의 가족 관계나 가정생활들은 어떻습니까?

효성은 지극한 편입니다. 부모를 모시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인식되고요. 원래 못사는 사회일수록 구성원이 뭉쳐야만 살 수 있기 때문에 혈연을 기초로 다들 똘똘 뭉쳐서 사는 편입니다. 워낙 다 같이 못 사니 돈 때문에 의 상할 일도 없고요.

부부 관계는요? 가부장적일 것 같습니다만.

예, 맞습니다. 무척 가부장적입니다. 여성평등이 뭔지도 모르고 여성이 자기 권리를 찾을 줄도 모릅니다. 정권 잡은 사람들이 다 남자니, 여성인권에 대해 정책이 있지도 않습니다. 학교에서조차 모내기를 가면 똑같이 일하고도 여학생들은 밤에 남학생 옷을 빨아줘야 합니다. 부부들도 마찬가지로 여자들이 일을 많이 하고 때때로 여성에 대한 구타도 서슴지 않습니다.

그런 것은 남한과는 조금 다르군요. 통일이 된다고 하면 북한 사람들이 남한에 잘 적응할 것 같습니까?

북한에 이미 자본주의의 싹이 다 터 있어요. 이제는 돈으로 안 되는 게 없답니다. 제 조카가 군대에 갔는데 대대장한테 돈만 주면 1년 복무 중 10개월을 집에서 보내도 된다고 하더라고요. 누나만하더라도 돈 있으니까 경찰이 동원 되서 호위해주고 편하게 남한에 왔답니다. 지금은 간부보다 더 통하는 게 돈입니다. 외려 북한의 자본주의가 남한보다 더 치열합니다. 남한은 이제 자본주의의 룰이 있지만 북한은 잔인하고 치열한 초기의 자본주의가 있다고 하더군요.

북한에서 자본주의의 싹이 이미 다 터 있다라...... 저희가 정말 모르고 있던 사실이군요.

저도 최근에 북에서 오신 분들한테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당장의 통일 보다는 북한이 북한만의 자본주의를 만들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남한 또한 50년대 처음 자본주의가 시작할 때 여러 어려움을 겪고 나름의 자본주의를 만들지 않았습니까! 저는 북한 또한 그러한 과정을 겪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남북의 통일 과정을 독일과 비교 한다면 어떨까요?

독일의 경우보다는 힘든 일이 많을 겁니다. 동독 사람들은 분단되어 있을 때에도 서독 TV도 봤고 동유럽 쪽으로 여행도 많이 다녀서 합리적이고 유연한 사고방식을 지니고 있는 편이었습니다. 그런데도 통일 후 동독에서 저임금 노동자들이 몰려오니까 서독 사람들이 그들의 숙소에 불도 지르는 등 별별 일이 다 있었습니다.

남한의 탈북자들이 지금은 소수라 남한에 융화될 수 밖에 없지만 나중에 통일이 되면 북한 사람들이 굉장한 다수가 되고 하나의 정치세력이 되겠지요. 그들이 힘들고 멸시받으면서 산다고 생각되면 문제가 커질 겁니다. 워낙 다혈질이라 들고 일어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합치기 전에 너희끼리 해봐라 하고 투자만 해주고 나름의 자본주의를 발전하게끔 도와야 할 겁니다.

정부의 대북정책이 어떤 방향으로 가는 게 좋을까요?

(한참을 고민하며) 정답은 없습니다. 저는 사실 지난 정권처럼 북한에 무조건 식으로 퍼주는 정책은 참 싫어합니다. 정작 탈북자의 인권은 무시하고 북한에만 퍼주면서 정치적으로 너무 이용하는 것 같아서 되게 싫었었어요. 그런데 지나고 보니 그 덕에 확실히 개성이랑 금강산이 열리게 된 것 같긴 합니다. 북한의 긴장을 풀었다는 점만큼은 정말 긍정적으로 평가할 만 한거죠. 그래서 정답은 없구나 싶었습니다.

북한에 대한 여러 감정이 교차하시는 듯 하군요. 전 대표님의 사업이 나날이 번창해서 언젠가 북한에서 사업을 하실 수 있길 바랍니다.

저도 그러길 꼭 바랍니다. 그 쪽에서 기회를 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런 날이 올 때까지 열심히 장사해야지요.

긴 시간 유쾌한 인터뷰 정말 감사합니다.

전철우 사장과 인터뷰를 하면서 뜻밖이었던 것이 두 가지 있었다. 첫째는 그가 가장 최신형 터치 화면 방식의 핸드폰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기계를 좋아하시나 봐요?’ 하고 물어보니 사업차 일본에 갈 일이 잦은데, 지금의 핸드폰이 특별한 로밍도 필요 없이 한국과 전화를 할 수 있어서 좋다고 한다. 게다가 대학 때의 전공도 있고 해서 기계 만지는 것을 좋아하기도 한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북한에 있을 때는 김책공과대학에서 전자공학을 전공했고, 동독 유학시절에는 기계공학을 전공할 정도로 엘리트 공학도였던 그였다. 최신 기계를 좋아하는 국제적 비즈니스맨! 탈북자라는 그 때까지의 이미지와는 무관하게 바로 그것이 전철우의 진정한 모습이었다.

또 하나는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코메디언의 이름들이었다. 이봉원, 최양락... TV에서 늘 보고 듣던 그 사람들과 친구이고 선후배로 지냈다는 사실이 내가 가졌던 그의 이미지와 잘 맞아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누구 못지않게 인기 있던 개그맨, 그것 역시 전철우의 진짜 모습이었다.

그와 가졌던 1시간 반 가량의 대화는 경쾌하고 재미있었다. 어렵던 시절 이야기를 할 때도 웃음 띤 얼굴을 잃지 않았다. 괜히 코미디언을 했던 것이 아니구나 싶었다. 그런 긍정적 태도 때문에 그리 짧은 시간에 사업에 재기할 수도 있었구나 싶었다. 다른 새터민들과 북한 동포들도 전철우 사장처럼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비오는 석촌호수 옆 삼전동 코레푸드 사무실을 나왔다.

Posted by 자유기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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