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을 잡다’
새벽1시, 5호선 송정역 서울방향 버스 정류장에는 십 수명의 사람들이 휴대폰과 PDA의 화면만을 응시하며 서있습니다. 대리운전 기사들입니다. 올 겨울 그런 사람들이 부쩍 늘어난 것 같습니다. 새벽 1시 10분 정도에 영등포로 가는 심야버스가 도착합니다. 그 시간에 버스에 사람이 가득차서 도착합니다. 버스에서 내리는 5-6명의 사람들 대부분이 단말기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습니다.
바로 콜을 잡기 위해서입니다. 소비자가 업체에 대리운전을 신청하고, 업체는 그 정보를 일정 수수료를 받고 대리운전 기사에게 보내주어 연결시켜줍니다. 자신이 있는 곳에 해당하는 정보는 다른 사람보다 빨리 확인하고,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잡아 놓아야 비로소 손님과 전화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것을 콜을 잡는다고 합니다.
정류장에 있던 사람들이 버스에 올라탑니다. 새벽1시의 버스는 만원입니다. 앉아있는 사람, 서있는 사람 포함해서 족히 50명 정도는 되는 것 같습니다. 열기가 후끈하고, 버스창문에 김이 서려있습니다. 화면만을 응시하는 수많은 사람들. 거의 대부분이 대리운전 기사입니다. 여기저기서 업체에서 콜이 오는 삑삑 소리가 들립니다. 두 손에 삑삑 거리는 휴대폰을 들고 잠이 든 사람도 있습니다. 30대부터 60대까지 연령층도 다양합니다. 옷차림도 다양하지만 매우 단정합니다. 옆에서 기사들이 이야기하는 것을 들으니 손님들이 옷차림이 단정하지 못하면 매우 싫어한다고 합니다.
“대리기사입니다. 지금 어디시죠?”
한 사람이 버스로 이동하면서 콜을 잡았습니다. 바로 다음 정류장입니다. 사람들이 표정이 미묘하게 엇갈리는 순간입니다. 모두다 지금 저 말을 하기만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다행스러움과 아쉬움이 교차하는 그 일순간은 정적이 흐릅니다.
저는 처음에 새벽 1시-2시에 다니는 심야버스가 이렇게 만원버스라는 것에 놀랐습니다. 두 번째는 대부분이 대리운전 기사라는 것에 놀랐습니다. 그리고 요즘은 대리운전 기사 중에 젊은 사람들과 여성이 많아졌다는 것에 놀라고 있습니다.
“오늘은 어디로 가실건가요?”
기억나는 모습들이 있습니다.
근처에서 콜은 잡았는데 타고 있는 버스는 막 정류장을 출발했고, 지금 못 내리면 다음 정류장까지 거리가 굉장히 멀어 당황하고 초초한 모습으로 버스기사한테 가서 망설이고 망설이다 내려달라고 부탁하던 30대 후반 정도의 여자 대리기사의 모습. 딱 봐도 대리운전 시작한지 얼마 안 된 것처럼 보였던 그녀. 아는 사이인 듯 대화하는 할아버지 대리운전 기사와 중년 대리운전 기사, 그리고 며칠 전 본 내 또래의 대리운전 기사.
버스 세워줘서 고맙다고 몇 번이나 인사하고 내리는 여자 대리운전 기사의 모습을 보는데,
머리가 희끗희끗한 할아버지 대리운전 기사에게 “어르신, 오늘은 어디로 가실 건가요?” 라고 물어보는 중년 대리기사를 보는데, 사실 나보다 더 어려보이는 청년이 콜을 잡으려고 화면만 응시하는 것을 보는데 왜 저의 코끝이 찡했던 것일까요?
요즘 대리운전업체는 실직자와 실패한 자영업자들이 몰려들어서 포화상태를 이룬다고 합니다. 사실 대리운전은 운전면허만 있으면 할 수 있기 때문에 실업자의 마지막 보루로 여겨져 왔습니다. 예전에는 낮에는 직장, 밤에는 대리운전을 하던 투잡족이 많았다면, 최근에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운전대를 잡는 사람들이 다수입니다.
현재 정부의 평가와 달리 서민들이 체감하는 경기는 최저 수준에 가깝습니다. 성장률 회복은 큰 재정적자를 감수하며 지출을 늘렸기 때문에 가능했지만, 정작 민간부문의 회복은 본격적으로 이뤄지지 않고 있습니다. 특히 서민의 체감 경기와 밀접한 고용상황은 아주 좋지 않습니다. 정부의 공식 실업률은 3%대에 머물고 있지만, 취업준비 등을 합친 실질실업률은 12%를 넘고 있기 때문입니다.
1월 중순 통계청에서 발표한 고용동향을 보면 2009년 고용시장은 외환위기 이후 11년 만에 최악을 기록했습니다. 지난해 12월 취업의사가 없거나 사실상 포기한 비경제 활동인구가 사상 최대를 기록했고, 고용률 악화, 여성의 일자리 감소, 취업자 감소, 실업자 증가 등 고용시장이 얼어붙는 것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비경제활동인구 사상최대 1625만명
(15세 이상 인구 가운데 취업자와 실업자를 뺀 나머지 인구, 실업자에는 분류되지 않음, 상당부분은 실제 직장을 원하지만 여건이 안돼서 노동시장에서 퇴장한 사람으로 볼 수 있음)
25세~49세 산업 주력 연령층 취업자수 1492만명
(전년보다 25만 7천명 감소)
고용률 57.6%
(고용률은 취업자를 15세 이상 인구로 나눔, OECD평균 62.6%)
여성 고용률 46.2%, 남성 고용률 69.5%
(특히 60대 이상 여성의 고용률은 10년동안 22%나 하락)
2009년 취업자수 2350만명
(2008년보다 7만 2천명 감소)
2월이 되어 고등학교, 대학교의 졸업생 50-60만명이 쏟아져 나오면 올 초의 고용지표는 더욱 악화될 것입니다. 노동부에서 얼마 전에 발표한 지표 하나를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2009년 실업급여 지급액 사상 최대 4조 1164억원(전년보다 31.4% 증가)
2009년 신규 실업급여 신청자 수 사상 최대 107만명(전년보다 28%증가)
이런 시기 그나마 다행스런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30대 그룹이 올해 87조원을 투자하고 7만 9천명을 채용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습니다. 특히 현대차, LG, 포스코 등은 창사 이래 최대 규모의 투자를 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물론 대통령의 의지와 정부의 압력이 크게 작용했을 것입니다. 대기업에 무조건 일자리를 늘리라고 해서 해결책이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투자가 새로운 일자리 창출이 가능한 신산업 육성으로 이어지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정부는 고용을 늘리는 기업에 세금을 줄여주는 등의 정책적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방안을 검토해야 할 것입니다.
2008년 전 세계적 금융위기가 몰아닥친 후에 힘들어진 사람이 많아졌습니다. 뉴스와 신문에서는 우울한 보도와 기사들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정부가 설명하는 경기와 일반국민이 체감하는 경기의 차이도 많이 납니다. 그래도 어려운 때 일수록 잘 참고 준비하면 좋을 일들이 있을 것입니다.
오늘도 60번 심야버스에 몸을 싣고 달리는 대리운전 기사님들! 힘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