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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10.23 서민정책의 함정

서민정책의 함정

시민논객 2009. 10. 23. 09:00



어느 순간부터 친서민이라는 말을 입에 달지 않고서는 정치인으로 살아가기 힘든 현실이 되었다. 이것은 반면, 친서민이라는 말이 정치적 수사로서 그만큼 매력적이라는 의미도 된다. 얼마나 매력적인지는 지지율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던 이명박 대통령조차 서민정책을 모토로 내세운 이후에는 지지율이 급격히 올랐다는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친서민을 자신의 정치적 좌표로 삼는 것을 문제 삼고 싶지는 않다. 각자의 정치적 방향성은 스스로 정하는 것이다. 다만 친서민이라는 이념적 좌표가 서민정책의 모습으로 현실에 발을 딛는 순간 비극은 시작된다.

정책이란 모름지기 그 대상과 목표가 분명해야 한다. 서민정책의 첫 번째 문제점은 정책 목표는 분명하나 정책 대상이 불분명하다는 것이다. 과연 서민이란 무엇을 뜻하는가? 여기에 확실하게 대답할 수 있는 정치인이 얼마나 될까?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서민을 재산과 소득수준으로 평가하고 인식한다. 하지만 재산과 소득수준은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부모로부터 많은 재산을 물려받았지만 직업이 변변치 못하여 소득이 적은 사람도 있고,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은 적지만 열심히 일하여 높은 소득을 올리는 사람도 비일비재하다. 때문에 서민을 나눌 때 재산을 주된 기준을 삼을지 소득을 주된 기준을 삼을지 부터가 문제다. 설사 두 가지 모두를 적당한 선에서 맞춘다고 해도 문제는 여전하다. 재산과 소득의 분포는 계단처럼 단절된 그래프가 아닌 길게 이어진 곡선으로 표현된다. 이 곡선의 어느 부분을 잘라서, 이보다 재산이나 소득이 낮은 사람을 서민으로 부를 것인지를 합의하는 것은 무척 어렵다.

문제를 더 심각하게 하는 것은 서민이라는 용어가 법적 또는 사전적 의미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개개인마다 다른 기준에서 심정적 의미로 받아들여진다는 점이다. 서민에 대한 법적 정의는 없다. 하지만 사전적 정의는 존재한다.(여기서 사전적 정의의 옳고 그름을 논의하는 것은 생략하자.) 서민의 사전적 정의는 경제적으로 중류 이하의 넉넉지 못한 생활을 하는 사람이다. 즉 중산층이하의 사람들을 의미한다. 그럼 우선 중산층을 정의하고 나서 서민에 대해 살펴보자.

중산층을 정의하는 방법은 다양하나 OECD기준에 따라 흔히 중위소득을 기준으로 중위소득의 50~150%에 해당하는 사람들로 본다. KDI보고서에 따르면 '2007년 4인 가족 가처분 소득 기준’으로 한달 290만원이다. 즉, 145~435만원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중산층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따라서 서민이란 4인가족 기준으로 소득이 145만원 이하인 사람들을 의미한다. 이는 정치적 용어로 빈곤층과 차상위계층을 의미하고 보통 500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 그러나 스스로를 서민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보다 훨씬 많다.

이것은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정치인들의 인식도 이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즉 표를 생각할 수밖에 없는 정치인의 속성상 서민의 범주를 확장시켜 인식할 수밖에 없다. 더 많은 인기영합적인 정책들과 막대한 재정지출이 따를 것은 불 보듯 뻔하다. 결국 정책 대상이 불분명하다는 것은 대상이 무한정 확대될 수 있다는 것이고, 이것은 더 많은 세금을 의미할 뿐이다.

서민정책의 두 번째 문제는 그것이 필연적으로 특정집단의 특정이익을 위한 정책이 될 수 밖에 없다는 점이다. 정책은 입법을 통해 효력을 발휘한다. 법은 특정인이나 특정집단을 위해서가 아닌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고 일관되게 적용될 수 있을 때에 진정한 법으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불행히도 우리 사회에서는 이러한 원칙에 위배되는 법들이 너무도 쉽게 제정된다.

이러한 입법의 대표적인 예가 바로 비정규직법이다. 잘 알듯이 이 법은 기존의 입법 목적을 달성하기는커녕 입법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의 처지만 악화시키는 결과를 불러왔다. 서민정책의 미래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서민정책은 정부가 해줄 수 없는 것에 대한 약속들이다. 이제 정부가 솔직해져야 한다. 국가는 별로 해줄 것이 없고, 개개인의 생계와 복지는 각자가 알아서 해결해야 한다고 말해야 한다. 국가는 정말 최소한의 생존이외에는 그 어떠한 것도 보장할 수 없다고 고백해야 한다.

국민들도 바로 알아야 한다. 국가가 보장하는 것은 행복추구권이지 행복권이 아니다. 누구나 스스로의 행복을 위해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지만 그 결과 행복해 지지 못하더라도 그것은 각자의 책임이다. 부모조차 자기 자식을 행복하게 해줄 수 없다. 하물며 국가가 국민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다는 생각은 하이에크가 말한 치명적 자만의 전형이다.

정부와 정치인들이 진실로 고민해야 할 것은 행복을 추구하기 위한 조건들을 확립해 주는 것이다. 하이에크가 말한 것처럼 '정부를 필요로 하는 공공재화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특수한 욕구들을 직접 충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개개인들과 소규모 그룹들이 각자 자신들의 욕구를 충족하기 위한 유익한 기회들을 찾을 수 있는 조건들을 확립하는 것이다.’라는 점을 분명히 인지해야 한다.

서민이라는 용어는 우리 정치 현실의 부끄러운 이름이자, 정치인들에게는 모욕과도 같다. 정치인의 생명은 정직성이다. 자신이 하는 말의 의미를 분명히 알고 거기에 책임지는 것은 정치인으로서의 기본이다. '서민’이라는 용어를 운운하는 것은 결국 제대로 알지 못하는 말, 지킬 수도 없는 말을 남발하는 우리 정치인들의 부끄러운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 일뿐이다.

어떤 의미에서 대한민국의 모든 정치인들은 친서민적이다. 이것은 모든 정치인들이 따뜻한 가슴을 가졌다는 의미가 아니다. 친서민이라는 가면 속에 감춰진 속내는 언제나 같다. 더 이상 거기에 속아서는 안 된다. 친서민이라는 감정적이고 동정적인 용어에 흔들리는 순간 우리는 서민정책의 함정에 빠지고 말 것이다.

 


Posted by 자유기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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