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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8.28 [자유주의자와의 대화] 금난새 지휘자


“가족들이 보고 싶어요. 이제는 집에 가세 해 주세요.” 제1 바이올린들이 힘든 목소리를 냈다. “맞아 맞아. 이제는 도저히 못 견디겠어요. 여섯 달 동안이나 집에 돌아가지 못하게 하는 것은 너무해요.” 제2 바이올린들이 맞장구를 쳤다. 첼로는 웅얼거리고, 호른은 점잖게 동조했다.

230년 전 하이든이 작곡한 교향곡 제45번 고별. 귀로 들려오는 그 선율이 내게 한편의 동화처럼 펼쳐졌다. 금난새의 해설이 있는 음악회에서 내게 일어난 일이다. 공연이라 봐야 뮤지컬 몇 편 본 것이 전부인 나로 하여금 클래식을 느낄 수 있게 한 것은 금난새의 해설 때문이었다. 폭소를 자아내는 그의 해설이 나같은 사람들까지도 뒤에 따라 나오는 악기 소리들의 의미를 깨닫게 해준 것이다.

해설이 있는 음악회에 대한 소문은 들었지만 호들갑이려니 생각했다. 그러나 나의 눈과 귀에 들어오는 연주회는 기대 이상이었다. 해설은 톡톡 튀게 재미와 위트가 넘쳤고, 그 해설이 있음으로 연주는 동화책장을 넘기듯이 스토리와 의미를 가지고 펼쳐졌다.

2부는 브람스의 교향곡 제1번 무슨 단조 어쩌고 하는 곡이었다. 제목조차 잘 기억이 안 나지만 감동은 더 했다. 1부의 하이든이 동화라면 2부의 브람스는 기승전결이 분명한 역사소설 같았다. 십여 대의 현이 뽑아내는 섬세하면서도 동시에 굵직한 소리들, 관과 타악기의 강렬한 두드림. 이런 것들이 나의 모든 감각기관들을 압도했다. 무대 위에서 만들어진 진동은 객석에 앉은 나의 눈과 귀를 자극하는 것으로 모자라, 피부를 뚫고 들어와 뼈 속을 울릴 정도였다. 온몸의 근육들이 움찔거리는 느낌. 다른 청중들 눈치를 안봐도 되는 장소였다면 아마 나도 모르게 일어서서 금난새를 따라 팔과 다리를 흔들어 댔을 것이다.

아~ 그래서 금난새구나, 싶었다. 그 음악회에서 나는 금난새의 개인적 매력에 빠져 들었고 클래식의 매력을 처음 알게 되었다.

사실 금난새를 대화에 초청한 것은 그의 생활태도 때문이었다. 무엇보다도 그의 독립적이고 도전적인 자세가 자유인의 철학과 맞다. 그는 KBS 교향악단의 상임지휘자라는 안정된 자리를 버리고 수원시향을 택한다. 수원 시향을 어느 정도의 궤도에 올려놓은 후 그는 더 큰 도전에 나선다. 유라시안 필하모닉이라는 순수한 민간오케스트라를 만든 것이다. 스스로 음악감독이자 CEO가 되었다. 스스로 자랑스럽게 말하듯이 정부 돈은 한 푼도 받지 않는다. 고상한 음악가가 다른 사업가들과 마찬가지로 고객을 감동시켜야만 생존이 가능한 일에 도전하고 나선 것이다. 그리고 연간 100회가 넘는 연주회를 하고 있으니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그런 사실들에 마음이 끌려서 금난새를 모시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그의 연주회에 가본 후 나는 그의 철학과 생활사보다는 그가 만들어내는 음악과 음악 이야기에 더 매료되고 말았다.

워낙 바쁜 사람이라 스케줄 잡기가 쉽지 않았다. 겨우 밤 시간의 짬을 얻어서 예술의 전당 건너편 그의 집무실을 찾았다. 아직도 밤 공기가 제법 쌀쌀하던 날이었다.


한 때 ‘내 탓이요’ 운동이 있었는데요. 금선생님은 그런 원칙에 충실한 분이어서 모셨습니다. 우리나라 고전 음악의 낙후를 청중의 무지 탓으로 돌리지 않고, 오히려 청중에게 기쁨을 줘서 예술을 사랑하는 소비자를 만들어내는 태도. 또 안정된 지원금을 마다하고, 돈 한 푼 없이 <유라시안 필하모닉>이라는 독립적인 음악 기업을 만들어 스스로의 힘으로 성공시킨 것도 그런데요. 어떤 계기로 그런 자세를 가지게 되었습니까?

성장환경 때문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제가 둘째로 태어났습니다. 보통 첫째들이 모범생 기질이 있다면 둘째들은 반항적이고 창의적인 기질을 타고 나는 것 같습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어릴 때 부모님들께서 “학교 가서 좋은 친구 만나라.”하시잖아요. 그럼 그래야지라고 수긍하기 보다는 ‘내가 좋은 친구가 되어야 좋은 친구를 만날 수 있는 것 아닌가?’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어릴 때부터 다소 독특하고 반항적 기질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러다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게 남은 장면이 있는데, 60년 대 케네디 대통령 취임식 연설 장면입니다. 국가가 당신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묻지 말고, 당신이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물어라 - 그 말이 당시 중학생인 제게 깊게 남았습니다. 그 때 사회에 기대기보다는 내가 사회에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라는 생각을 강하게 가지기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지휘자라는 직업도 그렇게 선택하게 되었나요?

예, 그렇습니다. 제가 대학에 입학하던 66년도에는 지휘과라는 것은 없었습니다. 저는 당시 음악이 발전하려면 음악과 관련된 모든 분야가 고루 발전을 해야 한다고 생각을 했고, 그래서 지휘를 하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대학에 들어가 독학으로 지휘를 공부하면서 동아리를 하나 만들게 되었는데요. ‘서울 영 뮤지션 앙상블’이란 이름의 서울예고 출신의 동기, 선후배들이 모인 오케스트라였습니다.

동아리를 만들기는 했는데 연습장소가 문제였습니다. 25~35명의 인원이 모여서 연습할만한 장소를 찾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 때 광화문의 미국 문화원 생각이 나더군요. 도서관 때문에 그곳에 자주 갔었는데 2층 100여 평의 강당이 늘 비어 있더라고요. 과감하게 원장실을 두드리고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말했죠. 내가 패기 있는 젊은이들로 구성된 좋은 오케스트라를 가지고 있다. 우리에게 연습장소로 2층 강당을 제공해달라! 그러면 우리가 그 대가로 연주회 때마다 미국 음악가인 거쉬인, 사무엘 바버 등의 곡을 꼭 한 곡씩 연주하겠다고 했습니다.

여지껏 미국 문화원은 문화 전파의 도구로 도서관, 영어 회화 등만을 생각했습니다. 음악은 생각을 못 했던 거죠. 제 제안을 들으시더니 흔쾌히 승낙을 했습니다. 그 때부터 영 뮤지션 앙상블은 서울 미국 문화원에서 연습을 할 수 있었고, 광주, 대구 등 지방 미국 문화원에서까지 연주회를 할 기회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나중에는 미국 음악협회로부터 공로상까지 받고요. 그것을 통해, 저는 지휘공부를 할 수 있었고, 단원들은 오케스트라와 현장감을 익히는 공부를 하게 될 수 있었던 거죠.

일반적으로 리더라면 터프한 이미지가 떠오르는데, 금 선생님은 사람들에게 이익을 주어 따르게 만드시는 군요. 어릴 적부터 윈-윈의 해법을 찾는 능력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사실 그런 거창한 생각 때문에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단지 한 가지 생각뿐이었습니다. 내가 오케스트라의 단원들과 문화원 원장님께 도움을 받는 만큼 그들에게 기여하겠다고 말입니다.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고, 그 긍정적 에너지를 조화시켜 목적을 달성한다는 사고방식이 요즘 CEO들의 사고방식과 굉장히 비슷해 보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금난새 선생님을 ‘예술CEO’라고 부르는가 봅니다. 예술CEO 금난새와 일반적인 지휘자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답부터 말한다면 저는 지휘만 하는 지휘자가 아닙니다. 저는 음악으로 세상을 바꾸고 싶어 하는 음악가입니다. 저는 그런 결심을 독일 유학시절, 베를린필하모닉의 연주회장에서 했습니다. 연주되는 곡은 베토벤의 전원교향곡이었는데요. 태풍이 몰아치는 3,4악장을 지나 햇볕이 따스한 5악장이 울려 퍼졌습니다. 작곡자인 베토벤이 살아서 들었으면 정말 행복 했겠다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훌륭한 연주였습니다. 나무나 감동적이어서 눈물이 났습니다. 그런데 그 감동은 단순히 연주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공연장을 꽉 메우고 열심히 듣는 청중, 음악에 대한 사랑으로 충만한 바로 그 청중들의 분위기를 느끼는 순간 나도 음악으로 우리 사회를 이렇게 만들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지휘라는 나무를 보러 독일에 갔지만 음악이라는 숲을 보게 된 거죠. 전 청중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지휘자가 되고 싶다고 결심했습니다. 나만 잘났다고 으스대는 지휘자가 아닌 음악을 이해하고 내 지휘에 감동해주는 청중이 있는 사회를 만들고 싶었던 거죠. 독일은 네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금 선생님의 그같은 생각과 철학들이 오케스트라 연주에 반영이 됩니까?

물론입니다. 지휘자는 작곡가와의 교감을 통해 작곡가의 의도를 창조적으로 파악해야 합니다. 연주에 제 철학이 반영되기 마련이지요. 뿐만 아니라 지휘자는 연주자를 격려하고 좋은 연주를 할 의욕을 북돋워야 합니다. 저는 지휘자라고 해서 지휘만 하기 보다는 단원들과 공감하면서 함께 가치를 창조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지휘자와 오케스트라를 이끄는 사람이 중요한 이유는 또 있습니다. 국가나 공공기관으로부터 예산을 보장받는 악단과 그렇지 않은 곳 사이에는 자세에 차이가 생깁니다. 사실 오케스트라를 비롯한 우리나라의 제도권 예술단체들은 정부나 지차체 등으로부터 예산을 배정받기 때문에 노력을 덜합니다.

공무원 같은 태도를 말하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정부 돈은 결국 국민들이 세금으로 낸 돈입니다. 대통령이든 장관이든 그 돈을 쓸 때는 항상 납세자에게 보답하려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자기랑 친하다는 이유로, 제도권 안에 있는 단체라는 이유로 예산을 주는 것은 후진국적인 발상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나라 돈을 받고도 열심히 하지 않는 문화단체도 옳지 않습니다. 모두들 세금을 낸 사람들에게 충분히 보답해야 합니다.

그러면 좋은 대안이 있으신가요?

지금은 큰 단체에 예산을 몰아주는 방식입니다. 예를 들어 서울 시향이나 KBS 교향악단은 각각 100억원 안팎의 큰 금액을 지원받고 있습니다. 저라면 그 돈을 한 군데에 몰아주는 대신 20억원씩 쪼개서 여러 군데를 지원하고 경쟁하게 하겠습니다. 그 나머지 예산은 스스로 조달하게 하는 거지요. 생각만 바꾸면 나머지 예산도 얼마든지 조달할 수 있습니다. 우리 유라시안 필하모닉은 정부의 지원을 단 한 푼 받지 않고도 매년 100회가 넘는 연주를 해오지 않았습니까.

너무 큰 것만 좋아합니다. 물론 대외적으로 우리나라 음악계를 상징할 만한 큰 오케스트라가 있을 필요는 있지요. 그러나 올림픽 금메달을 많이 딴다고 해서 그 나라의 체육이 발전했다고 말하지 않듯이 음악도 그렇습니다. 큰 오케스트라가 한 둘 있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람들의 수요를 다양하게 맞출 수 있는 다양한 오케스트라와 청중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국가로부터 재정을 보장받는 오케스트라와 스스로 재정을 확보해야하는 유라시안 필하모닉 사이에는 음악적 차이도 있습니까?

하하! 매우 예민한 부분이라 답을 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것만큼은 말할 수 있습니다. 재정이 보장된 악단은 사람이 오든 말든 정기 연주회를 꼬박 꼬박 합니다. 그러나 유라시안은 청중을 찾아다닙니다. 그리고 또 다시 오라는 소리를 들어야만 살아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 연주자들이 ‘청중을 감동시켜야만 한다’는 고민을 항상 하고 삽니다. 우리 유라시안에게는 청중의 반응이 무척 소중하고 그래서 청중을 행복하게 하기위해 더 고민한다고 자신 있게 말씀드립니다.

유라시안 필하모닉의 연주회 횟수가 매년 늘어난 것을 보면 고객감동을 매번 성공시킨 듯 하십니다. 그렇게 매번 청중들을 감동시킨 비법을 여쭤보고 싶은데요.

그걸 말로 설명하기는 어렵군요. 김 원장님께서 연주회장에 와서 느껴 보시기 바랍니다. 하하! 김 원장님은 사회주의가 망한 이유를 어디서 찾으십니까? 전 그들이 고객을 생각하지 않은데 그 이유가 있다고 봅니다. 소비자를 배려하지 않고 그냥 기계적으로 공장만 돌렸어요! 저는 그렇게 의무적으로 일 하는 것을 제일 싫어합니다. 처음 청소년 음악회를 맡게 되었을 때도 정부의 사업이니까 의무적으로 시간만 때우자라는 식으로 했으면 지금과 같은 <해설이 있는 음악회>는 나올 수 없었겠죠. 전 청소년 음악회가 미래 청중을 만들 수 있는 소중한 기회라고 생각했고, 해설을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췄습니다. 제목도 더 친근하게 <금난새와 함께하는 세계음악여행>으로 짓고요. 제가 해설을 하겠다고 했을 때 다들 비웃고 말렸지만 첫날 매진, 그리고 뒤 이은 연주회들도 모두 매진되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청중과 호흡해 왔고, 앞으로도 청중이 원하는 것을 할 것입니다.

그렇게 청중들의 취향을 맞추다 보면 대중성이 너무 짙다느니, 예술성이 훼손되다느니 하는 비난도 있을 것 같은데요.

아니지요. 유라시안 필하모닉은 청중들에게 다가가기를 원하지만 크로스 오버나 대증음악을 연주하지는 않습니다. 저는 사찰에서 도 닦는 스님 아닙니다. 저는 사랑을 받아야 하는 아티스트입니다. 사람들은 쉬운 것을 우습고 가볍게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 선입견 좋지 않다고 봅니다. 저는 유치원 아이에게는 유치원 아이에게 맞는, 고급 관객에게는 고급스러운 음악과 해설을 선물하고 싶습니다.

현 조지 W. 부시 미국대통령의 부친인 조지 부시 전 미국대통령이 2005년 한국을 방문했을 때 그 앞에서 연주회를 할 기회가 있었어요. 비발디의 사계를 연주하게 되었는데, 연주에 앞서 제가 이런 질문을 했지요. “전 청소년을 위한 해설이 있는 음악회를 자주 합니다. 대통령께서도 제 해설을 들어보시겠습니까?” 부시 대통령이 수준에 안 맞는다고 화를 냈을까요? 전혀 아닙니다. 오히려 감동을 받고 나중에 함께 찍은 사진을 사인까지 해서 보내줄 정도로 마음에 들어 했습니다. 청중이 원하는 것에 맞춰 음악을 서비스하는 것을 가벼운 일이라고 생각지 않습니다.

금 선생님의 그런 생각에 맞춰 유라시안 코퍼레이션도 점점 사업이 다양해지는 것 같던데요. 최근에는 음악을 케이터링 하기도 하고요. 유라시안 코퍼레이션의 사업에 관해 구체적으로 들을 수 있을까요?

처음에는 유라시안에 대해 부정적이던 사람들이 요즘 다들 우리 유라시안을 벤치마킹 하는 바람에 사업 내용을 공개하기가 망설여집니다. 구체적인 사업 내용은 영업비밀이라고 생각해 주시지요. 그러나 신동아 독자들께 한 가지만은 말씀드리죠. 비행기가 계속 떠있으려면 프로펠러가 계속 돌아가야 되듯 유라시안도 계속 새로운 사업을 확대해야 하고, 실제로도 그렇게 해나갈 겁니다.

유라시안을 경영하시면서 기업들의 후원도 받으신 적이 있지요? 기업들의 메세나 활동과 예술단체의 관계에 대한 금 선생님의 생각은 어떠신가요?

우리 유라시안은 단 한 번도 기업으로부터 받은 돈을 공짜라고 생각한 적 없습니다. 받은 돈 만큼의 반대급부를 기업체에게 돌려주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훌륭한 연주를 하는 것은 기본이고 후원기업체의 이미지 향상을 위해서도 늘 고민했습니다.

우리가 하는 프로젝트 중 육사, 공사, 해사를 찾아가는 연주회가 있습니다. 처음 시작은 해사 교장님께서 제게 강의를 부탁하면서지요. 그런데 전 사실 강의 잘 안합니다. 전 음악하는 사람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 오케스트라가 갔습니다. 깜짝 연주회를 하면서 그 돈의 출처가 CJ그룹임을 밝혔어요. 학생들도 교장선생님도 모두 CJ그룹에 대한 이미지가 좋아졌을 것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우리는 미래의 엘리트 군인들에게 우리의 음악을 들려준다는 자부심과 그들의 열렬한 호응을 얻었으니 최고의 윈-윈이었다고 평가합니다. 그래서 기업들이 유라시안을 주목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그 점에 대해서 무척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나중에 CJ그룹이 사법연수원과도 연주회를 연결해줬는데 거기서는 더 뜨거웠습니다. 앙코르 연주를 끝내고 단원들이 모두 주차장으로 갈 때까지도 기립박수가 멈추지 않았지요. 할 수 없이 다시 강당으로 들어가 계획에 없던 또 한번의 앙코르 연주를 시작했습니다. 지금은 CJ그룹으로부터의 지원이 끝난 상태인데요. 그랬더니 사법연수원 측에서 자체적으로 스폰서를 구해 우리에게 연주회를 요청했습니다.

주차장까지 갔다가 다시 들어와 두 번째 앙코르 연주를 했다... 영화 속의 한 장면 같군요. 유라시안은 단원이 몇 명이고 어떤 시스템으로 부수가 이뤄지나요?

우리는 2007년 1월부터 단원과 계약을 하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비정규직이랄까요. 보수도 콘써트마다 지급하고요. 외형적으로만 보면 예전에 비해 단원들의 지위는 더 불안정해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원들의 애정과 열정은 여전하니 이것이야말로 영화 같은 일이고 기적입니다. 이점에 대해 항상 단원들에게도 감사하고 있습니다.

금 선생님께서는 우리나라 음악교육에도 관심이 있으시죠? 현재 우리나라 음악교육의 수준과 문제점, 그리고 금 선생님이 생각하는 해결책을 듣고 싶습니다.

우리나라 음악교육의 문제는 대학 들어가기만 너무 어렵다는 것입니다. 전체적인 음악 시장이나 음악계는 생각 안하고 다들 개인적으로 학교 들어갈 생각만 합니다. 전 어린 학생들이 이 금난새를 주목해줬으면 합니다. 내가 왜 솔리스트가 아닌 대중과 호흡하는 지휘자가 되고 싶어했는지에 대해서 말입니다. 전에는 선생님이 되겠다는 생각을 전혀 안했지만 나이 먹고 경험이 쌓이다보니 요즘은 교육도 제가 할 일 중 하나라고 여기게 됩니다.

오늘 인터뷰를 하면서 보니 금 선생님은 정말 음악으로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한 철학이 가득한 분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계명대에서 받으신 명예 철학박사 학위도 자연스레 납득이 갑니다.

부끄럽습니다. 계명대와는 연주회를 한 적은 있지만 개인적 친분은 전혀 없는데 저를 위해 교내외에서 800여 명이 참가한 별도의 수여식을 준비한 것을 보고 정말 많은 것을 느꼈습니다. 이 사회는 제게 많은 숙제를 줍니다. 제가 사회에서 받은 것들을 어떻게 돌려 드려야 할 지 고민 또 고민입니다.

마지막으로 신동아 독자 분들께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퍼스트 클래스 석을 돈으로 살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퍼스트 클래스에 어울리는 높은 교양과 성숙한 정신은 돈으로 살 수 없습니다. 전 해외여행 할 때 자주 이코노미석을 타지만 그것으로 인해 저와 제 음악의 품위가 떨어진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의 가치는 남에 의해 정해지지 않습니다. 내가 어디에 있든 노력하고 열심히 사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정신이 살아있는 사회가 되려면 문화가 중요하지 않을까요? 그런 문화를 만들기 위해 항상 노력하는 금난새와 유라시안의 음악회에 신동아 독자 분들을 초대합니다.

저도 꼭 가보겠습니다. 긴 시간 인터뷰 감사드립니다.


그는 멋을 알고 즐기는 사람이었다. 서초동 예술의 전당 부근의 집무실에 들어서면서부터 그의 멋이 느껴졌다. 꽤 넓은 홀에 작은 쇼파와 피아노 한 대. 트인 공간이었다. 연주를 위한 공간 같기도 했지만 시각적인 여유로움을 위해서도 공간을 비워 놓은 것 같았다.

악수 하려고 손을 내민 금난새의 모습도 그의 집무실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밤 8시였는데도, 그는 완벽한 정장 차림이었다. 젤을 발라서 가지런히 뒤로 넘긴 머리카락! 한 올도 허투루 날리지 않을 것 같았다. 넥타이는 젊은 사람들만 소화해낼 것 같은 좁은 것이었는데도 그에게 잘 어울렸다. 바지는 한국의 직장인이 입는 것보다 길이가 약간 짧았다. 아마도 국제적 취향 때문인 것 같았다.

직접 날라 온 투명한 유리 주전자도 멋졌고, 김을 내며 담겨져 있는 홍차도 정갈하고 맛있었다. 차를 직접 내게 따라준 후, 우리 둘 사이에 놓인 작은 불 위에 주전자를 올려놓고서야 그는 말을 하기 시작했다.

열정. 그와의 대화에서 느껴지는 것은 그것이었다. 한번 말을 시작하면 끊기가 어려울 정도로 확신과 열정이 가득한 문장들을 쏟아 내었다. 그런 태도가 그를 신뢰하게 만들었다. 금난새가 마음을 먹으면 반드시 이루어내겠구나 하는 믿음이 생겼다. 그것이 있기 때문에 수 십 명의 개성 강한 음악가들을 움직여서 청중을 감동시키는 연주를 만들어 내겠구나 싶었다. 누구에게도 손 벌리지 않고 당당하게 자유인으로 살아가려면 저 정도의 자신감과 설득력을 갖춰야 한다.

여덟시에 시작한 인터뷰가 원래 약속한 열 시를 30분이나 넘겼는데도, 그는 말을 멈출 기색이 없었다. 계획했던 질문은 더 남았는데. 사진도 찍어야 했다. 거기서 대담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몸은 힘이 드는데도 기분은 좋았다. 멋진 사람. 힘이 넘치는 사람을 만나서 기를 받았기 때문일까. 나 자신 왠지 조금은 고급스러워졌다는 느낌을 지닌 채 예술의 전당이 가까운 밤길로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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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자유기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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