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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11.17 친일행위 평가의 어려움

영화 <더 리더-책 읽어주는 남자>에서 주인공 한나 슈미츠는 아우슈비츠 학살범죄로 재판장에 서게 된다. 수용소에 들어간 것이 본인의 선택이었느냐는 재판관의 질문에 그녀는 경비원을 뽑는다기에 들어갔을 뿐이라고 진술한다. 수용소 경비원으로 취직한 그녀는 폭격에도 유대인 수감자들을 좁은 공간 속에 가둔 채 통제했고, 이는 참사로 이어졌다. 왜 풀어주지 않았느냐는 재판관의 물음에 그녀는 답한다. “온 마을이 불탔고 모두가 뛰쳐나오는 상황에서 수감자들을 쉽게 풀어줄 수가 없었어요. 우리가 수감자들을 책임졌어야 했으니까요.”

나치전범재판을 소재로 다루고 있는 이 영화는 보는 내내 몇 가지 물음들과 마주하게 된다. 아우슈비츠에서 일했다는 사실만으로 그녀를 유죄라고 할 수 있나, 그녀의 행위가 의도적인 것이었는지 아닌지 어떻게 판별할 수 있나, 당시엔 합법적으로 이뤄진 행위에 대해 현재의 관점에서 판결하는 것은 정당한 것인가 등의 물음이다.

지난 8일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 또한 이러한 혼란스런 질문들과 무관하지 않다. 공개된 4389명의 친일 명단을 둘러싸고 선정기준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친일인명사전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과 장면 부총리, 부통령을 지낸 김성수 등 우리 사회에 영향을 미친 고위 인사들이 포함되어 있다. 게다가 그동안 친일 행적이 알려지지 않았던 독립유공자와 사회지도층 인사들도 명단에 포함됐다. 독립운동가로 알려진 장지연 씨도 이 책에선 친일행위자로 기록됐다.

민족민제연구소측은 “민족 반역자 전부와 부일(附日) 협력자 중 일정한 직위 이상인 자와 친일행위가 뚜렷한 자에 대해 역사적 실증적 검증을 거쳐 친일행위자 명단을 선정했다”며 평가의 정당함을 밝혔다. 하지만 한일합방 때까지 거슬러 가면 거의 100여 년 전에 이뤄진 행위들에 대해 지금 살고 있는 사람들이 명확하고 객관적으로 친일행각을 분별하고 판단하는 것이 가능할까. 복거일 씨의 『죽은 자들을 위한 변호-21세기 친일문제』는 친일행위를 판별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명쾌하게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친일행위는 정의하는 것 자체가 어렵다. 식민통치 시기의 어떤 행위가 친일행위로 비판되려면 그것은 불법적이고, 자발적이고, 조선인들에게 해로웠어야 한다. 어떤 사람이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었을 때에만, 그는 자신의 행위에 대해서 도덕적으로나 법적으로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흔히 친일행위로 규정되는 행위들은 대부분 위의 세 가지 조건들을 충족시키지 못한다.

우선 친일행위라 여겨지는 것들의 대부분은 당시엔 합법적이었다. 징집, 천황숭배 등은 조선인들이 이행해야 할 의무였고, 이에 응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불법이었다. 또한 일본의 식민통치는 공식적이었고, 혹독했고 길었다. 따라서 조선 사람들은 그저 연명하기 위해서라도 자발적인 친일 행위를 해야만 했다. 이에 저항할 수 있는 사람은 어쩌다 한두 명일 뿐이었다. 마지막으로 정복된 나라의 관료조직은 정복자를 위해 봉사함으로써 실제로는 피정복민의 삶을 덜 어렵게 만든다. 이 점에서 식민통치 조직에 조선인들이 충당되었다고 해서 이 사실이 조선인들에게 해로웠다는 주장도 성립되기 어렵다.

이런 상황에서 친일행위에 대해 어디까지가 강제된 것이고, 어디서부터 자발적인 것인지 규정하기가 모호해진다. 때문에 일제에 협력한 친일행위는 명확하게 판단할 수 있다는 주장과 국가가 없었을 때의 친일은 기본적으로 생존 수단이었다는 주장 등이 여전히 논란이 되고 있다. 이러한 갈등 또한 본질적으로 친일행위를 정의하기 어렵다는 사정과 무관하지 않다.

다음으로, 지금 실제로 사람들에게 난해한 친일행위에 대한 개념을 적용해 친일파를 가려낸다는 것은 여러 사정들 때문에 훨씬 더 어렵다. 먼저 친일 행위를 했다고 비난받는 사람들은 이제 거의 모두 죽었다. 따라서 자신이 처했던 상황과 이에 대한 판단을 밝힐 수 없고, 잘못된 비난에도 자신을 변호할 수가 없다. 또한 행위들이 일어난 뒤로 너무 긴 시간이 지나 증거들은 대부분 없고, 증언을 얻기 힘들다. 따라서 친일행적을 밝히려는 사람들은 주로 문헌, 신문과 같은 기록된 것들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사실들은 후대 사람들이 선대 사람들의 삶을 재구성해 평가하는 데 큰 제약이나 갖가지 편향이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록된 것들이 증거로 많이 채택되기 때문에 친일파 명단에 문인들이 유난히 많이 오른다는 사실은 이 편향의 현주소를 잘 보여준다. 이번에 편찬된 친일인명사전에도 음악가 안익태, 홍난파와 무용가 최승희, 소설가 김동인과 시인 서정주 등 일제시절 활동한 여러 문화, 예술인들이 수록됐다. 평가에 활용된 증거들은 대부분 음악 작품이나 신문에 실린 글 등이다.

마지막으로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는 반세기 전에 일어난 행적들에 대해 도덕적으로 비판하고 평가할 충분한 자격을 갖고 있지 못하다. 지금 살고 있는 사람들은 혹독하고 무자비했던 식민통치를 겪어보지도 못했다. 더군다나 일제강점기 조선엔 정치적 자유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조선인들은 조선총독부로부터 반체제적이라는 판정을 받고도 살아남기는 힘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인 모두가 조선총독부의 권력에 항거해야 마땅했었다는 주장을 펼 수는 없는 것이다. 자유로운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가 어려운 상황에 살아야 했던 이들을 단죄하고 평가할 만큼 도덕적 권위를 갖고 있다고 말하기도 힘들다.

이처럼 친일행적에 대한 현 사회의 평가는 많은 문제점과 어려움을 동반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친일파 청산이야말로 과거를 올바로 보는 길이자 발전적인 미래를 위한 과업인 것처럼 받아들이고 있다. 일각에서는 우리 사회가 이제는 친일 문제를 올바르게 평가할 만큼 성숙됐다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여전히 우리 사회의 친일논란은 그것의 객관적 사실 여부를 떠나 사람들의 격정적 반응을 불러 일으켜왔다. 영화 <청연>에 대한 친일 논쟁이 대표적이다. 일제강점기에 조선 최초의 여류비행사였던 박경원을 소재로 한 이 영화는 친일 경력이 의심되는 인물의 삶을 담았다는 이유로 관객들에게 철저히 외면당해야만 했다. 인터넷을 통한 불매운동까지 벌어져 영화는 거의 사장되다시피 했다.

이 점에서 친일인명사전 발간은 그 자체에 의의를 두기에는 많은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친일인명사전에 기재됐다는 이유만으로도 그 당사자는 물론이고 남겨진 가족까지 사회적으로 '친일’의 낙인을 찍힐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그것이 편찬단체의 잘못된 판단으로 인한 기재였다면 문제는 더욱 심각해진다.

친일인명사전은 현재의 관점에서 식민지 시대 사람들을 '친일협력행위 대 독립운동’, '친일 대 반일’, '애국 대 매국’ 등으로 이분법적으로 나눠 평가할 수 있다는 가정을 전제하고 있다. 하지만 엄혹했던 시기의 많은 사람들을 두 가지 행태로만 분류할 수도 없을뿐더러, 과거에 살았던 사람의 복합적 삶의 단편적 내용만 골라 친일의 낙인을 찍는 것은 결정적 오류를 범할 수도 있다.

아직 우리 사회에선 일본식민지 시대에 대한 객관적 평가와 성찰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그 점에서 “친일 행위들은 역사학자들이 과학적 방법론에 따라 '조선에 대한 일본의 식민통치’라는 큰 주제의 한 부분으로 다루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복거일 씨의 주장을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 친일 행위는 반세기 전에 일어난 역사적 사건들이므로, 이제 이런 일들은 역사학의 영역 속에 자리 잡는 것이 온당하다는 것이다. 친일 청산이 한국사회의 해묵은 과제라는 구호에 얽매이기보다, 식민지 시대 자체를 과학적으로 성찰할 수 있어야만 과거를 올바로 보고 발전적 미래를 그릴 수 있다는 인식이 전적으로 요구되는 때다.

Posted by 자유기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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