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소득이 높은 행복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수천가지 지수가 가능한 “국민행복”이란 개념은 “행복의 증감” 여부를 두고 소모적 논쟁을 야기할 수 있다. 개인들의 목적-수단이란 틀에서 보면 소득증가는 목적을 이룰 수단의 증가이다. 목적이 변치 않는 한 수단증가가 불행을 의미할 수는 없다. 지극히 주관적인 행복에 대해 기계론적으로 다루는 것은 사회 정치적 갈등과 부작용을 초래할 가능성이 크다.
성적에 매달리는 부모에 항의하는 학생의 목소리를 연상시키는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라는 책이 있었듯이, 최근 '행복은 GDP 순서가 아니다’는 생각에서 GDP 대신 국민행복지수(GNH: Gross National Happiness)를 측정하고 이를 정책의 안내자로 삼을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일부 경제학자들을 비롯하여 광범위하게 제기되고 있다.1)'행복’보다는 주로 '효용’을 말해온 경제학자들로서는 이에 대해 어떤 말을 할 수 있을까?
행복은 지극히 주관적인 것
인간의 행동에서 각 개인이 추구하는 목적과 이를 달성할 수단을 중심으로 분류할 때 소득의 증가는 수단의 증가를 의미한다. '겸손한’ 경제학자들은 감히 목적에 대해 가치판단을 하지 않는다. 어떤 목적이 더 행복을 주는지 혹은 더 가치 있는 것인지는 각 개인의 가치관에 따라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 사회의 구성원들의 평균적인 소득이라는 개념은 가능할 수 있지만, 그들의 평균적인 행복수준이라든가, 그 사회 구성원들의 행복의 총합과 같은 개념은 결코 성립될 수 없다. 어떻게 개인들의 행복을 더하고 뺄 것인가?
따라서 GDP나 국민소득의 증가가 곧 행복의 증가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즉 행복은 GDP 순서가 아니다. 그러나 GDP나 소득의 증가는 목적을 추구할 수 있는 수단의 증가를 의미하며, 이는 곧 행복을 증진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확대됨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목적이 변치 않는 한 수단의 증가가 불행을 의미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행복이란 지극히 주관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국민행복’ 등을 언급하는 사람들은 '국민행복지수’와 같은 지수들을 내세우면서 그것이 마치 객관적인 것처럼 계층간, 국가간 비교를 하곤 한다. 이들은 어떻게 만들어 질까? 대체로 국민소득에다가 이런저런 항목들을 보태고 뺄 것이고 또 각 항목에다 특정한 가중치를 주어 국민행복지수를 계산할 것이다. 그러나 어떤 특정한 절차를 정당화할 과학적 근거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무수히 많은 국민행복지수가 등장하게 되며 어떤 하나가 더 우월하다고 주장할 수 없다.
기계론적 행복지수 집착은 사회 정치적 갈등과 부작용 초래
만약 이렇게 만들어진 국민행복지수라는 것이 정부정책에 감안된다면 아마도 국민행복지수에서 특정 부분이 차지하는 비중이 클수록 유리해지는 집단 - 예를 들어 정부의 재정으로부터 더 많은 지원을 얻을 수 있는 집단 - 은 실제로 그런 국민행복지수를 선호하고 이것이 표준으로 채택되도록 정치적 투쟁을 할 것이다.
미제스는 경제학을 인간행동학(praxeology)의 중요한 한 분야로 간주하였으며, 평소에 경제학을 가장 잘하기 위해서는 경제학 이외에도 역사, 심리학, 사회학 등 광범위한 분야에 대해 많이 알 것을 주문했다. 행복은 함부로 다룰 수 없는 매우 어려운 주제임이 분명하다. 그래서 더더욱 행복에 대해 말하려면 경제학 이외에 여러 분야의 연구들이 매우 조심스럽게 통합되어야 할 것이다. 기계론적으로 지수를 개발해서 다루기에는 적합한 주제가 아닐 수 있다. 행복에 대한 관심은 정말 필요할지 모르지만, 행복을 이렇게 기계론적으로 다루는 것은,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정치적 갈등과 같은 부작용을 불러올 수 있고, 어쩌면 사람들의 행복을 증진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해를 끼칠 수 있음을 경계해야 할 것이다.
김이석 / 한국경제연구원 초빙연구위원
1) 예를 들어 조선일보 2011년 신년기획기사 [2011 한국인이여 행복하라] 2011.1.1.-1.18.